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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살라딘 6





 12. 다미에타 전투 


 1169년에 숙부인 아사드 앗 딘 시르쿠가 사망한 것은 살라딘의 인생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이집트의 파티마 조 칼리프인 알 아디드는 자신을 이단으로 생각하는 수니파 무슬림들의 손에 이집트가 정복된 점을 내심 불안해 했다.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이 불운한 파티마 조 마지막 칼리프는 시르쿠의 휘하 에미르 (Emir : 장군이나 사령관이란 뜻으로 태수라는 의미로도 번역된다. 토후라고 번역하는 수도 있다) 중 가장 야심이 없어보이고 가장 영향력이 없으면서 가장 젊은 인물을 선택해서 그를 신임 와지르 (Vizier : 파티마 조의 총리에 가까우나 당시에는 사실상의 실권자) 로 임명했는데 이는 물론 살라딘이다.


 시르쿠 휘하의 다른 에미르들은 이 결정에 대해서 매우 떨떠름 하게 생각했지만 사실 살라딘이 시르쿠를 계승할 만한 명분은 칼리프의 선택 외에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시르쿠의 조카가 아닌가. 여기에 누레딘은 일단 이 젊은이의 미래를 알 지 못했기 때문에 일단 이를 승인하고 살라딘을 새로운 와지르로 인정했다. 그러나 시르쿠 휘하의 에미르 중 가운데 몇명은 자신이 왜 새파랗게 젊은 신임 와지르의 휘하에 있어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했으므로 결국 시리아로 다시 귀국했다.


 당시 세간의 평가는 이 새로운 인물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진 않았지만, 살라딘은 그의 성격답게 매우 조심스럽게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사실 그 때까지 별다른 권력 기반이 없던 살라딘이 와지르로 임명돤 것 자체는 이집트의 최고 권력자로 올라섰다고 말하기는 아직 일렀다. 이제부터 실질적인 권력을 잡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크게 두가지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것은 이집트가 시아파 파티마 왕조가 지배하는 지역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시리아에서 온 수니파 정복자들은 이들의 반발에 직면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살라딘이 이집트의 권력을 장악하는데 있어 시
아파 및 칼리프의 반발을 어떻게 처리해 나가느냐가 중요한 과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살라딘의 초상화 : 얼마나 실제 모습에 근접했는지는 알 수 없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두번째 문제는 바로 누레딘이었다. 누레딘은 일단 살라딘을 이집트의 와지르로 승인하기는 했지만 그가 시리아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은 상당히 신경쓰이는 점이었다. 즉 살라딘이 언제든지 누레딘으로 부터 독립하지 않을까하는 의심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의심은 결국 누레딘이 죽을 때 까지 따라 다녔는데 결국 누레딘이 죽고 난 이후에야 살라딘은 누레딘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아무튼 누레딘은 인생의 남은 기간 동안 살라딘이 자신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하게 계속 해서 견제를 했다. 사실 상위 군주로써 누레딘의 이와 같은 행동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다마스쿠스에서 이집트로 보내는 공문서에는 '사령관 에미르 살라딘 및 그외 다른 에미르' 들 앞으로 공문이 내려왔다. 이는 살라딘이 누레딘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교체할 수 있는 에미르 중 하나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진짜 살라딘이 독립할 것이 우려되어 실제로 교체는 하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앞으로 차차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1169년에는 살라딘에게 이 것 말고도 몇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는 사실 앞서 두 문제보다 사소한 것이긴 하지만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앞으로 살라딘에게는 미래가 없는 문제이기도 했다. 그것은 허둥지둥 팔레스타인으로 다시 쫓겨간 아말릭 1세가 다시 마누엘 1세에게 그들이 진정 우려했던 상황 - 즉 이집트가 누레딘의 손에 넘어간 일 - 이 벌어졌다는 점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들은 대규모 파병을 결정했다. 또 다른 문제는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이집트 내부에서 수니파 정복자에 대한 반란이 일어난 것이었다.


 우선 십자군의 이집트 침공을 이야기 해보자. 그때까지 마누엘 1세는 이집트 침공에 대규모 원조를 한 적은 없었으나 상황의 심각성 - 즉 우트르메르에 십자군 국가들까지 위태로워 진점 - 을 깨닫고는 방침을 바꾸게 된다. 비록 이 십자군 국가들이 마누엘 1세의 봉신들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그를 상위 군주로 모시고 있었고, 또 만약에 이들 완충 국가들이 사라지면 그 다음에는 누레딘이 비잔티움 제국 본토를 노리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그런 야심가와 제국 사이에 십자군 국가 같은 완충 지역이 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것은 누가 봐도 분명했다.


 결국 비잔티움 제국군과 십자군은 새롭게 연합해서 이집트를 향한 최후의 공격을 준비했다. 처음 계획 자체는 성공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아직 살라딘은 이집트의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고, 대다수 이집트 인들도 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기에 누레딘도 살라딘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십자군의 유리한 히든 카드는 바로 비잔티움 함대였다.


 지금까지 십자군의 이집트 침공은 거의 예외 없이 빌베이스를 첫번째 목표로 행해졌다. 따라서 살라딘이 우선적으로 방어할 거점역시 빌베이스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비잔티움 함대를 활용한 바닷길이 열려있었다. 십자군과 비잔티움 연합군은 바다를 통해 나일강 하류로 직접 쳐들어갈 계획이었다. 상대가 예측하기 어려운 곳으로 기습을 가하는 만큼 처음에는 상당히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첫 공격 목표는 이집트 북부의 주요 항구인 다미에타였다. (1169년 11월)


 


(1163 - 1169 사이의 이집트 침공, 1169년에 비잔티움 제국의 함대가 십자군과 힘을 합쳐 다미에타 (Damietta) 항을 공격한다   This file is licensed under the Creative CommonsAttribution ShareAlike 3.0 License. In short: you are free to share and make derivative works of the file under the conditions that you appropriately attribute it, and that you distribute it only under a license identical to this one. Official license  Author :  abattenb )


 하지만 다미에타는 십자군이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튼튼하게 방어되고 있는 도시였다. 십자군과 비잔티움 군이 원했던 기습의 효과는 기대를 배신했다. 결국 연합군은 첫 목표인 다미에타를 함락시키지 못한채 1169년의 후반기를 보내고 있었다. 여기에 적의 주공이 빌베이스가 아니라 다미에타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아챈 살라딘이 반격을 개시하자 오히려 궁지에 몰린 건 연합군 쪽이었다. 


 상륙한 십자군 군대는 다미에타 근처의 좁은 교두보에서 식량 부족과 폭우, 질병등의 재난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바다위의 비잔티움 함대역시 다미에타를 함락시키지도 못하고 시간만 보네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이집트에서 겪은 최악의 재난은 적의 공격이 아니라 나일강의 폭우로 범람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십자군은 퇴각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신에게 감사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이 상륙 작전에 대미를 장식한 것은 귀한 중이던 함대가 폭풍우를 만나 난파되어 비잔티움 군의 시체가 해안가를 뒤덮은 일이었다. 


 결국 이 다미에타 항 상륙 작전은 1163 - 1169년 사이에 있었던 일련의 십자군의 이집트 침공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실패작이었다. 이 작전의 실패는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연합군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낸 살라딘은 그 불안한 지위를 이제는 반석위에 올렸던 것이다. 십자군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방어해 내므로써 살라딘의 능력에 대한 의혹도 해소할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이집트를 적의 침공으로부터 지켜낼 능력을 지닌 지배자라는 인식을 줄 수 있었다. 


 반면에 비잔티움 제국과 십자군들은 심각한 혼란에 빠졌다. 이 작전에 실패의 책임에 대해서 상호간의 불신과 비방이 다시 되살아났다. 그러나 한층 배가된 누레딘의 위협때문에 마누엘 1세나 아말릭 1세나 서로 대립했다가는 스스로 자멸하는 길임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결국 1170년에 비잔티움 제국과 십자군 국가들은 상호간의 서로 화해했다. 그해 아말릭 1세는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해 마누엘 1세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실이 새롭게 등장하는 살라딘의 위협을 감소시키지는 못할 것이었다. 



 13. 이집트의 통치자 


 살라딘은 1169년 말의 다마티에 항 상륙 작전을 저지하므로써 이집트의 통치자로써의 첫번째 관문은 성공적으로 통과했다. 그러나 이것은 첫번째 시험이었을 뿐 아직 합격 여부는 결정된 건 아니었다. 살라딘이 권력을 장악하려면 일단 자기 편이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 정치 신인인 살라딘에게는 요긴하게 쓸만한 측근이 별로 없었다. 


 이 경우 쉽게 끌어들일 수 있는 건 가족들이다. 일종의 족벌 체제 구축이라고 할 지도 모르지만 당시 시대에는 드문 일도 아니거니와 살라딘의 가족 가운데는 특히 살라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참모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다소 기회주의 적이긴 해도 경험많고 눈치도 빠른 살라딘의 아버지 아이유브 였다. 


 사실 살라딘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아이유브는 이를 거절한다. 아이유브는 아들에게 "너에게 자격이 없다면 신은 이 위대한 자리에 너를 앉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라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아이유브는 이집트의 와지르 자리를 거절한 대신에 아들에게 정말 필요한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나누어 주었다. 아이유브는 오랜 행정 경험을 살려 살라딘의 재무상 자리를 맡았다. 


 살라딘은 요직에 자기 사람을 앉히는 것 이외에도 이집트의 백성들의 신임을 얻기 위해 무진장 노력했다. 사실 이집트 인들에게 자신들이 외세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살라딘의 통치를 받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시키게 하기 위해서는 매우 각별한 노력이 필요했다. 곧 이집트 각지에서 새로운 와지르에게 청원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백성들이 몰려들었는데 살라딘은 그들의 요구를 가능한 어떻게든 들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렇게 살라딘이 힘이 이집트 내에서 점차 커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할 이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특히 칼리프의 궁정이 그랬다. 칼리프 알 아디드 외에도 살라딘의 힘이 커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는데, 그런 이들 가운데 흑인 내시장인 네자흐가 - 단독 소행인지 칼리프가 배후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 음모를 꾸몄다. 


 네자흐는 십자군과 내통하여 일단 궁정 쿠테타를 일으키면 십자군이 다시 이집트를 침공한다는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었다. (사실 이 사건은 다미에타 전투 전인 1169년 7월이다)  이로 인해 칼리프에 충성스러운 수단의 흑인 병사들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살라딘은 이를 강력히 진압하고 흑인 병사들을 상이집트로 추방했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그곳에서도 다시 반란을 일으켜 살라딘의 형제들이 이를 진압하기 위해 수차례 원정을 떠나야 했다. 


 아무튼 1169 년에서 1170년 사이 살라딘은 이집트의 안쪽과 바깥쪽에서 발생한 도전에 능동적으로 대응했고 결과적으로 이집트의 와지르 자리를 성공적으로 획득할 수 있었다. 사실 그가 권력의 자리에 오른건 우연이었다. 그러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사람의 힘이었다. 기회라는 운명의 변덕은 아무나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회는 결코 누구나 다 활용할 수 있는게 아니다. 오직 능력 있는 사람만이 우연을 기회로 만들 수 있다는 교훈의 사례가 필요하다면 살라딘이 이야기가 그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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