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이반 뇌제 (12)








 24. 리보니아 전쟁 - 주변국의 간섭 


  이전 포스트에서 언급했듯이 리보니아 전쟁은 시작부터 러시아와 이반 뇌제의 뜻과는 반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카잔 정복으로 자신의 능력을 실제 이상으로 평가하게 된 이반 뇌제는 당연히 여기에 격분해서 계속해서 병력을 투입해서 끝장을 보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만만하지 못해서 주로는 리보니아의 내륙 지역에 대한 소규모 약탈과 공격만 성과를 거뒀을 뿐이었다. 계속해서 무의미한 손실을 치루면서도 차르의 군대는 리보니아의 주요 해안가 도시인 리가 (Riga) 나 레발 (Reval), 페르나우 (Pernua) 같은 도시를 함락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이러는 와중에 어부지리를 노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폴란드 - 리투아니아에 신경이 집중된 러시아를 피해 리보니아에 자신의 세력을 침투시키고자 한 스웨덴의 새로운 국왕 에릭 14 세 (Eric IXV) 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에릭 14 세는 1560 년에 아버지인 구스타브 1 세 바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집권초부터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것은 물론 군사력 강화에 힘을 쏟아 발트해 최강의 해군과 더불어 그보다 인상적이진 않지만 아무튼 강화된 육군을 가지게 되었다.       



(에릭 14 세, 바사 왕조의 두번째 국왕으로 시대의 풍운아라고 할 수 있다.  Domenicus Verwilt 작 ) 


 스웨덴 역시 사실 내외적으로 다른 문제가 많아서 나중에 뛰어들었을 뿐 발트해 연안의 국가 - 특히 리보니아 연방 - 에 관심이 많았다. 이 지역은 근세 초에 가장 활발한 무역 루트로 각종 원자재와 곡물, 공산품, 군수 물자들이 활발하게 교역되던 장소였다. 또 국가 안보상 이 지역을 장악해서 발트해를 스웨덴의 호수로 만들 수 있다면 앞으로 스웨덴의 상당한 군사 방어상의 이점이 생기게 된다. 무역로를 장악해서 생기는 경제적 이점은 물론 말할 것도 없었다. 다만 덴마크 - 노르웨이가 이를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고 러시아와 폴란드 역시 이 지역을 노리고 있었으므로 스웨덴이 이 지역에 진출하는 데는 상당한 애로 사항이 있었다.


 하지만 하늘이 에릭 14세를 돕는지 - 물론 이반 뇌제에게는 꽤 황당하게도 - 거의 피한 방울 흘리지 않은 스웨덴이 러시아가 막대한 손실을 보면서 공략한 북부 리보니아 지역을 가로채는 사태가 발생한다. 지금의 에스토니아에 해당하는 리보니아 연방 북부 지역과 레발 같은 주요 도시가 이반 뇌제의 통치를 받느니 차라리 스웨덴 국왕의 통치를 받기로 결정하고 에스토니아 공작령 (Duchy of Estonia  1561 - 1721 년  혹은 스웨덴령 에스토니아) 을 출범시킨 것이었다.      



(17 세기 스웨덴 제국의 발트해 동쪽 연안 지역   Based on various sources, though mainly Sveriges historia intill tjugonde seklet by Emil Hildebrand from 1906.  Thomas Blomberg   ) 


 이와 같은 사태 전개는 이반 뇌제의 분노를 더 폭발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스웨덴 역시 적지 않은 댓가를 지불하고 발트해 동부 지역의 지배를 확립하게 된다.  



 한편 덴마크 - 노르웨이 국왕인 프레데릭 2 세 ( 이 인물은 천문 관측에 지대한 관심으로 티코 브라헤에게 막대한 지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결과 케플러의 업적과 근대 천문학의 발전에 본의 아니게 (?) 크게 기여했다. 또 햄릿의 무대인 크론보르(kronborg)성의 건축을 지시하기도 했다) 은 이미 1559 년에 외젤-비크 주교구(Bishopric of Osel-Wiek, 위의 지도에서 왼쪽에 있는 섬) 를 3 만 탈러 (Thaler) 라는 거금을 주고 구입한 바 있다. 


 프레데릭 2 세나 에릭 14 세가 매우 편리하게 별 손실 없이 (특히 에릭 14 세는 당시 시점에서는 아주 수지 맞는 장사를 했다. 이 시점까지는 거의 로또 당첨되는 수준으로 들인 돈 거의 없이 꽤 많은 영토를 거저 얻었기 때문에)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당시부터 폭군의 이미지로 불리기 시작한 이반 뇌제 덕이었다. 리보니아 주민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반 뇌제에 지배를 받느니 그냥 이보다 나아 보이는 서방측 지배자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본래 주민들에게는 어차피 독일계 지배자가 다른 지배자로 바뀌는 정도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나빠 보이는 통치자를 피하는게 대부분의 바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땅은 유한하고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게 마련이라서 이런 식의 영토 분할은 특히 덴마크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런 식으로 영토를 늘려나가고 군대를 강화하면 스웨덴이 덴마크 - 노르웨이가 통제하기 힘든 제국이 될 가능성 있었다. 결국 이번에는 덴마크 - 폴란드 - 뤼베크가 힘을 합쳐 스웨덴을 공격하니 북유럽 7 년 전쟁 (Northern Seven Years' War  1563 - 1570 년, 7 년전쟁과 혼동하지 말 것 ) 이 발발해 러시아의 패배로 확정되는 듯 하던 리보니아 전쟁은 다시 동부 및 북 유럽 강대국간의 진흙탕 싸움으로 번지게 된다.  


 북유럽 7 년 전쟁이나 다른 발트해 강대국간의 이야기는 여기서 다룰 핵심은 아니고 일단 이반 뇌제와 그의 신민들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자. 



 25. 러시아의 반격과 좌절  


 발트해 주변 국가들의 사정이 이렇게 혼전 양상으로 확전되자 이반 뇌제는 새로운 희망을 느꼈는지 1562 년 공격을 다시 재개한다. 1561 년 이반 뇌제는 잠시 공격을 멈추고 일단 폴란드 - 리투아니아와 휴전 협상을 맺기는 했지만 이것은 내부적인 정비와 더불어 리투아니아 내부의 친 러시아파를 회유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이 시기 다시 리보니아 방면 군을 강화한 차르는 1562 년 대 스웨덴 전쟁을 앞두고 러시아와의 평화 협정을 더 연장하고 싶어하는 폴란드 국왕 지기스문트 2세  (지기스문트 아우구스투스  Sigismund II Augustus I ) 의 요청을 거절하고 심지어 리보니아는 물론 리투아니아 영토까지 침공했다. 


 차르의 원대한 꿈 가운데 하나는 본래 과거 키에프 루시 시절 러시아의 일부라고 여겨지기도 했던 리투아니아를 러시아에 통합하는 것이었다. 선대 모스크바 대공들의 러시아 모으기는 어느 정도 완료되었으나 가장 중요한 키에프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땅이 빠져있었다. 따라서 아예 이번 기회에 리보니아는 물론 리투아니아 영토까지 얻겠다면 더 좋은 일이었다. 또 어떻게 되든 간에 이미 리보니아 전쟁 자체가 폴란드 - 리투아니아 대 러시아의 전쟁으로 확전되었으므로 반드시 공격 목표가 리보니아 영토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문제는 리투아니아를 같이 침공한 것 보다도 이반 뇌제가 당시 러시아 군의 능력을 너무 과대 평가한데 있다. 





(1558 년에서 1561 년 사이 리보니아 전쟁의 진행 상황이지만 적당한 지도가 없어 이로 대체. 붉은색은 러시아군 진격 방향, 녹색은 리투아니아 군 진격 상황  Map showing the campaigns in Livonia, 1558–1560. Green arrows indicate Lithuanian campaigns, red arrows Russian campaigns. Lietuvos istorijos atlasas, Vilnius: Vaga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File:Livonian_war_map_(1558-1560).svg  ) 


 처음에 러시아 군은 공세적인 위치에서 비텝스크 (Vitebsk) 를 공격하고 폴로츠크 (Polotsk) 를 1563 년에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곧 러시아의 공세는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1564 년 울라 전투 (Battle of Ula 혹은 Battle of Chashniki  1월 26 일) 는 비텝스크 근방에서 일어난 전투인데 당시 다수의 러시아군이 소수의 리투아니아 군에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게 된다. 


 러시아 지휘관인 표트르 이바노비치 슈이스키 (Pyotr Ivanovich Shuysky ) 는 대략 17000 명에서 24000 명 정도의 군대를 이끌고 폴로츠크 보다 더 리투아니아 내륙에 있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 빌니우스 (Vilnius) 방향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또 다른 러시아 지휘관인 표트르 세메노비치 세레브랴니 - 오볼렌스키 (Pyotr Semenovich Serebryany-Obolensky ) 와는 이미 합류해서 적인 리투아니아 군에 비해 우세한 병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큰 걱정 없이 진격했지만 이들은 대략 4000 - 6000 명 에 불과한 리투아니군의 기습에 대패하는 굴욕을 겪었다. 


 이 전투에서 슈이스키는 전사하고  세명의 다른 보야르는 포로로 잡혔다. 세레브랴니 - 오볼렌스키는 나머지 병력을 가지고 후퇴했는데 마침 운나쁘게도 소수의 리투아니아 병력에 공격을 리투아니아 군 주력의 공격으로 오인해서 더 급하게 후퇴하는 추태까지 보였다. 변명의 여지라고는 있을 수 없는 러시아군의 치욕적인 패배였다.  


 이 비극적인 소식 와중에도 한가지 러시아 군에게 좋은 소식이라면 울라 전투이후 리투아니아 군이 아직 폴로츠크를 되찾기에는 힘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즉 아직 러시아가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건 아니었다. 또 1563 년 부터는 북유럽 7 년 전쟁이 시작되어 다른 나라들이 두패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으므로 이 시기에는 러시아에 희망이 보이는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외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러시아는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희생을 치른 것은 물론 남쪽 국경선이 허술해지면서 이미 다 지난 일이라고 생각했던 타타르 족의 약탈적인 침략에 시달려야 했다. 여기에 기근과 가뭄, 리보니아 전쟁의 여파로 인한 무역로 봉쇄등은 러시아 경제를 빈사상태로 만들었다. 이에 수많은 러시아 국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보야르, 그리고 류리크 왕조에 속하는 공 (Prince, Knyaz) 들까지 불만이 높아졌다. 일부 귀족들과 고위 관료는 점차 숙청의 기세를 올리고 있는 차르를 피해 적국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한편 울라 전투 이후 이반 뇌제의 정신은 더 불안정해 졌는데 자신의 군대가 치욕스런 패배를 당하는 것은 신하들이 자신을 배신하는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라는 믿음이 더 강해졌던 것 같다. 이와 같은 차르의 의심은 1564 년 한 전설적인 인물의 배신으로 확고한 믿음으로 바뀌게 된다. 


 본래 류리크 왕조의 일원인 안드레이 미하일로비치 쿠릅스키 공 (Knyaz Andrey Mikhailovich Kurbsky Андрей Михайлович Курбский; 1528–1583) 은 카잔 정복전에서도 뛰어난 공을 세운 러시아 지휘관이었다. 또 그는 보야르들의 반란을 진압한 차르의 충실한 신하였다. 여기에 리보니아 전쟁에서는 초기에 리보니아 연방 내륙의 주요 도시인 도르파트 (Dorpat) 를 점령해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차르의 의심이 자신에게까지 미쳤다고 생각하자 쿠릅스키 공은 1564 년 4월 30일 리투아니아에 투항한다. 


 쿠릅스키 공은 이반 뇌제의 측근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이반 뇌제가 점차 과거의 공신들을 의심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일단 차르가 의심하면 실제 죄가 있든 없든 간에 그들은 잔인하게 고문당하고 거짓 자백을 하고 처형당하거나 혹은 고문중에 사망했다. 따라서 차르의 의심이 자신에게 미친다고 생각하자 쿠릅스키 공은 살기 위해 과거의 적인 지기스문트 2 세에 항복했다. 그리고 그해 폴란드 리투아니아 군을 이끈 쿠릅스키 군은 러시아군에 대해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쿠릅스키 공의 이러한 행동은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 몰라도 이반 뇌제를 더 광기로 몰아넣는 기폭제가 되었다. 



 다음에 계속 : http://blog.naver.com/jjy0501/100185818106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세상에서 가장 큰 벌

( Wallace's giant bee, the largest known bee species in the world, is four times larger than a European honeybee(Credit: Clay Bolt) ) (Photographer Clay Bolt snaps some of the first-ever shots of Wallace's giant bee in the wild(Credit: Simon Robson)  월리스의 거대 벌 (Wallace’s giant bee)로 알려진 Megachile pluto는 매우 거대한 인도네시아 벌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말벌과도 경쟁할 수 있는 크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암컷의 경우 몸길이 3.8cm, 날개너비 6.35cm으로 알려진 벌 가운데 가장 거대하지만 수컷의 경우 이보다 작아서 몸길이가 2.3cm 정도입니다. 아무튼 일반 꿀벌의 4배가 넘는 몸길이를 지닌 거대 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가칠레는 1981년 몇 개의 표본이 발견된 이후 지금까지 추가 발견이 되지 않아 멸종되었다고 보는 과학자들도 있었습니다. 2018년에 eBay에 표본이 나왔지만, 언제 잡힌 것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사실 이 벌은 1858년 처음 발견된 이후 1981년에야 다시 발견되었을 만큼 찾기 어려운 희귀종입니다. 그런데 시드니 대학과 국제 야생 동물 보호 협회 (Global Wildlife Conservation)의 연구팀이 오랜 수색 끝에 2019년 인도네시아의 오지에서 메가칠레 암컷을 야생 상태에서 발견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메가칠레 암컷은 특이하게도 살아있는 흰개미 둥지가 있는 나무에 둥지를 만들고 살아갑니다. 이들의 거대한 턱은 나무의 수지를 모아 둥지를 짓는데 유리합니다. 하지만 워낙 희귀종이라 이들의 생태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동영상)...

몸에 철이 많으면 조기 사망 위험도가 높다?

 철분은 인체에 반드시 필요한 미량 원소입니다. 헤모글로빈에 필수적인 물질이기 때문에 철분 부족은 흔히 빈혈을 부르며 반대로 피를 자꾸 잃는 경우에는 철분 부족 현상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철분 수치가 높다는 것은 반드시 좋은 의미는 아닙니다. 모든 일에는 적당한 수준이 있게 마련이고 철 역시 너무 많으면 여러 가지 질병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철 대사에 문제가 생겨 철이 과다하게 축적되는 혈색소증 ( haemochromatosis ) 같은 드문 경우가 아니라도 과도한 철분 섭취나 수혈로 인한 철분 과잉은 건강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높은 철 농도가 수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버드 대학의 이야스 다글라스( Iyas Daghlas )와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의 데펜더 길 ( Dipender Gill )은 체내 철 함유량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적 변이와 수명의 관계를 조사했습니다. 연구팀은 48972명의 유전 정보와 혈중 철분 농도, 그리고 기대 수명의 60/90%에서 생존 확률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유전자로 예측한 혈중 철분 농도가 증가할수록 오래 생존할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유전자 자체 때문인지 아니면 높은 혈중/체내 철 농도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높은 혈중 철 농도가 꼭 좋은 뜻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하는 결과입니다.   연구팀은 이 데이터를 근거로 건강한 사람이 영양제나 종합 비타민제를 통해 과도한 철분을 섭취할 이유는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어쩌면 높은 철 농도가 조기 사망 위험도를 높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임산부나 빈혈 환자 등 진짜 철분이 필요한 사람들까지 철분 섭취를 꺼릴 필요가 없다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연구 내용은 정상보다 높은 혈중 철농도가 오래 유지되는 경우를 가정한 것으로 본래 철분 부족이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낮은 철분 농도와 빈혈이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은 이미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철...

사막에서 식물을 재배하는 온실 Ecodome

 지구 기후가 변해가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비가 더 많이 내리지만 반대로 비가 적게 내리는 지역도 생기고 있습니다. 일부 아프리카 개도국에서는 이에 더해서 인구 증가로 인해 식량과 물이 모두 크게 부족한 현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이 나오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사막 온실입니다.   사막에 온실을 건설한다는 아이디어는 이상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사막 온실이 식물재배를 위해서 시도되고 있습니다. 사막 온실의 아이디어는 낮과 밤의 일교차가 큰 사막 환경에서 작물을 재배함과 동시에 물이 증발해서 사라지는 것을 막는데 그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막화가 진행 중인 에티오피아의 곤다르 대학( University of Gondar's Faculty of Agriculture )의 연구자들은 사막 온실과 이슬을 모으는 장치를 결합한 독특한 사막 온실을 공개했습니다. 이들은 이를 에코돔( Ecodome )이라고 명명했는데, 아직 프로토타입을 건설한 것은 아니지만 그 컨셉을 공개하고 개발에 착수했다고 합니다.   원리는 간단합니다. 사막에 건설된 온실안에서 작물을 키움니다. 이 작물은 광합성을 하면서 수증기를 밖으로 내보네게 되지만, 온실 때문에 이 수증기를 달아나지 못하고 갖히게 됩니다. 밤이 되면 이 수증기는 다시 응결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에코돔의 가장 위에 있는 부분이 열리면서 여기로 찬 공기가 들어와 외부 공기에 있는 수증기가 응결되어 에코돔 내부로 들어옵니다. 그렇게 얻은 물은 식수는 물론 식물 재배 모두에 사용 가능합니다.  (에코돔의 컨셉.  출처 : Roots Up)   (동영상)   이 컨셉은 마치 사막 온실과 이슬을 모으는 담수 장치를 합쳐놓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도 잘 작동할지는 직접 테스트를 해봐야 알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