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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영웅 혹은 폭군들 - 스탈린 6




 17. 공포 경제의 시작 - 소비에트 5개년 경제 계획


 1928년 부하린 마저 몰아내고 사실상 모든 권력을 장악한 독재자 스탈린은 이후 25년 동안 죽을 때 까지 이어지는 공포정치를 시행하게 된다. 사실 어느 쪽이 먼저라고 이야기 하긴 힘들지만 스탈린의 공포 정치는 일단 경제 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사실 스탈린은 NEP (신경제 정책)을 지지하는 척 했지만 여기에 대해서 많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일단 사유 재산과 잉여생상물의 판매를 허용하는 정책은 자신의 재산을 순순히 빼앗기기 싫어하는 농민들을 고려한 것이긴 했지만 어느 면으로 보나 공산주의 이론과는 동떨어진 정책이었다. 문제는 이것이 그나마 소비에트에서 좀 지지를 받는 정책이라는 것이였다. 사실 NEP 덕분에 1926년 정도에는 1차 대전 이전의 상황으로 경제가 회복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당의 고민만 더했다.


 볼세비키(다수파)라는 명칭과는 달리 볼세비키 당원은 그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전체 인구의 1% 안되는 당원 조차도 실제 골수 볼세비키의 수는 얼마되지 않고 대부분은 그 사상이 의심되는 상태였다. 그들의 지지 세력이 되야 할 농민들은 볼세비키가 러시아 정교회를 탄압하는데 불만을 품고 있었다. 공산당 스스로가 지지 세력으로 본 노동자는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았고, 소비에트는 후진 농업국인 러시아가 이름만 바뀐 상태였다.


 누군가가 지적했듯이 당시 볼세비키는 지지를 받아 당선 되었다기 보단 이전 권력의 무능으로 집권했고, 이들은 숫적으로 따지면 러시아란 호수에 떨어진 한 방울 붉은 잉크에 불과했다.


 당의 고민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레닌이 예언했던 서유럽의 혁명은 전혀 감감 무소식이었다. 여기에 선진 공업국과 소비에트의 차이는 갈 수록 커져 가고 있어 만약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이 처들어 온다면 이를 막을 상황이 아니었다. (사실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의 이른바 대 공산 '십자군'은 스탈린이 계속 두려워했던 것 중 하나다)


 비록 스탈린 자신이 일국 사회주의 사상을 주장해 다른 국가에서 사회주의 혁명 없이도 소비에트 단독 공산주의 국가 건설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긴 했지만 심지어 소비에트 자체도 현재 완전한 형태의 공산주의로 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스탈린은 새로운 경제 정책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이 신 경제 정책은 다음과 같은 점을 중점으로 추진됐다.


 1. 진정한 공산주의의 확립 - 부농을 해체하고, 집단 농장을 통한 생산 수단의 공유화

 2. 소비에트를 신속히 공업화함 - 소비에트를 중화학/군수산업 중심으로 공업화 함으로써 지지세력
                                                인 노동자의 비중을 늘리고 자본주의  국가의 위협을 최소화


 스탈린은 공업화된 소비에트만이 자본주의 국가와의 향후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에 설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탱크와 비행기는 그가 가장 원하는 것 중 하나였다.




 (이 선전 포스트에 스탈린의 꿈이 모여있다)


 이를 위해 1929년 부터 제 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 정책은 단지 경제 정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후 스탈린 시대의 특징이 된 공포 정치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스탈린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 (물론 자신이 아니라 남의 희생)이라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18. 쿨라크(kulak) 와 굴락(Gulag)


 첫번째 표적이 된 그룹은 바로 쿨라크라고 알려진 부농들이었다. 1928년 다시 도시 지역의 식량 공급이 부족해지자 스탈린은 이전 적백 내전 때처럼 농민들의 식량을 징발하기 시작했다. 특히 부농들이 표적이 되었지만 누구든 식량을 숨기는 자는 공격의 대상이었다.


 1929년이 되자 스탈린은 보다 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기를 희망했다. 5개년 개발 계획의 실행 부서인 고스플란은 스탈린의 강요를 받으면서 계속 무리한 계획들을 남발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반발을 불러일으킨 계획은 집단 농장 계획이었다.


 당시 집단 농장은 콜호스와 소프호스 두가지가 있었는데 사실 농민 입장에서는 별 차이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쿨라크를 제외한 모든 농민이 강제적으로 토지를 몰수 당하고 집단 농장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선전 포스트- '동무들 날래 콜호스로 오시라요' 라는 내용이라고 함)


 스탈린은 쿨라크에 대해서 더 과격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계급으로써 쿨라크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히틀러가 유태인 문제 해결을 위한 '최종계획'을 내놓기 전에 이에 영감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스탈린은 이에 앞서 한 계층을 완전 제거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 내용은 1930년 1월 30일 정치국의 승인을 받는다.


 훗날 스탈린은 처칠에게 '소비에트에서는 1000만의 쿨라크가 제거되었다'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대략 200만 가구의 부농과 1000만 명이 '제거' 되었다는 뜻이 된다. 비록 수백만 이상의 쿨라크가 '제거'된 것은 확실하지만 그 정확한 수는 추산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혹한에 얼어죽은 굴락 수용자 )


 그런데 이들이 제거 되었다고 해서 곧 모두 총살 당했거나 아니면 가스실로 걸어들어간 건 아니었다. 대신 이들을 위해 내무인민위원부 (NKVD - 엔카베데) 가 준비한 강제 노동 수용소들이 있었다. 굴락 (Gulag) 으로 알려진 이러한 강제 노동 수용소의 거대한 네트워크는 수백만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많은 이들이 가혹한 강제 노동과 혹한, 질병등으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굴락 내부에는 항상 새로운 수용자를 위해서 마련된 새로운 자리가 있었다. 스탈린 자신이 누릴 수 있던 엘레강스한 유형 생활은 굴락에선 절대 가능하지 않았다 (이전 포스트 참조)



 이제 규모가 이전에 러시아 제국 비밀 경찰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엔카베데와 오게페우(게페우가 26년부터 이름을 오게페우로 변경) 은 엄청난 수의 쿨라크 들과 다른 반동 세력 (종교 단체나 기타 불만 세력)을 굴락으로 보낼 준비가 되었다. 1930년 7월 까지만 무려 32만 가구의 쿨라크가 해체되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엔카베데가 느닷없이 쳐들어와 가족 전체를 끌어갔다.



  (소비에트의 굴락 네트워크) 

 1930년에서 31년 사이에만 2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소련의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의 깊숙한 오지로 강제 이주했다. 이곳에서 이들은 금광 및 각종 광산 노동등에 동원되었다. 이들의 거주는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나중에 Gulag 에 대해서는 별도의 포스트로 다룰 계획입니다)


 (오지에 건설된 열악한 거주지들 열악한 식사와 주거환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


 이런 과격한 정책을 밀어부친 이유는 단지 쿨라크만 제거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머지 농민들에게 당의 정책에 반대하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농민이 아니라 누구라도 친애하는 스탈린 동무와 당의 지시에 반항하면 굴락으로 잡혀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공포 정치를 통해 스탈린은 1933년까지 농토의 60%를 집단화 할 수 있었다.



 (집단 농장 포스트 중 하나 - 집단 농장의 장점은 대단위 기계화 농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실은 농민 노동자의 것이 아니었다)



 비록 인민들은 여전히 굶주리긴 했지만 스탈린과 고스플란은 이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었다. 농장의 규모가 커지자 트렉터등을 동원한 기계화가 가능했고, 이를 통해 남는 노동력은 도시 공장으로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26년에서 1939년 사이 무려 2000만명이 도시로 이동했다.



 또 식량을 징발하기 쉬워 지면서 이를 수출해 산업화에 필요한 여러 기자재들을 수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징발이 너무 지나쳐 1932-33년 사이에는 끔찍한 대기근이 소비에트를 덮치게 된다. 특히 우크라이나의 홀로도모르는 지금까지도 큰 상처를 남긴 사건이었다. (홀로도모르에 대해서는 별도 포스트로 다루겠습니다)



 수백만 - 1000만 명의 사람을 강제로 수용소로 이주시켜 비인도적 강제 노동으로 혹사시켰고, 이들 중 상당 수가 사망한 것만 가지고도 이미 스탈린의 악행은 왠만한 독재자들이 선량해 보일 정도이지만 사실 이것은 이제 맞보기에 불과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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