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1217 년의 공세
일단 잘 무장된 헝가리 군이 당도하자 군사력의 추는 다시 십자군 쪽으로 기울었다. 알 아딜은 병력을 급히 소집하긴 했지만 그 역시 꽤 늙은 상태였고 (그는 1145 년 생으로 당시엔 이미 일흔이 넘은 노인이었다) 사실 군사적으로 유능한 인물이었다고는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진 못했다.
따라서 무슬림들이 예루살렘에서 급거 탈출하기 시작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 도시는 역사적으로 봤을 때 방어에는 별로 유리하지 않으며 난공불락의 요새라고도 할 수 없는 접근이 용이한 위치에 있어 셀수 없을 만큼 주인이 바뀐 도시였다.
무엇보다 무슬림 들이 걱정하는 일은 1099 년의 예루살렘 대학살 ( 이전 포스팅 http://blog.naver.com/jjy0501/100089611329 을 참조 ) 이 다시 재연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살기를 희망하는 많은 이들이 도시를 등졌다.
그런데 1217 년의 십자군 공세를 기록할 때 한 가지 난감한 점은 이 안드레 2세가 별로 자세한 기록을 남겨줄 연대기 작가를 대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무슬림 쪽 도 그다지 상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아서 1217 년 당시의 상황을 아주 상세하게 알기는 힘들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건 십자군의 우세였다는 점이다.
1217 년 11월 요르단 강에서 헝가리 군이 주축이 된 십자군은 알 아딜이 보낸 군대를 쉽게 물리쳤다. 알 아딜은 현명하게도 무리하게 이들과 전면전을 벌이는 대신 각지의 요새와 도시의 방비를 굳건히 했다. 헝가리군이 머지 않아 돌아가면 나머지 군대는 큰 병력이 아니었기 때문에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문제는 진짜 헝가리 군이 일찍 돌아갈 지 말지 였다.
1217 년의 남은 시기에 헝가리군은 약간의 성채와 타보르 산 (Mt Tabor) 주변 만 점령했을 뿐 전과를 전혀 확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투석기 ( catapults 와 trebuchets ) 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방비된 요새들을 공략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기 알라의 은총이 있었던지 진짜로 알 아딜이 원하던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중동 지역의 기후와 질병에 익숙치 않은 외부의 침략자들이 항상 겪게 되는 문제인 질병이었다. 과연 안드레 2세는 적절한 시기에 병에 걸려 쓰러지게 된 듯 하다.
결국 안드레 2세는 보무도 당당하게 잘 무장된 대군을 데리고 성지까지 왔건만 아무 소득 없이 병력을 물려 철군하기로 결정했다. (1218 년 2월) 다만 아주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앙드레 2세가 떠나기전 성지에서 약간의 성유물들을 챙겨 헝가리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렇게 어이없이 주력부대인 헝가리군이 철군하자 나머지 십자군도 저절로 해산하게 되어 5차 십자군의 성지에서의 첫 군사 행동은 아무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5차 십자군이라는 게 하나의 군대라기 보단 여러 군사 집단들을 통틀어서 언급하는 것이기 때문에 5차 십자군이 다 끝난 건 아니었다. 새로운 십자군 집단이 아이유브 제국의 심장부인 이집트를 노리고 있었다.
10. 이집트 공세
엔드레 2세와 현재 십자군 국가들의 성지 예루살렘 탈환전 과는 완전히 별도로 새로운 십자군이 1218 년 성지가 아닌 이집트로 향하고 있었다. 이 군대는 프랑스는 물론 독일과 기타 유럽 지역에서 온 병력들로 꽤 잡다한 구성을 하고 있었다.
1218 년에 일단의 독일 십자군이 퀄른 에서 당도했고 홀랜드 백작인 윌리엄 1세는 지금의 네덜란드 및 프리지아 인근 지대에서 병력을 모아 이 군대에 합류했다. 그리고 이전에 설명한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6세 역시 상당한 병력을 이끌고 합류하자 군대의 규모가 제법 커졌다. 이들과 프랑스에서 개별적으로 모인 십자군들이 합류하자 정규 십자군이라고 부를 만한 규모의 군대가 모아졌다.
이들은 1218 년 이집트 공세를 시작하기에 앞서 다른 무슬림 군주와 동맹을 맺었는데 그 대상은 바로 아나톨리아 고원지대에서 아이유브 왕조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롬 술탄국의 케카부스 1세 (Keykabus I) 였다. 십자군이 기대한 것은 이들이 시리아를 공격해 시리아에 있는 아이유브 제국의 군대가 남쪽으로 남하하지 못하게 묶어 두는 것이었다.
한편 1218 년에 이들의 계획을 알게된 장 드 브리엔 역시 이집트 공격에 찬성했는데 사실 여기에 찬성하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도 없었을 것이다. 이번에 독일을 중심으로 편성된 십자군은 엔드레 2세가 이끈 군대보다는 교황과 관계가 깊었고 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와 리처드 1세의 생각대로 이집트를 먼저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것은 물론 리처드 1세가 언급한대로 적의 심장부인 이집트를 그대로 두면 결국 예루살렘을 지키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이 판단이야 정확할지도 모르지만 이집트 처럼 당시에 많은 인구과 군대를 가진 국가를 순전히 상륙 부대 만으로 점령한다는 것은 상당히 무모해 보이는 전술이었다. 그럼에도 이 성공하기 힘들어 보이는 군사적 도박이 감행되었다.
장 드 브리엔 및 현지의 십자군 병력은 1218 년 5월 24일 아크레에서 프리지아 함대에 함류했다. 이 보다 앞서 4월에는 프랑스에서 십자군 본대가 이집트로 향했다. 이들이 아틀릿을 거쳐 나일 강 유역의 가장 중요한 요새 가운데 하나인 다미에타 항에 이르게 된 것은 1218 년 6월이었다.
11. 다미에타
다미에타 항은 이전 살라딘 편에서도 설명했던 이집트의 항구 도시로 카이로를 비롯한 나일강 하류 지역의 주요 도시들로 향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잘 요새화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살라딘은 1160 년대 4차례에 걸친 이집트 공략에서 경험을 얻어 이 도시의 중요도를 잘 알고 있었다. 1169 년에는 비잔티움 - 십자군 연합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경험도 있었다.
따라서 살라딘은 재위 기간 동안 이 도시를 더 요새화 시켰다. 다미에타는 나일강 및 육지에서 동시에 공략하지 않는다면 고립시키는 일이 불가능한 요새도시였다. 거기에 함대와 지상군이 동시에 포위공격하더라도 튼튼한 성벽과 탑 덕분에 쉽게 함락될 도시는 아니었다.
(구글 맵에서 본 다미에타. 실제로는 나일 강 하류 지역에 있으며 약간 바다에서 안쪽으로 들어와야 한다. 나일강이 워낙 거대한 강이다 보니 하류 지역이라고 해도 수백 km 에 이르는 삼각형 모양이다)
다만 공세를 시작할 즈음에 십자군에 유리한 점도 있었다. 그것은 알 아딜이 (당시 73 세) 고령으로 앓아 누웠는데다 후계자들이 서로 협력할 가능성이 적어 보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걱정거리였던 엔드레 2세의 대군이 돌아갔기 때문에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는 십자군의 추가 공격에 대해서 방심하고 있었다.
따라서 불행 중 다행이랄까 일단 다미에타를 방어하는 병력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만약 기습의 이점을 최대한 누리고 아이유브 왕조가 알 아딜의 사후에 내분에 빠진다면 이집트 원정도 꼭 불가능 하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일단 다미에타의 높은 탑과 성벽은 쉽게 정복이 가능하지 않았다. 따라서 십자군은 8월 24일 두개의 배위에 공성탑을 건설하고 도시 외각은 요새탑들을 공격했다. 다음날인 8월 25일 십자군은 요새 외각의 탑들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다미에타 공방전 This work is in the public domain in the United States, and those countries with a copyright term of life of the author plus 100 years or fewer. )
다만 군사적 성공은 일단 여기까지였다. 결과적으로 십자군은 다미에타를 전부 점령하는데 실패했을 뿐더러 워낙 다양한 군대가 모였다 보니 다시 내부적으로 의견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이후에 군사 행동에 대해서 합의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아후 아이유브 왕조의 미래를 결정지을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알 아딜이 사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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