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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1차 십자군 1






 1. 1차 십자군의 모집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95년 11월 클레르몽 공의회 이후 르퓌앙벌레이 (Le Puy-en-Velay) 의 주교였던 아데마르 (Adhemar (also known as Ademar, Aimar, or Aelarz) de Monteil ) 를 자신이 주창한 십자군의 지도자로 삼았다. 이는 십자군을 자신의 영향 아래 두고자 하는 교황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아데마르 주교는 클레르몽 공의회에도 참가했으며, 첫번째로 십자군의 십자가를 받은 인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자체 군사력이 거의 없는 교황으로써는 주교들과 신의 도움만으로는 성지를 탈환하고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 도박적 원정에 과연 얼마나 많은 군주들이 참가하는냐에 달려있었다.


(성창 롱기누스를 든 아데마르 주교 - 그림 왼쪽의 주교관을 쓰고 창을 든 사람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교황은 1차 십자군의 출발일을 1096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로 잡아 놓았다. 비록 이전에 교회의 지휘를 받지 않고 출발한 농민들의 무리가 있기는 했지만 이들은 어차피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고, 중요한 것은 역시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군주들의 동태였다.



 교황에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여러 국왕들은 십자군에 큰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카노사의 굴욕을 겪고도 자신이 교황 밑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황제가 교황의 주청을 받아들여 군대를 일으킬 가능성은 적어 보였고, 실제로도 움직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황제는 자신에 의해 이탈리아의 왕으로 선포된 아들인 콘라드가 우르바노 2세와 손을 잡고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사실에 분개하고 있었다. 당시 우르바노 2세는 콘라드에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를 미끼로 내걸었는데, 결국 콘라드가 이 미끼를 문 덕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는 콘라드의 동생인 하인리히 (나중의 하인리히 5세) 에게 돌아갔다.



 한편 아직 왕권이 미약한 프랑스의 카페왕조는 이 사업에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필립 1세는 성미 급한동생과는 달리 십자군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바다 건너 영국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용맹한 노르만족의 후예로 영국을 점령한 정복왕 윌리엄은 1087년에 사망한 상태였다. 그 후계자들은 영국과 노르망디등을 상속했는데, 일단 영국을 상속한 윌리엄 2세는 십자군 원정에 역시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각 나라의 국왕과 황제들은 이 십자군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십자군은 대체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것은 당시 사실상의 독립 국가를 이루고 있던 대영주들에게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이 십자군을 이끌던 개별 영주들과 지휘관을 우선 소개해 보겠다.





 2. 1차 십자군의 지휘관들 1


 일단 십자군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가담한 국가는 프랑스였다. 프랑스의 영주와 기사들은 사실 십자군의 가장 중핵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꼭 당시 프랑스인들이 종교적 신념이 강해서는 아니었다. 이들이 십자군에 참가하게 만든 동기는 사실 다양했다. 이에 대해서는 개별적으로 설명해보고 넘어갈 것이다. 당시 주요 십자군 지휘관과 영주는 다음과 같다.




  툴루즈의 레몽 (레몽 4세 : Raymond IV of Toulouse  1041 or 1042 - 1105 )


 : 툴루즈의 레몽이라고 자주 불리는 레몽 4세는 툴루즈의 백작이고 나르본과 마그레브의 공작이었다. 그는 초기 십자군의 가장 중요한 군주들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당시 50대였다고 했는데, (1041 년이나 1042년에 태어난 것 같다) 당시로써는 적은 나이가 아니었으나 아내인 에비라와 아직 아기인 아들 (원정 중 사망) 까지 데리고 원정을 떠났다고 한다.


 그는 남부 프랑스의 강력한 영주로써 아데마르 주교와 같이 남프랑스를 세력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교황 우르바노 2세와의 관계도 가까웠던 것 같은데, 교황이 십자군을 일으킬 때 아데마르 주교 및 툴루즈의 레몽과 깊게 상의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1840년대에 그려진 레몽 4세의 그림. 다소 미화된 듯 하다.  This image is in the public domain in theUnited States )



 따라서 정황상 레몽이 상당히 빨리 군대를 일으킨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동기는 다소 확실치는 않은 것 같다. 이제 50대가 넘은 그가 타향 만리에서 군사적 도박을 벌이기에는 당시 기준으로 다소 나이가 많았을 뿐 아니라 이미 남프랑스의 강력한 영주인 그가 다른 영지를 물려받지 못한 차남 삼남들과 함께 신천지를 개척한다는 것은 수지 맞는 장사가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지금까지 쌓아올린 영지와 권력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 여기에 사실 레몽은 십자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영지의 일부를 팔기까지 했다. 그러면 대체 동기가 무엇일까?


 필자가 추측컨데 레몽 자신의 행동을 종합해 보면 그는 십자군의 세속적인 사령관 자리를 노렸던 것 같으며, 이 군사적 지휘권을 통해 더 큰 것 - 예를 들어 신생 왕국 자체나 일부 - 을 노렸을 가능성이 있다. 또 부분적으로는 종교적 동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미 어느 정도 기반을 이룬 그에게 죽기전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성지를 순례할 뿐 아니라 이를 탈환하므로써 명성을 날리고 싶었던 게 아닐까?


 정확한 동기야 어찌되었든 레몽은 비교적 빨리 원정군을 편성해서 1096년 8월 15일 에는 출발하지 못했지만 10월에는 출발할 수 있었다. (사실 교황이 정한 출발일자는 대부분의 영주들이 지킬 수 없는 날짜였다)




 위그 드 베르망두아 (Hugh I of Vermandois  1053 - 1101)


 : 이 인물은 프랑스 왕국의 왕자이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 국왕 앙리 1세 였으며, 어머니는 키에프 대공의 딸 안나 왕비였다. 그는 당시 프랑스 군주 필립 1세의 동생으로 카페 왕조의 일원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 했듯이 필립 1세는 십자군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동생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다.


 위그는 베르망두아 백작의 지위를 가진 영주였는데, 그는 누구보다도 빨리 출발해서 유일하게 1096년 8월에 출발할 수 있었다.


 앞서 십자군에 참가한 기사들과 영주들 가운데는 차남이나 그 보다 아래 임으로 인해 영지를 상속받지 못해 십자군에 참가한 인물들이 있다고 했다. 사실 이 위그 백작도 앙리 1세의 차남이었다. 그러나 왕자 신분으로 베르망두아의 영지를 하사받았는데 과연 뭐가 불만이엇을까? 


 당시 기록을 본다면 그는 매우 자존심이 센 인물이었던 것 같은데, 늘 형의 그늘 밑에 있던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원정을 통해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 프랑스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세울 방법을 강구했던 것 같다. 형인 프랑스 국왕의 왕명을 받자 위그 백작은 기다렸다는 듯이 북프랑스에서 군대를 소집해서 가장 먼저 출발했다. 




 고드프루아 드 부용 (Godfrey of Bouillon, 1060 - 1100)


 : 이 인물 역시 레몽, 보에몽등과 더불어 1차 십자군의 가장 중요한 지휘관이다. 그리고 비록 왕이라는 명칭은 쓰지는 않았지만 짧은 시간 예루살렘 왕국의 초대 통치자 이기도 했다.


 그는 샤를마뉴 대제의 후손인 불로뉴 백작 외스티슈 2세의 차남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의 어머니는 로렌 공작의 딸 이다였다. 그는 부용 (Bouillon) 의 영주였는데, 엄밀히 말하면 아버지의 볼로뉴 영지가 아닌 외가쪽 영토였다. 마침 하로렌 공작가의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차남이었던 그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결국 하 로렌의 공작이 될 수 있었다. 



(앞에서도 본 고드프루아 드 부용의 모습. 머리 장식이 특이하다. 이 그림은 1420년대 이탈리아에서 그려진 것이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expired.)




 그는 젊은 시절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싸움에서 하인리히 4세에게 충성을 받쳤다. 그는 하인리히 4세가 불리한 입장에 있을 때도 황제에 대한 충성을 받쳤으며, 역적 슈바벤의 루돌프와의 싸움에서도 황제편에서 싸웠다. 그리고 하인리히 4세가 로마를 공격할 때도 참전했다. 하지만 아주 중요한 지휘관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후 로렌의 영지 문제로 황제와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황제를 굳게 지지한 덕에 결국 1087년 영지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별로 효율적이지 못했으며, 그의 전공과 충성에도 불구하고 제국에서 그의 지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따라서 십자군 원정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뛰어든 덕에 그는 중요한 군사 지휘관중 하나가 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십자군이 없었다면 생각할 수도 없던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성묘 교회에 있는 고드프루아의 검 :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  Deror avi)



 하지만 일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려면 돈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는 영지를 팔아서 자금을 마련했다. 심지어 영지와 성을 담보로 리에주의 주교와 베르덩의 주교에게서 돈을 빌리기 까지 했다. 여기에 이미 에미코 백작 때문에 (앞의 민중 십자군 참조) 겁을 집어먹은 유대인 공동체를 적당히 구슬려 거의 보호비 명목 으로 막대한 자금을 조달 할 수 있었다.


 그는 이 군자금으로 당시 유럽에서 수천명의 기사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당시 유럽에서 차남 삼남등으로 조그만 영지나 직장이 없던 잉여 (?) 기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덕분에 고드프루아의 군대는 상당히 큰 규모였다고 하며, 잘 조직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덕에 그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가장 중요한 지휘관이 될 수 있었다.




 외스타슈 3세 (Eustace III, Count of Boulogne ) 


 : 그는 앞에 설명한 고드프루아 드 부용의 형이다.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 외스타슈 2세로 부터 영지를 물려 받아 외스타슈 3세가 되었다. 그는 이미 많은 영지가 있었기 때문에 사실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 같지만 동생이 앞서 나가자 형의 체면상 참가했던 것 같다.


 그는 원정에서 신속히 발을 빼고 귀국했으며 타향만리에서 죽은 동생과는 달리 오래 살았서, 나중에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직을 제의 받기도 했다.

 (덧 : 여기서 한가지 설명이 추가로 필요할 듯 하다. 막내인 보두앵의 두 형이 외스타슈 3세아 고드프루아 임은 분명하다. 문제는 외스타슈와 고드프루아 중 누가 첫째인가 하는 문제이다. 외슈타슈 2세와 로렌 공작의 딸 이다가 결혼한 것은 1157 년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볼로뉴 3형제를 그녀가 출산한 것으로 되어 있다. 형제중 생몰연대가 비교적 확실한 것은 고드프루아이다. 그는 1160 년생이다. 그리고 차남이라고 알려져 있다. 외스타슈가 일부 기록대로 1158 년생이라면 외스타슈가 (살아남은) 아이들 중 첫째이고 고드프루아는 둘째, 보두앵은 3남이라는 순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그리고 볼로뉴 백작이 자기 장남에게 자신의 영토를 상속하고 차남은 후계가 없는 외가로 보네 결국 그 영지를 차지하게 했다는 추정도 그럴 듯 하다. 그런데 사실 외스타슈 3세의 정확한 탄생 년도는 문헌마다 차이가 있어 오히려 고드프루아가 더 먼저일 가능성도 배제는 할 수 없다. 사실 당시에는 영아 사망율이 높아 어느 정도 클때 까지는 정확히 기록도 안했기 때문에 정확한 생몰 연대는 알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이 경우 정확히 기록되는 건 사망 연도 정도다. 더군다나 형이나 동생이라는 표현 보다 형제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전쟁사에서는 고드프루아가 살아남은 아이중 첫째로 나온다.)





  보두앵 (Baldwin I of Jerusalem, Baldwin I of Edessa, Baldwin of Boulogne  1058 (?) - 1118)


 : 볼로뉴 삼형제인 외스타슈 3세, 고드프루아 드 부용, 보두앵 중 막내가 바로 이 보두앵이다. 이 형제들의 인생 역정은 아버지의 영지를 물려받아 편한 삶을 산 외스타슈 3세를 제외하곤 모두 파란 만장했다. 그러나 결국 보두앵은 왕의 자리에 올랐으니 로또 대신 십자군을 통해 인생 역전을 이룬 인물이었다.



 그는 사실 삼남으로 태어나 아무런 영지도 받지 못한 백수 신분이었다. 그래서 성직쪽으로 활로를 찾아보려 했으나 곧 그의 자유 분방하고 사치스런 성격이 성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성직의 길을 중도 포기했다.


 성직자도 아니고 영지도 없으니 거의 백수 한량이나 다름없던 그에게 십자군은 새로운 기회였다. 그는 형인 고드프루아의 군대에 바로 합류했다. 그는 아내와 자식들도 같이 데리고 떠났다. 아예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돌아오지 않았다)



(에데사에 입성하는 보두앵, 1840년대의 그림이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아마 아무것도 물려 받지 못한 삼남이 십자군 원정에 참가해서 크게 성공한 경우를 뽑으라면 이 보두앵 1세를 뽑을 것이다. 백수이던 볼로뉴의 보두앵에서 에데사 백작 보두앵 그리고 마침내 예루살렘 왕국의 2대 국왕 보두앵 1세로 가는 그의 파란 만장한 인생은 앞으로 십자군 전쟁사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참고로 이 인물의 탄생 연도도 확실치가 않다. 1058 년 이라는 일부 기록을 믿으면 그가 첫째가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1160 년도 초반생으로 추정된다. 이 쪽을 믿으면 원정 당시 30 대 초중반이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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