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무슬림 세력의 상황
1차 십자군 전쟁에서 가장 처절한 전투였던 안티오크 포위전을 설명하기에 앞서 당시 이 지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본래 안티오크는 오랜 세월 로마 및 비잔티움 제국의 도시였다. 이 도시가 무슬림 세력에 넘어간 것은 1085년이었으니 비잔티움 제국의 입장에선 사실 적의 손에 넘어간지 12년 정도 밖에 안되는 것이있다.
(다시 보는 지도 - 이 지도는 1차 십자군 이후의 지도이지만 일단 여기에서 안티오크와 알레포(Aleppo), 다마스쿠스 (Damascus) 및 예루살렘등의 위치를 확인하자.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MapMaster )
앞서 이야기 했듯이 본래 대셀주크 제국의 마지막 통일 지배자였던 말리크 샤 1세의 사후 셀주크 제국은 여러 제후들에게 분열된 상태였다. 이 와중에서 팔레스타인에 여러 지역의 통치자들은 사실 반독립 상황에 놓여있었다.
일단 이야기의 중심인 안티오크의 경우 본래 말리크 샤 1세의 투르크 노예 였던 야기 시안 (Yaghi Siyan) 이 1088년 이후 이 도시를 통치하고 있었다. 사실 그가 섬기던 군주는 말리크 샤의 동생이자 시리아의 군주 투투시 1세 (Tutushi I) 였다. 투투시 1세는 알레포, 다마스쿠스, 안티오크 등을 포함하는 시리아의 지배자였지만 그 시기는 길지 못했다.
1095년 투투시 1세가 사망했을 때 마침 그의 왕위를 이어 받은 것은 바로 투투시의 아들인 알레포의 리드완 (Fakhr al-Mulk Radwan ) 이었다. 약육강식의 원리에 지배를 받던 셀주크 투르크의 지배자들은 친족끼리라도 피의 보복을 주저하지 않았는데, 이 알레포의 리드완은 특히 이 원리에 충실했다.
일단 왕위를 물려받게 되자 리드완은 이를 튼튼히 할 목적으로 우선 알레포에서 그의 형제들을 죽이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 운좋게 알레포를 빠져나간 인물이 있었으니, 그의 동생인 두카크 (Abu Nasr Shams al-Muluk Duqaq ) 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다마스쿠스로 탈출해 이 지역의 군벌들에게 통치자로 옹립되어 형과 대립하기 때문에 다마스쿠스의 두카크라는 명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형제들은 상호간 극단적인 대립 관계였다. 형인 알레포의 리드완은 사실 아타베그 (Atabeg 본래 어린 왕자의 교육과 보호를 담당하던 직책이었으나 나중에는 어린 형식상의 군주 대신 통치를 하는 사실상의 지배자를 뜻했다) 인 야나 앗 다울라 알 후세인 (Janah ad-Dawla al-Husain) 에 의해 옹립되었다. 사실 아타베그가 알레포의 실권자이긴 했지만 아직 젊은 리드완 역시 단순한 허수아비는 아니었다.
리드완은 살인, 폭력등의 수단에 잘 의존했는데, 특히 역사 뿐 아니라 대중 문화에서도 익숙한 아사신 파 와 연관이 있었다. 한편 동생인 다마스쿠스의 두카크의 경우는 자신을 죽이려 하는 형과 아사신 파를 항상 두려워했다.
투투시 1세가 죽기 무섭게 두카크, 일가지, 야기 시안은 서로 연합해서 리드완과 전쟁을 벌였으나 이 전쟁에서는 리드완이 우세했다. 리드완은 다마스쿠스까지 적을 밀어부쳤고, 야기 시안은 결국 적대 정책을 포기하고 자신의 딸을 리드완에게 시집보네서 그와 연합할 수 밖에 없었다.
1097년 당시 안티오크의 지배자인 야기 시안은 이런 복잡한 상황 한 가운데 놓여 있었다. 일단 그는 리드완과 동맹이었다. 그러나 야기 시안은 자신의 사위가 자신의 영토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다. 따라서 야기 시안은 다마스쿠스의 두카크와도 은밀히 연합하고 있었다.
이 복잡한 상황을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안티오크라는 도시의 특수성이었다. 불과 10여년 전까지도 비잔티움의 영토였던 이 도시는 본래 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고, 동방의 주요 총대주교좌중 하나인 유서 깊은 기독교의 도시였다.
도시 안에는 그리스 정교회를 비롯, 아르메니아 정교회와 시리아 정교회 등 여러 종파의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기독교도들이 자신의 본래 지배자인 비잔티움 제국에 동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은 야기 시안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이 생각하기에도 합당해 보였다.
따라서 1097년 10월, 3만이 넘는 십자군이 안티오크로 접근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야기 시안이 행했던 조치는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불가피한 것이었다. 야기 시안은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그리스 및 아르메니안 정교회 신자들은 도시 밖으로 추방했다. 반면 자신에게 충성하는 편인 시리아 정교회도들은 도시에 남겼다. 그리고 성벽의 보수등 필요한 준비를 서둘렀다.
11. 1차 안티오크 포위 (Siege of Antioch, first siege 1097. 10. 20 - 1098.6.3 )
한편 이야기의 본 주인공인 십자군은 험난한 아나톨리아의 산맥들을 넘어 1097년 10월 20일에는 마침내 안티오크 외각인 오론테스 강에 도착했다. 이들이 안티오크에 도달하자 그들은 새삼스럽게 자신들의 과업의 어려움을 깨달았다.
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제국 시절을 이어가며 견고하게 증축된 안티오크의 성벽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였다. 산과 강을 끼고 건설된 12km 길이의 성벽은 튼튼했으며, 오론테스 강이 흐르는 서쪽 방면은 지중해에서 가까워 물자를 보급받기 쉬웠기 때문에 포위자들 이 도시를 완전히 포위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이 도시가 가장 마지막에 투르크 족에 정복된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실푸스 산을 낀 안티오크의 성벽 :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비록 야기 시안이 거느린 병사는 6,7천에도 이르지 못할 정도였고, 도시의 주민은 4만명에 불과했으나 이 요새도시는 다시 한번 그 난공불락의 명성을 과시했다. 더구나 본래 20만 이상이었던 도시의 인구가 주는 덕분에 내부의 토지에서 많은 식량을 자급할 수 있어 식량도 쉽게 고갈되지 않을 형편이었다.
사정이 이러니 오히려 곤란한 것은 바로 십자군들이었다. 이들이 가진 식량은 역시 충분하지 못했다. 만약 포위전이 길어진다면 오히려 포위하는 측이 곤경에 빠질 참이었다. 여기에 1차 십자군의 고질적인 문제가 다시 한번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명확한 최고 사령관의 부재 - 비록 보에몽이 여기에 제일 가까웠기는 했지만 - 에 따른 지휘 체계의 혼선이었다.
선발대를 이끌고 도착한 것은 고드프루아 드 부용, 보에몽, 레몽 4세였다. 이 도시에 도착하자 레몽 4세는 적이 응원군을 부르기 전에 바로 공격에 들어갈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고드프루아와 보에몽은 포위전을 주장했다. 스스로를 지휘관으로 생각하는 레몽과 보에몽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레몽 4세가 내키지는 않지만 이 제안에 동의함으로써 십자군은 도시를 둥그렇게 둘러싸고 포위하기 시작했다. 다음날인 10월 21일에는 기본적인 포위망이 형성되었다.
안티오크의 북동쪽에는 보에몽의 부대가 성 바울문 (Gate of St Paul) 밖에 진지를 구축했다. 레몽의 진지는 서쪽의 개의 문 (?) (Gate of the Dog) 에 구축되었다. 고드프루아는 이보다 더 서쪽에 진지를 구축했는데, 오론테스 강에 배다리를 놓고 여기에서 탈란키 마을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성의 남동쪽은 실푸스산이 존재하고 있었고, 여기에는 십자군이 다 포위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야기 시안은 이를 통해 식량을 들여올 수 있었다고 한다.
(안티오크 전투의 중세 기록화. 포위하는 쪽이 십자군인 점으로 봐서 1차 포위이다. 그림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이 도시는 기독교 도시라고 할 수 있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한편 야기 시안 입장에서도 곤란한 문제는 있었다. 그것은 이 큰 도시를 방어하기에는 병력이 충분치 못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일단 야기 시안은 그의 잠재적인 동맹인 다마스쿠스의 두카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 소심한 동맹으로부터 지원을 얻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두카크는 사실 십자군보다 형이 더 두려웠다. 그가 십자군을 공격할 때 형의 군대가 등뒤에서 공격을 가할 지도 모르는데, 이런 위험을 무름쓰고 이교도와의 성전을 벌일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이 시기에 이슬람 세계가 힘을 합쳤다면 십자군은 큰 곤경에 빠졌을 것이다. 아니 적어도 두 형제만 힘을 합쳤더라도 다른 결과가 나왔을 수 도 있었다. 그러나 십자군은 이번에도 무슬림들의 대립과 분열로 이득을 봤다.
그러나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는 야기 시안은 그이 아들을 보내 계속해서 다마스쿠스의 지배자를 설득했다. 마침내 두카크가 무거운 몸을 일이킨 것은 포위가 2달이나 계속된 12월 말에 이르러서 였다.
한편 이 시기에는 십자군도 다른 이유로 곤경에 빠져 있었다. 역시나 식량이 모자라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록 제노바 함대를 통해 중간에 약간이 식량을 공급 받기는 했으나 이를 가지고는 도저히 겨울을 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십자군 지휘관들은 결국 식량을 구하기 위해 병력을 차출해서 주변으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1097년 12월 말 보에몽과 플랑드르의 로베르는 2만의 병력을 이끌고 나섰고, 병으로 앓아누운 고드프루아를 대신해서 레몽 4세가 남은 부대를 책임졌다. 한편 야기 시안으로써는 바로 이때가 포위를 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안티오크의 무슬림 군은 12월 29일, 야음을 틈타 성 바울문 쪽에서 총공격을 감행했다. 야기 시안의 병력은 오론테스 강 너머의 탈란키까지 공격했지만 노련한 군인이었던 레몽 4세의 활약으로 결국 포위를 뚫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보에몽과 로베르가 이끄는 군대는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두카크가 이끄는 다마스쿠스 군대와 마주쳤다. 이날(12월 30일) 의 전투 결과는 일단 십자군의 승리였다. 소심한 다마스쿠의 지배자는 즉시 병력을 거두어 돌아갔고, 다시는 안티오크를 지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십자군은 승리를 기뻐할 여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결국 식량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12월 30일 발생한 지진과 그 뒤에 수주간 계속된 비는 공격하는 측을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문제는 바로 식량 부족으로 인해 발생한 기아였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1098년 초에 발생한 기아로 인해 십자군 7명 중 1명이 사망했으며, 말도 700마리를 제외하고 다 죽었다고 한다. 일부 십자군들은 살기 위해 죽은 말은 물론 죽은 무슬림의 시체를 먹었는데, 이렇게 식인종으로 변모한 사람들 중에는 이전에 민중 십자군의 잔존 세력으로 이전에도 비슷한 일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십자군의 처지는 매우 비참해졌다. 그들은 추운 비를 맞으며, 진창으로 변한 진지안에서 쫄쫄 굶고 있었다. 여기에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일이지만 외지인인 십자군에게는 신의 징벌로 생각되는 지진까지 발생하자 십자군들은 참회의 기도를 하고 진지안에서 매춘부를 내치며 - 중세에 군대에는 이렇게 비전투원이 많이 따라 다녔다 - 어차피 먹을 것이 없긴 하지만 금식 기도를 하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십자군들이 죄가 많기는 해도 신앙심은 나름대로 깊었던 듯 싶다.
일부 십자군은 살기 위해 도망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 중에는 1차 십자군에 합류한 은자 피에르도 같이 있었다고 한다.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그는 아직까지 살아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탈영중에 붙잡혀 탕크레드의 병영으로 끌려왔다고 한다.
한편 이전부터 서로를 불신해 왔던 비잔티움 제국과 십자군이 결정적으로 갈라진 것도 이 시기였다. 비잔티움의 장군으로 병력 지원 및 군사 자문을 하기 위해 십자군과 합류했던 타티키오스가 1098년 2월 갑자기 병력을 이끌로 비잔티움 으로 철수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안나 콤네나 공주의 기록에 따르면 타티키오스가 십자군과 결별했던 것은 보에몽 덕분이었다고 한다. 일단 십자군은 이 비잔티움 장군의 충고를 전혀 따르지 않았고, 사실 이 단계에서는 비잔티움 제국의 용병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여기에 보에몽은 타티키오스에게 한가지 고마운 충고를 했는데 그것은 비잔티움 제국이 적과 내통한다고 생각하는 다른 십자군 지휘관들이 그를 암살하려 한다고 은밀히 알려준 것이다.
결국 타티키오스는 이 충고를 받아들여 십자군 진지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비잔티움 군대가 떠나자 마자 보에몽은 이에 강력히 항의했다. 그는 비잔티움 제국의 신의없음을 비난했으며, 만약 이 도시 (안티오크) 가 함락되는 날에는 제국이 아니라 자신이 이를 접수하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이것이 이 교활한 노르만 전사의 치밀한 계산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1098년 2월에도 무슬림들의 통일되지 못한 공격은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알레포의 리드완이 구원병력을 보내온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2월 9일 하림에서 적에게 격파되었다. 이미 늦은 이야기긴 하지만 형제가 협력해서 병력을 합쳤다면 아마 십자군도 식량 부족과 함께 큰 곤경에 빠졌겠지만 신의 도움인지 이 형제는 죽어도 서로는 협력하려 들지 않았다.
한편 3월에 되자 십자군에게도 좋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것은 서 색슨의 세르딕 왕조의 마지막 남성이자, 자칭 영국 국왕 에드가 (Edgar (the) Ætheling) 가 함대를 이끌고 지원 병력과 함께 도착한 것이다. 이 인물은 정복왕 윌리엄 이후의 노르만 왕조에 밀려난 이후 머나먼 비잔티움 까지 와서 바랑인 경호대의 일원으로 활약하다가 십자군을 지원하기 위해 공성무기등 보급품을 가지고 3월 4일 시메온 항을 통해 도착한 것이다. 십자군은 이를 고맙게 받았지만 비잔티움 제국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은 부인했다.
아무튼 새로운 공성무기에 얻은 십자군은 이를 진지로 이송했다. 이 작업에는 보에몽과 레몽이 같이 참가했는데, 이는 서로 화해를 해서가 아니라 이 중요한 무기를 서로에게 맞길 만큼 서로를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3월 6일 이를 탈취하려는 투르크 군대의 공격이 있었고, 고드프루아의 도움이 없었다면 공성무기도 잃을 뻔 했다.
봄이 되자 식량 사정은 하결 나아지긴 했지만 역시 안티오크는 난공 불락이었다. 한편 십자군에게는 좋은 뉴스와 나쁜 뉴스가 동시에 들려오고 있었다. 좋은 뉴스는 셀주크와 종교적 / 정치적으로 대립중인 파티마 왕조로부터 동맹 제의를 받은 것이고, 나쁜 뉴스는 모술의 지배자인 아타베그 카르부카 (Karbogha) 가 십자군을 공격하기 위해 대군을 집결시켰다는 것이었다.
사실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는 바그다드의 경쟁자와 비슷하게 실권을 잃고 그 신하들이 사실상의 지배자인 상황이었다. 그들은 십자군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들이 비잔티움 제국의 용병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비잔티움 제국과 사이가 좋았던 - 왜냐하면 셀주크 투르크라는 공통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 파티마 왕조의 입장에서는 이들과 충분히 협상의 여지가 있어보였다.
재미있는 것은 이 때 (1098년 4월) 십자군의 협상단에는 무슨 생각인지 은자 피에르가 끼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 협상은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는데, 이는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꼭 자신들이 가지겠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파티마 왕조 입장에서는 이 도시는 자신들의 것이었다.
12. 안티오크의 함락
한편 한편의 해프닝 같은 이 사건 이후에는 더 위협적인 사건이 발생하고 있었다. 바로 모술의 지배자 카르부카가 대군을 소집한 것이다. 그는 다른 투르크의 지배자들 처럼 셀주크의 노예 출신이었다. 그는 형식상의 어린 지배자를 모시면서 실권을 휘둘렀는데, 이는 당시처럼 셀주크의 군주가 어린 자식들을 남기고 죽는 일이 많는 경우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일이었다. 이들 아타베그는 사실상의 지배자로 인식되었다.
(역시 다시 보는 지도지만 안티오크, 알레포, 에데사, 그리고 모술의 위치를 확인하자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MapMaster )
1098년 5월이 되자 모술의 지배자는 충분한 병력을 모아 십자군을 정벌하기 위해 떠났다. 이 때가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의 도움 혹은 징벌 (이는 보는 진영에 따라 다르겠지만) 인지 결국 카르부카는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그것은 1098년 3월 에데사의 백작이 된 보두앵 때문이었다. 카르부카는 잘못하면 혹시 에데사와 안티오크 사이에 끼어 양쪽에서 협공을 당하게 되는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불경한 자들을 공격하기 위한 성전을 주장하고 나서긴 했지만 당시 무슬림 세계의 상황을 고려하건데 자신이 조금만 어려운 지경에 처하면 자신의 권력을 같은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 빼앗기게 될 우려가 컸다.
카르부카는 거의 3주에 걸쳐 에데사를 공격했다. 그리고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자 마침내 안티오크가 함락된 것이다.
이 난공불락의 요새가 함락된 것은 이전 1085년의 함락과 비슷한 이유였다. 바로 배신이었다.
보에몽은 안티오크의 두자매의 탑을 지키던 아르메니아 인인 피루즈 (Firouz) - 갑옷 제조인이었다고 한다 - 와 은밀히 접촉했다. 그리고 피루즈는 십자군을 위해 사다리 (혹은 밧줄)를 놓아 주기로 했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배신을 한 이유는 그의 아내가 투르크 장교의 아내와 바람이 나서라고도 하고, 혹은 불법 축재 때문이라고 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 결과는 엄청났다. 1098년 6월 3일 새벽 도시에 침투한 십자군들은 이 도시를 마침내 점령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보에몽은 주도적인 역활을 했으며, 그로 인해서 이 도시의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수많은 십자군이 도시로 들어왔는데, 그들은 도시를 점령만 한게 아니라 철저히 약탈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사실 이 도시는 본래 기독교들의 도시였고, 당시에도 많은 기독교인들 - 시리아 정교회를 포함하여 - 이 도시내에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굴할 십자군은 아니었다. 그들은 막대한 전리품을 약탈하므로써 지난 반년간의 포위전의 댓가를 얻었다.
(안티오크의 학살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야기 시안은 결국 이 와중에 죽었다. 도망치는 와중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한편 그의 아들인 샴스 알다울라를 포함한 투르크 군은 도시내의 한 요새에 바리케이트를 쌓고 계속 저항을 지속했다. 그들은 카르부카의 응원군이 도착할 때 까지 저항했다.
한편 이 도시의 함락은 예기되었던 갈등을 증폭시켰다. 보에몽은 자신이 도시의 함락에 결정적인 역활을 했으며, 비잔티움 제국의 신의 없음을 들어 자신이 이 도시의 지배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레몽은 - 아마도 보에몽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 이 도시가 황제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머지 지휘관들은 절망적인 상황에 지쳐 그냥 보에몽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이들의 승리의 기쁨은 잠시 뿐이었다. 왜냐하면 카르부카가 대군을 이끌고 나타나 이 도시를 다시 포위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서로 입장을 바꿔서 2차 안티오크 포위전이 시작된 것이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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