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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1101년 십자군 2



 
3. 롬바르디아 십자군


 일단 이 1101년의 마이너 십자군에서 최초로 떠난 부대는 바로 롬바르디아의 십자군 부대였다. 이 부대는 앞서 언급했듯이 잘훈련된 군대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농민들의 비중이 높아 이전의 민중 십자군을 연상하게 하는 측면도 있었다. 이 오합지졸 부대를 지휘한 것은 역시 그 자신도 군대 지휘 경험이 없는 밀라노 대주교였다.


 이런 부대들이었으니 이들이 숫적으로는 우세해도 전체의 발목을 잡은 부대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2차 대전 당시 추축국의 일원이었으면서도 독일군의 발목을 잡은 그들의 후손인 이탈리아 군대보다 훨씬 큰 해악을 동료 십자군에 미치게 된다.


 이들은 1100년 가을 출발해 아드리아해를 건너 육로를 따라 이전에 십자군들이 갔던 길을 다시 행군해다. 그러나 제대로 훈련된 군대가 아니었으므로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제대로 기강도 없었고, 통제되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들이 민중 십자군처럼 주변지역을 약탈하러 다녔을 것임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던 수순이었다.


 한편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이 달갑지 않은 불청객을 처리할 방법을 고심했다. 군대라기 보다는 폭도에 가까운 이 무리들을 공격해서 괴멸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했지만 이보다 더 잘 훈련된 군대가 뒤따르고 있었고, 아나톨리아 고원지대에서는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을 비롯한 용맹한 무슬림 국가가 건재했으므로 황제는 이들을 제거하는데 제국의 힘을 쓸데 없이 소진하는 방법보다는 이전처럼 이들을 이용해 무슬림 국가들을 공격하고자 했다.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비잔티움 제국은 이 성가신 무리들을 과거 민중 십자군처럼 신속히 보스포러스 해엽 너머의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수송했다. 그들은 니코메디아로 이동한 다음 여기서 후발 부대를 기다리도록 권유 받았다. 다행히 이전의 민중 십자군들과는 달리 이들은 이 충고를 지킨 덕분에 전멸되는 운명을 잠시 보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작은 십자군의 개별 군대들은 거리상의 이유도 있긴 했지만 모두 늦게 도착했다. 1101년 5월에서야 비로써 프랑스 십자군 개별 부대들이 도착했는데, 이들은 숫자는 적었지만 잘 훈련된 부대들이었다. 이 부대에는 이전에 실추된 명성을 되찾기 위해 나타난 블루아 백작 스테판 2세, 부르고뉴 백작 스테판 1세, 그리고 부르고뉴 공작 유데 1세 (Eudes I, Duke of Burgundy, Eudes Ier Borel le Roux = '적색 대공 유데 1세'라고도 한다) 의 군대가 끼어 있었다.


 이중에 블루아 백작의 경우는 기묘한 출전 이유에 대해서 설명했었다. 그는 귀국한 이후 그의 무서운 아내인 아델라 (Adela of Normandy) 에게 계속 시달렸는데, 이렇게 시달리면서 살 바에는 차라리 다시 십자군에 참가하는 편을 택했다는 소문이었다. 만약 그게 모두 사실이라면 그의 무서운 아내는 남편을 사지로 내몬 셈이었다.


 이들 부대는 비록 소수이긴 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보낸 기묘한 부대도 있었다. 바로 황제의 관리인 콘라드가 이끄는 병력이었다. 당시 황제인 하인리히 4세는 평생을 교황측과 싸우면서 지낸 사람이었다. 따라서 교황이 주도하는 십자군에 이들 부대가 있다는 것은 다소 특이했다. 


 이들이 니코메디아에서 조우 했을 때 이미 콘스탄티노플에서 롬바르디아 십자군의 난동을 중재하고 진정시킨 툴루즈의 레몽도 이들 부대와 다시 규합했다. 또 여기에 지난 1차 십자군 이후 약간 영토를 수복한 알렉시우스 1세도 추가적인 영토를 회복할 목적으로 페네체그 족 용병을 중심으로 한 병력을 트지타스(Tzitas) 장군의 지휘하에 파견했다.


 이정도 지휘관과 부대가 모이자 이제 서서히 진군할 만한 상황이 조성된 듯 했다. 다시 한번 최고 지휘관이 누구인지가 논의가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현지 사정에 가장 밝고 경험이 많은 레몽 4세가 지휘관이 되는데 대체적으로 동의한 것 같다. 이 십자군은 매우 잡다한 부대들이 모여있었지만 잘 조직 되지도 않았고,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대규모의 병력은 아니었다.


 1101년 5월, 니코메디아에 1차로 집결된 1101년 십자군은 이제 내륙을 향해 진격했다. 아나톨리아 고원지대에서 십자군 국가와 비잔티움 제국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롬 술탄국이 그 첫번째 목표였다. 물론 여기에는 영토 탈환을 위한 알렉시우스 1세의 입김도 작용했지만 육로로 십자군의 안전한 통행을 보장 받기 위해서는 어차피 1차적으로 공격해야 하는 목표이기도 했다.




 4. 혼란


 여기서 갑자기 보에몽 1세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이상하긴 하겠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위해서 이쯤에서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야기를 1년정도 앞으로 돌려 1100년 8월로 돌아가게 되면 이 때의 보에몽 1세는 구미당기는 소식 하나를 접하게 된다.


 그것은 아나톨리아 고원의 주요 관문이자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와 1차 십자군이 통과한 관문인 실리시안 관문 (Cilician Gate) 에서 타우루스 산맥 (Taurus Mountains) 의 사이에 있는 지역인 말리티아 (Malatia) 의 수비대로 부터 나온 구조 요청이었다. 아르메니아 용병인 이들은 무슬림 세력인 다니슈멘드 군으로부터 공격받아 위태로운 상태였다.


 보에몽 1세는 물론 같은 기독교도를 지키려는 의도보다는 세력을 보다 북쪽으로 확장할 욕심에서 이들을 도와줄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보에몽 1세는 적의 세력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실책을 범했다. 안티오크에서의 성공 때문이었을까 ? 평생을 전장을 누비며 살아왔던 이 교활한 노르만 전사도 지나친 자만심으로 인해 큰 낭패를 보고 말았다.


 보에몽 1세는 약 300명의 기병과 소수의 보병만을 데리고 말라티아로 진군했는데, 결국 다니슈멘드 군에 의해 멜리티네 전투 (Battle of Melitene) 에 대패하고 보에몽 자신도 포로로 잡힌다. 1100년 8월의 일이다.


 이 소식은 곧바로 에데사의 보두앵 1세에 전달되어 에데사 백작으로 하여금 미리 대비할 수 있게 해주었다. 부분적으로는 행운이 작동하고 또 보두앵 자신이 끊임없이 조심한 덕에 에데사 백작은 그해 크리스마스에 예루살렘 왕국의 왕관을 선물로 받을 수 있었다.


 반면 한때 야심 만만했던 안티오크 공작은 그해 크리스마스와 설날을 이슬람 감옥에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무슬림 지배자들은 제법 몸값이 나갈 것으로 보이는 포로를 죽이지 않고 억류했다. 한편 그의 영지인 안티오크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조카 탕크레드가 삼촌의 슬픈운명을 한탄하면서 자신이 그 영지를 차지하고자 했으나 보에몽에게는 다행히도 그의 부하들이 탕크레드를 지지하지 않아 공작은 감옥에서 백수 신세가 되는 일은 모면할 수 있었다.


 만약 몸값을 받을 수 없게 되면 자신의 생명이 위험해 질 것이기 때문에 보에몽 공작으로써는 한숨 돌린 셈이었다. 그러나 이후 벌어진 석방 협상에서 조카 탕크레드는 숙부 못지 않은 교활한 속셈을 드러냈다. 다분히 의도적인 협상 지연은 탕크레드가 숙부보다는 안티오크 공작령에 더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결국 이 석방 협상은 3년을 질질 끌게 된다.



 이 이야기를 갑자기 꺼내는 것은 앞으로의 1101년 십자군의 진로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1101년 십자군은 과거 1차 십자군때의 승전지인 도릴라이온을 지나 앙카라 (Ancyra)를 점령한 후 코니아 (Konya) 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앙카라까지 진격한 이후 문제가 발생했다. 십자군은 이 도시를 점령한 후 알렉시우스 1세에게 반환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이후에 롬바르디아 십자군이 주도적으로 십자군의 주요 지휘관인 보에몽 1세를 구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보에몽 1세는 아나톨리아 북부의 니크사르 (Niksar - 당시엔 네오 카이사레아) 에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러기 위해서는 군대의 진격로를 북쪽으로 틀어야 했다. (아래 그림에서 확인)


 사실 아나톨리아 고원의 건조한 기후에 보급상의 문제, 그리고 무엇보다 클르츠 아르슬란을 비롯한 무슬림 군대의 기습 가능성을 고려할 때 이 십자군 병력은 처음 계획대로 남하해서 코니아를 점령한후 비잔티움 제국에서 안티오크와 다른 십자군 국가와의 병참을 연결시키는 일부터 했어야 했다. 그러나 정말 알 수 없게도 지휘관 레몽 4세는 북쪽으로 군대를 돌리는데 동의했다. 이는 정말로 재앙의 전주곡이라 할만 했다.



(1101년의 십자군의 진격로. 앙카라, 코니아, 강그라, 메르시반, 니크사르등 주요 도시의 위치를 확인하자. 지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1차 십자군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영토의 일부를 수복하는데 성공하긴 했으나 여전히 아나톨리아의 많은 부분이 무슬림의 수중에 있었다. CCL 에 따라 동일 조건하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MapMaster)



 왜 레몽이 이런 잘못된 의견에 동의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특히 자질이 떨어지는 롬바르디아 군의 보에몽 구출 주장은 분명이 이 지역에서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데서 나온 것이었다. 북쪽에서 고립되고 병참이 끊어지면 그야말로 클르츠 아르슬란과 다니슈멘드 군대 사이에 끼어서 고립 무원의 처지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레몽이라도 이런 문제를 바로잡아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아무튼 십자군은 그들을 구렁텅이로 내몰 북쪽으로의 행군을 시작했다. 1101년 6월 23일 앙카라를 떠난 이들은 강그라 (Gangra)를 포위했다. 짧은 포위후 그들은 다시 북쪽으로 이동하여 터키 북부의 도시인 카스타모누 (Kastamonu) 를 점령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때마침 자신의 영토 깊숙이 들어온 십자군 부대를 환영하기 위해 클르츠 아르슬란의 부대가 이들을 기습했다. 이 투르크 술탄의 군대는 경험이 풍부했으며, 무엇보다 어떻게 하면 십자군을 효과적으로 괴롭힐 수 있는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십자군이 이용할 수 있는 식량을 모두 파괴했고, 정면대결을 피하면서 건조하고 황량한 아나톨리아 고원의 오지로 십자군을 유인했다. 그리고 식량과 보급품을 구하러 나온 부대는 여지없이 전멸시켰다.


 이에 수많은 십자군 병사와 민간인들이 곧 비참한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마실 물과 먹을 식량은 턱없이 부족했고, 여름의 날씨는 건조하고 더웠으며, 투르크 군대는 끊임없는 매복과 기습으로 십자군을 괴롭혔다. 이들은 결국 북쪽의 흑해 해안지대로 이동했는데, 안전과 보급상의 문제도 있었지만 이 상황에서도 롬바르디아 인들이 보에몽을 구출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5. 메르시반 전투 (Battle of Mersivan  1101년 8월)


 결국 십자군은 1101년 8월경에 메르시반이라는 지역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 지역은 보급품을 구하기 매우 힘든 반면 사방이 트인 평지가 있어 투르크 기병들이 활동하기 적당한 곳으로 생각되었다. 클르츠 아르슬란은 여기서 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기로 결정했다.


  당시 십자군은 5개의 부대로 나누어져 있었다. 롬바르디아 부대, 레몽과 비잔티움 군대의 부대, 프랑스 부대, 독일 부대, 부르고뉴 부대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전반적으로 유기적으로 잘 결합되어 있기 보다는 1차 십자군에 훨씬 못미치는 오합지졸이었다.


 메르시반 전투의 첫날은 투르크 기병대가 십자군이 메르시반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포위하는 것이었다. 포위망이 완성되자 보급품을 거의 가지지 못한 십자군은 큰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다음날 십자군은 포위망을 풀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과적으로 콘라드 공작이 이끄는 독일 부대가 전멸당하는 피해를 입으면서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이는 나머지 십자군 부대의 사기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미쳤다.


 포위 3일째는 다소 소강 상태로 지나갔지만 사실 물과 식량이 없는 십자군은 메르시반에서 계속 포위되 있다가는 결국 고사되어 전멸하게 될 판이었으므로 어떻게든 포위를 풀고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포위 4일째 십자군은 필사적인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투르크 군은 알레포의 리드완과 다니슈멘드 까지 힘을 합쳐 십자군을 더욱 단단히 죄었다. 다른 무슬림 지배자들도 이번 만큼은 십자군의 위험성을 깨닫고 더 이상의 십자군 병력이 보강되는 것을 막기 위해 힘을 합친 것이다. 결국 십자군의 이 마지막 탈출 시도는 그날 저녁 늦게 완전히 실패라는 것이 드러났다. 십자군은 막대한 손실만 입고 사기도 꺽인채 포위를 뚫는데 실패했다.


 롬바르디아 인들은 완전히 패배했고, 페네체그 족 부대는 버려졌으며, 독일과 프랑스 군도 크게 패배해서 궁지에 몰렸다. 5일째인 다음날 아침까지 전투가 이어졌는데, 겨우 레몽과 부르고뉴 백작 스테판 1세, 블루아 백작 스테판 2세 등만 간신히 탈출에 성공해서 북쪽의 시노페 (Sinope)에서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플로 도망칠 수 있었다.


 이 패잔병을 본 알렉시우스 1세의 실망이 얼마나 클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비잔티움 병력도 거의 전멸했고, 잘만하면 아나톨리아 중남부를 장악해서 십자군 국가들에 이르는 병참선을 확보 향후 무슬림 국가들을 지속적으로 압박할 수 있던 기회를 그들이 완전히 놓친 셈이었다. 특히 지휘를 맡았던 레몽 4세의 경우에는 그 명성이 더 심각하게 실추되고 말았다.




 6. 결과


 한편 프랑스의 느베르 백작 기욤 2세 가 이끄는 부대는 좀 더 뒤늦게 도착했다. 이 느베르 군은 당시 중세 군대 답지 않게 극도로 규율이 잘 잡혀 있어 오는 도중 아무런 사고도 없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 그들은 곧 니코메디아를 거쳐 앞서 떠난 1101년 십자군의 본대와 합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느베르 백작은 현명하게도 북쪽으로 절망적인 전투를 벌이기 위해 떠나지 않았다. 대신 본래 목표대로 코니아를 공격했다. (위의 지도에서 남쪽으로 향한 빨간 화살표를 따라 가면 이들의 진로가 나온다) 그러나 불행히 잘 훈련되었어도 숫적으로 부족한 느베르 백작의 군대는 이 도시를 점령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느베르 군은 좀 더 동쪽의 헤라클레아 (Heraclea Cybistra) 에서 하필이면 1101년 십자군의 주력 부대를 격파한 클르츠 아르슬란의 군대의 공격을 받았다. 술탄은 적의 본대를 격파하자 마자 투르크족 특유의 기동성을 발휘해 남쪽으로 전광석회처럼 이동 이들을 시간차 각개격파한 것이다.


 비록 느베르 군은 용감했지만 숫적인 열세를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느베르 백작 본인을 비롯한 극히 일부 병사만이 겨우 살아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한편 느베르 백작이 콘스탄티노플을 떠난지 얼마되지 않아 아키텐 공작 기욤 9세와 위그 드 베르망두아, 그리고 독일의 바바리아 공작 벨프 1세가 이끄는 군대가 다시 도착했다. 사실 느베르 백작이 좀더 기다렸다가 이들과 합류했다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왔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느베르 백작은 어서빨리 선발대를 따라 가겠다는 생각으로 떠났다가 결국 각개격파되고 말았다. 한편 이 마지막 부대도 마찬가지 였다. 물론 어차피 뒤에 따라올 부대는 없었으므로 이들은 선발대를 찾아 무작정 출발했다.


 여기서 볼수 있는 것은 이들 부대들이 유기적으로 통일되서 협력했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패배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점이다. 이 1101년 십자군의 가장 큰 특징은 크게 3개의 부대가 서로 전혀 협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튼 마지막 부대역시 아주 특이한 방식을 택해 성지로 가기로 결정했다. 일단 절반 정도는 해로를 따라 배를 타고 팔레스타인에 도달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나머지 절반은 위험한 것으로 드러난 육로를 따라 진군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 육상 부대를 주요 지휘관인 기욤 9세와 벨프 1세, 위그 백작이 이끌었던 점으로 보아 이들이 아마 주력 공격부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들의 운명도 앞선 부대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1101년 9월에 헤라클레아에서 이들은 다시 클르츠 아르슬란의 기습을 받고 크게 패배했다.


 여기서 위그 백작은 크게 상처를 입었고, 결국 이 부상으로 어이없이 사망했다. 아키텐 공작이 이끄는 패잔병들은 간신히 타르수스에 도달할 수 있었으며, 결국 그들은 어찌되었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도달할 수는 있었다.




 결과론적으로 말해서 이 1101년의 십자군은 민중 십자군에 견줄 만한 오합지졸에서 아주 잘 훈련된 군대까지 다양한 병력이 있었지만 역대 십자군 중 가장 통일되지 못한 지휘 체계로 말미암아 투르크 군, 특히 클르츠 아르슬란 1세의 군대에 각개격파 당하여 괴멸되거나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재앙적인 십자군이었다. 아마도 십자군의 엄청난 패배는 사실 클르츠 아르슬란 1세의 능력에 기인한 바도 있지만 무엇보다 십자군들의 어리석음에 기인한바가 크다고 하겠다.


 메르시반 전투와 연이은 십자군 부대들의 패배는 사실 역사적으로 중요하다곤 할 수 없다. 그러나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만약 이 십자군 군대들이 본래 계획대로 아나톨리아 중부를 장악하는데 성공해서 코니아와 그 주변의 지역을 점령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이렇게 될 경우 롬 술탄국은 동서로 양분되고 안티오크를 비롯한 십자군 국가에까지 비잔티움의 세력이 확장되어 향후 비잔티움 제국이 세력을 더 회복할 수 있던 기회이기도 했다. 물론 단순한 가정은 금물이지만 말이다.


 반면 안티오크의 탕크레드에게는 오히려 십자군의 패배가 다행스런 일이었다. 자신들과 비잔티움 제국 사이에 여전히 롬 술탄국이 건재했기 때문에 비잔티움 제국은 이 유서깊은 제국의 도시를 다시 차지하기 어려웠다. 이를 확대 해석한다면 이 패배는 십자군 국가 전체가 비잔티움의 영향력에서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지나친 확대 해석은 금물이지만 말이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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