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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예루살렘 왕국 5 (1101 - 1145)



 11. 탕크레드의 최후


 앞서 포스트에서 1109년 트리폴리 백작령이 설립될 때 까지를 설명했다. 1109년에는 대략 예루살렘 왕국, 안티오크 공작령, 트리폴리 백작령, 에데사 백작령의 4대 십자군 국가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곧 붕괴될 것 같던 십자군 국가들은 무슬림들의 내분이란 기회를 통해 어느 정도 팔레스타인 및 지중해 서안지대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1109년에 이르러 대략 이런 지도가 완성되었다. 다만 예루살렘 왕국은 정복 전쟁을 지속하던 중이었다.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MapMaster ) )


 이제 안티오크 공작령의 탕크레드에 대해서 설명해야할 순간이 왔다. 그의 최후가 가까워 졌기 때문이다. 탕크레드는 1072년 생으로 당시 아직 마흔도 되지 않은 비교적 젊은 세대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사망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109년 이후 한동안 탕크레드는 인생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삼촌은 보에몽은 본래 성지를 지원하기 위한 십자군을 조직한 후 이 군대를 이끌고 비잔티움 제국과 전쟁을 벌이다 패배하여 사실상 안티오크를 비잔티움 제국에 반환한다는 데볼 조약을 맺었다. 이는 보에몽의 경력에 치명적인 오점이었다. 성지를 지킨다는 명목하에 군대를 조직해서 같은 기독교 국가인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한데다 실패해서 포로로 잡히기 까지 했기 때문이다. 본래 영지인 타란토로 돌아간 보에몽은 사실상 폐인이나 다름 없었다.


 사정이 이러니 삼촌의 영지를 호시탐탐 노려온 탕크레드에게는 하늘이 내린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즉시 그는 삼촌 보에몽과 프랑스 공주 콘스탄스 사이에서 태어난 보에몽 2세 (Bohemond II (1108 – 1131)) 를 안티오크의 허수아비 지배자로 내세운 후 자신이 섭정이 자리에 앉아 실권을 장악했다. 물론 탕크레드는 데볼 협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안티오크 공작령을 자신의 영지로 삼고자 하는 야심만이 꿈틀거릴 뿐이었다.


 이는 당연히 안티오크의 본래 주인인 비잔티움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를 격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불행히 1101년 십자군의 패배로 역시나 아나톨리아 중부 지대가 룸 술탄국의 지배하에 있어 안티오크까지 힘이 닿지 않는게 문제였다. 그래서 심지어 알렉시우스 1세는 바그다드와 협정을 맺어 탕크레드를 공격하려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는 구상만으로 끝났고, 사실상 안티오크는 탕크레드의 지배하에 있었다.


 비록 1108년에 보두앵 2세와 조슬랭이 풀려나는 바람에 에데사 백작령까지 집어 먹으려는 그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아무튼 안티오크 공작령은 확보한 셈이었다. 여기에 탕크레드는 1110년 트리폴리 백작령의 주요 성체인 크락 데 슈발리에 (Krak des Chevaliers ) 를 장악해서 트리폴리 백작령에 대한 야망까지 드러냈다.



(지금의 레바논 국경 시리아 영토에 있는 성채인 크락 데 슈발리에. 650 미터 정도 되는 산 정상에 있으며 트리폴리에 동쪽에 있는 성채이다.  CCL 에 따라 동일 조건하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Citypeek)


 이를 테면 탕크레드는 안티오크 공작령 뿐 아니라 에데사 백작령, 그리고 나중에는 트리폴리 백작령까지 야망을 품었던 것 같다. 사실상 십자군 국가의 북부 지대를 모두 포함하는 자신만의 왕국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과도한 야망과 탕크레드 본인이 지닌 특유의 탐욕과 음험함이 결국 그에 대한 반발을 불러왔다. 특히 에데사 백작인 보두앵 2세와의 관계는 거의 치유가 어려울 정도로 벌어진 상태였다. 그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이나 영향력 아래 있는 지역들도 그에게 반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탕크레드의 야망은 결국 1112년에 끝장이 나고 말았다. 왜냐하면 어이 없게도 그가 장티푸스로 추정되는 질환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의학 수준이 낮았던 시절 장티푸스는 아주 치명적인 질환이었다. 그러나 그가 지도적인 위치에서 보인 행동 때문에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십자군 국가들 사이의 내분을 가라앉히는데 일조하기 까지 했으니 씁쓸한 최후였다. 


 비록 당시 십자군 군주들이 대개 대의 명분 보다는 개인적인 이익을 추종하는 경향이 있기는 했지만 탕크레드 처럼 남의 영토에 대한 끊임없는 욕망으로 그의 삼촌과 주변 영주들과의 긴장 관계를 초래한 인물은 없었기 때문에 사실 그의 죽음은 본인에겐 비극이지만 십자군 국가 전체로는 이익이 되는 일이었다.

 탕크레드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내와의 사이에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사후에는 보에몽 가문의 친척들이 그를 계승하게 되었다. 일단 보에몽 자신도 1111년 사망했기 때문에, 타란토 공작령 및 안티오크 공작령의 지위는 그의 아들인 보에몽 2세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그러나 보에몽 2세는 당시 3살로 누군가 섭정이 필요했다.


 1112년까지는 사촌인 탕크레드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의 사후에는 역시 탕크레드의 사촌인 - 보에몽의 아버지 로베르 기스카르를 비롯해서 그의 가문은 형제가 무척이나 많았다 - 살레르노의 로게르 (Roger of Salerno 1112 - 1119년까지 안티오크 공작령의 섭정 ) 가 새로운 섭정이 되었다.


 사실 말이 섭정이지 로게르는 보에몽 2세가 나중에 안티오크에 도착하면 그 권리를 양도한다고 했기 때문에 보에몽 2세의 나이를 감안하면 사실상 그가 안티오크의 새로운 지배자였다. 솔직히 보에몽 2세는 당시에 이탈리아의 아풀리아에 살고 있는 어린아이일 뿐이었기 때문에 실제적 지배자가 바뀌든 아니든 안티오크에는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아무튼 새로운 섭정 로게르는 선대의 섭정 탕크레드의 정책을 계승하여 알레포를 비롯한 무슬림 세력과 끝임없는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결국 종국에는 이 전투에서 본인도 사망했으므로 보에몽 2세를 위해 길을 열어준 셈이 되었다.




 12. 노르웨이 십자군 (1107 - 1113)


 한편 남쪽의 보두앵 1세 또한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이는 아직까지 자신에게 정복되지 않은 팔레스타인의 독립 세력을 정복하기 위해서 였다. 이 과정에서 보두앵 1세는 간헐적으로 도착하는 유럽의 십자군 지원자들의 도움과 제노바 같은 이탈리아의 상업 도시들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1110년에는 그에게 정말 뜻밖의 지원군이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저 멀리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나타난 노르웨이 십자군이었다. 이 십자군을 이끌고 온 전사는 노르웨이의 왕인 시구르드 1세 (Sigurd I Magnusson 재위 1103 - 1130) 였다. 사실 그들은 1107년에 출발했으나 중간에 많은 모험을 거치고 3년이 흐른 후에야 팔레스타인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었다. 아마도 시구르드 1세가 십자군 원정에 처음 참가하는 유럽의 국왕이었을 것이다.


(시구르드 1세와 보두앵 1세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그러나 3년이란 긴 시간이 걸린 이유는 단순히 멀어서만이 아니었다. 모험을 좋아하는 바이킹 답게 그들은 중간 중간 기착지마다 한동안 머물면서 천천히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약 60척의 갤리선에 5천명 정도의 병력을 태우고 나타났다고 한다.


 그들이 처음 들린 경유지는 바로 영국이었다. 과거 십자군 전사였던 형 로버트 2세를 유폐시키고 왕위에 오른 영국 국왕 헨리 1세가 당시 영국 국왕이었다. 여기서 바이킹들은 그해 겨울을 보냈다고 한다.

 이듭해인 1108년 날씨가 풀리자 이들은 서쪽을 향해 항해했다. 역시나 천천히 이동해서 그해 겨울에 이베리아 반도에 도달한 노르웨이 십자군은 다시 여기서 월동준비를 했다. 그들은 해당 지역 영주의 허락을 얻어 그곳에서 월동했지만 겨울에 식량이 부족해지자 위기가 닥쳤다. 지역 영주가 물자를 팔기를 거부했으므로 시구르드 1세는 영주의 성을 파괴하고 물자를 약탈했다.

 이 노르웨이 십자군의 활약으로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서 2개 이상의 마을이 사라지고 많은 지역에서 희생자들이 속출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주민들만을 약탈하고 살해한 것은 아니었다. 노르웨이 십자군들은 해적들을 만나면 역시 용서가 없었기 때문에 만나는 해적들 마다 모두 공격해서 무려 8척의 배를 빼앗았다고 한다. 아마 당시 이 당당한 노르웨이 함대는 주변 국가들은 물론 해적들에게도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노르웨이 십자군의 경로 : 빨간색 라인을 통해 성지까지 간 이후 녹색 라인을 통해 귀국했다.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Gabagool / Jarle Grøhn  )


 노르웨이 십자군 함대는 1109년에는 지중해 방향으로 경로를 잡았다. 그들은 항해 중간에 동포들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시실리에 이미 기틀을 잡은 노르만족들과 조우하게 된 것이다. 당시 시실리는 로베르 기스카르의 동생인 로게르 1세가 죽고 그 아들인 로게르 2세가 지배하고 있었다. 비록 로게르 2세가 당시 12-13세 정도이긴 했지만 이들은 오랫만에 고국에서 나타난 바이킹 동포들을 환대했다고 한다.


 그들은 키프로스등 여러 섬을 거친 끝에 마침내 1110년 팔레스타인에 도달했다. 그동안 만성적인 병력 부족에 시달리던 보두앵 1세는 이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해안가에서 조우한 양국 정상은 우호의 뜻으로 요르단 강까지 말을 타고 달렸다고 한다.


 시구르드 1세가 이끌고 온 강력한 5천명의 바이킹 전사들을 본 보두앵 1세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보두앵 1세는 현재는 레바논 영토인 해안 도시인 시돈을 공략하는데 노르웨이 십자군의 도움을 받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그들을 도우기 위해 또다른 이탈리아 도시 국가 베네치아의 군대까지 등장한 상태이었으므로 더 이상 미룰 이유도 없었다.


 1110년 예루살렘 왕국, 노르웨이 십자군, 베네치아 군의 협공을 받은 시돈은 결국 예루살렘 왕국의 손에 함락되었다. 그러나 보두앵 1세에게는 아쉽게도 이 노르웨이 십자군은 3년이나 걸려서 온 것 치곤 신속하게 귀국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역시 모험을 좋아하는 이들 답게 평범한 루트로 귀국하는 것은 거부했다는 것이다. 노르웨이 십자군은 바로 콘스탄티노플로 향해서 알렉시우스 1세의 환대를 받았다. 여기서 노르웨이 십자군은 3년 동안 타고온 자신들의 배를 모두 비잔티움 제국에 팔고 대신 말을 사서 육로로 귀환하기로 결정한다. 또 일부 노르만 족들은 용병을 항상 모집하는 비잔티움 제국에 남아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기로 결정했다. 정말 모험을 좋아하는 민족다운 결정이었다.


 결국 시구르드 1세는 3년에 걸친 육로를 통한 여행을 통해 불가리아, 우크라이나, 헝가리, 독일, 덴마크등을 거쳐 유럽 대륙을 남북으로 통과했다. 그런 후에 노르웨이로 귀국했으니 이들의 행동은 정말 지금 기준으로 봐도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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