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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1차 십자군 2





 3. 1차 십자군의 지휘관들 2


 이전에 이어서 1차 십자군의 지휘관들을 소개한다.



 노르망디의 로버트 or 노르망디 공작 로버트 2세 (Robert Curthose or Robert II, 1051 or 1054 - 1134)


 : 노르망디의 로버트 혹은 로버트 2세라고 불리는 이 인물은 바로 정복왕 윌리엄 (윌리엄 1세) 의 장남이다. 그는 아버지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노르망디를 물려받아 노르망디 공작이 되어있었다. 특이하게도 영국 국왕자리는 아버지로부터 총애를 받은 차남인 붉은 머리 윌리엄 (윌리엄 2세, 혹은 윌리엄 루퍼스, rufus 는 붉은 머리란 뜻) 에게 주어졌는데, 나름대로 형제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보통 남의 떡이 더 커보이는 현상은 형제간이라고 해서 예외일 순 없다. 노르망디를 물려받은 로버트 2세나 영국을 물려받은 윌리엄 2세 모두 불만이 있었는데, 이것은 선왕의 신하들도 마찬가지 였다. 결국 아버지가 죽고 나서 상호간의 평화를 약속한 형제들은 1년도 지나지 않은 1088년 반란에 휩싸였다. 윌리엄 2세에 대항해 일어난 반란에 로버트 2세가 지원한 것이다.


 반란 세력은 노르망디와 영국의 지배자가 하나인 편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원군을 실은 로버트 2세의 군대가 폭풍으로 영국에 상륙하는데 실패하는 바람에 결국 반란은 실패했고, 형제간의 골만 더 깊어졌다.


 1차 십자군은 이런 미묘한 시기에 일어났다. 윌리엄 2세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십자군엔 별 흥미가 없었다. 그러나 로버트 2세는 정확한 동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  아마도 개인적 명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 중요한 이유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 이 원정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자신의 영지를 담보로 동생인 윌리엄 2세에게 1만 마르크를 빌려 원정대의 자금을 마련하는 열성을 보였다.



 당시 40대였던 그에 대해서는 기록이 사실 충실하지 못하다. 심지어 대군을 이끌고 원정에 참가했는데도 그러했다. 그러나 이 비운의 인물에 대해서는 1차 십자군 이후의 이야기도 약간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찌 보면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중요한 기회를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정복왕 윌리엄에게는 삼남 헨리도 있었다. 아버지는 불쌍한 헨리에게는 두 형과는 달리 영지는 주지 않고 영지를 살 수 있게 돈만 상속했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정복왕의 장남은 죽었고, 로버트 2세는 차남, 윌리엄 2세는 삼남이었다. 그러니 막내 헨리는 사실 4남이다)


 그런데 로버트 2세가 십자군 원정에 합류해서 떠난 후, 1100년 인기없던 국왕인 붉은 머리 윌리엄이 사냥터에서 화살에 맞아 죽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래서 암살설도 있다) 그러자 영국 국왕자리는 이 자리를 이전 부터 탐내던 로버트 2세에게 돌아갈 참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불쌍한 헨리 왕자가 갑자기 등장했다. 그는 십자군 원정을 떠난 형의 부재를 틈타 자신이 대관식을 거행해 버렸다. 이에 분기 탱천한 형 로버트 2세는 원정에서 급거 귀국하게된다. 담보로 잡힌 자신의 영지를 다시 사기 위해 부유한 신부와 결혼한 그는 동생 헨리와 싸우지만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불쌍한 것은 결국 로버트 2세였다. 로버트 2세는 폐위되어 수십년간 유폐되었으며, 동생 헨리 1세는 영국은 물론 노르망디까지 장악했다.


 만약 그가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그는 영국 국왕과 노르망디 공작 두 지위를 움켜쥘수 있엇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인지 십자군 원정에 참가함으로써 그의 자리는 그의 동생 헨리 1세의 것이 되었다.


 앞서 본 보두앵과 반대로 십자군 원정에 참가함으로써 모든 것을 잃어 버린 인물이 있다면 바로 이 로버트 2세였다.



(노르망디 공작 로버트 2세의 특이하게 생긴 관 : This file has been (or is hereby) released into thepublic domain by its author, en:user Auximines. This applies worldwide. Monument to Robert Curthose at Gloucestershire Cathedral.  )





 블루아 백작 스테판 2세 (Stephen II, Count of Blois, in French Étienne Henri  1045 - 1102)



 :  블루아의 스테판이라고 부르는 블루아 백작 스테판 2세는 정복왕 윌리엄 1세의 사위이다. 그는 아버지로 부터 블루아 백작의 지위를 계승했으며, 윌리엄 1세의 생전인 1080년에 아델라 공주 (Adela of Normandy) 와 결혼해서 윌리엄 1세의 사위가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에티엔 앙리로 알려져있고, 스테판은 2세는 영어 명칭이다)


 사실 십자군에 참여한 인물들은 여러가지 각자만의 이유가 있었다. 일부는 새로운 영지를 위해, 누구는 종교적 이유에 의해, 혹은 막연한 모험에 대한 기대까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이 블루아 백작 만큼 독특한 이유로 원정에 참여한 인물은 없었다.


 왜냐하면 일설에 의하면 그가 이 내키지 않는 원정에 참여한 이유는 바로 그의 드센 아내인 아델라의 등쌀에 견디지 못해서 라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정복왕의 사위로써 명성을 드높이기 위해 그는 내키지 않는 원정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가 십자군 원정에서 현지에 영지를 마련하거나 하기 보다는 바로 돌아올려고 했던 것을 보면 내키지 않던 원정을 떠난 것만은 확실하다. 


나중에 차차 설명하겠지만 이 인물은 나중에 원정에서 돌아올 때도 비슷한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2세 (Robert II, Count of Flanders  1065 - 1111)


 :  플랑드르의 로베로로 불린 로베르 2세는 사실 그 자리에 오른지 수년 밖에 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1093년 백작의 지위에 오르자 아직 팔팔한 30대였던 그는 십자군에 바로 참가했다.


 그의 아버지 로베르 1세는 알렉시우스 1세의 지지자였다. 또 로베르 2세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서 예루살렘을 순행한 적이 있었으므로, 그가 이 성지 탈환 전쟁에 참가하게 된 동기를 어림 잡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간 적이 있다면 아마 성지 순례를 박해한다는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사실도 알았지 않았을까?)



(후세에 그려진 플랑드르의 로베르의 초상화, 십자군의 주요 지휘관들 중 가장 젊었다.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Henri Decaisne )





 4. 보에몽과 탕크레드


 사실 이 보에몽과 탕크레드 역시 1차 십자군의 주요 인물에 같이 넣어 설명하려 했지만 독특한 사연을 가진 이들은 따로 설명하는게 좋을 것 같아 분리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우선 보에몽의 아버지인 로베르 기스카르 (Robert Guiscard) 부터 설명해야 할 것이다. '교활한 로베르' 라고도 번역이 되는 로베르 기스카르 (족제비란 뜻이라고 한다) 는 본래 용맹한 바이킹인 노르만 족이었다. 그는 6남으로 태어났는데, 당시 바이킹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무엇인가를 물려받기를 기대하기 보다는 새로운 모험을 찾아 떠났다.



(로베르 기스카르와 로제르 의 삽화.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동생 로제르 (Roger) 와 함께 5명의 기사와 30명의 병력만을 가지고 1047년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한 그는 이곳에서 그의 운명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앞서 설명했듯이 당시 이탈리아는 국가라기 보다는 지역을 가르키는 단어였다. 그 안에는 다양한 세력들이 서로 아귀 다툼을 할 뿐 통일된 국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전란에서 용맹한 노르만 용병은 인기가 높았다.





(1000년 경의 이탈리아 지도 Political map of Italy in 1000 AD (CE). Created by MapMaster.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



(1084년 경의 이탈리아 지도 Created by MapMaster.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


 이 지도는 앞에서도 본 지도이지만 이들의 놀라운 업적을 설명할 때도 유용하다. 소수의 병력만 가지고 온 이들은 곧 이탈리아 남부의 토착세력과 비잔티움 제국, 그리고 심지어 시칠리아의 이슬람 세력까지 몰아내고 자신의 세력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력이 커지자 교황도 이들과 손을 잡으려 했다. 1059년 교황 니콜라스 2세는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아풀리아 (Apulia), 칼리브리아 (Calibria) 및 시칠리 (Sicily) 공작의 지위를 '하사했다'라기 보다 사실을 승인했다. 이제 이 형제들에게 이탈리아 남부가 장악된 것이다.


 형인 로베르 기스카르는 아풀리아 및 칼리브리아 공작이 되었고, 동생인 로제르 1세는 시칠리아 백작령을 차지했다. (위의 그림 참조) 그러나 이들 형제의 야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교황과 동맹할 때도 있었고, 대립할 때도 있었는데, 이를 통해 이탈리아 뿐 아니라 중세 유럽의 정세에도 영향을 미쳤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교권의 수호자로 카노사의 굴욕의 주인공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역시 하인리히 4세의 로마 침공 때 이들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비록 이들이 바이킹의 피를 속이지 못하고 로마를 약탈해서 문제가 되긴 했지만


 아무튼 이들의 바이킹의 피는 정말 숨길 수가 없었던 것 같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비잔티움 제국이 심각한 위기에 빠지자 이들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도래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즉 비잔티움 제국으로의 길이 열린 것이다. 이미 그들은 남부 이탈리아에서도 제국의 영토를 장악 했으니 발칸 반도와 에게해에서도 불가능하리라는 법은 없었다.


 로베르 기스카르와 그의 일족이 일으킨 노르만 - 비잔티움 전쟁은 1080년에서 그가 죽는 1085년까지 이어졌다. 이 때 비잔티움 제국의 구원자인 알렉시우스 1세가 등장 이들의 침공을 결국 끝까지 저지 했기 때문에 훗날 십자군 원정도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 노르만 비잔티움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하나 있다. 그가 바로 오늘 소개할 보에몽이다. 그는 교활한 로베르의 장남으로 1058년 태어났는데, 보에몽 (Bohemond, Bohemund or Boamund) 이라는 이름은 태어날 때의 그의 커다란 몸집을 본 아버지가 전설적인 거인 Buamundus gigas의 명칭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그는 커서도 노르만 족 답게 키와 덩치가 제법 컸다고 한다.


 노르만 비잔티움 전쟁에서는 1082 - 1084년 사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지휘권을 맡기도 했으며, 이시기에 자신의 용맹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1085년 병을 얻어 남부 이탈리아로 돌아왔을 때 그의 아버지 로베르 기스카르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는 그의 아들들에게는 내란의 신호탄이었고, 비잔티움 제국에게는 뜻하지 않던 횡재였다.


 로베르 기스카르는 생전에 전처 알베라다로 부터 보에몽을 얻었는데, 그는 이후에 롬바르드의 공주인 시켈가이타 (Sikelgaita, Sichelgaita or Sigelgaita)) 와 다시 결혼하여 슬하에 로게르를 비롯한 자식들을 두었다.

 1085년 로베르 기스카르가 죽었을 때 그는 비잔티움 제국에 곧 탈환되는 아드리아 해 연안을 보에몽에게 상속했고, 로게르에게 아풀리아 공작등을 상속했다. 이는 장남인 보에몽에게는 참을 수 없는 조치였다. 그러나 다행히 1085년 보에몽은 귀국한 상태였고, 로게르는 그리스에서 전투 중이었다.


 이로써 유리한 고지에 선 보에몽은 곧 동생들과 전쟁에 돌입했다. 이 아풀리아 계승 전쟁에서 그는 숙부인 시실리 백작 로게르 1세와 손을 잡고 시켈가이타와 로게르와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결국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중재로 종료되었는데, 여기서 보에몽은 공작의 지위를 얻는 댓가로 약간의 영토를 얻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새로이 타란토 공작 (Duke of Taranto)이 된 보에몽은 공작의 지위를 아버지로 부터 물려받게 된 점에 만족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탈리아 반도 남쪽의 좁은 영지는 여전히 불만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십자군에 참가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었음이 분명하다.


 사실 그는 10여년 전만 해도 비잔티움 제국과 죽기로 싸운 용맹한 전사였다. 그런 그가 갑자기 비잔티움 제국을 돕겠다고 나선 것 하나만으로도 주변인들은 물론 비잔티움 인들과 알렉시우스 1세를 경악시킨 상태였다. 그러나 교활한 로베르의 아들답게 그 역시 술책에 능했고, 어제와 적과 동맹하는 것에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흔히 바이킹 하면 무식하고 용맹한 저돌적인 용사들을 떠올리게 되지만 그들 중 일부는 교육 정도와는 무관하게 비상한 머리를 지닌 이들이 있었고, 또 교활하기 까지 했다. 이 보에몽 또한 그러했던 것이다.


 사실 십자군 모집 당시 보에몽은 숙부인 로게르 1세를 도와 반란을 일으킨 이탈리아의 주요 상업도시인 아말피를 공격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기회가 왔음을 눈치챈 보에몽은 즉시 군대를 돌려 별로 얻을 게 없는 이 공격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같은 기독교인들을 공격하던 군대를 이끌고 이교도와의 성전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안티오크 공방전에서의 보에몽,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그에게는 조력자도 있었다. 바로 조카인 탕크레드 (Tancred of Taranto) 였다. 그는 보에몽의 여동생인 엠마의 아들이었다. 이 탕크레드는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그의 숙부보다 더 교활하고 기회주의적인 인물이었다.



(니콜라스 푸생의 탕크레드와 에르미니아 - 뭔가 사실과는 상당히 다른 상상화 인 듯 하다. This image is in the public domain )


 한편 이 노르만 족들의 군대에는 교활함 뿐 아니라 용맹함으로도 이름을 떨친 인물도 가담했다. 바로 앞에서 설명한 목수 윌리엄이다. 이 인물은 사실 처음에는 위그 백작의 군대에 합류했지만 안티오크 공방전 때는 보에몽의 군대에 합류해서 그 명성을 떨쳤다.


 일단 이 정도면 서유럽의 주요 십자군 지휘관들에 대한 설명은 된 듯 하다. 이들은 1096년에서 1097년 사이에 1차 집결지인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제각기 출발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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