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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1차 십자군 10




20. 예루살렘 왕국 (Kingdom of Jerusalem)



 이제 그토록 어려운일로 생각되던 예루살렘이 십자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십자군의 각 지휘관이 선택할 선택지는 두가지 였다. 첫번째 선택은 목적을 달성했으니 어서 빨리 의기 양양하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부류의 십자군은 실제로 성지탈환이라는 종교적인 목적도 상당히 있던 그룹들로 전리품과 더불어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예루살렘 함락이후 귀국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이 그룹에 속하는 대표적 지휘관은 바로 노르망디 공작 로버트 2세와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2세 였다. 앞서 이야기 했지만 로버트 2세의 경우 결국 이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므로써 결국 영국 왕위 계승 경쟁에서 막내 동생에게 패배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비운의 인물이다. 동생 윌리엄 1세가 사망했을 당시 그가 멀리 있었기 때문에 막내 헨리 1세에게 패배했기 때문이다. 그는 런던 탑을 시작으로 이곳 저곳에 죄수로 유폐되어 거의 80세까지 살다가 1134년에 사망했다.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2세의 경우는 이보다 명예로운 명성을 얻었다. 그는 예루살렘 탈환에 실제 참여한 다음 고국으로 명예롭게 귀국한 1차 십자군의 보기 드문 영주였다. 그래서 그는 귀국후에 플랑드르의 로베르라는 명칭대신 예루살렘의 로베르나 십자군의 로베르 (Robert of Jerusalem (Robertus Hierosolimitanus) or Robert the Crusader ) 같은 보다 폼나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나 로베르 2세는 귀국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반대하는 반란에 연루되기도 했고 로버트 2세의 동생인 영국왕 헨리 1세의 신하가 되었다가 프랑스 국왕 루이 4세와 연합하는 등 정치적으로 평탄치 못한 삶을 살다가 1111년 전투에서 부상으로 사망했다. 그래도 이 정도는 노르망디 공작보다 훨씬 괜찮은 최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 존재감은 없지만 당시까지 있었던 고드프루아 드 부용과 보두앵 1세의 맏형 외스타슈 3세 역시 집으로 빨리 돌아가길 희망했다.


 한편 일부 영주들은 이와 같이 그냥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이들은 이를테면 제사 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인물들로 성지 탈환 이상으로 새롭게 장악한 영토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툴루즈 백작 레몽 4세 (레몽 생 질이라고도 한다), 타란토의 탕크레드, 그리고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에데사 백작 보두앵 1세나 안티오크 공작이 된 보에몽 1세 처럼 새로운 영토를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자신들의 차례가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성지 탈환 일주일 뒤인 1099년 7월 22일, 모든 종파의 크리스트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 중 하나인 예루살렘의 성묘 교회 (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 - 왜 중요한 교회인지는 앞에서 설명했다) 에서 일종의 종전 협약을 겹한 공의회 (Council) 가 열렸다. 물론 전쟁은 현재 진행형이었기 때문에 종전 협약이라기 보다는 일단 현안을 논의하는 자리에 더 가까웠다.


 바로 이 시점에서 가장 논란이 될 문제가 불거졌다. 이 신생 예루살렘 왕국의 통치자는 과연 누가 될 것인가?


 본래 이 십자군 원정이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우스 1세의 요청으로 시작되었을 뿐 아니라 십자군들이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을 생각할 때, 이 새로운 영토는 비잔티움 제국에 반환되는게 정답이었다. 그러나 이 전리품을 순순히 황제에게 넘길 생각은 아마 아무에게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다소 적반하장 격이지만 십자군들이 황제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러한 방안은 거론되지도 않았다.


 두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방안은 이 십자군 원정의 실제적 주창자로 볼 수 있는 교황 우르바노 2세와 교황청에 통치권을 양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고생해서 영토를 장악했는데 이를 순순히 넘길 영주는 누구도 없었다.


 더군다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교황이 임명한 십자군의 지휘관인 아데마르 주교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었다. 그의 후임으로 임명된 피사의 대주교인 다임베르트 혹은 다고베르트 (Daimbert or Dagobert of Pisa) 는 아직 피사의 함대를 이끌고 나타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상대적으로 십자군의 교황의 지배로 부터 자유로왔다.


 한편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이와 같은 상황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것은 우르바노 2세가 1099년 7월 29일 사망했기 때문이다. 비록 성지가 탈환된지 2주가 지난 후 눈을 감았지만 중세시대에 소식이 그렇게 빨리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르바노 2세는 끝내 성지 예루살렘이 십자군에 의해 탈환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채 선종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은 교황 파스칼 2세 (Pope Paschal II)였다. 십자군 원정을 통해 교황권을 안정시킨 우르바노 2세와는 달리 파스칼 2세는 4명의 대립교황과 신성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에 둘러싸여 평온하지 못한 나날을 보냈기 때문에 십자군에 적극 관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참고로 이야기하면 교황 파스칼 2세는 신성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에 대해 쿠데타를 일으킨 아들 하인리히 5세 (앞서 이야기 했듯 형인 콘라트가 교황 우르바노 2세와 손잡고 반란을 일으킨 덕에 황태자 자리에 앉았다) 을 지원한 후 새 황제로부터 서임권 포기를 얻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하인리히 5세가 황제가 된 이후 펼친 첫번째 정책 중 하나는 교황 파스칼 2세를 포로로 잡고 황제의 관을 쓰는 것이었다. )


 따라서 십자군들에게 남은 가장 현실적은 방안은 십자군 영주 중 하나가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신생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 되고 나머지는 봉건제 방식에 따라 각 영주들에게 분배하는 것이었다.



 7월 22일에 있었던 첫번째 회의에서 십자군 귀족들의 논의 끝에 툴루즈의 레몽 4세를 왕으로 선출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뜻밖에도 레몽 4세는 이 의견을 일축했다. 여기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고통받았던 도시에 지배자가 된다는 것은 내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분명이 왕위에 욕심이 있었던 그가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레몽 본인의 생각을 지금 알수는 없는 일이지만 후세의 역사가들이 몇가지 그럴듯한 의견을 제시했다. 아마도 레몽은 1099년 상반기의 아르카 공방전 이후 자신의 인기가 심각하게 떨어졌기 때문에 이 직위를 그냥 수락했다면 상당한 반발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에 매번 보에몽과 대립하면서 내분을 키운 것도 인기를 떨어뜨린 한가지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또 레몽 자신이 이렇게 거부한다면 다른 사람들도 선뜻 이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계산도 있을 수 있다. 그런후 다시 자신에게 요청이 들어왔을 때 마지 못해 그자리에 오르는 것 처럼 왕위에 오른다면 많은 이들의 반발을 최소화 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레몽만의 생각이었다. 사실 그가 거부했다면 노르망디 공작 로버트 2세가 다음 유력자 중에 하나였을 것이지만 그는 돌아갈 예정이었다. 플랑드르의 로베르 2세도 마찬가지 였다. 또 보에몽의 조카 탕크레드는 야심은 컸지만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을 만한 인물도 아니었고, 세력도 작았다. 그러니 남은 인물은 정말 우연하게도 고드프루아 드 부용 뿐이었다.


 사실 고드프루아 드 부용은 가장 용맹하고 잘 싸운 지휘관은 아니었다. 1차 십자군에서 가장 용맹을 떨친 인물은 아마도 보에몽일텐데, 그가 탐욕을 부려 안티오크를 차지한 덕분에 고드프루아는 그와 경쟁할 필요가 없어졌다. 여기에 가장 큰 세력을 가진 노르망디의 로버트는 돌아갈 채비를 서두루고 있어 역시 경쟁할 필요가 없었다. 가장 유력한 사령관이던 레몽 4세의 경우 보에몽과의 다툼과 아르카 공방전 이후 신뢰를 크게 잃었다. 이로써 모든 상황이 고드프루아 드 부용에게 유리해졌다.



 일단 왕위 제안을 받은 고드프루아 드 부용은 바로 왕위에 오르는 대신 좀 더 현명한 방식을 택했다. 그 역시 왕이라는 명칭을 받아들기는 일단 겸양했지만 이 성스러운 도시와 역시 성스러운 교회인 성묘 교회를 이를 탐내는 이교도 앞에 그냥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대신 자신이 '성묘의 수호자' (advocatus sancti sepulchri = defender of the Holy Sepulchre) 로서 이 교회와 성지를 수호하겠다고 한 것이다. 이를 한마디로 번역하면 '내가 예루살렘 왕국의 왕' 이라는 이야기였다.



(예루살렘 왕국의 문장   This image has been (or is hereby) released into the public domain by its author, Orange Tuesday at the wikipedia project. This applies worldwide)



(비록 왕이라는 명칭은 쓰지 않았지만 고드프루아 1세는 예루살렘 왕국의 초대 왕으로 인정된다. 태조 고드프루아랄까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expired.)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일이 진행되자 레몽 4세가 느꼈던 배신감과 충격은 별로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는 항상 자기가 십자군의 사령관이라고 생각했고, 가장 강력한 전사인 보에몽만 라이벌이라고 생각했다. 레몽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인 고드프루아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난 후 뒤통수를 해머로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이 결과에 당연히 불복했다. 그는 이전에 이흐티카르로 부터 넘겨받은 예루살렘의 요새인 다윗탑에 틀어 박혀 이를 넘겨주기 거부했다. 결국 절충안이 마련되고 레몽은 이 탑을 떠나게 되긴 하지만 분이 풀린건 아니었다.


 아마도 레몽은 팔레스타인에서 새로운 자신의 영토를 개척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러나 그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이흐티카르가 이전에 요청한 이집트의 원군이 빼앗긴 자신들의 도시 - 즉 예루살렘 - 을 다시 찾기 위해 북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21. 아스칼론 전투 (Battle of Ascalon  1099.8.12)



 8월 1일에는 사실상의 신생 왕국의 왕으로 선출된 태조 (?) 고드프루아 말고도 예루살렘의 주교도 선임되었다. 그의 이름은 코퀘스의 아르눌프 (Arnulf Malecorne of Chocques (or of Rohes)) 였다. 기록에 의하면 이 인물은 가장 성스러운 교회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장소인 성묘교회에서 중요한 유물을 하나 찾아냈다.


 그것은 8월 5일의 일이었는데, 바로 앞으로 많이 등장하게 될 참십자가 (True Cross) 였다. 잠시 이 참십자가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면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힌 바로 그 십자가라는 것이다. 고대와 중세의 교회는 이런 성유물을 매우 중시했기 때문에 이것이 아주 중요한 유물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위 여부는 어떻까? 사실 많은 성유물들이 진위 여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당했다. 일부 성유물은 고고학과 과학이 발전한 현대에 와서 위조로 밝혀지는 경우들도 있었다. 바로 앞서 보았던 안티오크의 성창 (Holy Lance -  예수 그리스도를 찌른 창, 롱기누스의 창이라고도 한다) 의 경우 너무 작위적인 냄새가 났기 때문에 발견 당시부터 상당히 그 진위가 의문시 되어었다.


 그러나 이 참십자가의 경우는 그렇게 진위를 의심받지 않았다. 무엇보다 실제 권위 있는 교회에서 발견된 유물이기 때문이다. 이 유물은 다른 참십자가 유물들 처럼 참십자가 자체가 아니라 참십자가의 조각으로 보이는 나무 조각이었는데,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이 유물을 십자가 형태의 황금으로 둘러쌌다.


(현재 성묘 교회에 있는 참십자가   CCL 에 따라 동일 조건하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adriatikus )


 다만 참십자가의 조각들 가운데는 진위를 의심받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이미 기독교가 공인된 로마 제국 후반기부터 참십자가의 조각이거나 혹은 본체라고 주장되는 나무들이 상당수 존재했는데, 너무 여기 저기서 참십자가의 조각들이 발견되니 아무래도 그들 중 일부는 진위가 의심될 수 밖에 없다.


 아무튼 이 때 발견된 참십자가의 경우는 워낙 유서 깊은 교회에서 발견된 조각이라 별 의심은 받지 않았다. 대신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의 저자인 아민 말루프의 경우에는 이 참십자가가 발견된 과정이 현재 토착 기독교도들에게서 강탈당한 것이라고 적었는데, 정확한 출처는 책에도 없어 잘 모르겠다. 필자의 생각으론 이 때 발견된 조각은 참십자가 조각 중에서 사실 큰편도 아니고 이미 발견된 참십자가 조각도 상당한 상태에서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잡설이 길었지만 일단 본론으로 돌아오면 당연히 자신의 영토를 침범당한 파티마 왕조의 실권자 알 마흐달은 십자군을 향해 강력히 경고를 했다. 즉시 예루살렘을 반환하고 퇴각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물론 십자군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으므로 이제 양측 사이에는 무력에 의한 해결책 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1099년 8월 10일 고드프루아는 각 십자군 지휘관들에게 연락을 해서 적의 대병력이 아스칼론에 집결했으며 이를 격퇴하지 못하면 성지 탈환은 몇일만에 수포로 돌아가게 될 것임을 알렸다. 당시 집으로 가려고 짐을 꾸리고 있던 플랑드르의 로베르 2세는 비교적 빨리 고드프루아의 군대에 합류했고, 아스칼론으로 향했다.


 한편 배신감이 채 가시지 않은 레몽 4세와 향수병이 더 심했던 것 같은 노르망디의 로버트 2세는 이 소식을 듣고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그들도 다음날 아스칼론에 적의 대병이 모였다는 사실이 확실해지자 고드프루아와 합류했다.


 나머지 병력도 본대와 합류하자 일단 십자군은 대략 1만 정도가 좀 넘는 병력을 확보했던 것 같다. 아길레라의 레몽은 1200명의 기사와 9000명의 보병이라고 했는데, 예루살렘 공방전에 참가한 병력을 보면 이정도가 맞는 듯 하다.


 십자군은 전례없는 신속함으로 적을 공격해 들어갔다. 그들은 놀랍게도 - 물론 아스칼론이 가깝기도 하지만  - 8월 12일에 아스칼론에 도달했다. 두개의 중요한 성유물도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같이 운반되었다. 하나는 앞서 이야기한 참십자가로 아르눌프 주교에 의해 운반되었다. 나머지는 성창이었는데, 작년에 안티오크에서 실제로 승리를 가져다준 성유물이었으므로 다시 아길레라의 레몽에 의해 운반되었다.


 사실 파티마 군은 훨씬 수적으로 우세했다. 당시 병력은 5만이라는 기록도 있지만 일부에서는 2-3만 정도로 추산하기도 한다. 아마 형편없이 패배한 것으로 볼 때 후자가 더 맞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유명한 연대기인 게스타 프랑코롬은 무려 20만이라는 믿기 어려운 숫자를 적었는데, 이는 삼국지에 나오는 것 같은 과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알 아흐달은 십자군을 교란하고 약탈에 정신이 팔리게 할 목적으로 가축 떼를 뿌려놨는데, 십자군은 이 가축떼에 전혀 동요되지 않았으며 사실 가축떼를 데리고 신속히 진격하는 바람에 실제보다 병력도 많아 보였다고 한다.


 1099년 8월 12일 새벽, 십자군은 적을 향해 기습을 실시했다. 이 뜻하지 않은 기습은 - 당시 파티마 군은 적이 벌써 나타날리 없다고 여겼던 것 같다 - 대성공을 거두었다.


 십자군은 9개의 부대로 나누어졌는데, 고드프루아 자신은 좌익을 맡았고, 레몽은 우익을 담당했다. 중앙은 노르망디의 로버트 2세, 플랑드르의 로베르 2세, 탕크레드, 외스타슈 3세, 가스통 4세 등이 담당했다. 중앙은 더 작은 2개의 부대로 나누어져 있었서 보병들이 앞장섰다.


 이 전투에서 파티마 군은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아 수적인 우세를 잘 활용하지 못했다. 양군은 서로 화살을 쏘아대다가 창으로 교전할 만큼 근접해서 백병전을 벌였으며, 이 전투에서 십자군이 매우 유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비록 파티마군의 일부가 후위로 돌아가 포위를 시도했으나 좌익의 고드프루아에 의해 격퇴되고 말았다.



(아스칼론 전투의 상상화   1881년 Gustav Dore. 작  This UK photograph or other artistic work (e.g. painting), of which the author is known,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the author died prior to 1 January 1939.  )


 결국 전투는 짧은 시간안에 끝나고 파티마군은 퇴각했다. 퇴각하는 파티마군을 십자군들이 추격했고, 막대한 파티마군이 학살당했다. 아스칼론 성 자체는 함락되지 않았지만 파티마군은 완전히 패주했다. 획득한 전리품만도 막대했다.


 물론 사실 이 전투가 끝난 후에도 병력 자체는 파티마군이 우세했다. 또 장거리 원정으로 인해 쉽게 병력을 보충하기 힘든 십자군의 특징상 이집트의 우세한 물적, 인적 자원을 동원하면 십자군은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십자군은 이렇게 우세한 적이 퇴각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므로 적의 반격에 대비하며 하루를 지냈다.


 그러나 다음날 알게된 사실은 파티마 군이 전부 이집트로 퇴각했다는 것이었다. 다만 아스칼론 성 자체를 수비하던 수비대만 후퇴하지 못하고 남았을 뿐이다. 사실 아스칼론의 수비대도 안전한 퇴각만 보장받으면 성을 적에게 넘길 생각이 있었지만 고드프루아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모양세가 우숩게도 고드프루아는 이 성을 공격해서 점령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무슬림들은 이 도시만은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문제를 제외한다면 이 아스칼론 전투는 십자군 전쟁사상 가장 성공적인 십자군의 승리로 기록될 만 했다. 이 전투의 결과는 엄청났다. 당시 신생 예루살렘 왕국에 가장 위협적인 적은 바로 파티마 왕조였다. 이들이 우세한 인적, 물적 자원을 감안하면 이미 그 숫자가 크게 감소한 십자군은 장기전에서 승리할 전망이 전혀 없어보였다.


 그러나 이 전투의 결과 이집트 군은 전쟁 수행 의지 자체를 잃어버렸다. 이것은 당시 1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 인적 손실 보다 파티마군의 패배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 셀주크 투르크는 더욱 혼란스런 내란으로 점철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신생 예루살렘 왕국은 첫 고비를 넘기고 그 200 여년의 역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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