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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살라딘 14


 33. 다가오는 결전


 사실 1185년에 살라딘은 당시 섭정이 된 레몽 3세와 휴전 협정을 맺었다. 기 드 뤼지냥과 르노 샤티옹, 그리고 성전 기사단 같은 대 무슬림 강경파 - 그러나 그들은 무슬림에 대해서 적극적인 공세를 펼친 것도 아니고 그냥 약탈만 하러 다녔다 - 이에 반대했지만 보두앵 4세가 위중하고 이후에는 어린 보두앵 5세가 즉위한 혼란스런 와중에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레몽 3세가 생각하기에 군사적으로 열세인 예루살렘 왕국이 우세한 살라딘의 제국에 덤비는 것은 아무래도 자살 행위였다. 몽지사르 전투에서 한번 큰 승리를 거두긴 했어도 적은 그 피해를 금방 회복했다. 더구나 최근 살라딘은 북부 시리아 및 메소포타미아 일부를 병합하여 그 전보다 세력이 더 커졌다. 따라서 저쪽에서 먼저 처들어오려는 생각이 없다면 굳이 상대가 우리를 공격하도록 자극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게 레몽 3세의 생각이었다.


 사실 1185년에는 살라딘은 모술과의 전쟁에 돌입했기 때문에 - 비록 그의 건강이 중간에 악화되어 중단 할 수 밖에 없었지만 - 진짜로 예루살렘 왕국을 공격할 의도가 없었다. 물론 모술이 정복되면 그 다음은 예루살렘 왕국이겠지만 결국 그해에도 모술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대신 1186년에 평화 협정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르노 드 샤티옹에게는 이런 살라딘과의 평화 협상 자체가 불만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자신의 영지인 카락 성 앞을 지나가던 부유한 상인들의 행렬을 약탈하지 않고는 더 이상 참을 수 가 없게 된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르노는 1186년 다시 약탈에 유혹을 참지 못했다. 본래 평화 협정 따위는 휴지조각 만도 못하게 여긴 그였기에 아마도 무슬림 대상들을 약탈하는데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이 1186년의 약탈은 르노에게는 꽤 큰 횡재였다. 막대한 재산을 무슬림 상인들로 부터 약탈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살라딘의 누이가 탄 행렬까지 납치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살라딘은 즉시 항의했고 새로이 국왕이 된 기 드 뤼지냥 역시 인질과 약탈된 재물을 반환하라고 요구했지만 역시나 르노 드 샤티옹은 재물에 눈이 멀어 결국 이를 거부한다.


 아무리 관용의 군주로 정평이 난 살라딘이지만 이와 같은 일을 계속 해서 참는 다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여기에 르노 드 샤티옹의 비열한 행동은 이슬람 권 전체의 분노를 한곳으로 집중시켰다.


 마침내 1187년 3월 살라딘은 저 불경스런 십자군에 대해서 성전 (지하드) 를 선포했다. 이에 범 이슬람 권이 하나로 단결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르노 드 샤티옹의 공이 컸다. 저 멀리 수단과 리비아 부터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리아 이르기 까지 수많은 에미르들과 용병들이 살라딘의 깃발아래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제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처음으로 무슬림들이 하나의 깃발아래 힘을 합쳐 십자군과 싸우는 대 역사가 시작되었다.



 34. 크레송 전투 (Battle of Cresson   1187년 5월 1일)


 이 1187년에는 십자군 전쟁사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전투인 하틴 전투가 발생한 해였다. 그러나 그 전에 예루살렘 왕국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전투가 있었으니 바로 크레송 전투였다.


 당시 에루살렘 왕국은 두개의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역대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중 가장 무능한 인물인 기 드 뤼지냥을 중심으로 르노 드 샤티옹과 성전 기사단 같은 강경파 들이었다. 또 다른 한편은 보두앵 4세와 5세의 전 섭정으로 오랜 세월 국왕을 보좌해온 왕국의 동량인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였다. 그리고 레몽 3세는 어차피 상대가 안되는 상황에서는 살라딘과 가능하면 친하게 지내는 게 낮다고 믿는 화친파였다.


 아무튼 당시까지 레몽 3세가 기 드 뤼지냥을 국왕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 사실 이것은 선왕 보두앵 4세의 유지이기도 했다. 비록 젊은 나이에 죽었고 나병이 육신을 괴롭혔지만 기 드 뤼지냥이 왕국을 패망의 길로 몰아가리라는 예상을 미리 했던 것이 아닐까 - 왕국은 둘로 분열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기 드 뤼지냥의 지지 세력인 성전 기사단의 기사 단장 제라르 리포르 (Jerad of Ridefort) 그리고 구호 기사단의 기사 단장 로게르 드 물랑 (Roger de Moulin) 및 시돈의 레지날드, 이벨린의 발리앙 등이 협상을 위해 레몽의 영역인 티베리아스 (Tiberias) 로 파견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살라딘 역시 르노 드 샤티옹의 행위에 대한 응징을 위해서 아들인 알 아흐딜 (
Al-Afdal ibn Salah ad-din) 에게 7000명의 병력을 주어 티베리아스 근처에서 기회를 노리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안 레몽 3세는 가능하면 살라딘과 싸우기 보다는 협상을 하고자 했다. 그래서 레몽 3세는 알 아흐딜이 공격을 하지 않는 등의 몇가지 조건을 달아서 자신의 영지 근처를 그냥 지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한편 이 사실을 잘 몰랐던 제라르 리포르를 비롯한 기사 130명과 수백명의 보병들은 크래송의 샘 근처에서 이들과 마주쳤다. 병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알 아흐딜의 군대는 그들이 즐겨하던 대로 즉시 흩어졌다. 사실 이는 투르크 족이 좋아하는 유인 전술이었다. 주 목적은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되는 십자군을 자극해 기병과 보병을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1차 십자군 시절부터 정말 오랬동안 사용한 이 방법을 성전 기사단장인 제라르 르포르가 몰랐을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정말 알 수 없게도 제라르는 주저하는 자는 비겁자로 몰면서 즉시 기병을 이끌고 이를 추격했다. 그 다음 벌어진 일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결국 보병대와 분리된 기병은 압도적인 적 기병에 포위되어 전멸하고 기병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보병대 역시 각개 격파 당했다. 





(크레송의 샘 근처에서 벌어진 크레송 전투. 하지만 하틴 전투 그림이라는 의견도 있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이 재앙적 전투 끝에 살아남은 것은 이해할 수 없게도 바로 병사들을 사지로 몰아붙인 제라르 리포르 본인과 아주 소수의 기사들 뿐이었다. 사실 제라르 리포르 같은 인물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십자군 입장에서 다행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비극이었다.


 이 크레송 전투의 결과 비난의 대상이 된 - 그가 무슬림 병력을 그냥 통과 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 레몽 3세는 결국 여론에 굴복해서 기 왕과 화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이들이 협력하게 된 것도 살라딘의 공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살라딘은 대군을 모아 결국 예루살렘 왕국을 친히 침공했다. 



35. 하틴 전투 (Battle of Hattin   1187 년 7월 4일)



 1186년 6월 살라딘의 본대가 마침내 예루살렘 왕국을 향해 움직였다. 당시 살라딘의 군대는 약 3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살라딘은 즉시 티베리아스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티베리아스 요새는 한동안 살라딘의 대군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


 한편 레몽 3세와 기 왕을 비롯한 십자군의 주요 세력은 주요 도시 가운데 하나인 아크레에 집결했다. 당시 구호 기사단과 성전 기사단은 물론 유럽에까지 원군을 요청한 덕분에 이들은 근래에는 보기 힘들 정도의 대규모 십자군 병력을 소집할 수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1200명의 기사와 10000 명의 보병이 집결했다고 한다. 여기에다 영국 국왕 헨리 2세가 보내 준 돈으로 현지에서 투코폴레스 같은 많은 용병들 (Turcopoles -기마 궁사들) 고용했을 뿐 아니라 마침 이탈리아 상업 도시들이 지원해준 석궁병 (Crossbowman) 들도 합류했다.


 따라서 기록에 의하면 적어도 1만 5천 이상의 병력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2만에 육박한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그래도 살라딘의 병력이 3만 이상인 것을 감안하면 병력 면에서는 살라딘이 훨씬 우세했다. 십자군 주력은 아크레에서 세포리아 (Sephoria) 로 이동했다.


 여기서 레몽 3세는 지구전을 주장했다. 살라딘의 군대는 여기저기 먼 곳에서 온 병사들로 이루어져있으므로 장기전으로 끌고 갈 수록 병사들을 붙잡아두기가 어려울 것이었다. 따라서 장기전으로 갈 수록 우리가 유리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티베리아스를 포기할 준비도 되어 있어야 한다는게 레몽의 주장이었다.


 사실 티베리아스의 요새에서 도시를 방위하는 것은 레몽 3세의 아내인 에쉬바 (
Eschiva) 였다. 그런 만큼 그런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레몽 3세는 지금 티베리아스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군 본대가 그곳으로 가는 것은 바로 살라딘이 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군대를 이동하다가 적의 매복 공격에 걸리거나 혹은 살라딘의 본대에 포위 공격을 당하면 결국 왕국이 위험해질 것이었다. 레몽은 현재 있는 세포리아 (Sephoria) 는 방어에 유리한 위치이므로 이를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기 왕도 처음에는 이 의견을 옳게 여겼다. 따라서 7월 2일 있었던 회의에서 지구전을 하길 결정했었다. 하지만 그날 밤 성전 기사 단장인 제라르와 르노 드 샤티옹은 레몽을 겁장이라고 비난하고 지금 즉시 적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역시 큰 그릇이 못되는 기 왕은 그들의 설득에 넘어가 군대를 이동시켰다. 레몽은 이 결정에 충격을 받았지만 하는 수 없이 병력을 이끌고 합류했다.


(레몽은 기 왕에게 '팔레스타인 전체가 함락되느니 차라리 티베리아스가 함락되고 나와 내 아내가 모든 재산을 잃는 것이 낮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당신이 가는 길은 망하는 길이다' 라고 경고 했다고 한다)


 레몽은 선봉을 맡았고 기 왕은 본대를 이끌었으며, 기타 기사단과 르노 드 샤티옹은 후위를 맡아 십자군은 티베리아스로 전진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성 유물인 참 십자가 (True Cross) 가 역시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이들과 함께 했다. 그러나 그들은 7월 3일에 약 10 km 를 전진했을 뿐이다. 그리고 역시나 매복하고 있던 무슬림 기병들의 산발적인 공격이 이어졌다. 십자군은 점심때 쯤 투란 (Turan) 이라는 곳에 - 여기에는 우물이 있다 - 에서 잠시 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오후의 무더운 햇볕을 받으며 행군을 지속했다. 당시는 7월이라 본래 건조하고 더운 지역인 이곳의 날씨는 매우 무더웠다. 티베리아스 까지는 14 km 정도 거리로 사실 반나절 행군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그날의 몹씨 더운 날씨로 말미암아 무거운 갑옷을 걸친 기사들은 마치 갑옷이 녹아내리는 듯한 고통을 받았다. 따라서 행군 도중 행렬이 크게 늘어졌고 후위 부대는 분리될 정도로 뒤처졌다. 그들은 8km 도 이동하지 못했다.


 이 상황을 우려스럽게 본 기 왕은 행군을 중단하고 그날은 쉬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레몽은 다시 반대했다. 당장은 쉬는게 좋겠지만 그래도 이 더운 건조 지역에서 식수를 확보 못하는 곳에서 휴식을 하는 것은 자살 행위라는 점을 설명하고 힘들어도 식수를 구할 수 있는 곳까지 행군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레몽으로써는 기왕이 자신과 병사들을 파멸로 이끄는 것을 답답하게 볼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의 군대가 쉬게 된 곳은 티베리아스 근방의 하틴의 뿔 (Horns of Hattin) 이라고 알려진 지점에서 가까웠다. 바로 근방에 티베리아스 성이 있었으므로 사실 목적지 거의 근방인 셈이었다. 한가지 문제는 바로 앞서 이야기 했듯이 이들이 쉬는 곳이 하필이면 식수원에서 약간 떨어진 지점이라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된 살라딘은 즉시 병력을 풀어 투란을 점령하고 퇴로를 막아버렸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7월 4일 아침이 되자 전날 행군에 심한 갈증을 느끼던 십자군들은 티베리아스 근처에 호숫가를 딱 하니 점령하고 있는 살라딘의 군대를 보게 되었다. 




(하틴 전투가 벌어진 하틴의 뿔을 동쪽에서 본 모습. 두개의 낮은 언덕이 뿔처럼 솟아 있다. This image has been (or is hereby) released into the public domain by its author, אלמוג at the Hebrew Wikipedia project. This applies worldwide. )


 사실 십자군이 차지하고 있는 언덕 지형이 싸우기는 더 좋았다. 그러나 문제는 식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살라딘의 지시로 주변에 관목에 불을 지르니 곧 연기와 열기에 의해 이들의 갈증은 더 심해지고 판단력도 흐려졌다.


 이 시점에서 살라딘이 바라는 바는 십자군이 유리한 지형을 버리고 나와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미 퇴로까지 차단당해 사실상 포위 당했으므로 십자군은 큰 선택의 여지가 없기는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어리석은 제라르 리포르와 르노 드 샤티옹은 먼저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사실 그렇게 주장하지 않더라도 갈증에 시달리던 많은 십자군 병사들이 절망적으로 갈릴리 호수로 진격했지만 역시나 기다라고 있던 무슬림의 대군에 의해 하나씩 격파당했을 뿐이었다.


 이 재앙적인 하틴 전투에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수 있던 것은 레몽 3세와 그를 따르던 조슬랭 3세, 시돈의 레지날드 등이었다. 그들은 훗날 비겁하게 왕을 버리고 달아났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긴 했지만 사실 레몽 3세가 살아서 나가는 편이 기 왕이 도망가는 편보다는 더 좋은 결과를 예루살렘 왕국에 가져올 수 있었다. 다만 그들도 예상 못했던 점은 레몽 3세가 곧 죽게 된다는 점이었다. 이로 인해 살라딘은 더 저항 없이 예루살렘 왕국을 접수할 수 있었다.




(히틴 전투 이후에 살라딘과 기왕의 그림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하틴 전투 이후 수많은 십자군들이 포로로 사로잡혔다. 십자군의 주력은 3천명 정도 남고 괴멸되었기 때문에 이제 팔레스타인 정복 및 예루살렘 함락은 시간 문제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실제로 그해 예루살렘은 살라딘에 의해 함락된다. 


 이제 이 하틴 전투를 유발한 인물에 대한 응징이 있을 차례였다. 살라딘은 전투가 끝나고 나서 막사를 설치하고 이곳에서 포로들을 심판했다. 일단 기 드 뤼지냥과 르노 드 샤티옹이 살라딘의 천막으로 끌려왔다. 이제 곧 자신의 목숨이 끝나는 줄로만 알고 있던 기 왕에게 살라딘은 자신이 마시려고 놔 두었던 시원한 물을 건냈다. 곧 갈증으로 고통스러워하던 기 왕은 살라딘이 자신의 목숨을 살려줄 것이라는 점을 알았다. (적에게 마실것과 먹을 것을 주는 행위는 살려주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기 왕이 물을 르노 드 샤티옹에게 건너자 살라딘은 분노한 얼굴로 그 물은 자신이 아닌 기 왕이 주는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르노 드 샤티옹이 지금까지 해온 죄악을 열거한 후 분노의 일격을 가해 결국 그의 죄 많은 인생의 종지부를 찍게 했다. 




(다마스쿠스에 있는 살라딘 동상 밑에는 이렇게 르노 드 샤티옹이 포로의 신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살아서 저지른 죄악으로 죽어서까지 조롱거리가 된 대표적 사례이다.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르노 드 샤티옹의 목을 베는 살라딘   Guillaume de Tyr, Historia et continuation (BNF Richelieu Manuscrits Français 68, folio 399) (William of Tyre, Historia and continuation (BNF Richelieu French manuscripts 68, folio 399))] This image from the National Library of France (BNF) is a reproduction by scanning of a bidimensional work that is now in the public domain )


 솔직히 르노 드 샤티옹은 알레포의 감옥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거기서 죽었으면 동정이라도 받았을 것이다. 결국 그의 인생 내내 온갖 악행으로 점철되었을 뿐 아니라 결국 그의 행동으로 인해 무슬림을 단결시키고 종국에는 예루살렘 왕국을 패망으로 몰고 갔으니 너무나 당연한 최후였다. 



 한편 이를 본 기왕은 다음은 자신의 차례로 생각하고 공포에 떨었다. 그러는 그를 살라딘은 안심시켰다. 실제로 살라딘은 기왕을 해치지 않고 다만 포로로 잡아갔다. 대부분의 십자군 포로들도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아 가뒀고 이 중 일부는 몸값을 받고 풀어 주었다. 그러나 평소 무슬림들을 약탈하는 것을 주요 임무 중 하나로 여긴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에 대해서 만큼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참수되었다. 


 아마 이 전투가 살라딘이 가장 많은 적들을 한번에 참수한 사례일 것이다. 이 전투이후 살라딘은 자신의 관용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되는데 사실 결과적으로 이로 인해 관용의 군주라는 평판도 얻었지만 대신 십자군에게 매우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아무튼 이제 적의 주력을 분쇄한 만큼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 정복의 과제만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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