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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살라딘 8



 17. 기만


 1171년에 마침내 누레딘과 살라딘의 긴장은 일촉 즉발의 상황에 달했다. 누레딘이 몽레알에서 병력을 회군하지 않고 곧장 이집트의 와지르를 공격하기 위해 남하할 것이라는 루머가 설득력있게 돌았다. 곧 카이로에서는 와지르 살라딘과 다른 에미르들이 모여서 심각한 회의를 진행했다. 


 이 때 아이유브 가문의 일부는 누레딘을 향해 반기를 들것을 선동했고 어느 순간에는 살라딘도  여기에 넘어가는 듯 했다. 그러나 갑자기 살라딘의 아버지인 아이유브가 큰 소리로 이들의 경거 망동을 꾸짓었다. 아이유브는 자신보다 살라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없음을 강조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누레딘이 나타날 경우 말에서 내려 그의 말에 입을 맞추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즉 누레딘에 복종하겠다는 뜻)


 아이유브는 이집트는  누레딘의 땅이고 우리는 그분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주제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면서 누레딘에게 '단봉 낙타 편으로 특사를 보내 제 목을 터번으로 묶어 끌고 가도록 하시지요. 그래도 아무도 말리지 않을 것입니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쓰도록 조언했다. 


  이렇게 누레딘에게 복종의 뜻을 나타내기로 결정하면서 그날의 회의는 끝났다. 그러나 진짜는 그 다음이었다. 아이유브는 주변 사람을 물리친 다음 살라딘과 단둘이 이야기 했다. 그리고 자신의 진짜 속내를 드러냈다. 


 아이유브는 지금 누레딘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전쟁이 아니라 회유와 기만책이라고 말했다. 현재 이집트에서 살라딘의 지위는 이전보다 반석에 올라있지만 과거 누레딘의 휘하에 있었던 시리아 군이 아직 살아있는 자신의 주군에 대해서 반기를 들지는 모를 상황이었다. 따라서 지금 전쟁을 벌이면 이집트 주둔 시리아 군 중 일부는 누레딘을 지지할지도 몰랐다. 


 아이유브는 지금은 누레딘을 기만하고 시간을 벌어 힘을 키울 때라는 점을 역설했다. 이것은 오랜 세월 기회주의적이긴 하지만 나름 난세를 헤쳐온 아이유브의 지혜였다. 살라딘은 지금 힘을 키우고 있는 신흥 세력이므로 시간을 끌면 끌수록 유리했다. 반면 누레딘은 점차 나이가 들고 있었으므로 시간이 갈수록 불리하다는 간단한 계산이 아이유브를 움직였을 것이다. 시간은 살라딘의 편이었다. 

 
 과연 살라딘은 아버지의 조언대로 누레딘을 향해 엎드려 복종의 뜻을 나타냈다. 누레딘이 이 기만책을 믿었던지 아니면 믿을 수 밖어 없는 상황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십자군 국가 옆에서 내전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1171년 살라딘과 누레딘의 전쟁은 결국 불발로 끝났다. 그러나 이집트가 시리아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상태이고, 이곳을 누가 누레딘의 대리로 지배하더라도 누레딘의 의심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이는 임시적으로 불씨를 꺼둔 것에 불과했다. 



 18. 아이유브의 최후 


 누레딘과 살라딘의 갈등은 일단 겉으로만 봉합된 상태였다. 사실 이런 종류의 갈등은 둘 중에 누구 하나가 내려와야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러나 1172년에는 사실 살라딘도 누비아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바쁜 상태로 일단 이 때는 누레딘과의 갈등도 다소 소강 상태로 들어갔다. 


 반란을 일으킨 것은 이전 파티마 왕조를 모시던 누비아와 수단의 흑인 용병들이었다. 이들은 1169년에도 반기를 들어 이집트 본토에서 쫓겨난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일강 상류를 기반으로 계속해서 병력을 규합해서 알 아디드의 복수를 갚으려 했다. 


 살라딘과 그의 형제인 투란 샤 (Turan Shah) 는 이들을 공격해서 나일강 상류 지역인 아스완 (Aswan) 을 포위공격한 후 점령했다. 그리고 이후 남진을 계속해서 지금의 수단 땅까지 점령해 들어갔다. 이 때 살라딘이 이렇게 깊숙이 공격해 들어간 것은 단순히 전 파티마 왕조의 잔존 세력을 정리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훗날 누레딘이 이집트를 침공했을 때를 대비해서 수단에 또 다른 근거지를 마련할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이집트 상류의 아스완과 나일강. 지금도 이집트 남부에 도시이다.   I, the copyright holder of this work, hereby release it into the public domain. This applies worldwide. )



(구글 맵에서 아스완의 위치 표시 (빨간색 A) 아스완은 이집트 남부에 위치한 도시이다. )


 살라딘의 형인 투란 샤는 수단의 이브림 (Ibrim) 까지 원정군을 파견했지만 사실 이 지역은 누레딘에 추격을 피해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기에는 그다지 좋지 않은 곳으로 판명되었다. 일단 열대의 기후 자체가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투란 샤는 1174년 부터 홍해를 건너 아라비아 반도의 서남부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런 과정을 통해 아라비아 반도의 서남부 지역 - 지금의 사우디 아라비아 서부와 예멘 지역 - 이 아이유브 왕조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본래 의도한 대로 피신처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살라딘이 죽기 직전 아이유브 왕조의 최대 판도 - 지금의 아라비아 반도 서부 및 남부 지역이 포함되어 있다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Gabagool / Jarle Grøhn )


 아무튼 다시 1173년이 되기 전까지는 누레딘도 다시 살라딘의 충성심을 시험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전에 시르쿠가 이집트 원정을 위해 누레딘에게서 받은 20만 디나르의 군자금 중 일부인 6만 디나르와 기타 보석등 값나가는 물건을 받았다.


 그해 중순 (1173년) 살라딘의 충성심은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올랐다. 살라딘은 카락의 요새를 다시 한번 공격해 들어갔고 누레딘 역시 이를 협공할 계획이었다. 카락의 요새는 여전히 잘 버텼다. 사실 누레딘과 살라딘의 미묘한 관계를 잘 알고 있던 카락의 십자군 들은 어서 빨리 누레딘이 오기를 기다렸을지도 몰랐다. 그것만이 살라딘을 물러나게 만들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과연 누레딘의 군대가 접근하자 살라딘은 다시 이집트로 퇴각했다. 그런데 사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다. 그의 아버지인 아이유브가 낙마사고로 인해서 심한 부상을 입었던 것이다.


 살라딘은 이집트를 담당하고 있던 자신의 아버지가 죽으면 이집트를 상실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충분히 타당한 명분을 내세워 급거 귀국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인 아이유브는 아들이 결국 누레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173년 8월 9일 사망했다. 하지만 죽기전까지 아들에게 결정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아 결국 살라딘을 가장 강력한 술탄으로 만든 것은 바로 아이유브였다.


 한편 두차례나 기만당한 누레딘은 이제 자신의 이집트 총독을 믿지 못하게 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누레딘 역시 오랜 세월 전장에서 감을 익힌 사람이라 이집트를 원정하려면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다마스쿠스로 귀환한 다음 병력을 가다듬어 이집트 원정을 준비할 것이었다. 적어도 누레딘의 계획은 그러했으나 차차 언급하게 되듯이 신의 계획은 이것과 달랐다.



 19. 성왕의 마지막


 1174년에는 살라딘의 운명이 크게 변하게 된 해였다. 이해에는 여러가지 굵직 굵직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중에 첫번째는 이집트 내에서의 반란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파티마 왕조의 잔당들이 일으킨 반란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집트내의 살라딘의 측근들과 시칠리아 및 십자군 국가들 사이에서 살라딘을 제거하기 위해 공모한 음모였다. 그러나 알라의 가호가 있었는지 이 음모는 사전에 들통이 나서 결국 음모에 연루된 자들은 모두 그해 4월 6일 처형되는 운명에 처해졌다.


 하지만 이 음모는 그 다음 일어난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해프닝에 불과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누레딘은 더 이상 살라딘의 힘이 커지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었으므로 다마스쿠스에서 모술, 알 자지라 까지 전령을 파견해 저 배은 망덕한 이집트의 맘루크 (백인 노예란 뜻으로 주로 백인 용병을 뜻하는 의미, 여기서는 바로 살라딘) 를 응징하는 일에 군대를 조직하게 했다.


 이 군대는 1174년 4월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5월경에는 이집트를 향해 행군하고 있었다. 그런대 운명의 장난인지 아니면 신께서 개입한 것인지 누레딘이 앓아눕기 시작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누레딘은 인두염이나 편도염에 발생하여 농양이 생긴 것 같다. 그런데 항생제가 없던 당시에는 이는 매우 치명적일 수도 있는 질환이었다. 누레딘의 나이도 59세로 당시 기준으로는 그렇게 적지 않았다.


 결국 한시대를 풍미했던 성왕 누르 앗 딘 장기는 1174년 5월 15일 이집트 원정을 앞두고 허망하게 죽고 말았다. 사실 훗세에 이를 돌이켜 보면 이는 마치 한명의 영웅의 시대가 가고 이제 새로운 영웅의 시대가 도래하기 위해 이전에 있던 구세대 영웅을 신께서 불러들인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게 만들 만큼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이제 무슬림의 통일과 대 십자군 성전은 누레딘의 손에서 살라딘의 손으로 이어질 것이었다. 이는 물론 살라딘에게는 알라의 은총이지만 십자군 입장에서는 신께서 예루살렘 왕국을 버리신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시련이었다. 십자군 국가들은 누레딘의 죽음을 기뻐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이제 십자군들은 누레딘과 살라딘이 아니라 살라딘과 살라딘 사이에 끼어 서서히 몰락할 차례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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