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2차 람라 전투 (Battle of Ramla 1102. 5.17)
비록 아스칼론 전투이후 소수의 십자군 군대에도 패배하는 지리멸렬한 모습을 주로 보이던 알 아흐딜과 이집트군이지만 그렇다고 무슬림들에게도 중요한 성지인 예루살렘과 그 주변의 영토를 그냥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1102년이 되자 다시 한번 알 아흐딜은 대규모 병력을 모았다. 이는 이 이슬람 군주의 큰 장점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저 멀리 유럽에서 병력을 지원받아야 하는 십자군 국가들과는 달리 이집트의 실권자인 그에게는 병력과 보급을 쉽게 충원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었다. 반면 1101년 마이너 십자군의 실패로 보두앵 1세가 지닌 병력은 상당히 적었다.
당시 알 아흐딜은 3만에 달하는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고 한다. 사실 이 정도면 1차 십자군의 총병력에 육박하는 병력이며, 당시 십자군 국가의 병력을 총 동원해도 막기 힘든 숫자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숫적 우세에도 아스칼론 전투 당시 이집트 군은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바가 있다.
하지만 신의 가호가 있었는지 이번만큼은 행운의 여신도 알 아흐딜에게 관대했다. 십자군 국가들의 병력은 넓어진 영토에 분산되어 있었고, 예루사렘의 보두앵 1세가 가진 병력은 제한 적이었다. 여기다가 십자군이 정찰을 소홀히 하는 실책까지 범하므로써 보두앵 1세는 적의 병력 규모를 오판했다.
보두앵 1세는 1차 람라 전투 때 처럼 알 아흐딜이 또 다른 장군에게 많지 않은 병력을 주어 - 그래도 십자군 보다는 훨씬 우세했다 -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파견했다고 오판했다. 그래서 직접 500명의 기사만을 데리고 적을 맞이하러 나갔다.
한편 이집트 군은 강력한 해군을 이용 해로를 통해 아스칼론에 도달했다. 팔레스타인의 항구 도시이자 과거 고드프루아 드 부용의 오판으로 이집트 군의 수중에 남아있던 아스칼론은 훗날 반세기 후 십자군에 함락되기 전까지 이집트 군에 중요한 거점 노릇을 했다. 역시 이번에도 이집트군은 아스칼론을 출발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중간 요충지인 람라 (Ramla) 에서 양군은 맞붙게 되었다.
(적당한 지도가 없어 일단 구글 맵에서 상대적 위치를 표시했다. 왼쪽 아래있는 Ashkelon 이 라틴어로 아스칼론 (Ascalon)이다. 빨간 A 로 표시된 지역이 람라이다. 그리고 오른쪽 아래에 예루살렘 (Jerusalem) 이 있다. 아스칼론 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려면 해안을 따라 람라까지 간후 내륙으로 들어가야 한다. )
이 2차 람라 전투는 약간 희비극이 섞인 상태의 전투였다. 일단 적이 그렇게 많은지 몰랐던 보두앵 1세와 십자군 기사들은 용감히 적진으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 여기엔 불운한 십자군 군주 중 하나인 블루아 백작 (스테판 2세 혹은 에티엔 앙리)과 부르고뉴의 스테판도 함께 였다. 그런데 이들은 곧 이상한 사실을 눈치챘다. 주위를 포위한 적의 숫자를 보니 생각보다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제서야 보두앵 1세는 이번 군대가 이집트군의 주력 병력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리고 아무리 십자군 기사들이 정예이고 이집트 군이 오합지졸 이라도 3만대 500 이라는 숫차 차이는 도저히 극복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일단 후퇴해서 전열을 가다듬고 흩어진 십자군 군대를 모아 적의 공격에서 예루살렘을 지켜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십자군은 무식하게도 소수의 기사들로 적진 한복판에 돌격해 들어간 셈이어서 후퇴조차 쉽지 않았다. 소수의 군대로 다수의 적군에 돌격했다가 적의 숫자가 예상보다 많아 포위당해 '어 이게 아닌데' 라고 당황한 셈이었다. 반면 이집트군은 소수의 적군이 아군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포위당해 주니 이에 웬 떡이냐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전쟁터에서 산전 수전을 다 겪은 보두앵 1세와 십자군들은 그렇게 쉽게 당하진 않았다. 보두앵 1세는 생존자들을 이끌고 람라에 있는 탑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농성을 시작했다. 그러나 방어자는 소수이고 포위자는 엄청난 숫적 우위에 있으니 함락당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여기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밤에 야음을 틈타 보두앵 1세가 탈출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제 적을 다 잡았다는 이집트 군의 나태함이 이런 탈출을 가능케 했을 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집트 군은 눈앞에서 대어를 놓친 셈이었다.
(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과거 보두앵 1세가 은혜를 베푼 무슬림 족장이 있었는데 그가 탈출로를 열어 보두앵 1세만 겨우 탈출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 기록대로라면 이 무슬림 족장은 은혜를 갚긴 했지만 무슬림의 가장 큰 적을 살려준 셈이다)
그러나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아직 탑안에 있던 십자군은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 블루아 백작과 부르고뉴 백작이 결국 전사했다. 2차 람라 전투에서 불운한 십자군 영주 블루아 백작은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십자군 전사로써 썩 명예롭지 못한 삶은 산 이 불행한 남자는 드센 성격의 아내 아델라만 만나지 않았다면 유럽에서 평안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했을 지도 모른다.
아무튼 간신히 부하들을 버리고 혼자 살아남은 보두앵 1세는 아르수프 (Arsuf) 를 향해 달아났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기적을 보았다. 예정에도 없던 대규모 병력이 잉글랜드로부터 당도해 있던 것이다. 이들은 잉글랜드에서 출발한 십자군의 지원군으로 많은 수의 잉글랜드,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모인 신규 십자군 병력이 막 도착한 참이었다. 당시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그제서야 이들의 도착을 알게 된 것이다.
보두앵 1세는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병력을 추스려 다시 8천명의 병력을 재건했다. 그리고 설욕을 하기 위해 자파로 군대를 향했다. 당시 이집트 군이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면서 예루살렘이 아닌 자파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아마 이집트 군 생각은 후방을 안전하게 할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파 에서 시간을 낭비한 덕에 적에게 역전의 기회를 허용한 셈이었다.
5월 28일 다시 자파에서 자파 전투 (Battle of Jaffa) 가 벌어졌다. 당시 보두앵 1세는 다시 기병대를 이끌고 적진에 돌격했다. 비록 숫적 우세에도 불과하고 다시 한번 이집트 군은 크게 패배해서 아스칼론으로 후퇴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이집트 군에게 이 2차 람라 전투의 패배는 치명적이면서도 치욕적이었다. 3차 람라 전투 전까지 3녀간 이집트 군은 자신의 영토를 회복하려는 시도를 다시 하기 어려웠고, 결과적으로 유아기의 불안정한 예루살렘 왕국은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10. 내분
일단 이렇게 외부의 적이 사라지자 이제 십자군 국가 내부의 갈등이 더 고조되게 되었다. 일단 남쪽의 예루살렘 왕국 본토에서는 이전부터 보두앵 1세와 예루살렘 왕국 자체를 가지고 경쟁을 벌이던 탐욕스런 예루살렘 주교 다임베르트가 문제가 되었다.
종교가 큰 역활을 하던 중세 시대, 특히 종교적 색체가 강할 수 밖에 없는 십자군 국가에서 종교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가 서로 대립하는 상황은 사실 매우 위험한 내부 분열이었다. 이런 분열상은 적대적인 무슬림 세력으로 둘러싸인 예루살렘 왕국에는 특히 위험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보두앵 1세는 이전부터 다임베르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다행히 다임베르트의 탐욕이 이 기회를 제공했다. 다임베르트가 부정을 밝힌 보두앵 1세는 결국 이를 근거로 다임베르트가 사임할 수 밖에 없도록 했다. 이후 다임베르트는 유럽에 돌아가 자신의 복권을 노렸지만 결국 자신의 꿈을 이루기 전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는 예루살렘 왕국을 위해서는 물론 다행한 일이었다.
보두앵 1세 에게는 다른 좋은 일도 있었다. 1104년에는 주요 항구 도시인 아크레 (Acre) 가 십자군에 함락된 것이다. 이 항구는 계절에 영향을 받지 않는 가장 좋은 항구로 결국 십자군 국가에 마지막까지 가장 중요한 항구였다.
그러나 이듭해인 1105년에는 다시 한번 시련이 다가왔다. 바로 람라 전투 중 가장 처절한 전투인 3차 람라 전투가 발생한 것이다. (1105년 8월 27일) 이 전투는 특이하게도 수니파 무슬림인 다마스쿠스 군의 도움을 받은 시아파 이집트 군대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연합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는 보두앵 1세의 활약으로 십자군의 압도적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비록 이후에도 매년 이집트 군이 예루살렘 왕국의 영토를 집적대긴 했지만 1123년의 이브나 전투 (battle of Yibneh) 까지는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와 예루살렘 왕국간의 전면전은 없었다. (참고로 당시에는 보두앵 1세와 알 아흐딜 모두 죽고 없었다) 결국 기선을 제압한 아스칼론 전투와 이후 별어진 3차례의 람라 전투는 예루살렘 왕국의 가장 큰 위협이었던 이집트의 위협을 한동안 제거했다.
하지만 남쪽의 상황과는 별개로 북쪽에서는 갈등이 점화되고 있었다. 1104년의 하란 전투 이후 에데사의 영주인 보두앵 2세와 후일 에데사 백작이된 조슬랭은 무슬림의 포로가 되었고, 안티오크는 탕크레드의 섭정이 들어섰으며, 에데사까지 탕크레드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것은 앞서 설명했다. 그리고 다분히 의도적으로 탕크레드는 포로로 잡힌 에데사 백작의 석방 협상을 태만하게 진행했다.
그러나 1108년 보두앵 2세와 조슬랭이 풀려나자 결국 이들간의 갈등이 다시 폭발했다. (이 일은 1109년의 트리폴리 함락 이전의 이야기다) 보두앵 2세와 조슬랭은 탕크레드가 자신들이 포로로 잡힌 틈을 타서 에데사 백작령까지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려고 하는 것을 보고 격분했다.
그래서 그들은 탕크레드에 적대적인 아르메니아 인들은 물론 심지어 자신을 감금했던 무슬림 군주인 자왈리까지 끌여들여 탕크레드를 대항하기로 결정했다. 한편 더 가관인 것은 탕크레드였다. 그는 이에 대항해서 알레포의 리드완과 손을 잡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전부터 알레포의 리드완은 1107년 모술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자왈리가 자신을 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 십자군 군주가 십자군 - 무슬림 동맹군을 이끌고 한 전쟁터에서 만나는 희한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이 전투 자체는 비록 탕크레드 - 리드완의 우세로 끝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보두앵 2세가 에데사를 다시 확보하는데 성공하므로써 일단 안티오크 공작령을 차지한 탕크레드와 에데사 백작령을 회복한 보두앵 2세가 다시 십자군 국가의 북부 지대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이듭해에 트리폴리 함락을 도와 새로운 십자군 국가인 트리폴리 백작령을 건설하게 끔 도왔다. 1109년 에는 비록 내부적 갈등이 없어지진 않았어도 안티오크 공작령, 에데사 백작령, 트리폴리 백작령, 예루살렘 왕국 본토의 십자군 국가들이 그 기틀을 잡았다. 이들은 훗날 살라딘이 나타나기 전까지 한동안 그런대로 번영을 누렸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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