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간략히 보는 크림 반도의 역사 (5)






 6. 혁명기의 크림 반도 


 크림 전쟁이 끝나고 한동안 평화를 누렸던 크림 반도가 다시 격동의 시대로 진입한 것은 1917 년 러시아 혁명과 함께였다. 당시 볼셰비키 혁명 정권은 명칭과는 달리 러시아 내에서 소수파에 지나지 않았다. 1920 년대 스탈린이 정권을 잡고도 볼셰비키는 '러시아라는 호수에 떨어진 붉은 잉크 한 방울' 이라는 표현처럼 널리 확산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상태였기 때문에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치명적인 무능함과 이후 임시 정부의 혼란 덕분에 정권을 잡은 소비에트는 초기 권력이 매우 취약했다. 결국 다양한 반혁명 혹은 혁명 세력과의 내전은 불가피했다. 이 시기에 볼셰비키 혁명 정권과 전쟁을 치른 다양한 반혁명 세력 중에는 사실 러시아 제국의 붕괴를 틈타 독립을 쟁취하려는 민족주의자들도 다양하게 섞여 있었다.  


 이 점은 크림 반도도 마찬가지였다. 1918 년, 당시 크림 반도 인구 구성에서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크림 타타르들은 크림 인민 공화국 (Crimean People's Republic, 크림 타타르어로 Qırım Halq Cumhuriyeti) 이라는 사회주의 국가 같은 명칭의 독립국을 선포했는데 실제로는 세속 이슬람 국가였다. (물론 금방 사라졌기 때문에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가 되었을지 아니면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만 해도 러시아인은 크림 반도 인구의 42% 정도였고 우크라이나인은 11% 였으며 나머지는 타타르인이였는데, 타타르인들은 수세기 동안 러시아 제국 내 소수 민족이자 과거의 적으로 끊임없는 멸시와 탄압을 받아왔다. 따라서 이들이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자 그 틈을 타서 독립하려 들었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크림 인민 공화국은 과거 크림 한국의 수도였던 바크치사라이 (Bakhchysarai) 에 수도를 정했으며 타타르/몽골 족의 전통적인 회의인 쿠릴타이 (Qurultary) 를 통해 1917 년 12월 공화국을 선포했다. 초대이자 마지막 대통령은 노만 첼레비시한 (Noman Celebicihan) 으로 사실 임기는 2 달도 채 되지 못했다.  


 초기 크림 인민 공화국은 타타르족이 많이 사는 주요 도시를 장악하는 듯 했지만 역시나 모스크바의 볼셰비키 정권은 크림 반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무시할 수 없었다. 특히 당시에는 이미 재건된 흑해 함대의 기지가 있는 세바스토폴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혁명 정권은 이 흑해함대의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노력했으며 실제로 볼셰비키는 이 함대와 세바스토폴을 장악했다.  


 이후 볼셰비키는 크림 반도를 무력으로 점령했으며 쿠릴타이와 크림 인민 공화국은 1918 년 2월을 넘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노만 첼레비시한 역시 세바스토폴 요새에서 처형되어 그 시신은 바다에 버려졌다. 물론 대통령뿐 아니라 크림 타타르의 지도자들 역시 체포, 투옥, 처형되었으며 크림 반도는 한동한 테러가 난무했다. 20 세기 타타르족들의 수난사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지방 소비에트 정부를 세운 볼셰비키 세력도 오래가진 못했다. 역시나 러시아 혁명을 틈타 독립을 노린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Ukrainian People's Republic) 이 독일과 손잡고 구 러시아 제국 영토를 노렸기 때문이다. 볼셰비키 세력에 의해 1917 년에 설립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인민 공화국은 1 년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졌고 이후 우크라이나와 주변 지역은 우크라이나 - 소비에트 전쟁 (Ukrainian–Soviet War  1917 - 1921) 으로 알려진 지루한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1918 년 5월에서 11월 사이 주변 지도. 당시의 복잡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Map of the Ukrainian State (1918.V-XI)
   Ukrainian State
   West Ukrainian People's Republic (from 19.X.1918)
   Crimean government (planned to join the Ukrainian state as autonomic republic)
   Kuban People's Republic (planned to join the Ukrainian state as autonomic republic)
   Lithuania
   Soviet Russia


 우크라이나는 사실 역사적으로 봤을 때는 크림 반도와 큰 연관성이 없었으나 (물론 지리적으로는 붙어 있지만) 지정학적 중요성과 영토적 야망이 겹쳐 크림 반도를 장악하려 했다. 그러나 같이 들어온 독일군이 여기에 친독일 타타르 지방 정권을 건설했다. 독일군의 속셈은 좀 달랐던 것이다. 


 만약 독일이 전쟁에 패배하지 않았다면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이 지역의 역사가 더 꼬일 뻔 했지만 독일이 1918 년에 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므로써 이 친독일 정권은 무너지고 다시 반 볼셰비키 정부가 들어선다. 이 정권은 다시 볼셰비키에 의해 전복되는 듯 했으나 1920 년에는 다시 백군 (적백 내전 당시 반 볼셰비키 세력) 이 크림 반도를 장악했다. 


 이 혼란스런 역사를 보면 이 지역의 지정학적, 인종적 역사의 복잡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 타타르족,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독일, 백군 등 아주 다양한 세력이 크림 반도가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했는데 1921 년에 이르러서야 여기에 크림 사회주의 소비에트 자치 공화국 (Crimean Autonomous Soviet Socialist Republic) 이 설립된다. 크림 반도의 소비에트 지배 시대가 열린 것이다. 



 7. 2차 대전 이전의 크림 반도


 소비에트 시절의 인민들의 삶은 평탄치가 못했다. 일부는 출세의 기회를 잡은 이들도 있고 일부는 그럭저럭 생활이 향상된 이들도 있었지만 상당수 농민들과 소수민족들, 그리고 어떤 이유든 소비에트의 공안당국이랄 수 있는 오게페우나 엔카베데 (NKVD) 에 의해 잡힌 이들은 영문도 모른체 숙청 대상이 되거나 굶어죽거나 처형당했다.


 크림 타타르 역시 이 재앙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1921 - 1922 년 사이에는 내전으로 인해 심각한 기근이 발생해 새로 건국된 소비에트 연방에서 많은 이들이 (대략 이 시기 600 만명 정도) 희생당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피해를 입힌 것은 홀로도모르 (Holodomor) 였다. 


 스탈린 정권은 공업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도시에 공급할 막대한 곡물을 농업지대에서 차출했는데 그 과정이 너무 과도하여 1932 년에서 1933 년 사이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최대 750 만명이 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홀로도모르에 대해서는 이전 스탈린 관련 포스트에서 언급한 바가 있다. ( 오래된 글이지만 http://blog.naver.com/jjy0501/100065717770  참조)



(키에프에 있는 홀로도모르 희생자 기념비 안에서 참배하는 빅토르 야누코비치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이 시기만 해도 두 사람 모두 앞으로 일어날 일은 전혀 예측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2010 년  Dmitry Medvedev and Viktor Yanukovych honoured the memory of victims of the famine in Ukraine, placing candles at the foot on the monument to the victims of this tragedy. 17 May 2010.  Credit : Presidential Press and Information Office in Russia 


 1921 년의 기근과 홀로도모르 모두 크림 반도에 영향을 주었다. 대략 10 만명 수준의 타타르 족이 기근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수만명이 살기 위해 인근의 루마니아와 터키로 도망쳤다. 특히 터키는 같은 이슬람교 국가였으므로 많은 크림 타타르들이 이곳으로 탈출했고 그 후손들이 현재도 이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다. 일부는 구소련 붕괴와 우크라이나 독립으로 다시 크림 반도로 돌아오기도 했지만 20 세기 초반에는 크림 반도 인구 구성의 절반을 차지했던 크림 타타르가 서서히 크림 반도에서 소수 인종이 되는 변화는 피할 수 없었다. 


 다음에 계속 : http://blog.naver.com/jjy0501/100207693114




 참고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세상에서 가장 큰 벌

( Wallace's giant bee, the largest known bee species in the world, is four times larger than a European honeybee(Credit: Clay Bolt) ) (Photographer Clay Bolt snaps some of the first-ever shots of Wallace's giant bee in the wild(Credit: Simon Robson)  월리스의 거대 벌 (Wallace’s giant bee)로 알려진 Megachile pluto는 매우 거대한 인도네시아 벌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말벌과도 경쟁할 수 있는 크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암컷의 경우 몸길이 3.8cm, 날개너비 6.35cm으로 알려진 벌 가운데 가장 거대하지만 수컷의 경우 이보다 작아서 몸길이가 2.3cm 정도입니다. 아무튼 일반 꿀벌의 4배가 넘는 몸길이를 지닌 거대 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가칠레는 1981년 몇 개의 표본이 발견된 이후 지금까지 추가 발견이 되지 않아 멸종되었다고 보는 과학자들도 있었습니다. 2018년에 eBay에 표본이 나왔지만, 언제 잡힌 것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사실 이 벌은 1858년 처음 발견된 이후 1981년에야 다시 발견되었을 만큼 찾기 어려운 희귀종입니다. 그런데 시드니 대학과 국제 야생 동물 보호 협회 (Global Wildlife Conservation)의 연구팀이 오랜 수색 끝에 2019년 인도네시아의 오지에서 메가칠레 암컷을 야생 상태에서 발견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메가칠레 암컷은 특이하게도 살아있는 흰개미 둥지가 있는 나무에 둥지를 만들고 살아갑니다. 이들의 거대한 턱은 나무의 수지를 모아 둥지를 짓는데 유리합니다. 하지만 워낙 희귀종이라 이들의 생태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동영상)...

몸에 철이 많으면 조기 사망 위험도가 높다?

 철분은 인체에 반드시 필요한 미량 원소입니다. 헤모글로빈에 필수적인 물질이기 때문에 철분 부족은 흔히 빈혈을 부르며 반대로 피를 자꾸 잃는 경우에는 철분 부족 현상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철분 수치가 높다는 것은 반드시 좋은 의미는 아닙니다. 모든 일에는 적당한 수준이 있게 마련이고 철 역시 너무 많으면 여러 가지 질병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철 대사에 문제가 생겨 철이 과다하게 축적되는 혈색소증 ( haemochromatosis ) 같은 드문 경우가 아니라도 과도한 철분 섭취나 수혈로 인한 철분 과잉은 건강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높은 철 농도가 수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이야스 다글라스( Iyas Daghlas )와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의 데펜더 길 ( Dipender Gill )은 체내 철 함유량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적 변이와 수명의 관계를 조사했습니다. 연구팀은 48972명의 유전 정보와 혈중 철분 농도, 그리고 기대 수명의 60/90%에서 생존 확률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유전자로 예측한 혈중 철분 농도가 증가할수록 오래 생존할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유전자 자체 때문인지 아니면 높은 혈중/체내 철 농도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높은 혈중 철 농도가 꼭 좋은 뜻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하는 결과입니다.   연구팀은 이 데이터를 근거로 건강한 사람이 영양제나 종합 비타민제를 통해 과도한 철분을 섭취할 이유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어쩌면 높은 철 농도가 조기 사망 위험도를 높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임산부나 빈혈 환자 등 진짜 철분이 필요한 사람들까지 철분 섭취를 꺼릴 필요가 없다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연구 내용은 정상보다 높은 혈중 철농도가 오래 유지되는 경우를 가정한 것으로 본래 철분 부족이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낮은 철분 농도와 빈혈이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은 이미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철...

사막에서 식물을 재배하는 온실 Ecodome

 지구 기후가 변해가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비가 더 많이 내리지만 반대로 비가 적게 내리는 지역도 생기고 있습니다. 일부 아프리카 개도국에서는 이에 더해서 인구 증가로 인해 식량과 물이 모두 크게 부족한 현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이 나오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사막 온실입니다.   사막에 온실을 건설한다는 아이디어는 이상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사막 온실이 식물재배를 위해서 시도되고 있습니다. 사막 온실의 아이디어는 낮과 밤의 일교차가 큰 사막 환경에서 작물을 재배함과 동시에 물이 증발해서 사라지는 것을 막는데 그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막화가 진행 중인 에티오피아의 곤다르 대학( University of Gondar's Faculty of Agriculture )의 연구자들은 사막 온실과 이슬을 모으는 장치를 결합한 독특한 사막 온실을 공개했습니다. 이들은 이를 에코돔( Ecodome )이라고 명명했는데, 아직 프로토타입을 건설한 것은 아니지만 그 컨셉을 공개하고 개발에 착수했다고 합니다.   원리는 간단합니다. 사막에 건설된 온실안에서 작물을 키움니다. 이 작물은 광합성을 하면서 수증기를 밖으로 내보네게 되지만, 온실 때문에 이 수증기를 달아나지 못하고 갖히게 됩니다. 밤이 되면 이 수증기는 다시 응결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에코돔의 가장 위에 있는 부분이 열리면서 여기로 찬 공기가 들어와 외부 공기에 있는 수증기가 응결되어 에코돔 내부로 들어옵니다. 그렇게 얻은 물은 식수는 물론 식물 재배 모두에 사용 가능합니다.  (에코돔의 컨셉.  출처 : Roots Up)   (동영상)   이 컨셉은 마치 사막 온실과 이슬을 모으는 담수 장치를 합쳐놓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도 잘 작동할지는 직접 테스트를 해봐야 알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