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트리폴리 포위전 I (Seige of Tripoli 1102 - 1109)
1102년 4월초는 레몽 4세의 고난으로 가득찬 인생에서 보기 드문 성공의 순간이었다. 당시 소규모의 병력을 데리고 우트르 메르로 귀환한 레몽 4세 - 당시 기록에 의하면 불과 300백명의 병사 - 는 부유한 트리폴리를 공략하기 보다는 그 자신이 적대적 무슬림 세력으로 부터 공격받아 전멸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불행히 가까이 있는 안티오크의 탕크레드로 부터는 아무런 지원을 약속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큰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한쪽의 불행은 다른 한쪽의 행복으로 연결되기 마련이다. 당시 트리폴리의 지배자인 파크르 알 물크 (Fakhr al-Mulk, qadi of Tripoli) 는 적의 병력이 얼마되지 않고 분열되어 있음을 갈파하고 지금이 저 불경스런 프랑크인들을 공격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알 물크는 즉시 인근에 있는 다마스쿠스의 영주인 두카크와 홈스의 지배자에게 전령을 보내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자고 권유했다. 그런데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은 그 다음이었다. 당대의 기록을 믿는다면 이 소수의 병력은 영화 300의 스파르타 전사들에 못지 않은 무적의 용사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알 물크의 군대는 시작하자 마자 패배했고, 이어서 도착한 다마스쿠스와 홈스의 부대도 패배하여 총 7000명의 병력을 잃고 전투는 무슬림 연합군의 참패로 끝났다.
이와같은 불가사의한 승리의 이유 중의 하나로 제시되는 것은 이 무슬림 영주들의 사이가 좋지 못했고, 무엇보다 자신의 병력을 쓸데없는데 소모하기를 주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마치 먼저 몰락한 카르부카의 경우처럼 두카크와 홈스의 지배자는 적당한 시기에 발을 빼고 퇴각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좋은 것은 레몽이었다. 그러나 적은 병력으로 트리폴리 자체를 공격할 순 없었다. 대신 레몽은 트리폴리 인근의 도시이자 다마스쿠스 북서쪽 220 km 에 있는 해안도시 토르토사(Tortosa, 현재에는 Tartus) 를 점령해서 앞으로 7년간 이어질 지루한 포위전의 전초기지로 삼고자 했다.
이듭해인 1103년에 레몽은 비잔티움 제국의 엔지니어들의 도움을 받아 트리폴리 근교에 필그림 산 (Mt. Pilgrim) 에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요새는 그의 이름을 따라 레몽 생질의 요새 (Citadel of Raymond de Saint-Gilles 혹은 fortress of Saint-Gilles) 이나 Mons Peregrinus, 혹은 아랍권에서는 Qala'at Sanjil 이라고 부른다. 이 요새는 1289년까지 굳건히 버티다가 불탔으며, 이후 현지 에미르에 의해 다시 재건되어 현재까지도 남아있다.
(현재도 남아있는 레몽 생질 요새의 모습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Heretiq )
물론 레몽이 트리폴리 근교에 이런 요새를 건설한 이유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트리폴리 자체를 공략하기 위해서 였다. 전해에 크게 패배한 트리폴리군은 이전 1차 십자군 때 아르카 공방전에서 처럼 굳건한 철통 수비는 어디 갔는지 이런 요새가 근처에 건설되는데도 저지하지 못했다. 이 요새는 트리폴리 항이 내륙과 접근하는 주요 통로를 차단했기 때문에 포위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레몽은 안티오크나 에데사의 도움을 구할 수는 없었지만 대신 바다 저편에서 새로운 조력자를 구했다. 이전부터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은 이 전쟁에 직간접으로 관여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제노바의 위그 엠브리아코 (Hugh Embriaco) 가 레몽을 돕겠다고 나선 것이다.
사실 이탈리아의 주요 상업 국가들 - 제노바, 피사, 베네치아 - 는 이 십자군 전쟁에 여러가지로 관여했으며,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베네치아의 경우에는 아예 4차 십자군을 이용해 비잔티움 제국을 장악하기까지 했다. 특히 1차 십자군을 전후해서는 제노바 상인들이 물자 공급은 물론 직접 참전하기 까지 했다. 이 엠브리아코 가문도 베네치아의 유력 상인 가문중 하나였다. 엠브리아코 가문은 이후로 십자군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한편 이 요새가 건설되고 트리폴리의 주요 길목을 차단하자 트리폴리의 알 물크와 레몽과의 긴장상태는 매우 고조되었다. 그런데 1104년 5월에 십자군 국가 전체에 큰 영향을 준 전투가 있었다. 바로 하란 전투였다. 이 하란 전투와 보에몽에 대해서 일단 설명한 다음 이후의 포위전을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중간에 있던 일을 이해해야 결과에 대해서 이해하기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5. 하란 전투 (Battle of Harran 1104. 5.7)
1103년 자유의 몸이된 보에몽 1세는 다시 안티오크로 귀환하자 마자 신민들을 쥐어짜서 자신의 몸값을 마련했다. 그리고 난 후 한동안 주춤했던 팽창정책을 다시 시작하고자 했다. 그는 주변의 기독교 세력인 아르메니아 독립 도시들을 점령하고 무슬림 영주인 알레포의 리드완을 공격해서 주변의 영토를 확장했다.
한편 이 십자군 국가의 팽창 정책에는 새로운 이웃인 에데사 백작 보두앵 2세도 같이 참가하고 있었다. 보두앵 2세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신임 예루살렘 왕국의 왕 보두앵 1세의 사촌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정확한 관계는 약간 정확하지 않지만) 보두앵 1세가 새로운 국왕이 된 후 자신의 영지를 대신 맡겨 에데사 백작이된 상태였다.
(영주들을 접견하는 보두앵 2세 (왕관쓴 사람) BaldwinII ceeding the location of the Temple of Salomon to Hugues de Payns and Gaudefroy de Saint-Homer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이 신임 영주는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기 위해 1104년 주변 무슬림들의 영토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는 무슬림들의 도시인 하란을 포위했는데, 무슬림 수비대의 저항으로 점령에 애를 먹고 있었다. 사실 이 도시를 점령하면 십자군 국가들은 시리아 중부를 지나 지금의 이라크 지역까지 공격할 가능성이 있었다.
따라서 에데사 백작은 이 도시를 공략하기 위해 안티오크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에 호응한 것은 안티오크 공작 보에몽 만이 아니었다. 이제 새로 갈릴리 공작이 된 탕크레드도 이에 합세하여 하란 전투에 참여했다. 여기에다 예루살렘의 다임베르트와 안티오크, 에데사의 주교까지 같이 참가해서 역시 종교적인 군대인 십자군의 면모를 다시 보여주였다. (그런데 이븐 알 칼라니시 연대기에는 보에몽과 탕크레드가 나중에 참가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나중에 나온 십자군 연대기에는 처음부터 참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러번 보는 지도이지만 일단 이 지도에서 하란의 위치를 확인하자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MapMaster ) )
이렇듯 십자군 국가들이 힘을 합치기 시작하자 무슬림 세력도 위기 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실 당시 바그다드는 말리크 샤 1세의 자식들인 바르키야루크 (Barkiyaruq) 와 무함마드 1세 (Muhammad I) 가 서로 왕좌를 바꿔가면서 뺏기고 빼앗는 전투를 벌이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이는 바르키야루크가 1105년에 사망할 때 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하란에서 비교적 가까운 위치에 있는 모술의 새로운 지배자인 (과거 지배자는 카르부카였다) 지키르미쉬 (Jikirmish) 는 이에 큰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터키 남부의 지역인 마르딘 (Mardin) 과 카르부카의 영역의 일부를 장악한 지키르미쉬의 이웃인 소크만 (Sokman) 역시 비슷한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지키르미쉬와 소크만은 이웃한 투르크 영주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 이들은 서로를 공격하기 위해 모았던 병력을 상대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통의 적을 위해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지키르미쉬와 소크만은 각각 7천과 3천의 병력을 모아서 하란 남쪽에서 접근했다.
결국 십자군 연합군도 이에 맞서 하란 남쪽의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이들을 맞이했다. (그러나 다른 무슬림 연대기 작가 이븐 알 아시르 (ibn al athir) 에 의하면 전투는 하란 남쪽 12km 에서 벌어졌다고 한다) 하란 전투는 1104년 5월 7일 벌어졌다.
당시 전투에서 보두앵 2세와 그 친척이자 나중에 에데사 백작이된 조슬랭 1세 (Joscelin I) 은 에데사 군을 지휘하면서 우익을 담당했고, 탕크레드와 숙부 보에몽 1세는 안티오크 군을 이끌고 좌익을 담당했다. 사실 이 전투에서 십자군은 거의 불시에 공격을 당했기 때문에 보에몽 1세와 보두앵 2세는 갑옷도 입지 않고 싸웠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전투는 무슬림 군대의 의도된 후퇴로 부터 시작했다. 십자군 군대의 장기인 진형을 무너뜨리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지형으로 적을 유인하기 위해서다. 여러번 써먹은 속임수임에도 불구하고, 또 전투를 지휘하는 보에몽 자신이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속임수에 완전히 빠졌다.
결과는 무슬림 연합군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에데사군이 담당한 우익은 거의 무너졌고, 보두앵 2세와 조슬랭 1세는 포로로 잡혔다. 물론 좌익의 보에몽 1세와 탕크레드도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그들은 가진 병력을 대부분 상실할 정도의 큰 패배를 당했다. 결국 그들은 이제까지 역전의 용사와 같은 이미지를 과감히 탈피하고 후퇴했다.
그나마 십자군에게 다행인 것은 무슬림들이 포로로 잡은 보두앵 2세와 조슬랭 1세에 대해서 막대한 몸값을 예상하고 이들을 죽이는 대신 억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1108년 이전에는 풀려나지 못했다. 그것은 너무나 속이 보이는 일이지만 보에몽 1세와 탕크레드가 몸값을 지불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보에몽 1세는 작년까지 비슷한 처지였지만 입장이 바뀌었을 때 그의 생각은 단호했다.
아무튼 이렇듯 십자군이 크게 패배하자 이는 에데사 백작령은 물론 안티오크 공작령에도 큰 재앙이 되었다. 그런데 이는 무슬림 영주들이 이 여세를 몰아 이들을 공격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직면한 위협이 사라지자 그들은 본래 하던대로 자기끼리 싸우기 바빴다.
그러나 이제까지 안티오크 공작의 지배에 신음하던 아르메니아 인들의 반독립 도시국가 및 그 위세에 눌려있던 알레포의 리드완에게는 다시 없는 기회처럼 여겨졌다. 알레포는 잃어버린 지역을 되찾았고, 아르메니안 도시들은 반란을 일으켜 안티오크의 지배에서 벋어났다. 또 안티오크가 자신의 영토임을 꾸준히 주장해온 비잔티움 제국에도 이는 호재로 생각되었다.
이 전투는 보에몽 1세의 거취를 정하므로써 십자군 국가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본래 폭력으로 주변 지역을 장악한 보에몽 1세는 그 폭력을 강제할 군대가 사라지자 큰 위기에 처했다. 사방에 적으로 둘러싸인 형국이 되어 사면초가의 상황에 처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이전부터 안티오크를 호시탐탐 노렸던 탕크레드를 섭정으로 임명하고 다시 유럽으로 귀국했다. 여기서 다시 병사들을 모아 안티오크 공국을 재건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보에몽 1세는 다시는 우트르메르라 일컬어지는 십자군 국가와 안티오크 공작령에 돌아가지 못했다. 여기서 잠시 옆으로 이야기를 비켜나가서 보에몽의 마지막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겠다.
6. 보에몽의 최후
사실 1104년에 보에몽이 유럽으로 돌아가서 교황 파스칼 2세를 접견한 후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업적을 크게 부풀린 영웅담으로 새로운 십자군 군대를 모집한 것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멀리 떨어진 십자군 국가들의 상황에 대해서 실제로 잘 알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는 매우 효과적이었던 같다.
그런데 보에몽의 선전이 너무나 효과적이었는지 프랑스에서는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를 거두기 까지 했다. 당시 보에몽은 자신의 용기에 대한 무용담을 너무나 멋지게 각색한 나머지 이를 전해 들은 국왕 루이 4세는 자신의 누이인 콘스탄스 공주 (Constance of France) 를 그와 결혼시키고자 하였다. 사실 콘스탄스 공주는 전남편인 샹파뉴 백작과의 결혼에 실패해 이혼한 상태였고, 새로운 결혼에 관심이 없었으나 결국 보에몽의 사전 공작과 프랑스 왕의 지원으로 인해 결혼하기에 이른다.
(콘스탄스 공주의 그림 : 기록에 의하면 매우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림에 문제가 있거나 아마도 미의 기준이 지금과는 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This image is in the public domain )
보에몽은 프랑스 국왕과 사돈을 맺었을 뿐 아니라 무려 3만 4천에 달하는 새로운 신규 병력까지 모집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거의 1차 십자군의 병력에 맞먹는 병력이다. 이에 위협을 느낀 영국 국왕 헨리 1세 (앞서 형인 노르망디의 로버트 2세를 패배시키고 왕위에 올랐다)는 보에몽이 영국에 상륙하는 것을 금지하기 까지 했다.
그런데 예상외의 성과에 기고만장한 보에몽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 이 정도 대규모 병력을 모아들이자 본래와는 딴 생각을 품게 된 것이다. 바로 그것은 본래 처음에 자신이 정복하고자 했던 대상인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의 아버지인 로베르 기스카르가 살아있을 당시 보에몽은 장남으로써 노르만 - 비잔티움 전투에 선봉에 서서 알렉시우스 1세를 궁지에 몰아넣기도 했다. 당시 로베르 기스카르가 노렸던 것은 바로 비잔티움의 제위였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했다면 결국 보에몽이 비잔티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꿈으로 끝났고, 아버지의 죽음 이후 보에몽이 물려받았던 비잔티움 제국내의 영지는 전부 비잔티움 제국에 탈환되었다.
이제 보에몽은 비잔티움 제국에서 자신의 몫이라고 주장했던 부분을 찾기 희망했다. 그래서 그가 새로 모은 십자군은 무슬림 과의 전투가 아니라 본래 십자군 운동이 지원하기로 했던 대상인 비잔티움 제국과의 전투에 투입되었다. 십자군 군대가 기독교도를 공격하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사실 민중 십자군과 1차 십자군 이후 내려오는 유구한 전통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전투에서 보에몽은 과거 노르만 - 비잔티움 전쟁에서와 비슷한 경로로 아드리아 해를 건너 뒤라키움 항을 점령하고 비잔티움의 핵심부를 타격하려 했지만 강력한 베네치아 해군의 도움을 받은 비잔티움 군대의 반격으로 결국 크게 패배하고 보에몽 자신도 포로로 사로잡혔다.
알렉시우스 1세로써는 정말 잡고 싶던 고기를 손에 넣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냉정하고 용의 주도한 알렉시우스 1세 답게 사소한 원한을 갚기 위해 보에몽을 죽이는 대신 - 이는 안티오크 섭정 탕크레드에게만 좋은 일이다 - 그에게 협정을 요구했다.
1108년 상황이 불리해진 보에몽 1세는 데볼 조약 (Treaty of Devol)을 맺어 안티오크 공작령이 비잔티움 제국의 봉건적인 영토 (Vassal) 임을 확약했다. 이는 안티오크 공작이 비잔티움 제국의 신하라는 뜻이었고, 안티오크가 비잔티움의 영토라는 조약이었다.
비록 탕크레드가 이 협약을 사실상 거부하고 스스로 이 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긴 했지만 이는 보에몽에게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영지인 남부 이탈리아로 돌아갔으나 이미 전쟁에 패배한 장수에 불과했다.
보에몽은 결국 3년 후인 1111년에 사망했다. 너무나 지나친 욕심을 부린 탓에 결국 그는 아풀리아 계승전쟁이후 아무것도 더 이루지 못하고 수많은 전투와 피를 흘리며 자신의 재능을 허비했다. 그의 교활한 꾀와 거대한 야망은 결국 스스로 자승자박하는 꼴이 되어 좀 더 큰 대업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저버린 셈이었다.
이렇게 1차 십자군의 풍운아 중 하나였던 보에몽은 사망했다. 그리고 1 차 십자군의 주요 세력중 이 시기에는 고드프루아 드 부용, 블루아 백작, 위그 백작, 레몽 4세 등 주요 인물은 대부분 사망했고, 보두앵 1세 같이 젊은 사람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실상 십자군 1세대가 거의 세대 교체를 이룬 셈이었다. 다음에는 레몽 4세의 최후를 보기 위해 다시 트리폴리 공방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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