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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살라딘 13



 30. 메소포타미아 공략


 1182년에는 살라딘의 공세가 다시 재개되었다. 살라딘은 자신의 부장인 파루크 샤 (
Farrukh-Shah) 로 하여금 갈릴리 및 다른 십자군 영토를 공격하게 했고 머지 않아 십자군의 주요 요새 중 하나인 하비스 잘덱  (Habis Jaldek) 이 함락되었다. 이후 살라딘은 그해 여름에 베이루트를 공격하기 위해 해군을 동원하고 살라딘 본인은 베카 계곡으로 지상군을 이끌고 공격에 나섰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아무튼 이런 대 십자군 공세는 다시 지지 부진하게 끝난 편이었다. 사실 살라딘으로써는 십자군 보다 더 신경쓰이는 상대가 있었으니 불론 장기드 왕조의 잔존 세력들이었다. 이들을 공격해서 평정하지 않고서는 십자군에 힘을 집중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살라디은 그들과의 휴전 협정이 끝났음을 - 물론 살라딘은 기간이 다될 때 까지 끈기있게 기다린 후 공격했다. - 알레포를 공격하므로써 알렸다. 누레딘의 아들인 앗 살라흐도 죽었으므로 이제 그도 마음 대로 걸리는 것 없이 공격하겠다는 의사였다.


 이후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일부 에미르들과 힘을 합친 살라딘은 자지라 (Jazira) 지역의 도시들을 하나씩 정복해 나갔다. 에데사를 시작으로 주요 도시들이 하나씩 살라딘의 손에 떨어졌다. 그 중 하나인 Ar Raqqah 에서는 살라딘은 도시를 장악한 후에 본래 이 도시를 다스리던 자를 '자신을 살찌게 하고 백성을 야위게 하는 자'라고 꾸짓고 무거운 세금을 낮추어 주었다. 이와 같은 정책은 물론 백성들의 민심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살라딘이 병력을 빼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정복하자 이에 십자군과 알레포에서도 살라딘의 영지를 약탈했다. 살라딘은 그들이 마을을 습격할 때 우리는 도시를 장악하고 있다면서 부하들을 격려했다. 곧 정복 사업을 마무리 하는 데로 다시 그들을 공격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해에 살라딘은 적의 수도인 모술을 점령하는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다시 1183년이 되자 알레포를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다시 집결시켰다. 살라딘은 5월 21일 알레포를 포위했다. 당시 알레포의 지배자인 이마드 앗 딘 장기 2세는 장기드 왕조의 창시자인 장기와 이름은 같았지만 재능이나 용기는 부족했다. 더구나 알레포에서 그의 인기는 바닥이었므로 그는 본래 자신의 영지인 신자르 (Sinjar) 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당시 신자르와 그의 영지는 살라딘에게 정복당한 상태였다. 장기 2세의 의도를 알게 된 살라딘은 평화적으로 신자르를 그에게 돌려주고 대신 장기 2세가 봉신으로 살라딘에게 복무하는 조건을 달았다. 이 관대한 조치를 들은 장기 2세는 이 내키지 않는 전쟁을 더 이상 수행할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에 결국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이로써 6월 12일 알레포는 살라딘의 영토가 되었다.


 시리아의 또 다른 주요 도시인 알레포를 장악한 살라딘은 크게 기뻐했다. 이제 십자군 국가들의 동쪽 경계와 남쪽 경계가 거의 살라딘의 영토로 포위된 상태였다. 살라딘은 바로 다음 목표를 안티오크 동쪽의 도시 하림 (Harim) 으로 잡았다. 당시 이 영토는 Surhak 이라는 맘루크의 소유였다.


 살라딘은 그에게 다마스쿠스 근처의 영지를 줄테니 하림을 양도하라고 요구했다. 그가 이 요구를 거부하자 오히려 하림의 수비대가 그를 체포해 살라딘에게 그를 넘겼다. 이렇듯 살라딘은 점차 민심을 얻어가면서 그 힘이 커져가고 있었다.


 대략 이렇게 알레포와 에데사등 주요 도시를 정리한 살라딘은 결국 모술 자체를 함락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이제 그의 힘은 메소포타미아 및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다음 상대는 바로 십자군이었다.



 31. 르노 드 샤티옹


 한편 십자군 국가들은 점점 답답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우선 카락의 인간 말종 르노 드 샤티옹은 1181의 약탈을 초라하게 보일 만한 대담한 공격을 준비중에 있었다. 그것은 바로 카락 남쪽의 홍해쪽으로 나가서 배를 타고 무슬림 상인들을 약탈 한 후 더 나아가 성지 메카로 가서 그곳의 부유한 사원들을 약탈하는 것이었다.


 사실 아무도 이전에 그와 같은 일을 시도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지역 상인들과 주민들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다. 그리고 르노가 노린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의 눈에는 홍해쪽의 약탈을 기다리는 수많은 재물들이 눈에 어른 거렸을 것이다.


 즉시 그는 베두인 족을 매수하여 배를 홍해쪽으로 옮기고 여기서 부터 다시 배를 타고 남하하면서 약탈을 개시했다. 과연 지금까지 아무도 이런 약탈에 대비를 한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주 손쉽게 큰 재물을 약탈할 수 있었다. 대담해진 르노는 이제 무슬림의 성지인 메카를 직접 약탈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바이킹도 무색하게 만들만한 이런 대담한 약탈 행각은 결국 이집트 해군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즉시 이 불경스러운 이교도 해적들을 잡기 위해 이집트 해군이 출격하게 되고 결국 이들은 대부분 죽거나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여기서 르노는 겨우 목숨만 건저 살아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르노가 모르는 일은 이 일이 무슬림 사회 전체를 격분시켰다는 것이다. 십자군의 극악 무도한 르노 드 샤티옹이란 인물이 무슬림의 가장 성스러운 장소인 메카를 약탈하려 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무슬림 세계 전체를 경악시켰다. 이로 인해서 가장 이득을 본 사람이 있다면 역시 살라딘이었다. 살라딘의 대 십자군 전쟁은 이제 무슬림이라면 누구나 참여해야 하는 성전 중에 으뜸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르노 드 샤티옹의 사소한 탐욕은 결국 십자군에 대한 무슬림 사회의 적개심을 최고조에 달하게 만들었으며 이것이 결국 예루살렘 왕국과 르노 드 샤티옹을 몰락시키는 데 뇌관 역활을 한 셈이었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무덤을 자기가 판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였다.


 이와 같은 르노 드 샤티옹의 극악 무도한 행패는 물론이고 자신이 병력을 이동시킨 사이 다마스쿠스 인근 지역에 십자군이 출몰하여 백성들을 약탈하러 다녔으므로 살라딘은 이를 응징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하지만 1183년의 전투는 상호간의 지지부진하게 끝났다. 일단 십자군들은 육신의 고통이 더 해가는 보두앵 4세의 문제때문에 강력한 공격을 퍼붇기 어려웠다. 보두앵 4세는 자신의 고통이 심해지자 어쩔 수 없이 지휘를 기 드 뤼지냥에게 맡겼는데 이 인물은 평판대로 군사적 재능이 전무하다 시피 했기 때문에 결국 주저하면서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았다.


 한편 살라딘 역시 모술에 힘을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인지 이 시기에는 십자군에 대한 대규모 공격은 벌이지 않았다. 다만 르노 드 샤티옹의 약탈 행위에 대한 반격으로 1182년에는 베이루트에 해군을 보내 공격했고, 1183년과 1184년에는 카락을 포위 공격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카락을 포위 공격하던 당시 선왕 아말릭 1세가 두번째 부인인 마리아 콤네나 사이에서 얻은 딸인 이자벨라와 토론의 영주 험프리 2세의 손자인 험프리 4세가 카락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있었다. 왜 그렇게 되는 지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본래 르노 드 샤티옹과 재혼한 스테파니는 결혼을 3차례 한 여자였다. 그녀의 두 전남편 중 하나가 바로 토론의 험프리 3세였다. 그리고 험프리 3세가 죽은 후 아직 어린 험프리 4세를 대리고 르노 드 샤티옹과 재혼한 것이다. 그래서 르노 드 샤티옹이 험프리 4세의 양부가 되었던 것이다.






(험프리 4세아 이자벨라의 결혼식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아무튼 험프리 2세의 업적을 고려할 때 보두앵 4세도 이 결혼에 반대를 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이 결혼식이 있을 때 왕은 병 때문에 카락성에서 열린 연회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다행으로 밝혀졌다. 피로연이 한창일 때 살라딘의 대군이 카락을 포위했기 때문이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르노 드 샤티옹은 당대의 관습에 따라 잔치 음식을 살라딘의 진영에 보내 주었고 살라딘은 신랑과 신부가 있는 탑은 공격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아무튼 이 카락 포위전은 지지 부진하게 진행되다가 보두앵 4세의 지원군이 오자 종결되었다.




 32. 기 왕의 즉위


 사실 보두앵 4세는 어린 나이와 나병이라는 심각한 신체적 질환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서 예루살렘 왕국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몽지사르 전투를 비롯해서 여러 전투에서 그는 용감히 싸웠고 놀라운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나병은 그의 육신을 심각하게 갉아먹어 들어갔고 1185년에는 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보두앵 4세가 생각하기에 왕국의 가장 큰 위협은 물론 살라딘이었다. 이제 살라딘의 제국이 십자군 국가의 남쪽과 동쪽을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으므로 왕국을 포위당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왕국 내부에서는 또 다른 위협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 드 뤼지냥과 그를 두둔하는 무리들이었다. 기 드 뤼지냥은 무능한 인간이었지만 국왕이 되려는 야심만은 남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문제는 기 드 뤼지냥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무리들 이었다. 여기에는 성전 기사단을 비롯한 강경파와 르노 드 샤티옹이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머니인 아그네스는 1184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보두앵 4세가 생각하기에 기 드 뤼지냥 같이 무능한 인간에게 왕위가 돌아가면 그것은 왕국을 통째로 살라딘에게 바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그는 이제 남은 유일한 믿을 만한 신하인 트리폴리의 레몽 3세에게 부탁을 하고자 했다.


 보두앵 4세가 후계자로 지명한 것은 바로 아직 어린 아이인 보두앵 5세였다. 보두앵 5세는 앞서 이야기한 긴칼 기욤과 시빌라 사이의 아들로 1177년 생이었다. 즉 당시에는 8살이었다. 당연히 직접 통치가 불가능하므로 섭정으로 다시 레몽 3세를 임명한 것이다.



(보두앵 4세의 죽음 (위) 와 보두앵 5세의 즉위 (아래)  William of Tyre's Historia and Continuation, 13C manuscript from Acre. Bibliotheque Nationale Française, Richelieu Manuscrits Français 2628 Copyright-free, from Bibliotheque Nationale Française site Gallica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사실 레몽 3세가 섭정을 유지했다고 해도 살라딘의 대군 앞에서 과연 그가 왕국을 지켜냈을지는 미지수이다. 하지만 문제는 레몽 3세가 섭정을 그렇게 길게 유지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정녕 신이 예루살렘 왕국을 버린 것인지 1186년 8월에 다시 보두앵 5세가 죽고 만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하지 왕국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일단 레몽 3세는 티베리아스에서 귀족회의를 열어 차기 국왕을 결정하고자 했다. 당시 보두앵 4세의 누이들인 시빌라와 이자벨라가 유력한 대상이었다. 

 
 당시 레몽 3세 역시 기 드 뤼지냥의 패거리가 국왕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시빌라 대신 동생인 이자벨라를 유력한 후보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자벨라의 새남편인 험프리 4세가 새로운 국왕자리에 오를 것이었다. 험프리 4세는 선대의 충신 험프리 2세의 손자로 당시 19세였으므로 레몽 등의 지원을 받는다면 충분히 국왕 자리를 맡아 다가오는 살라딘의 공세를 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의 양부가 르도 드 샤티옹이라는 문제는 있지만)


 그러나 불행히도 이번에는 시빌라파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결국 시빌라가 여왕으로 선포되었으며 그와 가까웠던 세력들이 레몽 3세파를 축출했으므로 기 드 뤼지냥과 시빌라가 공동 국왕으로 예루살렘 왕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이는 물론 신이 예루살렘 왕국을 버렸거나 알라의 은총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결과였다. 


 1185년 당시 십자군과 살라딘은 서로 간의 추스릴 일이 많았기 때문에 다시 휴전 협정을 맺은 상태였다. 살라딘은 최근 크게 팽창된 제국을 정리해야 했고, 예루살렘 왕국은 새로운 국왕이 교체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휴전 협정은 타당했다. 문제는 이번에도 르노 드 샤티옹이 휴전협정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 것이라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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