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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무슬림의 반격 4



 
 7. 키프로스 학살 사건


 1154년 마침내 다마스쿠스가 누레딘의 손에 들어가자 한동안은 누레딘도 새로운 영토를 통합하고 내실을 다지는데 힘썼기 때문에 우트르메르의 긴장 상태는 다소 덜해졌다. 그러나 지금도 세계의 화약고인 이 지역에서는 조금의 휴식도 없이 새로운 피바람이 몰아닥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슬림과 기독교도간의 전쟁이 아니라 기독교도들 간의 추악한 전쟁이었다.


 문제의 발단이 된 인물은 새로운 안티오크의 공작인 르노 드 샤티옹 (Raynald of Chatillon in French  Renaud de Chatillon) 이었다. 이 인물은 초대 안티오크 공작인 보에몽 1세나 그 후계인 탕크레드에 비해서 전반적으로 능력은 모자랐지만 탐욕 만큼은 역대 안티오크 공작 가운데 최고조에 달한 인물이었다.


 공작위에 오른지 얼마 안되는 1156년에 르노 드 샤티옹은 키프로스 원정을 계획했다. 그런데 사실 이 시점은 원정에 적합한 시기가 아니라 그가 신중에 신중을 기해 자중하고 있어도 모자란 시기였다. 왜냐하면 그를 안티오크의 공작으로 인정해야 할 사람들 - 상위 군주인 마누엘 1세, 보두앵 3세, 그리고 안티오크의 총대주교까지 - 모두 인정하고 있지 않거나 혹은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상위 군주의 주요 영토인 키프로스를 공격하는 원정은 최악의 결정이었다.


 간단히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리기 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153년에 콩스탄스와 결혼한 르노 드 샤티옹은 당연히 자신이 골라준 더 좋은 신랑 후보를 무시한 마누엘 1세의 분노에 직면했다. 그러나 마누엘 1세는 보다 신중하고 실리적인 정치인이었으며 무엇보다 당시 남이탈리아의 로게르 2세 (루지에로 2세) 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적을 더 만들기 보다는 르노 드 샤티옹을 잘 달래서 제국에 이익이 되는 일에 쓰고자 했다. 따라서 황제는 르노를 공작으로 인정했다.


 마침 르노 드 샤티옹이 해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일은 바로 안티오크의 옆에서 독립 세력화 한 실리시아의 아르메니아 왕국 (Kingdom of Armenia) 의 토로스 (Thoros) 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토로스는 앞서 보에몽 2세 에서 설명한 아르메니아 공작 레오 1세의 맏아들로 본래 1143년에 콘스탄티노플에 잡혀있던 상태에서 감옥에서 극적으로 탈출 다시 실리시안 아르메니아의 독립을 위해 귀국한 상태였다.


 토로스는 1151년 실리시아 산악 지대에서 내려와 비잔티움 제국군을 격파하고 실리시안 아르메니아의 독립을 되찾았다. 본래 자신들을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로 생각하지 않는 아르메니아 인들에게는 자랑스런 독립이지만 마누엘 1세에 관점에서 보면 반란이므로 즉시 군대를 파견해 진압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당시 남이탈리아의 로게르 2세는 물론 다뉴브 강 방면에서도 이민족과 싸워야 했던 황제는 토로스에 대한 응징은 일단 이후로 미뤄둘 수 밖에 없었다.



(실리시아 아르메니아 (Cilician Armenia) 왕국의 지도. 과거 안티오크는 물론 롬 술탄국 등과 함께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였지만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사실상 반 독립화했다. 타우르스 산맥을 끼고 있으므로 이 산악 지역을 기반으로 제국에 저항했다.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Semhur)


 그러던 시점에서 르노 드 샤티옹이 나왔기 때문에 일단 황제는 르노에게 공작위를 내려주는 대신 토로스를 공격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르노는 몇차례 토로스를 공격한 다음 이들과 동맹을 맺었다. 한마디로 공작위를 차지 하고 나자 더 이상 이익이 없는 전쟁을 지속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것이었다. 사실 여기까지는 뭐 그런데로 이해해 줄 만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1156년이 되자 르노 드 샤티옹은 새로운 부의 원천을 발견했다. 그곳은 바다 건너에 있는 키프로스 섬이었다. 사실 이 섬은 바다 건너에서 제국의 일부로 평화로이 번성하고 있어 잦은 전쟁으로 다소 황폐해진 우트르메르 보다 더 부유해 보였다. 그 섬은 키프로스로 근대와 현대 역사에 와서는 잦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섬이긴 하지만 당시에는 제국의 통치아래 번성하고 있었다.



 이 부유한 섬이 탐욕스런 십자군의 약탈을 지금까지 피할 수 있던 이유는 같은 기독교를 믿어서가 아니라 강력한 비잔티움 제국의 함대가 십자군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155년에서 1156년 사이 비잔티움 제국은 남이탈리아에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기 위한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결국은 실패했지만 한 때는 거의 성공할 뻔 하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전력을 집중해서인지 1156년 봄에는 키프로스 섬에 해상 방어가 르노 드 샤티옹과 토로스가 보기에도 충분할 정도로 약해졌던 것 같다.


 마침내 르노 드 샤티옹은 탐욕을 참지 못하고 약탈 원정을 계획했다. 사실 키프로스가 같은 기독교를 믿고 있다는 점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유럽 대륙에서 서로 기독교를 믿는 유럽인들끼리 약탈하고 전쟁을 벌이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키프로스를 약탈하면 마누엘 1세의 대군의 응징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텐데도 그렇게 한 점은 어리석었다.


 아무튼 장사를 하려 해도 밑천이 필요하듯이 돈을 벌려고 약탈 원정을 떠나려고 해도 역시 돈이 필요했다. 그런데 르노 드 샤티옹은 그만한 돈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안티오크의 총대주교인 에메리 (Patriarch Aimery of Antioch) 에게 돈을 요청했다. 하지만 에메리는 이 요청을 거부했다.


 사실 총대주교는 이전의 르노 드 샤티옹과 콩스탄스의 결혼도 반대했기 때문에 르노 드 샤티옹은 그전 부터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기독교도를 약탈하는 원정에 돈을 빌려주는 일도 거부하자 르노 드 샤티옹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났던 모양이다.


 르노는 결국 총대주교를 체포한 다음 고문을 가했다. 그런후에 총대주교는 옷을 벗기고 몸이 묶인 채로 꿀을 발라 성채의 지붕에 매달렸다. 뜨거운 안티오크의 햇빛에 노출된 채로 꿀을 노리고 나타난 벌레들에게 하루 종일 시달린 총대주교는 끝내 항복하고 돈을 내놓을 수 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일은 아무리 고문이 일상화된 중세 사회라지만 많은 이들을 경악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이 르노 샤티옹이란 인물은 점점 시간이 갈수록 최악의 행동만 해서 수많은 적들을 양산하고 있었다. 우트르메르 전체가 르노에 대해서 등을 돌렸다.



(고문당하는 에메리의 그림. 티레 윌리엄의 기록인데 나름 자체 검열을 해서 주교는 옷을 입고 있다. 
William of Tyre's Historia and Continuation, 13C manuscript from Acre. Bibliotheque Nationale Francaise, Richelieu Manuscrits Francais 2628  Copyright-free, from Bibliotheque Nationale Francaise site Gallica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expired.)


 1156년 봄. 이렇게 자금을 마련한 르노 드 샤티옹과 토로스는 마침내 방심하고 있던 키프로스를 공격했다. 비잔티움 제국군이 여기 저기 전쟁에 동원된 덕에 섬을 지키던 병력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공격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비록 황제의 조카인 요한네스 콤네누스와 미카일 브라나스가 방어군을 용감히 지휘했으나 중과 부적 이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르노 드 샤티옹과 토로스 연합군은 수많은 재물을 약탈하고 섬의 주민들을 학살했다. 수도원은 약탈되고 수사들은 살해당했으며 수녀들은 강간당했다고 기록은 적고 있다. 심지어 그들이 수주간 약탈한 물건이 너무 많아서 이를 배에 다 실을 수 없자 약탈자들은 다시 약탈당한 사람에게 그들이 약탈한 물건을 팔기 위해 흥정하기 까지 했다. 섬의 주요 인물들은 몸값을 받을 목적으로 안티오크로 끌려갔다.


 이와 같은 행동으로 인해 르노 드 샤티옹이 어떤 인물인지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비록 과거 십자군의 표식을 달고 같은 기독교인에게 - 무슬림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 잔학 행위를 한 인물이 르노 드 샤티옹 밖에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르노 드 샤티옹의 행동은 도를 넘었다는 게 일반적인 중론이었다. 무엇보다 이제 마누엘 1세가 복수를 위해 다시 우트르메르에 등장할 것이라는 점은 누가봐도 명확했다.



 8. 마누엘 1세의 복수


 상황이 이렇게 되자 비잔티움 제국에서도 토로스와 르노 드 샤티옹을 응징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물론 마누엘 1세 역시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한마디로 제국의 역습 (Counterattack) 이 준비되었다. 이제 분노의 화신이 된 마누엘 1세가 군대를 직접 몰아 전쟁을 지휘할 예정이었다.



(마누엘 1세와 2번째 황후인 안티오크의 마리아의 초상화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1158 - 1159년 겨울. 마누엘 1세는 직접 500명의 기병대를 데리고 선봉에 섰다. 비잔티움의 군대는 신속하게 실리시아를 통해 진군했는데 이는 기습을 하려는 의도였다. 이 기습은 대성공을 거두어 2주만에 실리시아의 대부분이 비잔티움의 통치아래 들어갔다. 다만 토로스 본인은 권토 중래를 노리고 재빨리 산악 지대로 도망갔다.이는 나중에 후환을 남기는 일이긴 했지만 일단 실리시아를 확보했으므로 다음 마누엘이 해야 할 일은 당연했다.


 물론 그것은  르노 드 샤티옹을 응징하는 일이었다. 르노에게는 불행히도 그에게는 주변에 탈출할 만한 산악 지대가 없었다. 결국 안티오크의 성벽을 의지해서 마누엘의 군대를 막아보는 수 밖에 없었는데 당시 시점에서 아마도 이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였던 것 같다.


 사실 토로스의 경우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아래서 실리시안 아르메니아를 독립시킨다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 동포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결국 아르메니아 왕국이 쉽게 무너지지 않은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르노 드 샤티옹은 상식 이하의 행동으로 우트르메르 전체에서 인심을 잃었고 그의 지지 기반은 매우 취약했기 때문에 비잔티움 제국과의 장기적 공성전을 벌인다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르노 드 샤티옹은 무조건적인 항복을 했다. 르노는 안티오크의 성채를 제국의 반환하고 기타 제국군의 주둔 비용을 안티오크에서 부담하며 주교를 그리스인으로 교체한다는 요구 조건을 모두 받아들이고 황제의 가신이 되기로 했다.


 1159년 4월 12일에 마누엘 1세는 의기 양양하게 안티오크에 입성했다. 르노 드 샤티옹은 황제가 탄 말안장의 등자 가죽을 붙잡고 있어야 했다. 다른 신하들과 예루살렘의 보두앵 3세가 그 뒤를 따랐다. 이 날 안티오크는 다시 제국에 품에 안겼다. 이후 마누엘 황제가 살아 있는 동안 이 도시는 제국의 부분적으로 일부가 되었다. (물론 완전히 직할 영토는 아니었지만)


 한편 보두앵 3세와 십자군 국가들은 황제를 크게 환영했다. 그들도 몹시 싫어하던 르노 드 샤티옹을 응징했을 뿐 아니라 차라리 강력한 제국군의 도움을 받으면 앞으로 시리아의 누레딘과의 싸움에서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십자군 국가들의 생각이었을 뿐 마누엘 1세의 생각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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