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십자군 전쟁사 - 2차 십자군 3



 4. 독일 십자군의 진로


 1차 십자군과는 달리 2차 십자군은 사실 독일과 프랑스의 황제와 왕이 참가했으니 다른 이들은 모두 군주의 신하였고 따라서 이 둘만 협력하면 의사 결정에서 혼란이 일어날 여지가 없었다. 이는 1차 십자군이 수많은 유력 영주들의 연합체여서 걸핏하면 분쟁이 발생했던 것과는 달리 큰 이점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콘라트 3세나 루이 7세 모두 서로에게 협력할 생각이 별로 없다는 점이었다. 이 둘은 사실상 별개의 군대를 소집해 별도로 진격해 나갔다. 다만 콘스탄티노플에서 합류한다는 약속만 한 상태였다.


  독일의 콘라트 3세는 1147년 십자군 원정을 위해 약 2만의 병력을 소집했다. 이와 같은 대규모 병력을 독일에서 멀리 떨어진 우트르메르로 보낸다면 2차 십자군 원정이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겠지만 남부 이탈리아의 로게르 2세를 견제할 힘이 사라지게 되므로 교황측으로써는 사실 걱정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교황이 적극 지지한 2차 십자군 이후 아이러니 하게도 교황과 황제의 사이는 더욱 멀어지게 되었으며 결국 콘라트 3세는 죽을 때 까지 교황으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황관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여담이긴 하지만 교황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사실 로게르 2세는 로마를 노리고 있지 않았다. 그보다는 당시 유럽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던 비잔티움 제국이 그의 목표였다. 사실 이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 인들에게 부유한 비잔티움 제국은 항상 약탈과 정복의 목표였다. 그것은 최초의 이탈리아 노르만 국가를 건설한 로베르 기스카르와 그 아들 보에몽 1세, 그리고 로게르 2세 모두의 꿈이었다. 따라서 콘라트 3세가 병력을 성지로 이동시킨 것은 로게르 2세에게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할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콘라트 3세가 출정하기로 결정한 순간 - 몇몇 기록에 의하면 이는 성 베르나르도에 열정적 연설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 실제 병력이 집결 이동하기까지는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1147 년 5월 독일군은 출발했다. 콘라트 3세는 헝가리와의 사전 협의에 의해 육로를 통해 비잔티움 제국으로 가기로 결정했는데 사실 이는 콘라트 3세의 적대 세력인 로게르 2세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당시에 독일군이 아드리아 해를 건너려면 일단 남이탈리아의 노르만 왕국부터 점령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게르 2세는 단시일 내로 무너뜨릴 수 있는 만만한 세력이 아니었다. 그러니 일정에 늦지 않게 가려면 육로 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또 콘라트 3세가 육로를 선택한 데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신황제 마누엘 1세와 그가 서로 우호 동맹 관계에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누엘 1세 콤네누스의 초상화. 조부 알렉시우스 1세와 아버지 요한네스 2세를 잇는 콤네누스 왕조의 3대 황제로 비잔티움의 마지막 번영을 이끈 황제였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12세기의 남부 이탈리아 지도. 2차 십자군이 있던 시기에는 시칠리아 섬과 이탈리아 남부의 초록색 지역은 로게르 2세의 지배 하에 있었다.  따라서 콘라트 3세는 1차 십자군 때 처럼 남부 이탈리아에서 아드리아 해를 건너 비잔티움 제국으로 가는 루트를 택할 수 없었다.  CCL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MapMaster)



 본래 마누엘 1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전 그의 아버지인 요한네스 2세 시절 부터 구 로마 제국의 동서 후예임을 주장하는 (그러나 그들 모두의 힘을 함쳐도 전성기 로마 제국의 힘에는 터무니 없이 미치지 못하는) 비잔티움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 (독일) 은 오랜 자존심 싸움을 접고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당시 마누엘 1세는 이를 위해 콘라트 3세의 처제인 베르타 (Bertha of Sulzbach ) 와 약혼한 상태였는데, 결국 황제의 지위에 오르고 난후 양 제국의 동맹 관계가 확실해지자 베르타는 이레네로 이름을 개명하고 비잔티움 제국의 황후가 되었다. (1146년) 이 동맹은 부분적으로는 바로 남이탈리아의 야심가 로게르 2세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아무튼 이렇게 2차 십자군 무렵 콘라트 3세와 마누엘 1세는 서로 동맹 관계에 있었고, 또 콘라트 3세가 비잔티움 제국의 오랜 적인 무슬림 세력과 싸우기 위해 친히 원정을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동방 원정길에 오른 독일 십자군의 전망은 제법 밝아보였다. 여기에 독일군이 비잔티움 제국 영내로 들어가는데 유일한 장애물 처럼 보였던 헝가리의 가제 2세 (Gaze II of Hungary) 와의 협상도 순조롭게 끝나 독일군이 무사히 비잔티움 제국 영내로 들어서자 원정은 제법 순조롭게 보였다.


 하지만 순조로운 것은 여기까지 였다. 문제는 오히려 비잔티움 제국 영내에서 발생했다. 당시 십자군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는 종교적 이유에서든 아니면 전리품이나 혹은 상위 군주의 명령이든지 간에 제법 정예한 기사와 병사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면 사면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끌어들인 범죄자나 부랑자, 그리고 그냥 할 일없는 부랑자와 백수까지 아주 다양한 이들이 존재했다. 따라서 모든 병사의 군기를 오랫동안 강하게 확립한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부유한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더욱 어렵다는 것이 곧 증명되었다.


 처음에는 일부 십자군 원정에 동행한 이들이 지역 주민들을 강탈하는 데 부터 시작해서 비잔티움 제국 영내에서 십자군과 비잔티움 국민들과의 갈등이 촉발되었다. 이는 결국 지역 주민과 십자군 병사들과의 전쟁으로 번졌다. 가장 경악할 만한 일은 콘라트 3세의 조카이자 미래의 독일 황제인 슈바벤의 프리드리히 (바바로사로 더 잘 알려진) 가 비잔티움에 보복 공격을 감행해 수도원을 불태우고 수도사들을 학살한 사건이었다. 결국 2차 십자군 역시 같은 기독교도와의 싸움으로 - 그것도 수도원을 상대로 - 원정의 첫번째 전투를 승리로 이끈 셈이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마누엘 1세와 콘라트 3세의 관계는 험악해졌다. 사실 마누엘 1세의 당시 상황은 다소 복잡했다. 마누엘 1세 역시 조부 알렉시우스 1세 이후로 진행된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 회복 사업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성과는 미미했지만) 그래서 당시에도 이코니움의 투르크 인들과 전쟁 중인 상황이었다.



(12세기 후반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  This image has been (or is hereby) released into the public domain by its author, Bigdaddy1204 at the wikipedia project. This applies worldwide.)



 하지만 전혀 원하지도 않았던 십자군이 비잔티움 제국 쪽으로 다가오자 마누엘 1세는 오히려 십자군에 대처하기 위해 투르크 인들과 동맹을 맺어야 할 상황이었다. 과거 용병으로 쓸 목적으로 병력을 요청했다가 결국 그들을 통제하지 못했던 조부 알렉시우스 1세를 생각했을 때 이 새로운 십자군 역시 마누엘 1세에게 전혀 통제되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또 이들이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와서 뭔가 딴 생각을 품을 가능성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훗날 4차 십자군을 생각할 때 이는 결코 과도한 우려가 아니었다)


 또 마누엘 1세는 십자군이 자국 영내에서 한 행패에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마누엘 1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양보는 이들이 콘스탄티노플을 거치지 않고 가장 신속히 성지로 갈 수 있도록 해주는 정도였다. 의도를 신뢰할 수 없는 대규모 외국군이 국내에 있기 보다는 결국 비잔티움 제국의 적대 세력인 무슬림 세력과 싸우게 하는 편이 훨씬 안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콘라트 3세는 이 권유를 단호히 거절했다. 독일 황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해 접대를 받고 여기서 루이 7세와 합류할 심산이었다. 결국 콘라트 3세와 마누엘 1세의 갈등은 커질 수 밖에 없었다. 콘라트 3세는 1147년 9월 10일 콘스탄티노플에 당도했고 결국 여기서 루이 7세를 기다렸다.


 한편 이 십자군 원정을 좋은 기회로 여긴 로게르 2세는 군대를 파견해 그리스의 주요 도시들을 약탈했다. 이에 마누엘 1세는 콘라트 3세에게 공동의 적인 로게르 2세와 싸울 수 있도록 원정군의 일부를 요청했으나 이마저도 거절하면서 양측의 골은 깊어졌다. 그리고 다음달인 10월이 되서야 프랑스 군이 나타났다.




 5. 프랑스 십자군의 진로



 프랑스 군은 루이 7세가 1145년 크리스마스에 참전 선언을 한 것에 비해서 상당히 느리게 움직였다. 이는 물론 부분적으로 프랑스 왕의 신하와 백성들이 이 전쟁을 별로 내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들이 생각하기엔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 멀리 있는 에데사 함락보다는 프랑스 서부에서 힘을 키우는 앙주 가문이 더 위협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루이 7세는 성 베르나르도의 도움을 받아 무거운 신하들의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프랑스 십자군은 규모가 약 1만 5천 정도로 독일 십자군 보다 작았다. 하지만 독일 십자군과의 차이는병력 규모만이 아니었다. 비록 중세 시대의 군대가 수많은 비전투 인원들 - 오리엔트 지역과 서방 지역의 군대의 머릿수가 크게 차이 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비전투 인원을 포함시켜 숫자를 세느냐의 차이 때문이다 - 을 포함시키긴 해지만 루이 7세의 십자군은 아예 왕비와 귀부인들까지 포함시켜 어떻게 보면 전쟁이 아니라 이민을 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루이 7세는 1146년부터 반대가 심한 십자군을 강행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중에 하나는 미리 마누엘 1세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이었다. 교황 에우제니오 3는 서신을 보내 마누엘 1세에게 지원을 미리 요청했다. 그러나 마누엘 1세는 프랑스 국왕이 지나가는 것을 돕기는 하겠지만 꽁짜는 없으며 이전 십자군과 동일하게 십자군이 자신에게 충성 서약 - 비록 이전의 십자군의 충성 서약이 별 효력이 없긴 했지만 - 을 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솔직히 마누엘 1세는 십자군을 전혀 원하지 않는 것 처럼 보였다.



(1146년 마누엘 1세가 에우제니오 3세에게 보낸 서신. 교황청 보존 자료이다. 루이 7세에 대한 지원을 약속한 서신이다   This image is in the public domain in the United States.)


 이렇게 프랑스 십자군은 우여곡절 끝에 1147년 6월에야 메츠에서 출발했다. 프랑스 십자군은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를 키우기 위해 프랑스 전역에서 십자군을 모집했을 뿐 아니라 노르망디와 잉글랜드에서 온 십자군 전사들도 참가시켰다.


 프랑스 국왕 역시 로게르 2세를 믿지 못했는지 해로 대신 육로를 택했다. 그런데 루이 7세의 군대는 헝가리에서부터 문제를 일으켰다. 십자군에 헝가리 왕의 반대자들을 합류시킨 것이 문제가 되어 가제 2세와 분란이 일어난 것이다. 겨우 이 분란을 해결한 다음에도 그들의 진군은 순조롭지 못했다.


 부분적으로 프랑스 십자군에는 귀부인들이 있어서 기강이 더 바로 서긴 했다고 하지만 불행히 독일 십자군이 휩쓸고 지나간 지역을 따라간 것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군대는 많은 식량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고, 고대 로마 군단 처럼 군수 병참이 완벽하지도 못해서 결국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했다. 결국 돈을 주고 식량을 구입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미 독일 십자군이 지나간 자리에는 불행히 식량이 귀했다. 따라서 수요 공급 법칙에 의해 가격이 크게 오를 수 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프랑스 십자군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들이 겪은 고통은 1147년 10월 4일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을 때 분노로 바뀌었다. 왜냐하면 마누엘 1세가 십자군에 대응하기 위해 투르크 군과 강화를 맺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십자군들은 몰랐지만 여기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비록 훗날에는 이슬람의 침공을 막은 유럽의 방파제라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사실 비잔티움 제국은 이슬람 세력과만 싸운게 아니었다. 비잔티움 제국을 위협하는 이민족의 파도는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비잔티움 역사의 상당 부분은 이런 이민족의 끊임없는 침공을 막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니 비잔티움 제국이 의도를 100% 믿을 수 없는 십자군을 경계하는 것은 당연했다. 여기에 남이탈리아의 로게르 2세가 콘라트 3세의 부재를 틈타 발칸 반도를 노리고 있었으므로 일단 룸 술탄국과는 전쟁을 중단하고 병력을 서쪽으로 집중 시킬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튼 이런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루이 7세와 프랑스 십자군은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어졌다. 심지어 성 베르나르도의 사촌인 랑그르 주교 조프루아는 독일과 프랑스가 힘을 합쳐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는 콘라트 3세와 루이 7세    Jean Fouquet 작  1445년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한편 마누엘 1세 역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더 이상 이들을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머물게 할 수 없었다. 마누엘 1세는 십자군들에게 투르크의 대군이 아나톨리아 지역에 몰려들고 있으며 이제 그들이 콘스탄티노플에서 합류한 이상 더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한 최대한 빨리 십자군을 보스포루스 해엽 너머의 아시아 지역으로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1147년 10월, 전혀 통일되지 않은 두개의 별개의 십자군이 지금의 터키 지역인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통계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사실 저도 통계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주제로 글을 쓰기가 다소 애매하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글을 올려봅니다. 통계학, 특히 수학적인 의미에서의 통계학을 공부하게 되는 계기는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아마도 비교적 흔하고 난감한 경우는 논문을 써야 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오늘날의 학문적 연구는 집단간 혹은 방법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그려면 불가피하게 통계적인 방법을 쓸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분야와 주제에 따라서는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상당수 논문에서는 통계학이 들어가게 됩니다.   문제는 데이터를 처리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익히는 데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학과에서 통계 수업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 학부 과정에서는 대부분 논문 제출이 필요없거나 필요하다고 해도 그렇게 높은 수준을 요구하지 않지만, 대학원 이상 과정에서는 SCI/SCIE 급 논문이 필요하게 되어 처음 논문을 작성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논문을 계속해서 쓰게 될 경우 통계 문제는 항상 나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간혹 통계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는 질문이 들어옵니다. 사실 저는 통계 전문가라고 하기에는 실력은 모자라지만, 대신 앞서서 삽질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몇 가지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입문자를 위한 책을 추천해달라  사실 예습을 위해서 미리 공부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통계는 학과별로 다르지 않더라도 주로 쓰는 분석방법은 분야별로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어 결국은 자신이 주로 하는 부분을 잘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과 커리큘럼에 들어있는 통계 수업을 듣는 것이 더 유리합니다...

9000년 전 소녀의 모습을 복원하다.

( The final reconstruction. Credit: Oscar Nilsson )  그리스 아테나 대학과 스웨덴 연구자들이 1993년 발견된 선사 시대 소녀의 모습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복원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유골은 그리스의 테살리아 지역의 테오페트라 동굴 ( Theopetra Cave )에서 발견된 것으로 연대는 9000년 전으로 추정됩니다. 유골의 주인공은 15-18세 사이의 소녀로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으나 괴혈병, 빈혈, 관절 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소녀가 살았던 시기는 유럽 지역에서 수렵 채집인이 초기 농경으로 이전하는 시기였습니다. 다른 시기와 마찬가지로 이 시기의 사람들도 젊은 시절에 다양한 질환에 시달렸을 것이며 평균 수명 역시 매우 짧았을 것입니다. 비록 젊은 나이에 죽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이런 경우가 드물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죠.   아무튼 문명의 새벽에 해당하는 시점에 살았기 때문에 이 소녀는 Dawn (그리스어로는  Avgi)라고 이름지어졌다고 합니다. 연구팀은 유골에 대한 상세한 스캔과 3D 프린팅 기술을 적용해서 살아있을 당시의 모습을 매우 현실적으로 복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나타난 모습은.... 당시의 거친 환경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긴 턱은 당시를 살았던 사람이 대부분 그랬듯이 질긴 먹이를 오래 씹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강하고 억센 10대 소녀(?)의 모습은 당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야 했다는 점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이렇게 억세보이는 주인공이라도 당시에는 전염병이나 혹은 기아에서 자유롭지는 못했기 때문에 결국 평균 수명은 길지 못했겠죠. 외모 만으로 평가해서는 안되겠지만, 당시의 거친 시대상을 보여주는 듯 해 흥미롭습니다.   참고  https://phys.org/news/2018-01-te...

150년 만에 다시 울린 희귀 곤충의 울음 소리

  ( The katydid Prophalangopsis obscura has been lost since it was first collected, with new evidence suggesting cold areas of Northern India and Tibet may be the species' habitat. Credit: Charlie Woodrow, licensed under CC BY 4.0 ) ( The Museum's specimen of P. obscura is the only confirmed member of the species in existence. Image . Credit: The Trustees of the Natural History Museum, London )  과학자들이 1869년 처음 보고된 후 지금까지 소식이 끊긴 오래 전 희귀 곤충의 울음 소리를 재현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프로팔랑곱시스 옵스큐라 ( Prophalangopsis obscura)는 이상한 이름만큼이나 이상한 곤충으로 매우 희귀한 메뚜기목 곤충입니다. 친척인 여치나 메뚜기와는 오래전 갈라진 독자 그룹으로 매우 큰 날개를 지니고 있으며 인도와 티벳의 고산 지대에 사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일한 표본은 수컷 성체로 2005년에 암컷으로 생각되는 2마리가 추가로 발견되긴 했으나 정확히 같은 종인지는 다소 미지수인 상태입니다. 현재까지 확실한 표본은 수컷 성체 한 마리가 전부인 미스터리 곤충인 셈입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그 형태를 볼 때 이들 역시 울음 소리를 통해 짝짓기에서 암컷을 유인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높은 고산 지대에서 먼 거리를 이동하는 곤충이기 때문에 낮은 피치의 울음 소리를 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이런 소리는 암컷 만이 아니라 박쥐도 잘 듣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중생대 쥐라기 부터 존재했던 그룹으로 당시에는 박쥐가 없어 이런 방식이 잘 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