27. 대숙청
비록 1565 년 이반 4세가 모스크바로 귀환하기는 했지만 짜르가 한동안 자신의 본거지로 삼았던 알렉산드로프의 중요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본래 이곳은 사냥 캠프가 있던 곳으로 모스크바에서 약 97 km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이곳에 위치한 짜르의 근거지는 알렉산드로바 슬로바다 Alexandrova Slobada 라고 불리웠다. 요새화된 이 작은 궁전은 작기는 했지만 사실상 이반 뇌제의 측근으로 채워진 또 다른 러시아 정부였다. 여기에는 궁전도, 경호원도, 군대도, 귀족도, 교회도 모두 갖춰져 있었다. 심지어 보야르 출신 가운데서 차르에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이들도 이 제 2 수도인 알렉산드로바 슬로바다에 있었다.
(알렉산드로바 슬로바다에 건설된 작은 교회 Androvskaya Sloboda (in Russian city Aleksandrov), Source : Russia Wikipedia )
1564 년 겨울 차르를 따라 나섰던 측근 가운데는 훗날 오프리치니나의 실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본래는 보야르 출신으로 차르의 절대적 신임을 받은 알렉세이 바스마노프 (Alexey Basmanov), 귀족 출신으로 차르의 신임을 받은 아파나시 비에젬스키 (Afanasy Viazemsky), 그리고 또 다른 야심가인 자이체프 (Peter Zaitsev) 가 있었다. 이들은 차르의 새로운 황후인 마리아 테류코브나 (Maria Temryukovna) 의 형제인 마히일 테류이코비치 (Mikhail Temriukovich) 와 함께 초기 오프리치니나를 주도했으며 이들 넷을 가르켜 4인 위원회 혹은 오프리치니나 두마 (Oprichnina Duma) 라고 부르기도 했다.
쿠릅스키 공이 오프리치니나와 연관해서 특별히 집중적인 비난을 쏟아부은 알렉세이 바스마노프는 역설적으로 보야르 출신이었으나 차르에 충성을 바치고 자신의 출신 계급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댓가로 요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와 아파나시 비에젬스키가 초기에 오프리치니키 (oprichiniki, 복수형. 단수형은 oprichnik 오프리치니크. 설명은 앞 포스트를 참조) 를 모집했다.
일단 오프리치니키들은 보야르 및 다른 귀족 (크나지, 공) 가문과의 연관성과 충성심을 조사 받은 후 고용되었다. 상당수는 본래 좀 힘이 있던 집안이나 귀족 가운데 차르와 연관성이 있고 충성심을 믿을 만 한자 중심으로 선발되었는데 차르는 특히 충성심을 강조했다. 아무튼 이로 인해 차르에 도전할 만큼 권력이 없었던 지방 귀족 출신 젊은이들에게는 새로운 출세길이 열린 셈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출세하기 위해서, 즉 새로운 토지르 획득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귀족과 보야르를 반역죄로 잡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이와 같은 문제는 차르의 끊임 없는 의심 때문에 쉽게 해결 될 수 있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쿠릅스키 가문과 그와 연관된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몰락한 후 차르의 또 다른 경쟁자 블라디미르 안드레예비치 및 그와 연관된 사람들이 연좌죄로 몰락했다. 하지만 이는 시작이었다.
차르는 모스크바에 돌아온 이후에도 알렉산드로바 슬로바다의 별궁 (?) 을 애용했는데 여기에는 별도의 고문실과 감옥이 있었다. 이 시기 이반 뇌제의 중요한 하루 일과는 아침을 먹은 후 이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 오프리치니크들이 러시아 전역에서 잡아온 수백명의 죄수들을 어떻게 고문해서 자백을 받아낼 것인지를 매일 매일 결정하는 것이었다. 여러가지 잔인한 고문의 방법들이 총 동원되었는데 차르는 매우 가학적으로 이를 즐기고 직접 방법을 결정해 주었다. 거론할 수 조차 없는 끔찍한 처형 방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령 아무 증거가 없더라도 차르가 의심하면 오프리치니크들은 누구든 잡아들였다. 그리고 결정적인 증거가 될 자백을 할 때까지 고문했다. 당시 이를 기록한 Albert Shlichting 에 의하면 이반 뇌제는 직접 두눈으로 고문당하거나 죽어가는 죄수들을 목격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얼굴에 피가 튀어도 차르는 꿈쩍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특하게도 그 자신이 고문이나 처형을 하지는 않았다.
오프리치니크들 가운데 사실 처형과 고문을 전문으로 하는 이들은 없었다. 대신 모두가 그 일을 할 줄 알아야 했다. 차르는 직접 고문이나 처형을 하는 일 없이 이들이 대신 하는 것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지하 감옥에서 고문이 끝나면 하루 하루 국무를 처리하고 나서 차르는 아침에 꽤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갑자기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사실 알렉산드로바 슬로바다는 어떤 의미에서는 종교 단체 같은 분위기였다. 이반 뇌제를 포함해 모든 이들이 검은색의 수도복 비슷한 옷을 입고 생활했으며 수도승처럼 새벽같이 일어나 기도를 하고 (새벽 4 시에서 아침 7 시까지 기도를 했다) 식사를 한후 죄수가 있으면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 그들을 고문하거나 처형했다. 고문/처형과 기도/신앙생활은 도저히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이반 뇌제와 그의 오프리치니크들에게는 가능한 일이었다. 때때로 교회에서 기도 시간 중간에도 누구를 처형할 것이고 어떻게 처형할 것인지를 지시하는 것이 이반 뇌제의 새로운 삶의 방식이었다.
모스크바와 알렉산드로프를 오가면서 차르는 수많은 러시아의 유력 가문을 자신의 음모론에 따라 처단했다. 적지 않은 유력 가문들이 몰락하는 가운데 1566 년 여름에는 필립 콜리체프 (Philipp Kolychev) 를 비롯한 유력 귀족들이 러시아 중부의 영지를 빼앗기고 북극권에 가까운 먼 영지로 사실상의 유배를 당했다. 강제로 영지가 오프리치니나로 지정되는 가운데 상당수 귀족, 보야르들은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유배길을 택했다.
1566 년 오프리치니나는 러시아 중앙의 8 개 지역으로 확대되었는데 12000 명의 귀족들이 570 명 정도만 오프리치니크로 지정되고 나머지는 모두 추방당했다. 추방된 이들은 1566 년 겨울 스탈린 시절 황무지로 유배당한 쿨라크들 처럼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살길을 찾아야 했다. 짜르는 만약에 이들을 돕는 농민들이 있으면 모두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 차르와 오프리치니크가 위협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아는 농민들은 자신도 살기 위해서 명령에 따르는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마도 오프리치니크에 의한 직접적인 숙청보다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ㅏ.
물론 차르에게 이제 그만 둘것을 탄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래된 귀족 가문의 일원인 바실리 프론스키 공 (Prince Vasily Pronsky) 을 비롯한 3백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1566 년 9월초에 차르에게 오프리치니나를 중단하고 더 이상 무고한 이들을 죽이지 말아줄 것을 탄원했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고른 셈이었다.
이반 뇌제는 이들을 모두 체포하게 한 다음 오프리치니크들에게 명령해서 프론스키 공을 비롯한 주도자를 처형하고 나머지는 죄의 경중에 따라 혀를 자르거나 팔이나 다리를 자르도록 명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석방시켰다. 하지만 수일 후 너무 많은 사람들을 그냥 풀어주었다고 생각한 차르는 다시 석방한 이들을 체포해서 사지를 절단해서 처형하는 극형에 처했다. 누구든 차르와 오프리치니나 정책에 반기를 드는 인물이 있다면 이런식으로 처형당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중에는 젬스키 소보르의 지도자였던 이반 페데로프 (Ivan Federov) 도 있었다.
이 시기 젬스키 소보르는 '좋은 이반' 통치시기와는 달리 이반 뇌제와 사이가 극도로 나빠졌다. 젬스키 소보르가 오프리치니나를 반대한 것은 물론이고 끝나지 않는 리보니아 전쟁 역시 반대했기 때문이다. 차르는 집권 초기 젬스키 소보르와의 협력 정치를 청산하고 대숙청과 공포 정치로 러시아를 피로 물들였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이라면 차르가 말년에 정신이상이 생겼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사실 차르의 나이 이제 30 대 중후반 이었다. 과거에는 평균 수명이 짧고 교육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오르고 사회에 진출했다는 점을 감안해도 차르의 경우 16 세 부터 성년으로 권좌에 올랐기 때문에 그 동안 시간이 꽤 흐른 셈이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차르가 30 세 넘어서 이렇게 잔혹한 폭군으로 변한 이유는 오랬동안 논란이 된 이슈 가운데 하나이다. 지금도 역사학자들은 여기에 대해서 일관된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고 있다.
아무튼 오프리치니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숙청의 기간이 길었기 때문인지 훗날 나타나는 스탈린 대숙청 시기와 비슷하게 숙청 정치계 (?) 의 새로운 신인이 한명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말류타 스쿠라토프 (Malyuta Skuratov (Малюта Скуратов) 본명은Grigory Lukyanovich Skuratov-Belskiy ) 이다. 그는 1569 년 차르의 사촌인 블라디미르 공을 숙청할 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서 지금 설명할 필립 수좌대주교 (Saint Philip II of Moscow / Metropolitan of Moscow ) 숙청에 공을 세운 후 나중에 설명할 노브고로드 학살 때 악명을 떨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하는 필립 수좌대주교와 그를 체포하러 온 말류타 스쿠라토프 Aleksandr Nikanorovich Novoskoltsev / Александр Никанорович Новоскольцев (1853 — 1919) 작. )
필립은 1566 년에 모스크바 및 전 러시아의 수좌 대주교가 된 러시아 정교회의 독실한 성직자였다. 서방 교회와는 달리 동방 러시아 정교회의 성직자들은 좀처럼 현실 정치에 잘 관여하지 않는 편이었다. 특히 이반 뇌제처럼 엄청난 숙청을 진행하는 차르가 있는 경우엔 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고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한 필립 수좌대주교는 이를 공개석상에서 비판하면서 차르에게 무의미한 학살을 그만들 것을 청원했다. (1568)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수좌대주교를 체포해서 처형한다는 것은 이반 뇌제로써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반 뇌제의 충복한 신하인 말류타 스쿠라토프는 모두가 꺼릴 수 밖에 없는 이 과업을 충실히 수행했다. 크리스마스 이틀전 말류타 스쿠라토프는 필립 수좌대주교를 살해했다.
당시에는 정의와 신념을 지킨 필립 수좌대주교는 패배자였고 말류타 스쿠라토프는 비열해서 출세한 인물로 생각되었을지 모르지만 역사는 이들을 다르게 기억한다. 말류타 스쿠라토프는 후세에 스탈린 시대의 베리야나 예조프 같은 인간 백정으로 모든 이들에게 각인되어 있고 사실 그로부터 4 년 후 필립 수좌대주교 보다 더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반면 정의를 말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의를 참지 못한 필립 수좌대주교는 나중에 동방 정교회의 성인으로 추대 (축일은 1월 9일) 되어 제정 러시아 시기는 물론 지금까지 추앙 받고 있다.
(차르 알렉시스가 니콘 대주교와 함께 성 필립의 유물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 Alexander Litovchenko (1835-90) 작. Young Tsar Alexis Praying Before the Relics of Metropolitan Philip in the Presence of Patriarch Nikon. )
하지만 이반 뇌제와 말류타 스쿠라토프의 학살극은 필립 수좌대주교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다음에 계속 : http://blog.naver.com/jjy0501/100186512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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