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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예루살렘 왕국 8 (1101 - 1145)



 
 18. 보두앵 2세 즉위 직후의 상황


 여기서 잠시 보두앵 2세의 즉위 전후의 예루살렘 왕국의 상황과 주변 무슬림 국가들의 상황을 간단이 설명하고 넘어가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예루살렘 왕국과 그 주요 십자군 국가들의 상황을 먼저 알아보자.


 사실 예루살렘 왕국이란 국가는 주변의 적대적인 무슬림 - 물론 먼저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십자군 국가들 자신들이지만 - 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자신들끼리도 분열을 거듭하는 불안정한 왕국이었다. 그러나 일단 십자군 1세대들이 대부분 세상을 등지게 되므로써 이러한 갈등 국면이 다소 완화될 조짐이 보였다.


 우선 안티오크의 보에몽 1세와 탕크레드는 사망하므로써 이제 남쪽의 예루살렘 왕국 본토 및 에데사 백작령과 대립할 인물이 사라짐 셈이었다. 1112년 탕크레드의 사망 이후 아직 어린아이인 보에몽 2세의 섭정으로 등장한 살레르노의 로게르 (Roger of Salerno)는 일단 안티오크에서 선대의 정책을 계승하여 대 무슬림 전쟁을 수행했다. 


 옆에 있는 에데사 백작령에서는 보두앵 2세가 선대 국왕 보두앵 1세의 정책을 계승하여 자신의 친척뻘인 조슬랭 1세 (Joscelin I, Prince of Galilee, Lord of Turbessel, Count of Edessa ) 에게 백작의 지위를 물려주었다. 따라서 에데사 백작령의 방위는 신임 에데사 백작 조슬랭 1세가 맡게되었다.



 한편 주요 십자군 국가 중 하나인 트리폴리 백작령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우연의 일치로 1112년 사실상 초대 트리폴리 백작이라고 할 수 있는 레몽 4세의 사생아인 베르트랑이 탕크레드와 같은 해에 사망한 것이다. 툴루즈는 그의 동생 알폰스 1세에게 계승되었으며, 트리폴리 백작령은 베르트랑의 아들이자 레몽 4세의 손자인 퐁스 (Pons of Tripoli  1098 – 1137) 에게 계승되었다.


 신임 백작인 퐁스는 당시 나이로 만 14세 정도에 불과했으나 일단 신생 트리폴리 백작령을 안정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여기에는 정략 결혼이 위력을 발휘했는데, 그의 결혼 상대는 놀랍게도 탕크레드의 미망인인 프랑스의 세실 공주 (Cecile of France) 였다. 그녀는 프랑스 국왕 필립 1세의 딸로 1112년 탕크레드의 사후 십자군 국가와 프랑스와의 유대를 공고히 할 목적으로 아직 14세인 퐁스와 약혼했다. (실제 결혼은 1115년) 당시 왕가의 결혼이 철저하게 정략적인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게 보통인 점을 감안해도 다소 정도가 심해보이긴 하지만 아무튼 이는 외교적으로는 매우 성공적인 결혼이었다.



 이렇게 1118년에는 주요 십자군 국가들의 상황이 그럭저럭 그런데로 굴러가고 있긴 했지만 역시나 주변의 적대적인 무슬림 세력의 가운데 십자군 국가들이 존재하는 상황 자체가 변하지는 않기 때문에 이들의 상황은 매우 불안했다.




(대략적인 12세기 초반의 십자군 국가들의 상황.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MapMaster ) ) 



 한편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와 그 실질적 지배자인 와지르 알 아흐딜은 예루살렘 왕국에 대한 초기 원정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다음 더 이상 십자군들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1121년 알 아흐딜이 암살당했을 때 까지도 새로운 공세는 없었다. 예루살렘 왕국으로써는 물론 천만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시리아와 북부 이라크 및 터키의 일부를 아우르는 지역에 있는 무슬림 영주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은 끊임없이 에데사 백작령 및 안티오크를 공격했다. 그리고 이러한 무슬림 영주들이 대열에 새롭게 이름을 올리는 인물이 바로 일가지 (Najm ad-Din Ilghazi ibn Artuq ) 이다.


 그의 아버지는 본래 예루살렘의 투르크 통치자였으나 소크만과 일가지 형제에게 그 자리를 물려준 바 있다. 그러나 그들 형제들은 마침 1차 십자군의 침입을 기회로 여긴 이집트의 알 아흐딜의 공격을 받고 예루살렘을 내줄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알 아흐딜도 곧 예루살렘을 내주긴 하지만 말이다.


 소크만은 이미 1104년의 하란 전투에서도 한번 소개한 바가 있다. 그가 죽고 나서 그의 영지인 마르딘을 장악한 것은 동생인 일가지였다. 일가지는 결국 자신의 속한 아르투키드 가문 (Artukid family) 의 수장이 되어 주변의 무슬림 세력은 물론 십자군 국가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19. 예루살렘 왕국의 시련기


 앞서 보두앵 2세의 치세는 그렇게 장미빛이 아니라고 이야기 했는데, 이는 즉위 다음해 부터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 1119년에는 안티오크 공국에 큰 시련이 닥쳤다. 1119년에 있었던 사르마다 전투 (Battle of Ager Sanguinis, = Battle of the Field of Blood, the Battle of Sarmada, or the Battle of Balat) 의 결과 때문이었다.


 이 전투는 실제 전투가 일어난 사르마다 전투 보다 라틴어로 Ager Sanguinis (피의 전쟁터) 라는 명칭으로 서방측에 기록되는데 이는 여기서 십자군 국가의 막대한 인명 손실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결국 일가지와 무슬림 군대의 빛나는 승리였다.


 전투의 발단은 1117년 알레포를 일가지가 장악한데서 시작했다. 로게르는 1118년 인근의 아자즈 (Azaz)를 점령해서 알레포 공격의 전초기지로 삼으려 했다. 이에 일가지는 자신이 먼저 공세로 나가기로 결심하고 다마스쿠스의 뷰리드 왕조의 투크테킨을 끌여들여 1119년 안티오크 공국을 침공했다.


 당시 안티오크의 주교는 로게르에게 트리폴리의 퐁스와 국왕 보두앵 2세의 증원군을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다고 충고했지만 로게르는 이 충고를 무시하고 약간의 병력만을 가지고 사르마다 근방에 진지를 쳤다.

 로게르의 병력은 기사 700명에 3000명의 보병이었는데, 이 보병 가운데는 투코폴레스 (Turcopoles) 라 불리는 현지 용병으로 구성된 궁수들도 포합되어 있었다. 그들이 진지를 구축한 것은 1119년 6월 27일 밤이었는데 참으로 무모하게도 탈출할 길이 별로 없어보이는 수목이 우거진 계곡에 진지를 구축했다. 이는 일가지와 그의 무슬림 연합군의 입장에서 보면 의심할 바 없는 알라의 가호였다.


 1119년 6월 28일 일가지가 이끄는 무슬림 연합군이 그들을 공격했다. 로게르가 이끄는 안티오크 군은 다섯 부대로 나뉘어 전투를 벌였다. 전투 초반에 안티오크 군대는 우익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고, 중앙 에서도 성공적인듯 했으나 좌측 옆구리 부분을 치고 들어오는 무슬림 군대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안티오크 군이 패배하기 시작하자 탈출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결국 안티오크 군은 지도자인 로게르를 비롯한 주요 병력을 완전히 잃고 엄청난 참패를 당했다.


 이 시기 안티오크 군이 얼마나 큰 타격을 입었는지는 이 전투를 피의 전쟁터라고 묘사한데서 여실히 드러난다. 단지 섭정 로게르만 죽은 것이 아니라 사실상 안티오크 군의 주력이 몰살당했기 때문에 이제 안티오크 공국 자체의 함락도 시간 문제로 생각디었다. 일가지는 마라트 알 누만을 포함한 주변 지역을 장악해 들어갔다.


 그러나 결국 일가지는 안티오크를 함락시키지 못했다. 1119년 8월 14일에 벌어진 하브 전투 (Battle of Hab) 에서 보두앵 2세와 퐁스 백작이 이끄는 십자군 군대 - 대략 700명의 기사와 창병과 궁병으로 구성된 수천의 보병 - 은 결국 일가지의 군대를 패배시키는데 성공했다.




(안티오크 공작령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MapMaster ) )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1119년은 십자군 국가들의 시련의 해였다. 십자군 국가의 북쪽을 지키는 안티오크 공국이 이제 거의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섭정을 맡을 사람도 없을 정도의 심각한 인력 손실로 말미암아 1119년 부터는 아직도 소년인 보에몽 2세를 대신하여 국왕 보두앵 2세가 안티오크 공국의 섭정을 맡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는 왕권을 강화시킨다는 개념 보다는 왕국이 방위해야 하는 지역이 남북으로 길게 늘어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는 결코 보두앵 2세에게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시련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1121년은 다행히 승승장구하던 일가지가 스탈린의 고향인 그루지야를 침공해서 보기 좋게 패배했기 때문에 큰 문제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1122년에는 에데사 백작인 조슬랭 1세가 일가지와 그의 조카인 발라크 (Balak)와 전투를 벌이다가 결국 패배해 또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그러니 조슬랭 1세는 한번도 아니고 2번이나 포로가 된 셈이다.
 
 
 이제 보두앵 2세는 지도자가 없는 에데사 까지 책임져야 하는 더 큰 짐을 지게 된 셈이었다. 사실 주변에 다른 적대 세력만 없다면 왕권 강화의 계기로 삼을 만도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아무튼 보두앵 2세는 자신의 친척이자 심복인 조슬랭 1세가 사라지자 무척 외로웠던 (?) 모양이다. 1123년 사냥을 나간 보두앵 2세는 그만 무슬림 군대에 붙잡혀 역시 2번째로 포로 신세가 되고 말았다.
 
 
 무슬림들은 이 중요한 포로를 붙잡아서 살려두었는데, 이는 물론 이들이 이전에 두둑한 몸값을 받고 풀려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 들에게는 걸어다니는 ATM이나 캐쉬카우라 불릴 만한 포로들이었으므로 죽일 필요는 없었고 이들을 억류하기로 결정했다
 
 
 아무튼 보두앵 2세와 조슬랭 1세가 감옥 안에서 다시 감격의 상봉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예루살렘 왕국으로써는 정말 국가 존망의 위기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보두앵 2세의 신하들은 기특하게도 국왕의 부재중에 다른 이를 왕으로 옹립하지 않고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갔다. 결국 보두앵 2세는 굴욕적으로 2번이나 포로로 잡히긴 했지만 결국 출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보두앵 2세에게 굴욕의 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1124년에 출옥한 보두앵 2세는 얼마 있지 않아 이 치욕을 설욕하고 몸값을 마련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것은 1125년에 있었던 아자즈 전투 (Battle of Azaz) 였다.
 
 
 이 전투는 모술의 새로운 아타베그인 일 부르수키 ( Il-Bursuqi ) 와 보두앵 2세와의 전투였다. (참고로 일가지는 1122년 사망했다) 보두앵 2세는 풀려나자 마자 알레포를 포위 공격했다. 알레포는 결국 3개월 정도 버티다가 항복했다. 사실 일 부르수키는 이 알레포를 지원하기 위해서 나타난 것이었다.
 
 
 보두앵 2세는 전장에서 오랜 세월 살았던 사람답게 능란한 지휘를 펼쳤다. 일단 일 부르수키의 군대가 다가오자 미련 없다는 듯이 알레포를 포기하고 후퇴했다. 일 부르수키를 좀더 싸우기 유리한 지점으로 이끌기 위한 전략이었다.
 
 마침내 일 부르수키가 아자즈를 포위하자 보두앵 2세는 1100명의 기사와 2000명의 보병을 이끌고 나타났다. 이번에도 역시 보두앵 2세는 퇴각했는데 물론 의도한 전략이었다. 이 전략에 말려든 무슬림 군대를 좀더 유리한 지형으로 이끌어냔 보두앵 2세는 강력한 반격을 시도해 결국 훨씬 우세한 무슬림 군대를 크게 패배시키고 과거의 패배에 대한 설욕을 갚았다.
 
 
 이 전투는 보두앵 2세의 치세 동안 가장 큰 승리였다. 1119년 잃었던 영토의 대부분을 수복했으며, 여기에 막대한 전리품을 바탕으로 밀린 몸값도 해결할 수 있었다. 잠시나마 예루살렘 왕국의 시련기가 끝나고 한동안 다시 안정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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