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십자군 전쟁사 - 살라딘 7

14. 살라딘의 공세 


 1170년에 이르러 이집트를 사실상 장악하는데 성공한 살라딘은 이제 그 다음 단계를 향햐 나아갈 준비가 된 상태였다. 사실 당시에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수순은 바로 누레딘이 시리아와 이집트 양 방면을 장악한 만큼 양쪽에서 십자군 국가들을 압박할 것이라는 점이다. 


 과연 살라딘은 1169년의 다미에타 공격에 대한 설욕을 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1170년에 살라딘은 이집트 방면에서 십자군들을 압박해 들어갔다. 첫 번째 목표는 지금은 팔레스타인의 가자 (Gaza) 지구의 일부인 다룸 (Darum, Deir el-Balah) 였다. 

 
 1170년 후반기에 살라딘은 다룸을 공격했다. 이에 아말릭 1세는 가자 지구를 수바하던 성전 기사단 (Templer) 들을 다룸으로 소환했다. 물론 다룸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살라딘은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아 가자 지구의 나머지 부분을 점령하고 파괴시켰다. 


 또 같은 해에 살라딘의 군대는 아카바 만 (Gulf of Aqaba  홍해와 시나이 반도 사이의 만) 에 있는 십자군의 요새를 공격했다. 이 요새는 지금의 이스라엘의 최남단 도시이자 홍해로 향해 있는 도시인 에일라트 (Eilat) 남단의 섬에 건설되어 있었는데 그 위치로 말미암아 이집트에서 시리아로 향하는 수송로에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은 물론 그 가능성이 낮기는 해도 홍해쪽으로 십자군이 진출할 가능성도 있었으므로 일단 점령해두는 것이 안전했다. 





(아카바(수에즈)만 의 위성 사진, 이스라엘과 이집의 국경이다. This file is in the public domainbecause it was created by NASA. )



(구글 맵에서 Eilat 의 위치는 빨간색 A 이다. 십자군 시대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이 도시는 이스라엘의 최남단 도시이자 홍해로 향하는 입구이다 )


 1170년 살라딘은 가자 지구와 에일라트의 요새들을 공격해서 일단 팔레스타인 방면으로의 공격루트를 확보한 셈이 되었다.


 하지만 우연치 않은 천재 지변으로 인해서 1170년에 공세는 힘을 잃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지진이 덮친 것이다. 이로 인해 누레딘도 피해 지역을 복구해야 했으므로 공격에 힘을 실을 수 없었고 결국 1170년의 공세는 이 정도에서 만족해야 했다.




 15. 파티마 왕조의 최후 


 오늘날 이집트에서 주종을 이루는 종교는 수니파 (Sunni) 무슬림이다. 하지만 당시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는 바그다드의 수니파 칼리프를 부정하는 시아파 칼리프 알 아디드 였다. 누레딘과 그의 부하들은 모두 수니파 무슬림 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이집트 침공은 이단을 징벌하는 지하드의 일종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앞서 이야기 했듯이 이들이 출정할 때 바그다드의 칼리프는 이들을 지지했다.


 따라서 사실 시르쿠와 살라딘이 이집트를 정복할 때 이 이단 파티마 칼리프를 처리하는 것은 매우 시급한 과제였다. 그러나 살라딘은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1169년 그가 이집트의 와지르가 되자 마자 결국 시아파들의 반발이 일어났다. 이집트의 시아파를 제거하려 들면 비록 수니파 무슬림이 많기는 해도 곧 이집트가 내전 상태로 빠질 지도 모른다.


 이런 고민 속에서 살라딘은 1169년에는 십자군의 침공을 막기위해서 1170년에는 십자군을 침공하기 위해서 일단 시아파 칼리프인 알 아디드를 방치한다. 하지만 당연히 예상할 수 있듯이 바그다드의 칼리프 - 당시 압바스 왕조 (Abbasid) 의 칼리프는 1170년에 즉위한 알 무스타디 (
Hassan al-Mustadi Ibn Yusuf al-Mustanjid) 였다 - 와 누레딘은 한시 바삐 이집트의 이단 칼리프를 처리하기를 재촉했다.


 이제 이집트에서 막 권력 기반을 장악한 살라딘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잘못하면 이집트가 내전 상태로 들어가 그의 입지가 위태로워 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레딘과 칼리프 알 무스타디의 요청을 거절할 수만도 없는 상태였다.


 1171년 9월 10일 (이슬람력 567년) 살라딘은 결단을 내렸다. 이집트 인들을 떠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집트의 모스크에서 바그다드의 칼리프를 찬양하는 기도가 올려졌다. 살라딘은 물론 누레딘과 알 무스타디에게도 몹시 다행하게도 다행히 이집트 인들은 강력하게 반발하지 않았다. 이를 돌려 말하면 이제 이집트의 국교는 수니파 무슬림이 된 셈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알 무스타디는 크게 환영하며 누레딘과 살라딘에게 예복과 압바스 왕조의 검은 깃발을 하사하고 특히 누레딘에게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지배자를 의미하는 칼을 한자루씩 만들어 하사했다.


 한편 파티마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 알 아디드는 차라리 다행스럽게도 병상에 앓아누운 상태였다. 살라딘은 마지막 베푸는 자비로 그에게 아무 소식도 전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회복된다면 스스로 진실을 알게 되고 죽게 되면 평화롭게 임종을 맞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알 아디드는 살라딘에게는 몹씨 다행하게도 -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살라딘이 그를 직접 처리 해야 했다 - 결국 회복하지 못했다.


 알 아디드는 죽기전 살라딘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살라딘은 이전에도 칼리프의 궁정음모에 암살 될뻔했으므로 이를 거절했다. (여기에 바그다드의 칼리프가 의심할 것을 우려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훗날 살라딘은 그의 요청이 음모가 아닌 진실된 것임을 알고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했다고 한다. 알 아디드는 자신이 끌어내려진지 불과 수일 후인 9월 13일 사망했다.


 이렇게 서기 909년에 건설된 파티마 왕조는 한때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500만 
㎢ 가 넘는 넓은 영토를 호령하기도 했지만 12세기에 와서 사방에서 몰려드는 외세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살라딘에 의해 멸망했다. 살라딘은 파티마 왕조의 생존자들을 후대했지만 그들이 새로운 칼리프는 선발하지 못하게 했다. 대신 카이로와 알 푸스타트에서 알 무스타디가 칼리프임이 선포되었다 (즉 이제 수니파 칼리프를 받들라는 뜻)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수니파가 시아파에 대해서 승리를 거둔셈이지만 실제 승자는 알 무스타디가 아니라 바로 살라딘이었다. 이제 이집트는 13세기까지 살라딘이 건설한 아이유브 왕조에 의해 지배될 것이었다.



 16. 의심


 살라딘은 1171 년 파티마 왕조를 공식적으로 종료시킨 후에도 계속 이집트의 와지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제 무주 공산이 된 파티마 왕조의 거대한 왕궁은 부하들과 형제들에게 양보하고 부유한 이집트의 금은 보화 역시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재물을 백성과 부하들에게 아낌 없이 양보하므로써 가장 중요한 재산인 백성들과 부하들의 신망과 사랑을 얻었다.


 그러나 이렇듯 살라딘이 이집트에서 세력을 키워나가자 여기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 사람들은 십자군은 아니었다. 솔직히 십자군은 이 상황을 반겼다. 왜냐하면 누구보다 누레딘이 이 상황에 대해서 불만을 품었으며 자신의 신하인 살라딘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1171년에 극명하게 드러났다. 살라딘은 이집트에서 파티마 왕조의 수명을 거의 끝장낸 다음 1171년 9월 25일 십자군을 공격하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했다. 살라딘은 지금의 요르단의 도시인 카락 (Kerak 혹은 Karak) 과 이보다 더 유명한 십자군의 성채인 몽트레알을 공격했다.


 카락은 이집트 국경에 근접한 요르단의 도시로 1140년 풀크 국왕의 집사인 파강 (Pagan) 에 의해 건설된 십자군 요새였다. 이 요새는 울트라주르뎅의 요새 가운데 하나로 메카에서 다마스쿠스에 이르는 캐러밴 루트에 가까웠으므로 당연히 무슬림들에게 껄끄러운 요새였다. 따라서 살라딘이 이를 점령해야 할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이 요새는 요르단 강 동안에 위치했으며 앞으로도 몇차례 언급할 일이 있을 것이다.




(카락의 남아있는 십자군 성채   Crac des Moabites or "Karak in Moab"  라고도 불리웠다.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Berthold Werner  )


 한편 이보다 더 중요하고 잘 알려져 있는 요새는 바로 몽레알 혹은 몽트레알 (Montreal) 요새라고 잘 알려진 요새였다. 당시에는 'Krak de Montreal' 이나 혹은 'Mons Regalis' 로 불리던 요새로 무슬림들을 쇼박 (Shoubak or Shawbak) 이라 부르던 곳이었다. 위치는 홍해에 연한 아카바의 동쪽으로 현대의 요르단의 쇼박 지역이다. 이 요새를 건설한 것은 바로 보두앵 1세였다. (1115년)


 이 도시는 위에서 설명한 에일라트의 인근의 요새이면서 이보다 한층 더 중요한 울트라주르뎅의 거점 요새였다. 또 위치상 역시 캐러밴 루트에 위협이 되는 존재였으므로 이를 점령하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크락 데 몽레알 요새 유적,  보두앵 1세 시절 건설된 울트라주르뎅의 중요 도시 중 하나다.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MDW )


 살라딘은 이 요새들을 공격했으며 몽레알에서는 적의 항복을 거의 받아낼 뻔 까지 했다. 그러나 갑자기 우발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군대를 이끌고 역시 양동 작전에 돌입한 누레딘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 몽레알 요새 쪽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는 물론 충성심이 의심스런 자신의 이집트 총독을 만나서 직접 따지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살라딘은 이 갑작스런 누레딘의 등장에 당황했는지 그의 군대를 이끌로 상이집트에서 옛 파티마 왕조를 복원하려는 반란을 분쇄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퇴각했다. 십자군으로써는 천만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누레딘이 살라딘의 설명을 듣고 그냥 다마스쿠스로 귀환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해지면서 살라딘과 누레딘의 긴장은 더욱 증폭되었다. 결국 살라딘이 누레딘에게 반기를 들 것인지 모두가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통계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사실 저도 통계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주제로 글을 쓰기가 다소 애매하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글을 올려봅니다. 통계학, 특히 수학적인 의미에서의 통계학을 공부하게 되는 계기는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아마도 비교적 흔하고 난감한 경우는 논문을 써야 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오늘날의 학문적 연구는 집단간 혹은 방법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그려면 불가피하게 통계적인 방법을 쓸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분야와 주제에 따라서는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상당수 논문에서는 통계학이 들어가게 됩니다.   문제는 데이터를 처리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익히는 데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학과에서 통계 수업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 학부 과정에서는 대부분 논문 제출이 필요없거나 필요하다고 해도 그렇게 높은 수준을 요구하지 않지만, 대학원 이상 과정에서는 SCI/SCIE 급 논문이 필요하게 되어 처음 논문을 작성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논문을 계속해서 쓰게 될 경우 통계 문제는 항상 나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간혹 통계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는 질문이 들어옵니다. 사실 저는 통계 전문가라고 하기에는 실력은 모자라지만, 대신 앞서서 삽질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몇 가지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입문자를 위한 책을 추천해달라  사실 예습을 위해서 미리 공부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통계는 학과별로 다르지 않더라도 주로 쓰는 분석방법은 분야별로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어 결국은 자신이 주로 하는 부분을 잘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과 커리큘럼에 들어있는 통계 수업을 듣는 것이 더 유리합니다...

9000년 전 소녀의 모습을 복원하다.

( The final reconstruction. Credit: Oscar Nilsson )  그리스 아테나 대학과 스웨덴 연구자들이 1993년 발견된 선사 시대 소녀의 모습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복원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유골은 그리스의 테살리아 지역의 테오페트라 동굴 ( Theopetra Cave )에서 발견된 것으로 연대는 9000년 전으로 추정됩니다. 유골의 주인공은 15-18세 사이의 소녀로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으나 괴혈병, 빈혈, 관절 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소녀가 살았던 시기는 유럽 지역에서 수렵 채집인이 초기 농경으로 이전하는 시기였습니다. 다른 시기와 마찬가지로 이 시기의 사람들도 젊은 시절에 다양한 질환에 시달렸을 것이며 평균 수명 역시 매우 짧았을 것입니다. 비록 젊은 나이에 죽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이런 경우가 드물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죠.   아무튼 문명의 새벽에 해당하는 시점에 살았기 때문에 이 소녀는 Dawn (그리스어로는  Avgi)라고 이름지어졌다고 합니다. 연구팀은 유골에 대한 상세한 스캔과 3D 프린팅 기술을 적용해서 살아있을 당시의 모습을 매우 현실적으로 복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나타난 모습은.... 당시의 거친 환경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긴 턱은 당시를 살았던 사람이 대부분 그랬듯이 질긴 먹이를 오래 씹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강하고 억센 10대 소녀(?)의 모습은 당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야 했다는 점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이렇게 억세보이는 주인공이라도 당시에는 전염병이나 혹은 기아에서 자유롭지는 못했기 때문에 결국 평균 수명은 길지 못했겠죠. 외모 만으로 평가해서는 안되겠지만, 당시의 거친 시대상을 보여주는 듯 해 흥미롭습니다.   참고  https://phys.org/news/2018-01-te...

150년 만에 다시 울린 희귀 곤충의 울음 소리

  ( The katydid Prophalangopsis obscura has been lost since it was first collected, with new evidence suggesting cold areas of Northern India and Tibet may be the species' habitat. Credit: Charlie Woodrow, licensed under CC BY 4.0 ) ( The Museum's specimen of P. obscura is the only confirmed member of the species in existence. Image . Credit: The Trustees of the Natural History Museum, London )  과학자들이 1869년 처음 보고된 후 지금까지 소식이 끊긴 오래 전 희귀 곤충의 울음 소리를 재현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프로팔랑곱시스 옵스큐라 ( Prophalangopsis obscura)는 이상한 이름만큼이나 이상한 곤충으로 매우 희귀한 메뚜기목 곤충입니다. 친척인 여치나 메뚜기와는 오래전 갈라진 독자 그룹으로 매우 큰 날개를 지니고 있으며 인도와 티벳의 고산 지대에 사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일한 표본은 수컷 성체로 2005년에 암컷으로 생각되는 2마리가 추가로 발견되긴 했으나 정확히 같은 종인지는 다소 미지수인 상태입니다. 현재까지 확실한 표본은 수컷 성체 한 마리가 전부인 미스터리 곤충인 셈입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그 형태를 볼 때 이들 역시 울음 소리를 통해 짝짓기에서 암컷을 유인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높은 고산 지대에서 먼 거리를 이동하는 곤충이기 때문에 낮은 피치의 울음 소리를 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이런 소리는 암컷 만이 아니라 박쥐도 잘 듣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중생대 쥐라기 부터 존재했던 그룹으로 당시에는 박쥐가 없어 이런 방식이 잘 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