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101년 십자군의 배경
1101년에 예루살렘 왕국의 기틀이 잡힐 무렵 서유럽에서는 새로운 십자군 군대가 출발했다. 그 원인은 앞서 이야기 했듯이 인력 부족이었다. 1100에서 1101년 사이 심각한 인력 부족에 시달리던 1차 십자군은 적대적인 현지인들로부터 병력을 보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서유럽 각지에서 새로운 십자군 용사들이 참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문제는 예루살렘 함락과 아스칼론 전투 이후 대규모 병력이 서유럽으로 철군하면서 더 심각해졌다.
이에 유럽 각지에서 산발적인 십자군 지원군이 조직되었다. 그런데 그 중 일부는 다소 친숙한 인물들도 있었다. 1차 십자군에서 위신이 제대로 서지 못한 지휘관들이 다시금 참여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바로 블루아 백작 (스테판 혹은 에티엔 앙리), 위그 백작 (위그 드 베르망두아) 그리고 마지막에 현지에서 합류한 레몽 4세 (툴루즈의 레몽) 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이 십자군은 소심한 자들의 십자군 (Crusade of Faint - Hearted) 라는 조소에 가까운 명칭으로도 불렀다. 사실 이후의 행동을 보더라도 이 명칭은 꼭 잘못되었다고 만은 할 수 없는 군대였다. 성지를 탈환하고 유럽으로 자랑스럽게 금위환향한 노르망디의 로버트 2세와 플랑드르의 로베르 2세는 이런 패잔병들이 모인 듯한 군대에 합류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현명한 판단이었음이 곧 드러났다.
한편 유럽 각지에서 일부 군대가 새로이 결집되었는데, 사실 이들 중 일부는 정예한 군대라기 보다는 1차 십자군과 최초의 민중 십자군의 중간 정도에 속하는 적합하지 못한 수준의 군대에 불과했다. (다만 모두가 그런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통일성과 지휘체계가 심각하게 결여된 군대였다.
아마 이들 중 일부는 1차 십자군의 성공을 보고 새로운 기회를 노린 어중이 떠중이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또 그들 중 상당수는 성지에서 종교적 보상 (즉 성지 순례와 천국에 이르는 길)을 보상 받고자 길을 떠났다. 종교가 지배하던 중세시대에 천국의 약속은 매우 큰 보상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주로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롬바르디아 (지금의 이탈리아 북부) 에서 모인 군대였다.
이 십자군은 그 시기에 따라 1101년의 십자군 (Crusade of 1101) 으로 불리며 정규 십자군 병력 사이에 끼인 마이너 십자군 (Minor Crusade) 라고 불리운다. 이런 마이너 십자군들을 일일이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지 모르지만 희극으로 시작해 비극으로 끝난 1101년의 마이너 십자군과 정말 먼거리를 달려온 노르웨이 십자군은 간략히 설명해 보고자 한다.
사실 1101년 십자군은 완전히 통일된 운동의 명칭은 아니었다. 크게 세개의 지역에서 별도로 출발한 별개의 군대들이 일으킨 일련의 재앙적인 결과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2. 1101년 십자군의 지휘관과 부대들
일단 다시 한번 각 지휘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이전에 설명한 지휘관에 대해서는 그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만 설명할 것이다.
블루아 백작 스테판 2세 (Stephen II, Count of Blois, in French Étienne Henri 1045 - 1102)
: 이 인물은 사실 십자군에서 가장 불운한 인물이었다. 1차 십자군 시절에도 그는 아내이자 정복왕 윌리엄에 딸인 아델라의 성화에 못이겨 참전했다. 그러나 안티오크 전투 이후 그가 보인 망신살 보이는 추태로 말미암아 십자군 원정과 성지 탈환을 통해 명성을 누리려는 아델라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고, 블루아 백작과 백작부인은 유럽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자존심 강한 아델라는 이 상황을 참지 못했으므로 다시 한번 남편에게 압박을 가했고, 블루아 백작은 어쩔 수 없이 명예 회복을 위해 다시 참전하는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간 셈이 됐다.
위그 드 베르망두아 (Hugh I of Vermandois 1053 - 1101)
: 위그 백작은 사실 안티오크 함락 이후 알렉시우스 1세에게 자문을 구하고 가능하면 지원을 얻기 위해서 안티오크에서 콘스탄티노플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이 프랑스 왕자는 힘들고 어려운 십자군 원정에 질렸는지 그 이후 돌아오지 않고 바로 프랑스로 가버렸다. 아마 위그 백작은 이미 숫자가 제법 줄어든 십자군이 예루살렘 함락에 실패할 것으로 예측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위그 백작은 본래 계획과는 달리 이전보다 위신이 더 떨어지고 말았다. 동지들이 성지 탈환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때 정작 그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시 떨어진 위신을 탈환하고자 그는 이 마이너 십자군에 참전했다. 그러나 그 역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 셈이었다.
툴루즈의 레몽 (레몽 4세, 레몽 생 질 : Raymond IV of Toulouse 1041 or 1042 - 1105 )
: 사실 레몽 4세는 이 1101년 십자군에 참가했다기 보다는 현지에 있다가 합류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고드프루아 및 보에몽과 갈등을 겪었던 레몽은 당시 비잔티움 영내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본의반 타의반으로 십자군 내에서는 친 비진티움 파가 되었기 때문에 알렉시우스 1세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 결과 오합지졸에 불과한 1101년 십자군의 선두 병력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자 레몽 4세는 이들을 통제하고 지휘하는 역활을 맡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말한다면 병사와 지휘관 모두 적합하지 않은 군대였다.
밀라노 대주교 안셀름 4세 (Anselm IV (Anselm of Buis ) = Anselmo da Bovisio, Archbishop of Milan)
: 안셀름 4세는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친구로 1097년에 밀라노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1100년 여름경에 그 전해에 있었던 예루살렘 함락에 자극을 받은 듯 했다. 한편 새로이 교황이 된 파스칼 2세 역시 처음에는 이 지역 (우트르 메르 라고 불리는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의 십자군 왕국) 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안셀름 4세에게 롬바르디아에 결집된 십자군의 지휘를 맡겼다. 이 롬바르디아 십자군은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농민들이 상당수 끼어 있어 자질 면에서 가장 뒤떨어지는 부대였다.
(밀라노 대주교, 안셀름 4세 I, the copyright holder of this work, hereby release it into the public domain. This applies worldwide.)
부르고뉴 백작 스테판 1세 (Stephen I, Count of Burgundy "the Rash" (French tête hardie))
: 부르고뉴 백작 스테판 1세는 규모는 작아도 잘 훈련된 군대를 이끌고 참가한 프랑스 영주였다. 그는 1097년 1차 십자군에 참가했다가 거의 아무런 이름도 날리지 못하고 전사한 선대 부르고뉴 백작인 그의 형 레지날드 2세 (Reginald II, Count of Burgundy)를 계승하여 부르고뉴 백작이 된 후 1101년 십자군에 참가했다. (사실 그의 형은 별 역활이 없어서 1차 십자군에서 필자는 한번도 기술하지 않았다)
느베르 백작 기욤 2세 (William II, Count of Nevers)
: 이 인물 역시 숫자는 많지 않지만 잘 훈련된 군대를 이끌고 참전한 프랑스 영주이다. 이 1101년 십자군에 참전한 이후 이후에도 살아남아 꽤 오래 살았던 점으로 미루어 정확한 탄생 연대는 미상이나 꽤 젊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나중에 2차 십자군 운동을 지지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 어는 잘 모르지만 William 이 프랑스어 Guillaume 이라고 함)
아키텐 공작 기욤 9세 (William IX, Duke of Aquitaine, Guilhèm de Peitieus in Occitan, 1071 - 1126)
: 이 아키텐 공작은 툴루즈의 레몽의 조카인 필리파 (Phillipa) 와 결혼하여 레몽 4세와는 친척이 되는 셈이다. (즉 아키텐 공작이 레몽 4세의 질녀의 남편임) 그러나 중세 시대에 흔히 그러하듯 이 둘이 사이가 좋다기 보다는 개와 고양이 같은 원수지간이었다.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아키텐 공작을 방문했을 때 교황은 공작에게 십자군 원정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이 요구를 거절했다. 그가 이 요구를 거절한 이유는 곧 드러나게 되는데, 레몽 4세가 툴루즈를 비운 틈을 타서 툴루즈를 집어 삼킬 준비를 했던 것이다. 결국 공작은 십자군 영주의 영지를 노린 때문에 파문의 위협까지 당해야 했다.
그러던 아키텐 공작이 갑자기 뒤늦게 1101년에 십자군에 합류하게 된 동기는 확실치 않다. 부분적으로는 자신의 종교적인 권위를 되찾고, 일부는 해외를 구경하기 원했기 때문에 원정에 참여했다는 설이 있다. 아키텐 공작의 둘째 아들 레몽은 나중에 안티오크의 공작이 된다.
(아키텐 공작 기욤 9세의 초상화. 중세의 그림이니 비율을 따지긴 그렇지만 키가 작고 머리가 큰 느낌이다. This image is in the public domain )
바바리아 혹은 바이에른 공작 벨프 1세 (Welf I, Duke of Bavaria - 1101)
: 이 독일 영주 역시 험난한 세월을 살았던 인물이다. 유명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황제 하인리히 4세와의 싸움에서 벨프 1세는 교황편을 들었다. 그는 이후 내전에서도 황제 편에 반대하여 반역자 루돌프 편에 섰는데, 결국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패배하고 하인리히 4세가 우세한 상황이 되자 바바리아 공작의 직위에서도 물러나게 된다. (그는 1070 - 1077년, 그리고 1096년에서 죽을때 까지 바바리아 공작이었다)
이후 아들을 교황파인 투스카니 백작부인 마틸다와 결혼시켜 교황측과 동맹을 유지하다 1095년 교황측과 갈라선 이후 다시 황제편에 돌아섰으며, 이후 그 댓가로 바바리아 공작의 지위를 다시 획득했다. 정확한 탄생연대는 몰라도 이미 나이가 많은 편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이 인물은 어떤 이유에선지 1101년 십자군에 참가하게 되었다. 결국 돌아오지 못할 원정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기타 병력으로
: 부르고뉴 공작 유데 1세 : (Eudes I, Duke of Burgundy, Eudes Ier Borel le Roux = '적색 대공 유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의 관리 콘라드 공작 (Duke Conrad)
일단 여기까지가 이 1101년의 십자군의 주요 병력이다. 이렇게 열거하면 꽤 병력이 되는 듯 하지만 실제로 병력 규모는 크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롬바르디아, 프랑스, 독일에서 독립적으로 병력이 참가하여 서로 분리되어 전쟁을 수행하였으므로 셀주크 군대에 의해서 하나씩 각개 격파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한마디로 각 부대는 잘 훈련된 군대에서 농민 잡병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어도 전체적으로 볼 때 행동이 전혀 통일되어 있지 않는 오합지졸에 무리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들은 앞으로 1101년의 무슬림 군대의 가장 인상적인 승리를 위해 진군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전체적인 병력 규모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1차 십자군에 비해 비교적 소규모 군대인 것 만은 확실하다.
각 지휘관 명단은 다음과 같다.
블루아 백작 스테판 2세 (Stephen II, Count of Blois, in French Étienne Henri 1045 - 1102)
위그 드 베르망두아 (Hugh I of Vermandois 1053 - 1101)
툴루즈의 레몽 (레몽 4세, 레몽 생 질 : Raymond IV of Toulouse 1041 or 1042 - 1105 )
밀라노 대주교 안셀름 4세 (Anselm IV (Anselm of Buis ) Archbishop of Milan)
부르고뉴 백작 스테판 1세 (Stephen I, Count of Burgundy "the Rash" (French tête hardie))
느베르 백작 기욤 2세 (William II, Count of Nevers)
아키텐 공작 기욤 9세 (William IX, Duke of Aquitaine, Guilhèm de Peitieus, 1071 - 1126)
바바리아 혹은 바이에른 공작 벨프 1세 (Welf I, Duke of Bavaria - 1101)
부르고뉴 공작 유데 1세 : (Eudes I, Duke of Burgundy, Eudes Ier Borel le Roux)
콘라드 공작 (Duke Conrad)
(다음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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