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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지킨 배 - 대한 민국 최초의 군함 PC 701 백두산함





 아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대한 민국에서 해군 창군이래 최초로 취역한 군함은 PC 701 백두산함이다. 비록 배수량 450톤의 작은 배지만 조국 수호의 큰 뜻을 보여준 군함이기도 하다. 사실 필자가 밀리터리에 대한 글을 작성할 때 우선 쓰고 싶었던 군함이기도 했지만, 모자란 필력으로 글을 쓰기가 부끄러워 주저했던 사연을 가진 군함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록 부족한 글실력이지만 간단하게마나 이 배와 영웅같던 해군들의 이야기를 적어본다.




 (PC 701 백두산함)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우리가 독립을 하지만 이게 곧 자주 독립국가와 주권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3년간의 군정 끝에 우리가 원치 않는 방식으로 우리 나라는 둘로 나뉘었고, 자의보다 타의에 의해 북과 대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1948년 이후 대한 민국 정부가 수립되긴 했지만 당시 나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특히 군대는 독립 이후 소련의 막대한 지원을 받은 북한과는 달리 우리는 미국에서 많은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해군은 있어도 변변한 군함 한척 구하기 어려웠다. 물론 서류상으로는 제법 배들이 있긴 했다. 1948년 당시 우리 해군은 미국이 남기고 간 소형 상륙정이나 일본군이 사용하던 민간 선박을 개조한 소형 경비정등 으로 무장했는데, 보유 함정수는 105척 (배수량 1만 3000톤)이고 병력은 3000명 정도였다. 그러나 말이 좋아서 군함이지 대개 매우 노후화된 것이고, 사실 제대로된 무장을 갖춘 배는 한척도 없었다. 경비 업무는 해도 전투는 못할 해군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손원일 해군 참모총장은 1949년 6월 군함 구입을 위해 참모총장 부터 말단 수병까지 월급의 10%를 모금하는 운동을 벌인다. 제대로 된 대포라도 달린 배를 사자는 취지였다. 당시 수병의 증언을 들어보면 월급의 10%을 떼어가도 불평하는 장교나 병사는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장교와 부사관 부인들이 빨래나 바느질 삯으로 모금운동에 보태고,병사들도 고철을 모아 돈을 더했다.



 당시 모두가 가난하던 시절 모두들 돈이 있어야 얼마나 있었겠는가. 장교 월급이 쌀 한말 가격이 안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들은 당시로썬 거금인 무려 만 오천달러를 모았다.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모은 돈 1만 5천 달러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네며 해군 장교와 병사들은 군함 구입을 위해 써달라고 청원한다. 여기에 감명을 받은 대통령은 당시 해군 고문으로 와 있던 로빈슨 대위에게 혹시 한국이 살만한 배가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해군의 피와 땀이 녹아있는 이 돈은 사실 군함 구입비로는 턱없이 낮은 금액이었다. 결국 로빈슨 대위는 미국 뉴욕주의 롱아일랜드의 킹스포인트에 있는 해양대학교에서 실습선으로 사용하던 '화이트헤드 소위 (Ensign Whitehead)'호 가 중고 매물로 나와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2차 대전때 쓰던 PC - 461 class (patrol craft ; 순찰선)  를 실습선으로 개조한 이후 이제 중고로 스크랩 처리한 것이었다. (여담이지만 화이트 헤드라니 '백두'란 뜻이 아닌가. 그래서 이름이?)



 배수량 450톤에 길이 52미터에 불과한 무장도 없는 중고 선박이지만 추후 3인치포는 달수 있었다. 그런데 이 배를 1만 8000달러에 사들여 개조하고 탄약과 연료 및 기타 보급품을 구입하기엔 모금한 1만 5천 달러로는 부족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국고 사정이 좋지 않았지만 4만 5천 달러를 추가로 송금해 준다. 결국 한국 해군은 49년 10월 7일 이 배를 구매한다.



  배를 보기 위해 일단 손원일 제독과 로빈슨 대위가 먼저 항공편으로 뉴욕으로 떠나고 이후 이 배를 수리해서 태평양을 건너 몰고올 인수 인원 15명이 뉴욕주에 도착한다. 그런데 이 배는 사실 뉴저지주의 민간 조선회사의 부둣가에 정박해 있었다.


 뉴저지의 호보켄 부둣가에 중고로 스크랩 처리한 이후 여기 저기 녹슬고 수년간 사용한 적이 없는 매우 낡은 배를 확인한 한국 해군 장교들은 실망할 겨를도 없이 수리 작업을 시작한다. 이들은 중령부터 중위로 모두 장교들이었는데, 미국인 작업반장의 지시에 따라 배를 수리하고 페인트 칠을 하며 배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미국인 노무자를 쓰면 인건비 감당이 안되기 때문이다.



 당시 이 낡은 배를 하두 깨끗하게 수리하고 페이트칠을 해놔서 미군 관계자들이 새 군함으로 알았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이들은 열심히 일했다. 결국 1949년 12월 26일 미국 뉴욕항에서 이 배의 이름을 '백두산함'으로 명명하는 명명식을 가졌다. 정말 눈물나는 과정을 거쳐 이제 한국 해군도 전투함을 가지게 된 것이다.



 (백두산 함 명명식 - 좌측 부터 손원일 제독, 이건주 소령, 로빈슨 대위)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뉴욕항에서 파나마 운하를 거쳐 다시 하와이 - 괌을 경유 한국까지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고난의 행군 중에 하와이에서 주무장인 3인치 함포를 장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역시 앞서간 15명의 인수 요원들이 선원이 되어 이 작고 낡은 배를 몰고 지구 반바퀴를 돌았다.



 한편 무장을 장착할 중간 기항지인 하와이에서 당시 한국 군함 백두산 호가 기항한다는 소식을 들은 현지 한인 교포들은 부두로 마중을 나간다. 그러나 백두산 호를 맞이하는 교포들은 이제 우리 나라도 군함을 가지게 됐다는 기쁨 만큼이나 주변의 거대한 미군함과 비교되는 작고 처량한 한국 군함을 보는 애처로움도 같이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함포를 장착하는 백두산함)




 아무튼 하와이에서 무장을 장착한 백두산 함은 1950년 4월 10일에야 비로써 진해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6.25 사변 불과 2달전의 일이다. 정말 애절한 사연을 거쳐 구매한 배이기 때문에 해군은 이 배를 상당히 애지 중지 했다고 한다. 심지어 100 미터 밖에 줄을 치고 헌병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기까지 했다니 말이다.



 그런데 또 한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이 배가 도착하자 일단 성금을 통해 산 군함이니 만큼 성금을 낸 장병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전국의 주요 항구를 돌았다고 한다. 이게 성금으로 산 대포 달린 군함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였다.



 이 귀한 군함을 가지고 우리 해군은 열심이 훈련에 임했다. 그러나 돈이 없어 3인치 포탄은 겨우 100발 밖에 구매 못했고, 이걸 가지고 사격 연습을 하기도 아까워 장탄도 안된 3인치 함포를 가지고 조준만 열심히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백두산함의 수병과 사관들의 사기는 높았고, 위기에 순간에 조국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백두산함에게 운명의 순간이 찾아온다. 6.25 당일 부산 앞바다에서 초계 중인 백두산함의 시야에 국기나 인식표지가 없는 괴선박이 나타난 것이다. 일단 백두산함은 수신호를 보내고 교신을 시도했으나 상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 화물선의 정체는 부산항에 상륙할 북한군의 병력을 가득 태운 수송선이었다. 당시 군함이 거의 없는 한국 해군의 약점을 이용 화물선을 이용해 부산을 점령하면 이후 유엔군의 지원을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배는 1000톤 급으로 600명 정도의 병력을 탑승시킨 상태였다. 물론 이정도 소수의 병력으로 부산을 점령하긴 힘들지도 모르지만 부산항의 기능을 잠시라도 마비시키거나 소요를 일으키기만 해도 북한군에게 큰 도움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2달전 백두산함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계속되는 신호에 반응이 없자 이 배의 정체를 짐작한 백두산호의 함장 최용남 중령은 무전으로 보고를 한다. 결국 본부로 부터 공산군 군함으로 생각된다면 공격하라는 신호가 떨어진다. 이미 서치라이트로 북한군의 모습도 다 확인한 상태였다. 결국 26일 오전 0시 10분 백두산 호의 3인치 포가 불을 뿜었다. 


 그러나 상대도 비무장은 아니었다. 적함엔 85mm 포가 장착되어 있었고, 북한군도 곧 반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백두산 호도 끈질기게 적함을 공격하며 좌현으로 최대한 근접하여 3인치포를 발사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 수병들의 희생들도 있었다.










 한시간에 걸친 교전과 추격전 끝에 마침내 6월 26일 오전 1시 10분경 적함이 점차 침몰하는 것이 목격됐다. 결국 적함을 격침시킨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한 민국 해군 첫번째 승리인 대한 해협 전투이다. 비록 이날의 승리는 작은 것이지만 그러나 그 의미는 아주 큰 것이었다.



 이때 부산항을 무사히 지키므로써 이후 유엔군의 교두보가 유지될 수 있었고, 대한 민국 임시 정부도 부산에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부산항이 점령되었다면 지금 대한 민국은 존재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이전에 백두산함의 글을 볼때 어느 분이 그래도 우리와 같은 민족인데 수많은 북한군을 수장시킨것을 너무 좋게 쓰는 것 같다는 글을 본적이 있다. 물론 이분 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 지금 우리가 매일 같이 장군님의 은총에 감사해 하면서 굶주리지 않을 수 있는 건 이 때 자신을 희생한 대한 민국 해군 장병들과 장교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비록 필자가 나라를 위해 이분들 처럼 자신을 희생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이분들 때문에 오늘의 생활이라도 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분들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백두산함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들에게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을 느낀다.




(부산 중구 민주 공원에 있는 대한 해협 해전 전승비)



 필자가 이상하게 부산하곤 인연이 없어 아직 가보진 못했지만 기회가 된다면 가고 싶은 곳이 부산 중구에 있다는 대한 해협 해전 전승비이다. 만약 이곳에 들릴 기회가 있다면 잠시 조국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넋을 기리고 싶다.





(희생자를 기리는 백두산함의 생존자들)




- 출처 : 월간 조선, 국방일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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