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사이자르 전투 (Battle of Shaizar 1111년)
비록 4대 십자군 국가들이 들어서고 나름대로 국가의 기반이 자리잡긴 했지만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우선 1110년을 전후해서 예루살렘 왕국 국왕 보두앵 1세는 아직까지 복속되지 않은 팔레스타인의 여러 지역들을 차례로 정복했다. 1109년에는 북쪽의 트리폴릭 함락을 도운 후 트리폴리 백작령을 건설했고, 다시 1110년에는 앞서 설명한 시돈 (Sidon) 을 비롯 주요 도시 중에 하나인 베이루트 (Beirut) 를 점령했다.
물론 보두앵 1세 자신이 가진 병력이 적었기 때문에 해외에서 오는 십자군 원군이나 혹은 제노바나 베네치아 같은 이탈리아의 상업 도시 국가들의 도움을 그 때 마다 받아야 했다. 십자군 원군의 경우 대개 순례의 목적으로 오는 경우들이 많았지만 상업 도시 들의 경우에는 좀 더 실제적인 교역권이나 혹은 기타 권리를 원했으므로 보두앵 1세는 적절히 이들과 협의하에 자신의 왕국을 확장해 나갔다.
베이루트 함락 이후 다음해인 1111년 보두앵 1세는 북쪽에서 다가오는 새로운 위협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북쪽으로 향했다. 약 1110 - 1115년 사이 동쪽의 셀주크 제국이 다시 십자군 국가를 침공했기 때문이다. (더 크게 보면 1차 십자군 이후 1097년에서 1127년까지를 셀주크 - 십자군 전쟁 (Seljuk - Crusader War) 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번에 처들어온 것은 형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바그다드의 셀주크 술탄 무함마드 1세 (Muhammad I) 였다. 과거 형제끼리 싸우기 바쁠 때는 십자군과의 전쟁을 원하진 않았지만 이제 내부 사정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니 주변의 영토를 확보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1110년 부터 1115년까지 매년 십자군 국가들을 침공하게 된다. 사실 얼마전까진 이곳이 셀주크의 영토였으니 술탄의 입장에선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그러나 1110년의 에데사 백작령 침공은 실패로 끝났다.
1111년에 술탄은 다시 한번 북부 시리아 지역으로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 모술의 지배자인 마우두드 이븐 알툰타쉬 (Mawdud ibn Altuntash) 가 군대를 지휘했다. 그리고 주변의 무슬림 세력들이 십자군 국가들에 대항하기 위해 모처럼 힘을 합쳤는데 이중에는 다마스쿠스의 새로운 지배자 자히르 앗 딘 토그테킨 (Zahir ad-Din Toghtekin) 도 있었다.
한편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 여긴 십자군 국가들도 내분을 중단하고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보두앵 1세를 중심으로 에데사의 보두앵 2세, 안티오크의 탕크레드, 트리폴리의 베르트랑까지 힘을 모아 이에 대항할 준비를 마쳤다.
최초에는 무슬림 연합군이 에데사와 투르베셀 (Turbessel) 함락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다시 알레포에서 리드완과 힘을 합치려 했다. 그러나 이 무슬림 군대를 자신에 대한 위협으로 여긴 리드완은 성문을 열기 거부했다.
무슬림 군대는 다시 안티오크 공작령 근방으로 진격하는데 여기서 탕크레드의 군대와 마주치게 된다. 탕크레드는 곧 지원군을 요청하게 되고 보두앵 1세, 보두앵 2세, 베르트랑의 연합군이 이를 지원하기 위해 사이자르 (Shaizar) 근방에서 합류했다.
이 전투는 한번의 결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식수와 식량의 보급을 차단하면서 투르크 족 특유의 치고 빠지는 전법을 고수한 셀주크 군과 이에 맞선 십자군 군대의 지루한 대치전이 지속되었다. 비록 보급의 부족으로 사이자르에서 십자군이 후퇴하긴 했지만 이 전투의 결과는 결국 무슬림의 패배였다.
무슬림 군대는 하나의 성도 함락시키는데 실패했고, 결국 십자군 주력에 대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데도 실패하여 후퇴하는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111년의 사이자르 전투는 전투 자체는 십자군의 승리라 말하긴 어려워도 결과는 십자군의 승리였던 전투였다.
14. 불행한 만남
다시 1113년에는 알 산나브라 전투 (Battle of Al - Sannabra) 가 벌어진다. 이 전투는 모술의 지원을 받은 다마스쿠스 군대가 예루살렘 왕국을 침공한 전쟁이었다. 이 전투에서는 앞서와는 반대로 안티오크 군과 유럽의 순례자들이 보두앵 1세를 지원했다. 사실 이 전투에서는 한 때 보두앵 1세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기도 했으나 결국 최종적으로는 다시 무슬림 세력을 밀어낼 수 있었다.
한편 1113년에는 또 다른 경사도 있었다. 보두앵 1세가 아델라이데 델 바스토 (Adelaide del Vasto) 를 새로운 왕비로 맞은 것이다. 사실 보두앵 1세는 이전 아르메니아 여성인 아르다 (Arda)와 결혼한 상태였으나 그녀는 우리식으로 말하면 폐비 신세가 되고 말았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이제 아르메니아 인들의 도움이 필요 없어진 보두앵 1세가 예루살렘 왕국과 자신에게 더 도움이 되는 신부를 들였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2번째 아내인 아르다 사이에서 자식이 없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수 있었다.
새로운 왕비 아델라이데는 몇가지 장점이 있었다. 그녀는 사실 보에몽 1세의 숙부인 시실리의 로게르 1세의 3번째 아내로 1089년에 로게르 1세와 결혼했다. (그녀는 1075년 생이라고 한다.) 그녀는 로게르 1세 사이에서 시몽 (Simon)과 로게르 2세 (Roger II) 를 얻었는데 1101년 로게르 1세가 사망한 후 어린 아들들을 데리고 일종의 수렴 청정을 하면서 시실리의 섭정으로 있었다. 따라서 그녀와의 결혼은 이탈리아 남부의 유력 노르만 국가와의 유대를 강화할 수 이었다.
아델라이데의 입장에서도 아들 로게르 2세가 어느 정도 커서 친정을 하기 시작하자 사실 그녀가 꼭 시실리에 있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아직 30대 후반으로 평생 과부로 살기엔 다소 젊다고 생각되었으므로 새로운 혼처를 찾는 것이 나쁠 것이 없어 보였다.
여기에 아델라이데는 나이가 좀 많은 과부이긴 해도 부자였기 때문에 보두앵 1세에게는 매우 매력적으로 생각되었다. 또 아들이 없는 보두앵 1세가 다른 자식이 안 태어나면 그녀 소생인 로게르 2세에게 예루살렘 왕국의 왕관을 넘겨주기로 했으므로 아델라이데도 보두앵 1세가 매력적으로 보였다.
1113년에 이루어진 이들의 결혼은 그러나 너무 속보이는 목적으로 이루어진 결혼이었기 때문에 행복한 결혼은 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미 없는 거나 다를바 없이 생각되었던 본처 아르다와의 관계도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최초에는 아델라이데가 많은 시실리 병력과 돈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부부관계가 원만한 듯 보였다. 그러나 사실 전처 아르다가 불행히 살아있었기 때문에 곧 이 결혼은 문제가 되었다. 이른바 중혼(重婚)죄 에 해당하는 문제였다. 결국 이는 곧 법정 분쟁으로 번졌고, 1116년에는 교황 파스칼 2세가 이 결혼은 무효라고 선언하는 사태까지 발전했다.
여기에 1117년에는 병에 걸린 보두앵 1세가 아델라이데와의 중혼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속죄하면서 이 문제는 더욱 벌어졌다. 자신이 병에 걸린게 바로 아델라이데와 결혼한 때문이란 것이었다. 결국 여기에 환멸을 느낀 아델라이데는 친정인 시실리로 가버렸고, 그곳에서 죽었다. 그러나 아직 보두앵 1세는 할 일이 더 있었다.
15. 요르단 너머로 (Oultrejordain)
울트레주르뎅으로 불리는 이 구호는 요르단 강 너머의 무슬림 영역을 정복하려는 예루살렘 왕국의 팽창 정책이었다. 사실 단지 요르단 강 너머 뿐만 아니라 주변의 무슬림 국가를 정복하려는 일련의 팽창 정책을 모두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이 요르단 너머의 영토 확보 전쟁은 1107년 이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바로 다마스쿠스가 확보하고 있는 캐러밴 (사막의 무역상) 루트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이 중요한 길목을 장악하면 많은 세금을 거둘 수 있고, 주변 상권을 장악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1115년 아직 병에 걸리기 전 보두앵 1세는 영토 확장 정책의 일환으로 요르단 강 너머에 새로운 항구적 요새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몽레알 (Montreal) 의 십자군 성채인 크락 데 몽레알 ('Krak de Montreal' 혹은 'Mons Regalis' ) 로 현재는 요르단 영토안에 있다.
(몽레알 성채의 유적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MDW )
보두앵 1세가 원했던 것은 단순히 캐러밴 루트만 장악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더 나아가 홍해까지 이어지는 영토를 확보하여 양대 무슬림 세력인 셀주크와 파티마 왕조 사이에 자신이 영역을 확보하려 했던 것 같다.
또 보두앵 1세는 이 지역에 살던 토착 시리아 기독교인 들을 예루살렘으로 이주시키기도 했다. 과거 예루살렘 학살로 인해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빈자리를 채웠다고 한다. 무려 15년 이상 지난 후에도 예루살렘에 빈자리가 많았다는 것은 그 만큼 많이 이들이 예루살렘 대학살에서 죽었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아무튼 보두앵 1세는 몽레알에서 더 이상 무슬림 영역으로 파고 들 수 없었다. 그것은 그의 최후가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제 십자군 1세대의 시대가 완전히 끝나가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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