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트리폴리 포위전 II (Seige of Tripoli 1102 - 1109)
1104년 5월에 있던 하란 전투의 결과는 결국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트리폴리를 포위한 레몽에게 잠재적인 지원군이 될 수 있던 안티오크와 에데사의 두 세력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이는 포위된 상태의 트리폴리의 지배자 파크 알 물크 (Fakhr al-Mulk, qadi of Tripoli) 에게는 다시 한번 매우 좋은 기회로 생각되었다.
그는 즉시 전투에서 승리한 소크만 (Sokman) 에게 전령을 보내 이번이 불경한 자들을 격퇴할 좋은 기회라고 설득했다. 물론 신앙심 만으로는 당시의 무슬림 군주들을 움직이긴 힘들었으므로 많은 돈을 주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그러나 철석같이 믿던 소크만의 군대는 결국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좋던 싫던 파크 알 물크는 혼자서 레몽의 군대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그는 1104년 9월, 트리폴리의 주요 보급로 옆에 세워진 레몽 생질의 요새 (Citadel of Raymond de Saint-Gilles ) 을 기습했다. 이 작전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수많은 십자군이 사망했고, 요새의 한쪽 날개도 심하게 파손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결정적인 성과는 레몽 자신이 심하게 부상당했다는 것이다. 이 부상은 당시로써는 고령인 60대 노인에게는 이겨내기 힘들었던 것 같다. 결국 레몽은 앓아 누웠고, 5개월 후에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
여기서 잠깐 레몽 4세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사실 들인 노력에 비해서 받은 결과물이 정말 보잘 것 없던 십자군 군주들 가운데 으뜸은 바로 레몽 4세 였을 것이다. 이미 남프랑스의 강력한 군주이던 레몽 4세가 대체 뭐가 아쉬워서 이런 모험적인 원정에 참여하고 결과적으로 좋지 않은 성과만을 거두게 되었을까?
레몽이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한가지로 말하기 어렵겠지만 아마도 명예욕과 종교적 동기, 그리고 영토에 대한 욕구등이 다양하게 작용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야망 만큼 그의 능력이 뛰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레몽은 전투에 있어서는 라이벌인 보에몽과 비교해서 좋지 못한 성과를 거두었다. 노르만 비잔티움 전쟁과 아풀리아 계승전쟁에서 단련된 노련한 전사인 보에몽과의 대결은 그에게 무리였을지 모른다. 오히려 보에몽과 다투는 과정에서, 그리고 무리한 전투를 고집하는 과정에서 그의 신망은 크게 추락했다. 여기에 몇가지 불운까지 작용해서 레몽 4세는 가장 불운한 십자군 군주 중에 하나로 생애를 마감하게 되었다.
비록 레몽 4세가 죽기는 했지만 아직 트리폴리 포위전은 끝난 게 아니었다. 레몽의 자리는 그의 사촌이기도 한 세르댜냐 백작 (County of Cerdanya) 에게 넘어갔다. 세르다냐 백작 William II Jordan 는 베르가 백작 (Count of Berga) 를 겸했는데, 1105년에는 다시 트리폴리 백작령의 섭정까지 더하게 되었다. 다만 레몽이 죽기전 알 물크와 협정을 맺어 알 물크가 요새를 공격하지 않으면 그도 보급로의 상인들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협정을 맺었으므로 일단 전투는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이 지루한 포위전이 점차 심각한 양상으로 변한 것은 바로 1108년 이었다. 이 시기가 되자 세르다냐 백작은 다시 군대를 정비하고 보급로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결국 트리폴리는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식료품의 공급이 부족해지자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트리폴리 시내에서도 모반의 기운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일부 귀족들은 은밀히 십자군과 내통할 계획까지 세웠다.
이런 시기가 오래 지속되면 결국 트리폴리는 내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파크 알 물크는 자신이 직접 원군을 청하러 가기로 결정했다. 다행히 1108년 에는 무슬림들의 내분이 다소 감소한 상태였다. 그것은 1105년에 바그다드를 두고 형제인 무함마드 1세와 싸우던 바르키야루크가 부상으로 인해 사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셀주크 제국의 중부지대가 무함마드 1세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비록 셀주크 제국의 여러 파편들이 자신의 독립성을 유지하고 군웅할거의 양상을 보이기는 했지만 일단 바그다드의 지배자가 한동안은 확실하게 정해졌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파크 알 물크는 대체 누구에게 원군을 요청할 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500명의 병력과 많은 선물을 들고 바그다드의 무함마드 1세에게로 향했다.
알 물크는 중간에 다마스쿠스에도 들렸는데, 당시 다마스쿠스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을 하면 1095년에 젊은 두카크를 권좌에 올린 아타베그 (atabeg)인 자히르 앗 딘 토그테킨 (Zahir ad-Din Toghtekin) 이 1104년 두카크의 사후 새로운 지배자가 되어 있었다.
두카크는 1104년에 병이 들었는데, 일설에 의하면 독살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죽기전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아직 어린 아들 투투시 2세 (Tutushi II) 를 보호할 목적으로 토그테킨을 아타베그로 임명했는데, 토그테킨은 두카크가 죽은 후 그의 미망인과 결혼하고 사실상의 지배자가 되어 뷰리드 왕조 (Burid Dynasty) 왕조를 창설했다. (뷰리드 왕조는 약 50년간 다마스쿠스를 장악했다)
두카크의 아들이 다마스쿠스에서 빠져나와 다시 다마스쿠스의 에미르 자리를 되찾기 위해 전쟁을 걸어왔으나 토그테킨은 노련한 외교술을 동원하여 예루살렘 왕국과의 공조를 통해 그를 제거하고 뷰리드 왕조의 기반을 다진 상태였다.
아무튼 과거 파크르 알 물크를 배신했던 두카크가 죽고 나자 일단은 토그테킨과 알 물크 사이에는 다소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된 상태였다. 그러나 다마스쿠스는 트리폴리의 카디를 환영하기는 할 지언정 원군을 보내주지는 않았다.
알 물크가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었던 무함마드 1세 역시 실망스럽기는 비슷했다. 무함마드 1세는 당시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모술을 공략하는데 정신이 팔려있었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트리폴리를 지원할 여유가 없었다.
결국 알 물크가 직접 트리폴리를 빠져나와 원군을 요청하러 다닌 것은 결국 그에게 독이 되고 말았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트리폴리의 지배자가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트리폴리의 주민들은 십자군에 항복할 생각은 없었지만 대신 자신들의 안정을 위해 더 강력한 무슬림 지배자에게 항복할 의사는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집트의 지배자인 알 아흐딜에게 항복했던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강력한 해군을 가진 이집트 군의 도움을 얻는다면 트리폴리의 심각한 물자 부족은 견딜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되었는데다, 적어도 트리폴리의 카디와는 달리 주민들은 시아파에게도 항복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파크르 알 물크는 수니파이다)
그러나 트리폴리 인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는 십자군 국가들이 트리폴리 공략을 위해 힘을 합치고 있었고, 알 아흐딜은 아스칼론 전투 이후 연이은 패배로 그다지 전쟁 수행에 적극적이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해가 바뀌고 1109년이 되자 십자군 국가들은 새롭게 힘을 합칠 준비가 되었다. 1108년에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에데사 백작 보두앵 2세는 에데사 군을 다시 회복시켰다. 한편 안티오크 섭정 탕크레드도 다시 군사를 회복하고 보두앵 2세와 화해했다. 한편 이집트 군을 연이어 이겨낸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1세 역시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나타났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레몽 4세의 장남이자 새로운 툴루즈 백작이 된 베르트랑 (Bertrand, Count of Toulouse) 이 아버지가 못다 이룬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숙부 뻘이되는 세르다냐 백작, 그리고 제노바 함대와 함께 나타났다.
본래 베르트랑은 아버지가 십자군 원정을 위해 툴루즈를 비운 사이 영지를 대신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아키텐 공작 기욤 9세가 툴루즈를 노리고 공격해 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1098 - 1100 년 사이에는 툴루즈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가 나중에 영지를 다시 회복한 상태였다. (앞서 1101년 마이너 십자군때 그래서 아키텐 공작과 레몽 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음을 설명했다)
레몽 4세의 사후에는 그가 툴루즈 백작이 되었는데, 이제 아버지가 못이룬 과업의 달성을 위해 우트르 메르로 진군한 것이었다. 보두앵 1세는 그를 환영했고, 트리폴리가 점령되는 날 이 도시와 트리폴리 백작령을 레몽의 아들인 그에게 주겠다고 약속하므로써 트리폴리 점령 후 일어날 영토 분쟁을 사전에 예방했다.
이렇듯 대규모 십자군 군대가 육지와 바다에서 트리폴리를 공격하자 트리폴리 군도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었다. 오기로 약속된 이집트 함대도 결국 너무 늦게 도착했다. 결국 1109년 7월 12일 트리폴리는 항복했다. 마침내 툴루즈의 깃발이 트리폴리의 성벽에 나부끼게 된 것이다.
1109년에는 7년간의 오랜 포위전의 결과물로써 트리폴리 백작령이 탄생했다. 그리고 이것은 12세기에 가장 중요한 십자군 국가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었다. 비록 레몽은 살아서 이 장면을 보지 못했지만 대신 그의 아들 베르트랑이 첫번째 트리폴리 백작이 되었다.
하지만 사실 그 과정은 그렇게 순탄하지는 않았다. 세르다냐 백작은 자신에게도 트리폴리의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안티오크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베르트랑은 예루살렘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다툼은 베르트랑의 승리였다. 1110년 세르다냐 백작은 암살되었으며 (아마도 베르트랑에게) 트리폴리 백작령은 베르트랑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기 전에 한가지 더 이야기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십자군의 역사에서 빠지지 않는 것 가운데 하나인 약탈과 파괴이다. 역시나 십자군들은 이 도시를 함락한 다음 약탈하고 파괴했다. 이 때 파괴된 것 가운데 하나는 바로 당시 시대 최고의 도서관인 다르 엠 일름 (Dar-em-Ilm ) 도서관이었다. 당시로써는 매우 방대한 저서인 10만권의 장서를 자랑하던 이 도서관은 십자군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었다. 또 주민들 상당수도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잡혀갔다.
8. 예루살렘 왕국의 사정
지도에서 보면 안티오크 공작령과 에데사 백작령, 그리고 트리폴리 백작령은 대개 십자군 국가의 북부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남부에는 갈릴리 공작령과 자파 백작령을 포함하는 예루살렘 왕국은 그동안 뭘하고 있었을까 ? 사실 북쪽에서 끊임없이 전쟁과 분쟁이 이어지는 동안 예루살렘의 보두앵 1세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주로 바쁜 이유는 아직 무슬림의 수중에 있는 지역의 점령 및 남쪽에 이집트군과의 싸움 때문이었다.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1세 (가운데) 티레의 기욤 (William of Tyre) 의 13세기 서적에서 나온 삽화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예루살렘 왕국의 건국 당시 예루살렘과 그 주변부는 십자군의 점령하에 있었으나 아직 팔레스타인의 많은 도시들이 사실상 독립 세력을 이루고 있는 상태였다. 왕국을 굳건히 하려면 수도인 예루살렘 말고도 지방의 영토가 필요했다. 따라서 보두앵 1세는 주변으로 팽창 정책을 실시했다.
이런한 팽창 정책은 요르단강 너머 (Oultrejordain or Oultrejourdain "beyond the Jordan") 라는 용어로 설명되는데 단순히 요르단 강 너머의 지금의 요르단 및 시리아 영토 뿐 아니라 사방으로의 확장을 모두 통칭한 용어였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보면 북쪽의 사해에서 서쪽의 점령되지 않은 아크레 및 아스칼론, 티레등의 해안 도시, 남쪽의 네제브 사막, 그리고 동쪽의 다마스쿠스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캐러밴 루트 까지를 모두 통칭한 용어였다.
이 팽창 계획은 일단 갈릴리 지역에서는 빨리 진행되어 곧 갈릴리 공작령이 들어서게 되엇다. 한편 1101년 십자군의 실패로 불충분한 병력 지원을 받은 보두앵 1세는 다시 제노바 군의 도움을 받아 (물론 제노바 인들에게 충분한 금전적 보상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제노바 인들은 무역상 답게 상업권도 같이 요구했다) 1101년 부터 주변 도시들을 하나씩 점령해 나갔다.
정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보두앵 1세는 순순히 항복하는 도시에는 비교적 관대한 조치를 취했으며 카이사레아 처럼 반항하는 도시에 대해서는 예루살렘 학살에 맞먹을 만큼 잔인한 보복을 가해 주변에 본보기를 보였다. 이렇게 1101년의 영토 팽창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아스칼론 전투의 패배를 설욕할 준비를 해온 알 아흐딜과 이집트 군은 아직 팔레스타인 지역과 성지 예루살렘을 완전히 포기한게 아니었다. 알 아흐딜은 2년전의 굴욕을 다시 설욕할 목적으로 다시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알 아흐딜의 설욕은 성공하지 못했다. 훗날 제 1차 람라 전투 (Battle of Ramla) 라 알려진 이 전투는 사드 엘 다울리 (Saad el-Dawleh) 가 이끄는 1만의 이집트 군이 불과 260명의 기병과 900명의 보병을 가진 십자군에 패배한 굴욕적인 전투였다.
1101년 9월 7일 벌어진 람라 전투는 고드프루아 드 부용 때문에 점령하지 못한 이집트 군의 교두보 아스칼론을 통해 들어온 이집트 군과 예루살렘 왕국군과의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보두앵 1세는 직접 군대를 지휘해서 적을 격파했으며 이집트 군은 다시 아스칼론 까지 그대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이 전투에서 이집트 군은 적은 수에 적에게 압도당해 공포에 빠져 후퇴하는 추태를 보였다. 반면 보두앵 1세는 이집트 군 진지를 약탈해 풍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물자가 풍부한 이집트 군은 아직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었다. 이야기는 다시 1102년의 제 2차 람라 전투로 이어진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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