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1차 십자군과 2차 십자군 사이의 예루살렘 왕국의 약 반세기간의 역사를 기술할 예정이다. 이 시기가 사실 예루살렘 왕국의 전성기라 부를 수 있으며, 나름대로 십자군 국가들이 200년 가까이 명맥을 유지하게 되는 기반을 마련한 시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 왕국은 1099년 세워진 이후 그런데로 번영을 누리다 1187 하틴 전투에서 살라딘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한 이후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할 수 있었다.
1. 1101년 이후의 정세
1101년의 마이너 십자군의 재앙적인 패배 이후에도 보두앵 1세와 예루살렘왕국은 건재했다. 사실 이 시기 예루살렘 왕국으로 알려진 십자군 국가는 (또는 해외의 영토라는 뜻의 우트르메르 (Outremer, over sea 라는 뜻의 프랑스어) 가장 전성기를 누리는 시기였다. 무슬림들이 분열된 이 시기 십자군 국가들은 좋은 시절을 외치며 주변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1100년 크리스마스에 왕위에 오른 보두앵 1세 (Baldwin I of Jerusalem 재위 1100 - 1118 ) 는 훗날 예루살렘 왕국의 3대 국왕이 되는 자신의 조카 보두앵 2세 (Baldwin II of Jerusalem, Baldwin II of Edessa, 또는 보두앵 뒤 부르 ) 에게 에데사 백작의 지위를 물려주고 예루살렘을 장악하므로써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에 모두 세력을 확장하는데 성공했다.
예루살렘과 북쪽에는 새롭게 생긴 갈릴리 공작령 (Principality of Galilee ) 이 설치되었는데, 여기에는 야심만만하고 교활한 노르만 전사인 보에몽 1세의 조카 탕크레드가 공작으로 취임했다. 항상 숙부의 그늘에 가려 아무런 영지도 없었던 그가 이제 공작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반면 모든 것을 가진 듯 했던 숙부 보에몽은 왕위 경쟁에서 보두앵 1세에게 밀리고 현재는 포로 신세가 되었다.
한편 아래 지도에 보듯이 십자군 국가의 영토사이에는 다마스쿠스 두카크 같은 무슬림 영주들이 건재했고, 트리폴리 역시 십자군의 손에 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특히 트리폴리는 그 부유함 때문에 일찍부터 십자군의 중요한 목표가 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후에는 이 무슬림 영주들이 중요한 공격 목표로 생각되었다.
(사해 (Dead Sea) 에서 갈릴리 해 (Sea of Galilee) 까지 지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 (Judea) 지역과 북쪽 사마리아 (Samaria) 지역, 그리고 더 북쪽의 갈릴리 (Galilee) 지역이 표시되어 있다. 북쪽에는 다마스쿠스가 존재하며 지도 보다 더 북쪽에 트리폴리 백작령이 있다. CCL 에 따라 동일 조건하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Nichalp.)
(예루살렘 왕국의 최고 전성기인 1135년의 지도. 1101년 당시에는 트리폴리 백작령은 아직 무슬림들의 손에 있었다. 갈릴리 공작령은 예루살렘과 트리폴리 사이에 있다.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MapMaster ) )
하지만 1101 년에는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밀어 붙일 시기는 아나었다. 1099 - 1101년 사이에 갈릴리 지역을 비롯한 예루살렘 주변부를 장악한 십자군은 부족한 병력을 보충할 예정으로 새로운 십자군을 모집했으나 이중 아주 일부만이 실제로 예루살렘 왕국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트리폴리에 대한 공격은 몇년이 흐른 뒤 레몽이 다시 도착하고서야 이루어졌다.
2. 보에몽 세일즈
일단 1101년에 예루살렘 왕국에서 주목할 일은 마이너 십자군의 패배를 제외한다면 탕크레드가 갈릴리를 넘어 안티오크 공작령까지 넘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물론 앞서 설명하였듯이 숙부인 안티오크 공작 보에몽 1세가 무슬림 국가인 다니슈멘드 왕국에 포로로 잡힌 덕분이었다. 여기에 다행히 (?) 1101년 십자군이 패배한 덕분에 숙부가 풀려날 가능성도 적어졌고, 비잔티움 제국이 본래 얼마전까지 자신의 영토였던 안티오크를 반환받기 위해 내려올 가능성도 사라졌다.
한편 포로로 잡힌 보에몽은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일단 무슬림들은 막대한 몸값을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이 포로를 죽이지 않고 억류했다. 곧 주변국에서 많은 원한을 산 이 노르만 전사의 몸값을 두고 한판의 경매가 벌어졌다.
우선 누구보다도 보에몽에 감정이 많은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다니슈멘드가 보에몽을 비잔티움에 넘긴다면 무려 26만 디나르 (Dinar) 의 거액을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역시 보에몽에 감정이 많은 롬 술탄국의 클르츠 아르슬란은 부유한 비잔티움 황제와는 달리 돈은 반 (13만 디나르) 밖에 줄 수 없지만 자신에게 보에몽을 팔지 않으면 대신 다니슈멘드 왕국을 공격하겠다는 옵션을 제안 했다.
이 경매에 마지막으로 참가한 것은 보에몽 자신이었다. 보에몽은 13만 디나르를 주고 앞으로 안티오크가 다니슈멘드의 동맹이 된다는 옵션을 제공해서 풀려나기를 바랬다.
보에몽을 억류하고 있던 다니슈멘드의 가지 구무스타킨 (Ghazi Gumushtakin )은 곧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일시불로 크게 받고 비잔티움에 보에몽을 팔까? 하지만 그러면 클르츠 아르슬란과 전쟁을 해야 했다. 그러면 돈은 적게 받지만 평화를 위해 클르츠 아르슬란에게 보에몽을 팔까?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주변의 위협이 없을 때 그들은 항상 전쟁을 하지 않았던가. 이제와 전쟁을 하더라도 별로 새로울 건 없었다. 아니면 차라리 안티오크와 동맹을 맺고 보에몽 자신에게 보에몽을 팔까 ? 그러나 보에몽의 동맹 제안은 구미가 당기긴 해도 보에몽 자신이 워낙 믿을 수 없는 인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좀 내키지 않기도 했다.
이런 행복한 고민을 하면서 가지 구무스타킨은 보에몽 세일즈를 진행하고 있었다. 한편 감옥안의 보에몽은 죽을 맛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오래 억류될 수록 자신의 영토에 나타난 조카 탕크레드가 안티오크를 장악할 가능성이 높아질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을 쏙 빼닮은 조카를 생각하면 보에몽은 눈앞이 캄캄해졌을 것이다. 탕크레드가 안티오크를 장악하는 날 몸값 지불을 거부할 것이고 보에몽 자신은 그에게 원한을 가진 이들에게 팔리게 될 것이다.
(보에몽과 탕크레드. Gustave Doré 작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탕크레드의 초상화.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한편 탕크레드는 안티오크에 머물면서 보에몽의 석방 협상을 방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직 점령하지 못한 주변 지역을 침략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라타키아나 아르메니안 실리시아 처럼 현지 기독교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탕크레드의 행동은 주위의 비난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당시의 보에몽 에게는 천만 다행하게도 탕크레드는 주변의 십자군 세력은 물론 안티오크의 가신들로부터 별로 신망을 얻지 못했다. 무엇보다 기특한 일은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보에몽 1세의 부하들이 그들의 주군을 배반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3년을 참고 기다린 끝에 보에몽은 마침내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보에몽의 이야기는 앞으로 다시 거론되겠지만 그다지 해피 엔딩은 아니었다.
3. 레몽 4세의 상황
한편 툴루즈의 레몽 역시 1101년는 정말 험난한 한해였다. 치명적인 메르시반 전투의 패배로 그의 입지는 더 크게 좁아지지 않을 수 없었다. 1102년에 레몽 4세는 입지가 크게 좁아진 콘스탄티노플에서 안티오크를 향해 떠났다. 십자군 국가에서 새로운 영토를 반드시 얻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면서 말이다. 아마 이렇게 고생만 하고 아무런 성과 없이는 떠날 수 없다는 오기가 작동했을지도 모른다.
(아데마르 주교(왼쪽의 주홍색 법의를 입은 사람)와 레몽 4세 (가운데 흰옷을 입은 사람) 의 모습을 그린 상상화. 아마 프랑스에서 출정 당시의 모습인듯 하다. 이 때만 해도 좋았는데...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그러나 불행히도 그가 안티오크의 영향력 아래 있던 타르수스 항에 도착했을 때 연락을 받은 탕크레드에 의해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아마 탕크레드는 레몽이 자신을 적대시 하는 비잔티움 - 비잔티움 제국의 자신의 영토라 주장하는 안티오크를 탕크레드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 의 앞잡이로 여겼을 가능성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레몽이 안티오크 주변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당시로써는 고령인 60대 노인 앞에서 자식뻘인 탕크레드는 오만 불손한 태도로 메르시반 전투등 레몽 4세의 패배를 비난했다. 그리고 앞으로 안티오크와 아크레 (Acre) 항 사이에 국가를 건설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고서야 레몽 4세를 풀어주었다. 한때 십자군 전체의 지휘관자리를 놓고 보에몽과 다투었고,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자리를 노리기도 했던 레몽 4세로써는 정말 굴욕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레몽 4세로써는 이런 굴욕을 받고도 빈손으로 귀국하긴 어려웠다. 결국 레몽은 자신이 이전에 노렸던 먹이를 다시 한번 노리기로 결심한다. 바로 부유한 무슬림 도시인 트리폴리를 공략하는 것이다. 과거 레몽은 이 부유한 도시의 부가 탐나서 과욕을 부리는 바람에 아르카 공방전에서 실패해서 결국 대세를 그르친 일이 있다. 하지만 기왕 이렇게 일이 진행된 상태이니 레몽 4세는 트리폴리 만이라도 손에 넣어야 겠다고 결심했다.
1102년, 레몽 4세는 이전 십자군의 베테랑들을 다시 모았다. 많지 않지만 경험은 풍부한 십자군 전사들이 레몽 주변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표는 예루살렘 왕국 본토와 안티오크/에데사 사이에 위치한 무슬림의 부유한 도시인 트리폴리 (Tripoli) 였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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