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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의 법칙은 끝났을까? (1)



(클릭하면 원본. 출처:


 별 생각없이 이웃 블로그 게시글을 보다 재미있는 내용을 발견했습니다. 미국의 경제학자인 로버트 J 고든이 쓴 미국의 성장은 끝났는가 (The rise and fall of American growth)라는 책의 내용을 분석한 것인데, 사실 저는 책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인 책의 내용은 현재 성장이 정체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새로운 IT 기술 (예를 들어 인공 지능 등)이 미국 경제의 생산성을 가속시킬 것이라는 테크노 낙관론자들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생산성 증가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것이죠. 아마도 이 이야기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컴퓨터 칩 성능 증가율은 1990년대 말에 비약적으로 올랐다가 2006년 이후 주저 앉았다라는 설명은 다소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결론은 속도의 감속이 공급 측 (제조사)가 아닌 수요측 (소비자)에 있다는 부분입니다. 저자는 구글의 수석 경제학자인 할 배리언의 말을 인용해 데스크톱과 랩톱(노트북)의 기술 변화는 중지된 상태이며 이는 데스크톱에 슈퍼 속도를 내는 칩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습니다. 


 저자가 뛰어난 경제학자일수는 있겠지만, 이는 해당 분야에 관심이 많은 소비자나 관련 전문가 입장에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일 것입니다. 사실 발전 속도가 둔화되는 것은 기술이 성숙하면 어느 제조업 분야에서든 다 보이는 현상이지만, 이것이 새로운 수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실제로 2006년 이후 프로세서 기술은 크게 정체한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을 할 필요를 느껴 포스팅을 작성했습니다. 


 저의 생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2006년 이후 인텔의 소비자용 프로세서의 성능 증가 및 트랜지스터 집적도 증가가 둔화된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소비자가 더 빠른 컴퓨터를 원하지 않는 것보다 시장 독점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 

 - 그 증거로 2017년 라이젠이 출시되자 인텔은 바로 코어숫자를 크게 늘린 새 제품군을 빠르게 출시했음. 만약 소비자가 이를 원하지 않았다면 이 제품들은 시장에서 참담한 실적을 거뒀을 것이지만, 새로 출시한 제품들은 판매 순위에서 빠르게 상위권을 차지함. 

 - 같은 시기 GPU 부분에서 빠른 속도로 트랜지스터 집적도가 늘어난 이유는 경쟁 구도가 형성되었기 때문. 이 시기에 소비자들은 꾸준하게 더 고성능 그래픽카드를 원했으며 제조사도 계속 신제품을 출시해 10년만에 괄목할만한 성능 향상을 이뤘음. 
 
 - 어떤 제품이든 소비자는 더 좋고 싼 제품을 원할 것이며 이는 프로세서 분야도 마찬가지. 소비자가 원하지 않아서 기술 발전이나 성능향상이 이뤄지지 않는 분야도 있을 순 있겠지만, 적어도 CPU는 그런 분야가 아니다. 더 좋고 싼 제품을 적극적으로 만들지 않아도 되는 쪽은 독점 기업이다. 경제학자가 파악해야하는 점은 이런 시장 상황이다. 


 이 이야기를 더 구체적으로 해보겠습니다. 


 무어의 법칙은 24개월마다 트랜지스터 숫자가 두 배로 증가한다는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the number of transistors in a dense integrated circuit doubles approximately every two years) 사실 이는 오래전부터 실현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였습니다. 100nm 이하의 미세 공정으로 진행하면서 비용이 크게 증가했고 여러 가지 물리적 장벽에 부딪혀 공정 미세화 자체가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어의 법칙이 현재는 과거처럼 잘 작동하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2006년 이후에 변화가 생긴 것일까요. 당시에는 지금처럼 공정 미세화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공정 장벽은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시장 상황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위키피디아) 


 인텔의 기념비적 프로세서인 8086의 경우 29,000개의 트랜지스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1978년에 출시된 이 프로세서는 인텔의 오늘을 만든 장본인으로 이후 인텔 아키텍처 프로세서를 x86으로 부르는 이유가 됩니다. 1982년에 등장한 20286은 13.4만개의 트랜지스터를 지녀 4년만에 4배 이상 증가했고 80386은 1985년에 등장해 27.5만개의 트랜지스터를 집적했습니다. 1989년에 등장한 80486은 118만개의 트랜지스터를 지녀 무어의 법칙에 부합되는 결과를 보여줬습니다. 


 이후 1993년 펜티엄에선 310만개, 1997년 펜티엄 2(클라매스) 에서는 750만개, 2000년 펜티엄 3 (코퍼마인)에서는 2100만개로 트랜지스터 숫자 증가는 순조롭게 이뤄졌습니다. 2004년에 나온 프레스캇 코어 펜티엄 4에서는 1억 1200만개라는 엄청난 숫자로 증가했는데, 사실 성능은 그렇게 좋지 못했죠. 그리고 2006년에는 인텔마이크로 프로세서 개발에서 큰 이정표를 찍은 코어 2 듀어 (콘로 Conroe)가 등장합니다. 

  
 콘로는 당시 인텔이 펜티엄4에 사용한 넷버스트 아키텍처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내놓은 회심의 대작이었습니다. 펜터엄 4는 AMD가 애슬론 프로세서를 들고 나와 인텔의 아성을 심각하게 위협하던 시점에 개발되었습니다. 사상 최초로 데스크탑 프로세서에서 1GHz의 벽을 넘는 기록을 AMD가 가져가자 인텔은 프로세서 클럭을 매우 높일 수 있는 새로운 아키텍처 개발에 집중해 펜티엄 4 프로세서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펜티엄 4 프로세서는 클럭이 높은 대신 발열량과 전력 소모량이 너무 컸고 결국 AMD가 64비트 프로세서를 투입하면서 전력대 성능비 면에서 오히려 열세에 빠지게 되어 시장 점유율을 심각하게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콘로가 나왔다는 것은 당시 컴퓨터 좀 써본 분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콘로의 등장 이후 시장은 급격히 인텔 위주로 재편됩니다. AMD도 급하게 K10 프로세서(페넘/페넘2)를 투입했지만, 인텔이 아키텍처를 완전히 갈아 엎으면서 성능이 크게 향상된데다 공정까지 앞서가서 이후로는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를 극복하고자 2012년 내놓은 불도저는 오히려 AMD를 더 위기로 몰아넣어 CPU시장은 인텔 천하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2006년 이후 인텔의 소비자용 프로세서가 급격한 성능 증가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닙니다. 경쟁 상대가 사라졌는데, 굳이 그렇게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죠. 물론 그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경쟁이 없다는 요소가 매우 크게 작용했다는데는 의문을 제기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2007년 Q6600 (켄츠필드) 같이 대중적으로 히트친 쿼드 코어 CPU를 내놓은 후 인텔은 코어 숫자를 증가시키는데 매우 소극적이 됩니다. 특히 2011년에 샌디브릿지가 나오면서 메인스트림은 쿼드코어 보급형은 듀얼 코어라는 공식을 계속해서 유지합니다. 6코어 이상은 고가형 프로세서에만 보급되었습니다. 2011년에 나온 옥타코어 불도저 프로세서의 성능이 신통치 못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시장 정책은 매우 잘 먹혀들었습니다. 


 2011년에 나온 4코어 샌디브릿지는 9억 9500만개의 트랜지스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전 포스트: https://blog.naver.com/jjy0501/100122542683), 그리고 2012년에 나온 아이비브릿지는 22nm로 공정을 낮췄는데도 똑같이 4코어를 지닌 제품이 14억개 정도이 트랜지스터를 지니고 있습니다. 소비자들 대부분이 원하지 않는데도 그래픽 유닛을 키웠기 때문이죠. 그래서 트랜지스터 숫자는 많아졌는데, 성능은 별로 차이가 없는 이상한 프로세서가 등장했습니다. ( https://blog.naver.com/jjy0501/100156649004 참조)


 이는 트랜지스터 집적 기술의 향상을 소비자가 원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분명히 독점 기업인 인텔이 소비자를 기만한 행위입니다. 당시 내장 그래픽을 빼고 그 자리에 코어 2개를 더 넣은 6코어 아이비브릿지가 같은 가격대에 나왔다면 분명히 잘 팔렸을 것입니다. '나는 더 좋은 CPU 필요 없으니 같은 값에 4코어 살게요'라는 소비자가 있었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할 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상황은 하스웰과 브로드웰에서도 이어집니다. 하스웰 4코어 프로세서는 아예 트랜지스터 집적도가 14억개 정도로 전세대와 비슷했고 ( https://blog.naver.com/jjy0501/100156649004 참조)브로드웰 역시 그래픽 부분만 좀 커진 하스웰이었습니다 ( https://blog.naver.com/jjy0501/220233133139 참조) 


 2011년에서 2017년 사이 인텔은 무어의 법칙을 무시하고 데스크탑 프로세서의 트랜지스터 집적도를 별로 올리지 않고서도 많은 수익을 남겼습니다. 물론 경쟁자가 없었기 때문이죠. 따라서 2017년까지 비슷한 행동을 반복했으나 와신상담 기회를 노리던 AMD가 반격에 들어갑니다. 


 2017년 AMD는 무려 48억개에 달하는 트랜지스터를 집적한 라이젠 프로세서를 출시했습니다. GT2 내장 그래픽을 탑재한 스카이레이크 쿼드 코어가 17.5억개 정도인 점을 생각하면 엄청난 숫자입니다. 이는 43억개의 15코어 아이비브릿지 EX 프로세서와 55.6억개의 하스웰 E5 18코어 프로세서의 중간에 해당하는 수준입니다. 


 라이젠 4개를 모은 서버 프로세서인 에픽은 무려 172억개의 트랜지스터를 지니고 있어 2009년에 등장한 6코어 옵테론 2400의 9억개 대비 거의 20배의 집적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8년이면 2^4=16배 정도니 CPU 부분에서도 무어의 법칙이 완전히 소멸된 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네 개의 다이를 하나로 패키징한 제품이라 동등비교는 어렵지만, 고성능 프로세서에 대한 수요가 매우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만약 정말로 소비자가 더 많은 코어를 원하지 않는다면 인텔은 단지 가격을 낮춰 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텔은 매우 다급하게 6코어 커피레이크와 최대 18코어를 지닌 스카이레이크 X를 내놓으면서 시장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는 인텔이 얼마든지 코어와 트랜지스터 집적도를 늘릴 수 있었다는 것과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단지 경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AMD에서 신제품을 내놓은 그해에 바로 메인스트림 제품의 코어를 1.5배(4->6), 하이엔드 제품의 코어수를 1.8배(10->18)로 높이기로 결정했으니 말이죠. 


 그리고 소비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더 빠르고 더 많은 코어를 지닌 프로세서에 대한 수요가 없다면 지금 인텔과 AMD 모두 경영위기에 빠질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보급형 4코어 이하 제품만 살테니 제품당 판매 액수가 줄어 매출과 마진 모두 감소할 것입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재 판매 순위 상위권 제품은 작년에 출시된 6/8코어 제품이 절반 이상입니다. 분명 고성능 CPU에 대한 수요가 존재했는데, 단지 소비자가 원하는 가격에 판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모든 소비자가 6/8코어 이상 제품을 선호하지는 않습니다. 분명 저렴한 물건에 대한 수요가 있는건 당연하지만, 소비자가 더 좋은 컴퓨터를 구매하기 원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더 좋은 집이나 더 좋은 차에 대한 수요가 없다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항상 좋은 차, 좋은 집, 좋은 옷에 대한 욕구는 있게 마련이고 이 욕망을 적당한 가격에 충족시키는 제품은 잘 팔릴 것입니다. 


 그리고 더 강력한 증거가 GPU 및 모바일 시장에 있습니다. 다만 글이 길어져서 GPU 시장의 경쟁 구도와 트랜지스터 집적도의 빠른 증가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이어 가겠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GPU 부분에서는 트랜지스터 집적도의 증가세가 2006년 이후로 눈에 띄게 감소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더 빠른 프로세서에 대한 수요가 없다면 GPU에서도 트랜지스터 집적도 증가가 거의 없었을 텐데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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