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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1차 십자군 11





22. 1099 년 후기에서 1100년까지의 상황



 아스칼론 전투의 결과는 내분으로 병력 감소로 위기에 처한 신생 예루살렘 왕국을 구원했다. 1000년은 못가도 200년은 갈 기틀은 마련했던 것이다. 하지만 태조 (?) 고드프루아 1세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몇가지 해결되지 않는 고민거리가 있었다.


 첫번째는 여전히 그들이 적대적인 무슬림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본래 수니파를 믿는 셀주크 투르크 군주들과는 항상 적대 관계였지만 아스칼론 전투 이후는 이집트의 시아파 세력과도 적대 관계가 되었다. 여기에 비잔티움 제국도 더 이상 그들에게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십자군과 고드프루아 1세에게는 다행하게도 여전히 무슬림 군주들은 이교도가 아니라 다른 무슬림 교도들이 더 큰 위협이라고 보고 서로간에 전쟁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미 형제간을 피를 흘리는 내전을 거친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에게는 한동안 더 이상의 내전은 없었지만 아직 말리크 샤의 네 형제가 살아있는 셀주크 투르크의 경우는 달랐다.


 이 형제들 중 모술과 알레포, 다마스쿠스의 명목상의 지배자인 바르키야루크 (Barkiyaruq) 는 이교도와의 전쟁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보다는 바그다드를 차지한 자신의 형제인 무함마드 1세 (Muhammad I) 와의 전쟁이 더 중요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바그다드는 무슬림 사이에서 매우 중요한 도시일 뿐 아니라, 비록 실권은 없지만 이 도시에 있는 수니파 무슬림의 정신적 지주인 칼리프 알 무스타지르를 보호한다면 상당한 명분상의 실리가 있었다. 마치 삼국지의 조조가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했듯이 말이다. (협천자 영제후(挾天子領諸侯))


 따라서 예루살렘 함락과 아스칼론 전투, 그리고 예루살렘의 함락이라는 사건이 일어날 때 바르키야루크는 무함마드 1세와의 전쟁에서 우세한 고지를 장악하고 바그다드를 점령한 상태였다. 그러나 1099년 10월에는 다시 무함마드 1세가 이 도시를 장악했다. 그러나 백마 고지 전투처럼 처절한 형제간의 전투는 끝난게 아니었다. 다시 1100년 1월 바르키야루크는 이 도시를 다시 장악했다. 하지만 역시 1100년 봄에는 다시 물러났다. 다음해가 되자 역시 연례 행사처럼 바그다드의 주인은 바르키야루크가 되었다.


 이렇듯 같은 형제들끼리 같은 수니파 무슬림들은 동원해서 전쟁을 벌여야 하는 중대한 과제가 있었기 때문에 안티오크, 마라트 알 누만, 예루살렘과 그 밖에 지역에서 수많은 무슬림들이 학살당하는 문제는 적어도 이들에겐 시급한 과제가 아니었다. 물론 신생 예루살렘 왕국과 고드프루아 1세로썬 천만 다행한 일이었다. 여기에 아스칼론 전투 이후에는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도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해서는 관심이 시들해졌기 때문에 이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번째 문제는 이보다 골치가 아픈 것이었다. 신생 예루살렘 왕국이 어느 정도 자체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군사와 영토가 필요했다. 문제는 충분한 군사가 모자란다는 것이다. 많은 십자군 기사와 병사가 죽었고, 또 십자군 중 상당수가 이제는 고향으로 가기를 고대했다. 그 결과 십자군의 숫자는 많이 감소했다. 따라서 이 때 부터 향후 십자군 국가가 존속한 오랜 시간 동안 서유럽에 지속적으로 원군을 요청하게 된다.


 십자군들은 현지 무슬림 원주민들에게 적대적인 것은 기본이고 솔직히 말해서 토착 기독교도들과의 사이도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에 - 이 중에는 이 '이단' 기독교도들을 개종하려는 일부의 시도도 그 원인이었다 - 현지에서 병사를 모집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결국 성지 보호의 명분을 내세워 서유럽에서 병사를 끌어들이는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는 가깝게는 앞으로 설명할 1101 년의 마이너 십자군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세번째 문제는 고드프루아 1세에게 매우 치명적인 문제였는데, 바로 그 자신의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오랜 타향 만리에서의 원정은 그의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 것 같은데, 1100년에 이르게 되면 태조 고드프루아 1세가 머지 않아 승하하게 될 것으로 기대 (?) 되었다.


 특히 고드프루아 가 죽으면 그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있었던 이들이 그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보에몽 1세와 보두앵 1세 그리고 피사의 대주교이자 교황의 전권 대리인 다임베르트 혹은 다고베르트 (Daimbert or Dagobert of Pisa - 이후 다임베르트로 통일) 였다.





 23. 다임베르트



 당시 고드프루아 에게는 확실한 후계자가 없었으므로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를 노릴 야심가들은 도처에 널려있었다. 첫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고드프루아 1세의 동생인 에데사 백작 보두앵 1세였다. 다른 십자군 지휘관에 비해서 눈에 띄는 지휘관은 아니지만 일단 태조 고드프루아의 동생으로 자격이 있었고, 상대적으로 에데사 백작령에 머물면서 세력을 그대로 유지한 덕에 이제는 십자군 중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되어 있었다.


 두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안티오크의 보에몽 1세였다. 이 교활하고 용맹한 십자군 전사는 안티오크라는 먹음직스런 도시를 장악했지만 여기에서 만족할 야심가는 아니었다. 그가 예루살렘 왕국이라는 더 큰 먹이를 노릴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한편 그전에 왕위를 제안받기도 했던 보에몽의 숙적 레몽 4세 또한 세번째 후보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레몽은 이미 많은 신망을 잃은 터에 그 자신도 건강이 좋은 편이 못되었기 때문에 이 결정적인 왕위 쟁탈전에서 우위에 설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설명할 유력한 후보이자 또 이전 포스트에서 이름만 언급하고 넘어갔던 새로운 다크호스는 바로 교황의 특사 다임베르트였다. 다임베르트는 1085년 최초의 피사의 대주교 (Archbishop of Pisa) 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다시 1092년에는  교황 우르바노 2세에 의해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두 섬까지 자신의 교구로 장악했다.


 1098년 안티오크 전투 이후 교황이 임명한 십자군 지휘관 아데마르 주교가 사망한 후 한동안 십자군의 영적 지휘관 자리는 비어 있었지만 1099년 예루살렘 함락이후 노르만계 주교인 코퀘스의 아르눌프 (Arnulf Malecorne of Chocques (or of Rohes)) 가 예루살렘의 주교가 됨으로써 이 공석은 채워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우르바노 2세의 후계자인 교황 파스칼 2세는 아르눌프 대신 피사의 다임베르트 대주교를 파견했다. 새로운 예루살렘 왕국에서 자신의 몫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아데마르 주교의 정식 후임인 다임베르트는 이 신생 예루살렘 왕국의 전체나 적어도 일부를 교황령 처럼 교회에 귀속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이 경우 다임베르트 또한 왕위 계승에 참여할 수 있었다. 사실 이 피사의 대주교는 마지막 까지 아주 강력한 계승 후보였다.


 중세시대 강력한 상업도시였던 피사는 (물론 나중엔 베니치아와 제노파에게 밀리지만) 이 대주교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던 것 같다. 다임베르트는 성직자 답지 않게 중무장된 피사의 함대를 이끌로 서서히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더 성직자 답지 않는 일은 항해중에 비잔티움 제국의 섬들을 공격한 것이다. (1099년)


 이에 분개한 비잔티움 함대의 추격을 따돌린 다임베르트와 피사 함대는 보다 큰 먹이감인 키프로스 섬을 공격하려고 시도하기도 했지만 일단은 그들의 본래 목표인 새로운 영토 장악을 위해 지중해 동부 해안에 상륙했다.


 다임베르트의 부대가 처음 도달한 곳은 보에몽이 지배하는 안티오크 공작령의 연안이었다. 여기서 서로 비슷하게 교활하고 탐욕스런 보에몽 1세와 다임베르트가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보에몽 1세는 다임베르트를 보자 마자 다시 한번 충성을 바쳤고 - 물론 이 충성심을 믿을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 다임베르트와 피사의 함대는 기꺼이 세속적인 욕망을 위해 보에몽 1세와 의기 투합했다.


 이 동맹을 통해서 보에몽 1세는 그가 비잔티움 제국 군대에 비해서 항상 모자라던 부분인 해군을 보충할 수 있었고, 다임베르트는 지상군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들이 첫번째 목표로 삼은 것은 이교도인 무슬림 세력이 아니라 같은 기독교를 믿는 독립 도시인 라타키아였다. 시리아 연안의 해안 도시인 라타키아는 십자군의 거듭된 공격에도 잘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보에몽과 다임베르트가 육지와 바다에서 협공한다면 함락될 가능성이 있었다.





(라타키아 - 시리아 연안의 도시로 안티오크 남쪽에 있다. CCL 에 따라 동일 조건하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NordNordWest)



 아스칼론 전투이후 북상하고 있던 레몽 4세와 노르망디의 로버트 2세, 플랑드르의 로베르 2세는 이 소식을 듣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탐욕스런 보에몽은 물론 피사의 함대와 교황의 전권대리인 다임베르트가 함께 시라아 연안의 기독교 도시를 공격한다는데 분개했다. 특히 로버트 2세와 로베르 2세는 집으로 가기 위해 비잔티움 제국으로 가는 길이었으므로 다임베르트의 행동으로 인해 곤경에 처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가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결국 레몽을 비롯한 십자군 지휘관들은 보에몽 1세와 다임베르트에게 강력히 경고했다. 또 알렉시우스 1세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으므로 결국 보에몽 등은 라티키아를 점령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황제도 자신에게 다시 화해의 몸짓을 보낸 이들에게 화답했다. 노르망디의 로버트 2세와 플랑드르의 로베르 2세는 그 덕분에 무사히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고향을 갈 수 있었다. 비록 고향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운명은 서로 달랐지만. 


 이렇게 기독교 도시를 점령하려는 다임베르트의 시도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렇다고 그가 실망하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보다 큰 먹이가 눈앞에 있었다. 1099년 말 고드프루아의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소식이 그에게 까지 들렸던 것이다. 이제 보다 큰 것을 노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서둘러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그런데 새로온 다임베르트가 그 소식을 들었다면 보에몽 1세와 보두앵 1세라고 그 소식을 듣지 못했을리가 없었다. 결국 이들은 모두 1099년 말 예루살렘을 향하게 되었다. 





 24. 보두앵 1세의 즉위



 한편 아스칼론 전투 이후 이 지역에 남기로 작정한 십자군 지휘관들은 1099년 후반에 주변 지역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 중에서 탕크레드는 고드프루아로 부터 새로이 점령지를 인정받아 갈릴리 공작령 (Principality of Galilee) 의 주인이 되었다.


 이 새로운 갈릴리 공작령은 티베리아스 (Tiberias) 를 수도로 갈릴리 일대를 지배했으며 1187년 살라딘에의해서 점령될 때까지 존속한 공작령으로 예루살렘 왕국의 4대 영주국 가운데 하나였다. 일종의 서유럽식 봉건제가 팔레스타인 지역에 도입된 것이다.


(사해 (Dead Sea) 에서 갈릴리 해 (Sea of Galilee) 까지 지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 (Judea) 지역과 북쪽 사마리아 (Samaria) 지역, 그리고 더 북쪽의 갈릴리 (Galilee) 지역이 표시되어 있다. CCL 에 따라 동일 조건하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Nichalp.)



 이후에는 자파항을 중심으로 자파 백작령도 같이 세워지게 된다. 또 주변의 무슬림 지배 도시에서도 안전을 위해 조공을 받치는 지역이 늘어나면서 신생 예루살렘은 다소 안정세를 보였다. 고드프루아가 위독한 것을 빼고 나면 말이다.


 상처입은 아프리카 물소가 죽기를 기다리면서 따라가는 하이에나처럼 다임베르트와 보두앵 1세, 보에몽 1세는 1099년 12월에는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다임베르트는 우선 현직 예루살렘 주교인 아르눌프 부터 파면시키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 다음 다임베르트가 요구한 것은 바로 예루살렘 이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자체를 넘기라는 요구에는 고드프루아도 순순히 따를 수 만은 없었다. 성지 예루살렘을 장악하면 그 다음은 우트르 메르라 이름 붙은 십자군 국가 전체를 장악하려 들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고드프루아가 예루살렘 왕국의 지배자로 있을 수 있는 것은 이 성스러운 도시의 지배자이고 그리스도 교의 가장 성스러운 교회인 성묘교회의 수호자 (advocatus sancti sepulchri = defender of the Holy Sepulchre) 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를 넘기는 것은 왕국 자체를 넘기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다임베르트의 압박에 고드프루아는 십자군이 이집트를 정복하면 이곳에 세속적인 국가를 건설하고 예루살렘은 교황에게 바친다는 서약을 했다.


 한편 이러한 다임베르트의 거칠것 없는 탐욕은 고드프루아의 동생 보두앵 1세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다임베르트에게 충성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이후에 바로 자신의 영지인 에데사로 돌아가 버렸다.


 다음해인 1100년 중반에는 아직 점령되지 않은 도시인 자파항을 공격하는데 다임베르트도 동행했다. 결국 이 도시는 점령되고 자파 백작령이 건설되게 되지만 여기서 뜻하지 않은 문제가 생겼다. 바로 전부터 건강이 좋지 못하던 고드프루아 1세가 1100년 7월 18일 사망한 것이다.


 만약 이 때 다임베르트가 예루살렘에 있었다면 이 도시를 장악하는데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늘의 도움인지 다임베르트는 그 도시에 없었다. 십자군 귀족들은 이 오만하고 탐욕스런 주교의 지배를 받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누군가가 대신 왕이 되기를 희망했다. 결국 가장 적당한 인물로 다임베르트에게 반대했던 보두앵 1세가 선택되었다.


 태조 고드프루아의 승하는 비밀에 부쳐지고 밀사가 에데사에 파견되었다. 자파 항 공방전이 지속되고 있었으므로 보두앵은 다임베르트가 여기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 신속히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한편 뒤늦게 고드프루아의 사망 소식을 접한 다임베르트는 완전히 뒷통수를 맞은 셈이었다.


 다임베르트는 영토를 미끼로 안티오크의 보에몽과 연합하여 보에몽 1세와 싸우려 들었다. 그러나 이는 성공할 수 없었다.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보에몽 1세가 적의 포로로 잡힌 것이었다. (1100년 8월) 다임베르트는 자신의 지지할 세력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상 보두앵 1세가 예루살렘 왕국의 2대 국왕으로 확정된 순간이었다. (그런데 아마 업적으로 볼 때 보두앵 1세가 '태종' 에 가까운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전에 넘어야할 문제가 있었다. 탕크레드를 비롯한 십자군의 약탈로 복수를 벼르고 있던 다마스쿠스의 무슬림 지배자 두카크가 십자군에 대해서 복수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1100년 여름은 십자군에게서 재앙 같던 순간이었다. 고드프루아는 죽었고, 보에몽 1세는 포로가 신세가 되었다. 이는 바꿔 말하면 무슬림들에겐 알라의 뜻인 셈이었다.


 이에 다마스쿠스의 두카크는 자신이 이 은총의 대미를 장식하고 싶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보두앵 1세를 기습할 목적으로 베이루트 근방의 좁은 길목에 매복했다. 그러나 결국 이 전투에서 보두앵 1세가 크게 승리했으므로 결과론적으로 본다면 이는 보두앵 1세의 즉위 기념 행사와도 같았다. 이로써 보두앵 1세는 십자군으로 부터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보두앵 1세는 역사적인 날에 즉위하기로 마음먹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지 1100년째인 서기 1100년 12월 25일 (물론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서력 원년에 태어나지 않고 몇년 정도 차이가 있다는 설도 있다) 예수가 탄생한 유서깊은 교회인 예수 탄생 교회 (The Church of the Nativity) 에서 그는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으로써는 최초로 대관식을 치루고 머리에 왕관을 썼다. 성직의 길에서 중도 탈락하고 형에게 더부살이를 했던 그가 이제 국왕의 지위에 오른 것이었다.




(아르메니아 인들을 접견하는 보두앵 1세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출처 : Guillaume de Tyr, 1286)



 이제 이 정도에서 1차 십자군에 대한 기술을 마무리하고 다음에는 1101년의 마이너 십자군의 이야기를 할 차례인 것 같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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