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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7 차 십자군 4





 5. 영토 회복  


 여러가지 자충수로 궁지에 몰린 티발 1세와 그의 십자군을 구원했던 것은 바로 무슬림 지도자들 간의 내분이었다. 대략 1240 년에는 분열된 아이유브 제국에서 이집트의 앗 살리흐 아이유브와 다마스쿠스의 이스마일, 그리고 케락의 안 나시르 간에 알력 다툼이 십자군과의 성전 보다 더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물론 이것 자체는 별로 특별한 일도 아닌 것이 십자군 끼리 혹은 무슬림 끼리 싸우는 일이 성전보다 더 중요했던 일은 너무나 흔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로인해 구원받은 것은 티발 1세였다. 구원의 손길을 내밀은 것은 다마스쿠스의 이스마일이었는데 변방의 케락으로 몰아낸 이후에도 다마스쿠스와 이집트의 킹메이커로 좀처럼 죽지않는 안 나시르와 새로운 이집트의 통치자 앗 살리흐 아이유브 (  Al-Malik as-Salih Najm al-Din Ayyub 가 서로 손을 잡고 자신을 공격하는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외교적으로 고립되는 것을 막아보고자 일단 티발 1세와 손을 잡은 것이었다. 티발은 그 댓가로 일부 영토도 양도받았다.


 한편 성지에서는 두 십자군 기사단 사이의 오래된 갈등이 다시 점화되었는데 그 기사단이란 물론 구호 기사단과 성전 기사단이었다. 3대 기사단이라고 불리는 튜튼 기사단은 사실 본거지를 발트해 쪽으로 옮겼기 때문에 성지에서 다른 2대 기사단과 그렇게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은 영역도 겹칠 뿐 아니라 상호간의 이권 역시 겹치는 부분이 있었으므로 본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따라서 구호기사단이 성전 기사단 몰래 이집트의 술탄과 협상을 진행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앗 살리흐 아이유브는 이스마일과 십자군이 연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증오스런 이교도에게 모든 것을 다 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즉시 자신이 가자에서 사로잡은 십자군을 비롯한 십자군 병력 및 일부 영토까지 내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티발 1세는 즉시 이전에 이스마엘과의 맹약을 잊어버리고 바로 이집트의 술탄과 협상을 맺었다. 그리고 일단 협상을 통해 구겨진 체면을 세울 만큼 영토를 회복하자 - 놀랍게도 갈릴리 지역의 대부분과 과거 구호기사단의 요새인 벨포트 (Belfort), 사헤트 (Saphet) 등을 포함 -  티발 1세는 1240 년 9월에 본국으로 귀국했다. 단 한뼘의 영토도 전투를 통해 빼앗지는 않았지만 그가 있던 2년간 수복한 영토는 사실 1차 십자군 이후 가장 큰 규모에 속했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은 후세의 역사가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아무튼 그 영토들은 오래가지 못했다. 



6. 1240 년대의 예루살렘 왕국


 1240 년 에 티발 1세가 떠난 자리에 대신 나타난 것은 바로 콘월의 리처드 (Richard of Cornwall, Count of Poitou, 1st Earl of Cornwall) 이었다. 그는 실지왕 존의 둘째 아들이자 헨리 3세의 동생으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 중에 하나였다. 


 그는 티발 1세와 떠남과 거의 동시에 사적인 십자군을 이끌고 티발 1세가 시작한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이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 왕국은 아이러니 하게도 갈릴리 대부분의 지역을 다시 확보해서 얼추 현재의 이스라엘 만큼 크기가 커졌다. 하지만  사실 지키는 병력은 별로 없었으며 실질적으로 이 빈약한 예루살렘 왕국의 독립을 유지하는 것은 아이유브 제국의 분열이라는 외부적인 요소 뿐이었다. 


 더욱이 사실 롬바르 전쟁의 완전히 종식된 것도 아니었다. 실제적으로 프리드리히 2세의 패배로 종결되긴 했지만 현지 귀족들도 황제를 완전히 배척할 명분도 없었으며 반면에 황제가 보낸 필란제리 역시 빈약한 병력으로 황제의 권위를 완전히 확립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1243 년 거의 탄생과 더불어 예루살렘 국왕 자리에 오른 콘라드 4세 (프리드리히 2세와 욜랑드 사이의 아들) 이 15 세가 되었다. (1228 년생) 그는 섭정이 아니라 정식으로 국왕이었고 이에 아직 예루살렘 왕국에 도착하진 않았지만 통치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한편 현지에서는 필란제리와 그의 편이었던 귀족들과 반대하는 귀족들 사이의 대립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이 상황이 완전히 종결된 것은 1243 년으로 결국 예루살렘의 귀족들이 Haute Cour (왕립 공의회, 혹은 왕국 최고회의)를 열어 샹파뉴의 앨리스 (Alice of Champagne : 이사벨 1세의 딸로 콘라드 4세의 할머니뻘) 를 섭정으로 정하고 티레에서 필란제리를 제거함으로써 롬바르 전쟁이 끝났다. 콘라드 4세는 실제로 예루살렘에 가지도 못했기 때문에 결국 왕국은 귀족등의 분할 통치로 남겨질 수 밖에 없었다. 





 (불운한 프리드리히 2세의 더 불운한 후계자였던 콘라드 4세 (그는 예루살렘 국왕으로는 콘라드 2세이고 시칠리아 왕으로는 콘라드 1세였으며 독일왕으로는 콘라드 4세였다.) 프리드리히 2세의 제위 기간 내내 반란을 진압하러 다녔던 그는 결국 아버지가 죽고 난 이후 4년만에 죽으므로써 호엔슈타우펜 조의 몰락을 알리게 된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한편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로 실제 예루살렘 국왕이었던 콘라드 4세는 과연 무엇을 했던 것일까 ? 그 대답은 이미 앞서의 포스팅에서 했다. 즉 형인 하인리히가 반란을 일으킨 후 나중에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가 프랑스로 도피해 반란을 일으켰기에 황제의 아들 콘라드 4세는 이들 반란군과 대립 왕 (처음에는 Henry Raspe 가, 그리고 1246 년 그를 격파한 후에는 William of Holland 가 ) 을 척결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했으므로 변방의 예루살렘 왕국은 거의 잊혀진 거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이렇게 되자 1241 년 콘월의 리처드가 귀국한 후 예루살렘 왕국 현지는 거의 무주 공산인 상태가 되버리고 말았다. 만약 프리드리히 2세가 반란을 진압하는데 총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면 충분한 병력과 함께 콘라드 4세가 예루살렘 왕국을 접수하고 이후에 불어닥칠 폭풍우로 부터 왕국을 당분간은 방어하는 데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왕국은 외견상 다시 회복되었지만 사실상 반 해체상태였으며 주요 군사세력인 구호 기사단과 성전 기사단의 불화는 점점 심해져 만약 주변의 아이유브 제국이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예루살렘 왕국의 해체는 더 빠르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사실 예루살렘 왕국을 거의 해체 상태로 몰고간 것은 결코 이교도들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기독교도들의 탐욕이 왕국을 반 해체상태로 만들었다. 허울뿐인 예루살렘 왕국이 허약한 약체라는 사실은 1244 년에 입증된다. 



 7. 예루살렘 포위 (1244) 


 1244 년이 되자 본격적으로 이집트의 앗 살리흐 아이유브와 다마스쿠스의 이스마일 사이의 전쟁이 발발했다. 이 때 십자군은 (정확히 말하면 현재 기독교도들인 프랑크인들) 다시 앗 살리흐를 배신하고 이집트를 분할하는 조건으로 이스마일과 손을 잡았다. 그러자 이집트의 앗 살리흐는 새로운 동맹을 찾아냈다. 그들은 호라즘 용병들이었다. 


 앞서 포스팅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 http://blog.naver.com/jjy0501/100155688612 를 참조) 호라즘 (혹은 화레즘) 제국은 몽골 제국의 급격한 팽창 때문에 급속히 붕괴되었다. 당시 호라즘 제국에 속했던 수많은 용병들은 서쪽으로 도망쳤는데 여기에 바로 시라이와 팔레스타인 지역이 존재했다. 마침 병력이 필요하던 이집트의 술탄은 바로 이들을 끌여들였다. 


 당시 호라즘 병력의 수는 1만에 달했다고 하는데 사실 용병이라기 보단 그냥 도적 떼에 가까워서 군사 행동보다는 약탈에 더 촛점이 맞춰진 상태였다. 아무튼 알 살리흐 입장에선 그냥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적들을 분쇄해주면 만사 형통이었으므로 그런 문제는 상관없었다. 이들이 그냥 들어가서 약탈만 해도 술탄에겐 손해볼 일이 없었던 것이다. 


 이 호라즘 용병들은 시리아를 실컷 약탈한 후에 방어가 견고해 보이는 다마스쿠스 대신 빈약한 방어력을 지닌 예루살렘이 더 좋은 약탈의 목표라고 생각하고 (사실 전혀 종교적인 고려는 없었던 것 같다) 예루살렘을 목표로 진군했다. 이들의 판단은 매우 옳은 것으로 판단되었는데 이전부터 예루살렘이 방어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6차 십자군 이후로 방어 요새들이 거의 버려지다 시피 했거나 파괴되었으므로 그들의 공격을 저지할 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결국 예루살렘은 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학살 (1099 년) 에 견줄만한 대학살에 노출되었다. 호라즘 용병들은 약탈로써 그들의 급여를 대신했기 때문에 도시가 사실상 거의 파괴되는 수준의 약탈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고용주인 이집트 술탄과 합류했다. 


 이 충격적인 패배는 (사실 패배라고 하기도 뭐한게 실제 맞서싸웠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물론 전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던 십자군 귀족과 기사단 때문이었는데 특히 기사단들은 패배의 가능성이 점쳐지자 이교도와 성전보다 귀중한 자신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모두 성도 예루살렘에서 후퇴해 버렸다. 하지만 사실 이집트 군과 호라즘 군사들도 십자군의 주력을 격파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 과업은 다음에 설명할 라 포르비에 전투 (Battle of La Forbie) 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 전에 예루살렘과 다른 주변 지역은 1244 년에 더 이상 예루살렘 왕국의 영토가 아니었다. 예루살렘 왕국의 거의 명목뿐인 왕국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 중요한 영토를 너무나 쉽게 손실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라 포르비에 전투는 이를 확정지은 전투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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