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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살라딘 15


 36. 예루살렘으로 


 1187년 7월 4일의 하틴의 결정적인 승리는 살라딘과 그의 무슬림 군대에는 알라의 은총이 같이 하는 것으로 생각될만큼 절대적인 승리였다. 적의 주력은 분쇄되었고 국왕을 비롯한 주요 귀족들을 붙잡혔으며 여기에 겨우 살아서 탈출한 레몽3 세 역시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이제 살라딘의 군대가 성도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을 정복하는데 방해되는 것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살라딘의 막사에서는 그날 밤 '알라는 위대하다' '알라 이외의 신은 없다' 라는 기도 소리가 높게 울려퍼졌다고 한다.


 살라딘은 적에게 회복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발빠르게 적의 주요 도시들을 접수했다. 1차 십자군 이래 팔레스타인의 주요 십자군 도시들이 하나하나 살라딘의 깃발아래 정복되었다. 레몽의 아내인 에쉬바가 지키던 티베리아스 성채는 더 이상 구원의 희망이 없음을 깨달은 그녀에 의해서 살라딘에게 양도되었다.


 7월 5일 살라딘은 그녀와 그녀의 시종 및 자녀들이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대신 성채를 접수했다. 이제 티베리아스는 살라딘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제 살라딘의 승리를 알게된 팔레스타인의 무슬림 농민들과 노예들, 그리고 포로들, 그리고 심지어 평소 이단으로 몰리던 토착 동방 기독교도들은 살라딘과 그의 군대의 진군을 크게 환영했다. 그들은 해방자였다.


 반면 기독교군의 저항은 미미했다. 살라딘은 부분적으로는 그들의 저항을 더 미미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너무나 관대한 항복 조건들을 내걸었다. 대개 포위된 십자군들은 원하는 조건으로 항복하거나 성을 포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결과 십자군은 포위된 잔존 병력들이 대부분 피해를 입지 않고 퇴각할 수 있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십자군에게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준 셈이었다.


 아무튼 살라딘은 신속하게 이동하여 7월 중에 아크레, 자파, 베이루트, 시돈 등 주요 도시들을 하나씩 점령했다. 점령하는 곳마다 무슬림 포로와 노예들을 모두 풀어주고 전리품들은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니 살라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고 한다.


 여러 도시들 가운데 점령을 모면한 것은 티레와 아스칼론 항 및 예루살렘 정도였다. 티레 항의 경우 유럽에서 나타난 몽페랏의 콘라드 (
Conrad of Montferrat) 덕분에 도시가 넘어가기 직전에 사수할 수 있었고 나머지 도시들은 그해가 가기전 함락되었다. 콘라드는 몽페랏 후작 기욤 5세의 차남이었는데 아버지인 기욤 5세는 사실 십자군에 참여했다가 하틴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몸이었다.


 살라딘은 기욤 5세를 끌고 나가 그의 목숨을 가지고 콘라드의 항복을 종용했으나 콘라드는 아버지는 살만큼 살았으니 티레의 돌맹이 하나도 넘길 수 없다고 큰소리 쳤다. 과연 콘라드가 살라딘이 관용을 잘 알고 그런 소리를 한 건지 아니면 정말 진짜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살라딘은 기욤 5세를 죽이지 않았다. (다만 이것은 실제로는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있던 일이고 티레 공방전에 대한 자세한 기술은 나중에 할 것이다)


 한편 살라딘은 이제 가장 중요한 목표를 공략하기 위해 채비를 했다.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 이었다.




 37. 예루살렘 수복


 살라딘은 처음 무슬림에게도 신성한 도시인 성도 예루살렘을 가능하면 피를 흘리지 않고 점령하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기독교도들에게 너무나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그것은 "다음해 오순절 (그리스도가 부활한지 50일째 되는 날) 까지 그들이 성을 지킬 수도 있고 필요한 농작물을 근처에서 재배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 그 사이 성을 보수해도 괜찮다. 대신 다음해 오순절까지 구원의 희망이 보이면 성도를 지켜도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성도를 나에게 평화롭게 양도하라. 그러면 그대들의 재산과 생명은 모두 보장하겠다" 라는 것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십자군이 약속이나 조약을 어기는 것을 너무나 쉽게 해왔다는 점을 생각할때 매우 파격적인 조항이었지만 - 또 약속을 지킨다는 아무 보장도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지만 - 예루살렘의 십자군은 자신에게도 중요한 그 도시를 절대 넘기지 않겠다고 말했다. 살라딘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예루살렘을 명예로운 방법, 즉 검에 의한 방법으로 접수하겠다고 맹세했다.


 한편 이벨린의 발리앙 (Balian of Ibelin) 은 레몽 3세와 더불어 간신히 하틴 전투에서 빠져나간 몇명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티레로 도망쳤는데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예루살렘에 있었다. 한편 예루살렘 주변은 모두 살라딘의 군대가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유일하게 가족을 데리고 올 수 있는 방법은 살라딘의 관대함에 기대는 것이었다.


 살라딘은 다시 한번 관용을 베풀어 발리앙에게 안전 통행증을 내주었다. 그것으로 예루살렘에게 안전하게 가족들을 데리고 나오라는 것이었다. 다만 가족만 데리고 나올 것이며 예루살렘으로 가서 전투에 참여해서는 안된다는 조건을 달았다. 가족을 핑게로 예루살렘 공방전에 참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발리앙은 살라딘이 약속을 지킨 덕에 예루살렘으로 무사히 들어왔다. 그런데 발리앙을 본 예루살렘의 기독교도들은 워낙 기사가 없었기 때문이었겠지만 그를 즉시 사령관으로 추대했다. 발리앙이 살라딘과의 약속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당시 십자군들은 이교도인 무슬림과  한 맹세는 무효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이미 고인이 된 르노 드 샤티옹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도 예루살렘 대주교인 헤라클리우스 (Patriarch Heraclius) 는 그런 맹세는 무효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발리앙의 죄는 자신이 사해 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발리앙은 거의 떠밀리다 시피 해서 예루살렘 공방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마침내 1187년 9월 20일 살라딘의 대군은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그들은 다윗의 탑에서 부터 다마스쿠스 문까지 공성타워와 투석기와 궁수들을 배치하고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공성 지뢰 - 성벽 밑에 구멍을뚫고 불에 태워 성벽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 - 을 설치했다.


 살라딘의 대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예루살렘의 성벽은 곧 무너질 듯 했다. 9월 29일에는 성벽의 일부가 공성 지뢰와 투석기의 공격앞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성과 함께 죽을 듯이 말했던 십자군들과 기독교도들도 생각이 좀 변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발리앙이 협상을 위해 술탄의 천막으로 갔다. 이미 성벽의 일부에선 살라딘의 깃발이 펄럭이던 시점이었다.


 살라딘은 발리앙을 보고 이미 함락된 성하고도 협상하는 경우를 본적이 있냐며 조소했다. 이제 검으로 성을 점령하겠다는 맹세는 거의 이루어지기 직전이었다. 비록 그날의 공격은 간신히 십자군이 막아냈지만 곧 함락이 임박한 것은 누가 봐도 명확했다.


 이에 발리앙은 다시 협상을 위해 살라딘과 면담했다. 이 면담에서 발리앙은 만약 평화로운 항복을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면 자신들은 무슬림 노예 - 약 5천명 정도 - 를 모두 살육하고 알 아크사 사원과 바위 돔 같은 무슬림의 성소를 모두 파괴할 것이라고 살라딘을 협박했다. 이 말을 들은 살라딘도 마음을 움직여 오직 검으로만 성을 점령하겠다는 맹세를 깨고 평화롭게 성을 양도받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다.


 10월 2일 체결된 협상의 내용은 이러했다. 40일간 여유를 줄 테니 남자는 1인당 10 디나르 (혹은 20 베잔트 - 비잔티움의 화폐단위) 를 내면 무사히 성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여자 2인당 남자 1명으로 치고, 아이 10명당 남자 1명으로 계산하여 (혹은 여자 1인당 10 베잔트, 아이 1인당 5 베잔트라는 설도 있다) 나머지 기독교도들도 무사히 성을 나갈 수 있게 해준다. 40일이 지난 후에도 성에 남아있는 기독교도들은 모두 포로로 삼는다.


 한마디로 몸값을 받고 성을 무사히 나갈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협상이 이루어진 것은 당시의 무슬림 병사들이 대개 용병인데다 약탈에 대한 기대로 전쟁에 참가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줄 급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즉 당시에는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성을 약탈하는 것이 십자군이나 무슬림 모두에게 상식처럼 받아들여졌던 시기였고 이점은 1차 십자군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따라서 살라딘과 발리앙의 협상 내용은 정말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내용이었다. 살라딘을 제외하고서는 누구도 다 점령한 성을 이렇게 몸값만 받고서 양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는 성을 점령해서 재물을 약탈하고 포로는 모두 노예로 팔아서 전쟁 비용을 마련하는 것이 아주 일반적이었다.


 한편 살라딘은 다시 관용을 베풀어 1 디나르도 내지 못할 만큼 가난한 사람들은 3만 베잔트만 내면 7천명을 석방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 정도 돈은 헨리 2세가 구호 기시단에게 보내준 돈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몸값을 내고 석방되는 이들은 모두 다윗의 문을 통과해서 나갈 수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처음으로 다윗의 문을 통과한 이들은 가난한 7천명의 주민들이었다. 이들은 물론 3만 베잔트를 내고 통과하는 것이었다. 이후에 수많은 기독교 인들이 몸값을 지불하고 성을 떠났다. 그런에 이 중에 자신의 처지를 망각한 인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총대주교인 헤라클리우스였다. 그는 교회에서 착복한 막대한 재물들 - 개인 재물은 물론 교회의 황금 접시와 각종 성물 들  - 을 가득 싣고서 10 디나르의 자신의 몸값만 달랑 지불하고 성문을 나섰다.


 헤라클리우스가 자신의 위치를 생각했다면 자신의 재신을 풀어 가난한 이들의 몸값을 대신 지불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 그는 단지 자신의 몸값만 지불하고 막대한 재산을 챙겨 빠져나갔다. 이를 본 에미르들은 살라딘에게 저 악당이 그냥 가게 내버려 둬서는 안된다고 말했지만 살라딘은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그냥 가게 내버려 두었다.


 40일이 지난 후 이제 성안에는 수천명의 가난한 주민들만이 - 이 들 모두를 헤라클리우스와 교회에서 몸값을 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 남아있었다. 이제 약속대로 이들은 노예로 팔려나갈 참이었다. 이를 딱하게 본 살라딘의 동생 알 아딜 (Al Adil) 은 자신에게 1천명을 달라고 했다. 살라딘이 그 소원을 들어주자 알 아딜은 즉시 그들을 자유의 몸으로 석방했다. 나머지 사람들, 특히 그중에서 노인들 역시 살라딘에 의해 모두 그냥 석방되었다.


 한편 살라딘이 이들을 석방한 후에 살라딘 앞에는 수많은 여인들이 울면서 자비를 요청했다. 이들은 전투 중에 죽었거나 혹은 포로로 잡힌 기사들의 아내였다. 이들의 딱한 처지를 알게된 살라딘은 다시 한번 자비를 베풀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명해서 이들의 남편으로 지금 감옥에 갇혀있는 자들은 풀어주고 전투에서 이미 죽은 이들을 위해서는 과부들의 지위에 맞게 살라딘 자신의 개인 자산에서 구호금을 주라고 이야기 했다.


 이 이야기는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해보면 거의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가 할 생각이 들만큼 놀라운 이야기이다. 당대의 유럽이든 아니면 아랍권이든 간에 성을 함락하면 약탈과 파괴는 승자의 권리로 생각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살라딘의 이야기는 모든 기록에서 공통되는 바 이 예루살렘 함락 만으로도 살라딘의 관용과 자비는 이후 전설이 되었다.


 살라딘은 이 모든 일이 끝난후 성소를 복구하고 1187년 10월 9일 알 아크사 사원에서 수많은 무슬림 신자들과 더불어 알라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1099년 예루살렘 이 십자군에 함락된지 88년만에 정말 평화적으로 다시 무슬림의 땅이 된 셈이었다.


 그런데 이 때의 일이 지금까지 회자되는 중요한 이유는 무엇보다 1099년 예루살렘 대학살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살라딘의 관용과 자비 때문일 것이다. (예루살렘 대학살에 대해서는 

http://blog.naver.com/jjy0501/100089611329   를 참조) 이를 비교해 본다면 관용과 자비의 군주라는 그의 명성이 전혀 잘못된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다마스쿠스에 있는 살라딘의 동상. 잘 보면 밑에 포로가 된 르노 드 샤티옹도 있다.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Godfried Warrey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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