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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회군 :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 2



 
 3. 위화도 회군


  일단 진영은 이랬다. 우왕과 최영은 서경(평양)에 지휘부를 설치한다. 그리고 팔도군도통사인 최영은 좌우군도통사인 조민수와 이성계에게 당시 고려군의 주력인 총 4만이 좀 넘는 병력을 맡겨 요동공략을 위해 위화도를 거쳐 요동으로 진격하도록 명령한다.


 사실 아무리 당시 명이 북원을 몰아내는 작업에 막바지에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사실 많지 않은 병력이었다. 그래서 소문으로는 10만 대병을 집결시켰다는 소문을 퍼트리게 했다. 사실 이정도는 양반이라고 할 수있는게 대개 오리엔트 국가들은 병력 규모를 4-5배 뻥튀기 하는 건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적벽대전 당시 조조의 군사는 15만 정도로 추산하고 있으나 당시엔 100만으로 부풀렸다.



 그러나 많지 않아 보이는 병력만이 불안 요소는 아니었다. 최영은 서경이라는 당시로써는 요동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 지휘를 했다. 당시 무선 통신이 있던 것도 아니니 실제 병력의 지휘는 야전 지휘관인 이성계와 조민수가 전적으로 담당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점은 상당한 불안 요소였다. 조민수는 이미 1362년의 홍건적 침공 때 2등 공신에 이르고 1383년에 총리직인 문하시중등을 거친 점으로 볼때 정확한 나이는 몰라도 아마 이성계보단 연배가 훨씬 위일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젊긴 하지만 53세의 이성계는 동북방면에서 상당한 세력 기반을 가진 군벌로써 이 둘은 라이벌 관계였다고 한다. 결국 한쪽이 병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이 둘이 나누어 가지니 그렇지 않아도 많지 않은 병력이 지휘계통도 통일 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최영은 자신이 직접 병력을 이끌지 않고 이렇게 지휘계통도 잘 통일되지 않은 비교적 소수의 병력을 요동으로 보낼려고 했을까?


 사실 지금와서 그 정확한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필자는 이렇게 추측을 해본다.


 일단 최영이 주병력을 자신이 직접 이끌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정변이 잦은 (이미 최영 자산이 1388년 이인임파를 축출하는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당시 상황에서 왕을 끼고 국내에 있는 편이 대처가 쉽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자신이 직접 병력을 이끌로 외정을 나가면 그 사이 다른 야심가가 정변을 일으켜 왕을 끼고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니 일단 국내에 왕과 같이 있는 게 안전하다.  또 한가지 참조할 점은 최영의 연배가 당시 만 72세로 야전 지휘를 맡기에는 다소 고령인 점도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지휘 계통이 완전히 통일 되지 않은 점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나타나는 점이지만 이성계나 조민수나 당시 고려내의 주요 군벌로써 호시탐탐 권좌를 노리고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둘을 남겨놓고 원정을 가기 보다는 이들을 모두 원정으로 내모는 것이 안전하다. 그런데 이성계나 조민수나 서로 라이벌 관계로 부하로 들어가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좌우군 도통사로 지휘권을 양분하여 원정을 보낸다. 다만 조민수가 연배나 경력이 위인 만큼 다소 권한이 위였을 가능성은 있으나 이성계가 조민수의 지휘를 받아들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런데 이런식으로 많지 않은 병력을 지휘계통도 통일 하지 않고 원정을 보내면 원정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우세한 병력을 가진 적에게 말이다. 여기에 이성계는 원정을 대놓고 반대한 인물인데도 주요 지휘관으로 출정시킬 필요가 있을 까?


 좀더 극단적인 추측이지만 꼭 최영이 원정이 성공하기를 바란 것은 아닐 수 있다. 과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킬 때 조선과 명을 정벌한다는 목적을 달성하진 못했지만 국내의 유력 군벌 세력을 약화시킨다는 목적은 달성했다. 비슷하게 조민수와 이성계의 세력이 국외에서 크게 손실을 입으면 상대적으로 최영의 세력은 강해 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당시 고려군의 주력인 이들의 힘이 약해지면 이후 여진족, 명, 왜군의 침입을 막을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가능성이 높아 보이진 않는다.


 또 한가지 이야기 해야 하는 점은 당시 정권의 실권자와는 거리가 멀긴 했지만 우왕 자신도 최영과 사돈을 맺은 후 최영에 많이 기대서 지내던 시기였기 때문에 우왕이 최영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영이 출전하려고 할 때 우왕이 옆에서 말렸다는 기록도 있다. 비록 최영이 사실상의 최고 실권자이지만 국왕 본인이 그렇게 나온다면 쉽게 수도를 비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필자의 주관적 추측은 여기서 중단하고 다시 원정쪽으로 이야기를 돌리면 조민수와 이성계가 이끄는 원정군은 1388년 음력 4월 18일 평양성을 출발하여 19일 후인 5월 7일경 압록강 하구인 위화도에 도달한다. 대군을 이끌고 간 점을 고려해도 비교적 느린 진격이었다.



 여기서 역사적 무대가 되는 위화도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본다.



 (압록강에서 본 위화도의 전경)

 
 "위화도는 평안북도 신의주시 상단리와 하단리에 딸린 섬으로서 면적은 11.2㎢이고 길이는 9km이며 평균 너비는 1.4km이고 해안선 길이는 21km인 압록강의 하중도(河中島)로 압록강이 운반한 토사(土砂)의 퇴적으로 이루어진 섬이다. 고려시대에는 대마도(大麻島)라 하여 국방상 요지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어적(於赤)·검동(黔同) 두 섬과 함께 삼도(三島)라 하여 농민을 이주시켜 경작하게 하였으나 1459년(세조 5)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습격을 받은 후 경작을 금지시켰다. 다시 1777∼1800년(정조 1∼24) 위화도 개간의 건의가 있었으나 실현하지 못하다가, 1810년(순조 10) 의주부윤 조흥진(趙興鎭)의 상주에 의해 정부 후원 아래 대규모의 개간이 실시되었다. 이곳에 이주한 농민은 영구소작권을 인정받아 우대되었다고 한다. 충적토로 이루어진 위화도는 토질이 비옥하여 옥수수·조·콩·수수 등의 산출량이 많다."






 (위화도와 신의주의 위성 사진)



 위화도는 비교적 큰 하중도 (강 내에 있는 섬)로 거의 그 크기가 여의도 만 한데, 길이는 여의도 보다 길죽한 섬이었다. 당시 위화도엔 이미 배다리가 놓여져 있었고, 여기서 고려군은 홍인계, 이의 등을 선발대로 하여금 요동의 적진을 공략하고 귀환하게 했다. 그러나 이후 장마로 물이 불어나 오도가도 못한 상황에 놓인다.



 이에 이성계와 조민수는 최영에게 회군 요청을 하지만 최영은 이를 거부한다. 오히려 우왕과 최영은 내시 김완에게 금과 비단, 말등 하사품을 내려 진군을 독촉하였다. 그러나 다시 이성계와 조민수는 진군의 불가함을 보고한다.


 다시 최영이 진군을 독촉하자 조민수와 이성계는 회군을 결심하고 군대를 개경으로 향하게 한다. 이 때가 음력 5월 22일이니 약 15일 정도 위화도에 있었던 셈이다. 깜짝 놀란 우왕과 최영은 개경으로 급히 환궁하지만 이들의 회군은 진군보다 2배는 빨라서 이미 6월 1일 이미 개경에 도달한다.






 이 회군 과정에서 지금도 논란이 되는 것 중에 하나는 이 회군이 의도적이었는지 아니면 우발적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이다. 앞서 설명하였듯이 진군할 때는 느리게 가다가 회군할 때는 매우 신속했다. 여기에 이성계는 본래부터 원정에 비판적이었고, 따라서 원정을 할 생각이 없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여기서 회군이 이성계의 의도된 행동이었다는 의혹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회군 자체는 우발적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회군은 이성계 혼자 한게 아니기 때문이다. 라이벌 조민수를 비롯해 이성계 파가 아닌 여러 장군들의 동의가 없다면 회군은 성공할 수 없었다. 이 점에서 위화도 회군이 이성계 혼자만의 쿠데타라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생각은 틀리다고 할 수 있다. 최소한 군권을 나누어 가진 조민수의 동의는 있어야 회군은 성공할 수 있다.


 그리고 사실상의 쿠데타인 회군시 부하 장수와 병사들의 동의도 어느 정도 있어야 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회군 당시에는 이들이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즉 당시 물이 불어 건너기 힘들었다는 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고 한다. 또 조민수까지 동의한 점으로 봐서 이 원정이 무리한 요구라는데 어느 정도 원정군 지휘관들의 의견 일치가 있었을 것이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사실상의 쿠데타인 회군을 한 이상 빨리 회군을 한 건 당연하다. 당시 조민수와 이성계는 우왕에게 사람을 보내 최영을 제거하지 않으면 큰 봉변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우왕의 답변은 조민수와 이성계를 삭탈 관직하고 최영을 문하시중으로 삼아 중군을 이끌고 좌우군을 진압하라는 것이었다.


 우왕의 진압의지가 확고한 것을 확인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지체없이 개경을 공략한다. 이성계는 지문하사 유만수로 하여금 숭인문을 공격하게 하고, 좌군은 선의문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최영의 역습을 받아 물러나고 만다. 이후 다시 조민수가 공격을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비록 최영이 고령에도 불구하고 선전하긴 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 상태였다. 병사들도 흔들리고 있음을 확인한 최영은 병력을 우왕이 있는 화원으로 철수 시키지만 회군 세력은 이를 포위하고 항복을 종용한다. 결국 최영은 곽충보를 비롯한 회군 세력에게 붙잡히고 회군 세력의 쿠데타는 성공한다.


 회군에 성공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우왕을 폐하고 아들인 창왕을 세운후 재빨리 명나라 연호 및 관복을 착용하므로써 명나라와의 싸움을 피하기로 한다.






 4. 회군 이후의 정변



  일반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바와는 달리 회군 = 이성계의 왕위 찬탈로 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왜냐면 고려말 군벌가운데 이제 유력 군벌인 이인임, 최영만 제거되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조민수와 이성계라는 범과 사자가 서로를 물어뜯을 것임은 너무나 자명했다. 여기에 신진 관료 세력이라는 변수도 있었다.



 이들 신흥 군벌 세력의 싸움은 우왕을 폐하자 말자 시작되었다. 차기 국왕을 옹립하는 과정에서 대립이 시작된 것이다. 이성계파는 종친 중 하나를 왕으로 선출하자고 한 반면, 조민수파는 우왕의 어린 아들 창을 왕위에 올리고자 하였다. 언뜻 생각하기에 그래도 자신들이 폐한 우왕의 아들을 옹립한다는 것은 이상해 보인다. 그러나 어차피 어린 창왕은 허수아비 였으므로 조민수는 창왕을 끼고 이인임이나 최영 처럼 정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당시 조정 내 세력이 크지 않던 조민수는 당시 명망가인 유학자 이색을 찾아가 도움을 구한다. 이색은 정도전, 정몽주의 스승이 되는 고려말 유학자이다. 그러나 이 사제들은 정치적으로 항상 숙청되는 편에 서게 된다. 아무튼 당시 이색은 공민왕의 제 3비 익비 한씨로 하여금 창을 왕으로 세우는 교지를 내릴 것을 요청한다. 이에 교지를 내리자 9세의 어린 창은 왕으로 즉위한다.


 이렇게 이색과 연합한 조민수가 창왕을 옹립하자 이성계는 병을 핑계로 사직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성계가 물러나고 조민수가 권력을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이성계파에는 조준이나 정도전 같은 신진관료들이 있었고 이들은 국정 전반에 대한 개혁을 주장하고 있었다.



 특히 조준은 관제, 신분, 국방 등 국정 전반에 대한 혁신을 주창하고 이성계, 정도전과 협의하여 1388년 7월 토지제도를 획기적으로 개혁하는 전제개혁소를 올렸다. 그러나 조민수는 이 전제개혁안에 부정적이었다. 따라서 조민수는 신진관료들에게 앙숙이 된 상태였다.



 이에 궁정 쿠테타가 기획된다. 조준은 과거 조민수가 이인임과 친척관계로 부정을 저질렀다는 주장하면서 그를 탄핵할 것을 주청한다. 결국 이 쿠데타는 이성계 일파의 승리로 끝난다. 이제 불쌍한 것은 이색이었다. 줄 한번 잘못선 탓으로 이제 대역 죄인으로 몰릴 처지가 된 이색은 살기 위해서 스스로 물러나니 조정은 결국 이성계 일파에게 기울어진다. 그나마 이색은 적절한 시기에 물러나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이성계 일파가 완전히 조정을 장악하게 된 건 아니었다. 우선 이성계파는 우왕이 아들인 창왕이 크면 우왕을 폐한 자신들을 척결할 지 모른다는 생각에 일단 창왕부터 폐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이런 점을 보면 아마 당시에는 이성계가 역성 혁명까지는 생각에 없었을 수 있다. 어차피 역성 혁명 일으킬 거면 창왕이 큰 이후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왕을 폐하려는 데 무슨 명분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9살 밖에 안된 어린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여기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그 뉴페이스는 바로 고려의 충신으로 잘 알려진 정몽주이다.





 (정몽주의 초상화)



 1389년 조준, 이성계, 정도전은 정몽주와 결탁하여 폐가입진 (廢假立眞 :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뜻) 이라는 명분을 내건다. 즉 우왕의 불분명한 출생을 문제 삼은 것이다. 우왕이 사실은 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자식이며 창왕 또한 신돈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창왕을 폐위시켜야 한다는 논리였다. (나중에 설명하지만 사실 정몽주는 이성계와 같은 친명파로 본래 정몽주는 이성계 파였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이 창왕 폐위를 앞두고 모반이 터진다. 김저와 정득후 등이 이성계를 타도하고 우왕을 복위하려다 발각되는 사건이 생긴 것이다. 이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수많은 반 이성계파가 척결된다. 따라서 이 역모 사건은 사실 폐가입진의 명분으로 창왕을 폐하기 전 사전 준비 작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1389년 11월 창왕은 폐위되고 신종의 7세손 공양왕이 마지막 왕으로 즉위한다. 이후 공양왕 탄생 이후 이성계 정권에서 주도권을 잡은 신진 관료세력은 역성 혁명을 주장하는 남은, 조준, 정도전 파와 고려 왕조 유지파인 정몽주, 이숭인, 이종학 으로 다시 나뉘어 세력 다툼을 하기에 이른다.



 본래 고려 충신 정몽주는 이성계와 절친한 사이었다. 정몽주는 이성계는 비슷한 연배로, 정몽주는 1382년에도 동북면조정원수로 있으면서 이성계와 함께 지내기도 했다. 정몽주는 친원파인 이인임 정권 시절에 친명파로 명나라와의 악화된 외교관계를 회복해 양다리 외교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래서 최영이 대명 강경책을 펼칠 때는 정치적으로 어려운 시절을 지냈지만 같은 친명파인 이성계가 정권을 잡자 물을 만난 물고기 처럼 친명 세력의 기수로 문하찬성사, 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하며 이성계 일파가 주도한 개혁의 핵심에 섰다. 그런 그가 결국 이방원에 의해 제거되어 훗날 고려 충신이 된 이유는 역성 혁명에는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1392년 당시 최고 실력자 이성계가 낙마하여 병상에 눕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기회로 정몽주 일파는 정도전을 탄핵한다. 역성 혁명파를 제거하려 든 것이다. 그러나 이방원이 선수를 쳐서 결국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암살당하고 고려 왕조 유지파는 결국 제거되어 마침내 고려 왕조는 문을 닫게 된다.





 5. 결론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필자의 짧은 소견으로는 일단 위화도 회군이 발생했을 때 이것이 결국 왕조교체로까지 이어질 것으로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려 왕조는 무신 정권 때도 여러 군벌간의 암투와 내전이 있었으며, 말기의 혼란기에도 마찬가지 엿다. 사실 회군 또한 이런 내전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리고 회군 역시 이성계 혼자 한 것도 아니란 것은 앞서 말한 대로다. 회군 당시 이성계 / 조민수세력이 새 왕조를 세우기 위해 회군을 했던 것은 아닌게 분명하다.



 그러나 회군이 없었다면 조선왕조 설립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 역사적 의미는 작다고 할 수 없다. 또 이후에 나타난 권력 다툼에서의 적극성을 볼때 이성계가 권력에 전혀 관심이 없다가 우연히 최고 권력에 올랐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 이며, 아마 회군 전부터도 이성계 역시 난세의 영웅으로 권력을 탐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것이 결국 역성 혁명으로까지 이어진 것은 여러 단계를 거쳐서였다.



 그렇다면 회군의 명분이 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할 수없다는 사대주의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많은 분들이 이를 자주적이지 못한 사대주의 국가 조선의 전초단계로 생각할 것이고, 사실 그건 맞는 말이다.


 물론 당시엔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우리 역시 강대국인 미국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자주적일까? 그나마 지금은 우리가 그렇게 약소국은 아니지만 당시엔 약소국의 형편에서, 나름대로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많이 이들이 조선이 500년간 중국의 속국이었던 점을 강조하지만 필자 생각으론 그러면서도 독립을 유지한 측면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주변국들이 결국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중국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의 종교적인 수준으로 사대주의를 주장한 것은 잘못한 일이다. 적당히 대국과의 관계에서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고 이를 이용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거의 섬기는 수준인 조선의 사대주의는 어쩔 수 없는 필요성을 넘어선 지나친 추종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충분히 비판을 가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요동 정벌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해야할까?


 앞서 말했지만 요동 정벌 자체는 별로 현명하지 못한 아이디어였다. 당연히 우리 영토를 요구하는 명나라의 무리한 요구는 거절해야 마땅하지만 그렇다고 꼭 요동을 원정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 명나라가 북원 세력을 거의 정리해가는 시절이었으므로 명나라를 필요이상으로 자극한다면 극단적인 경우에는 독립도 유지하기 힘든 상황에 처했을 수도 있다.


 요동 정벌은 자주적인 아이디어라기 보다는 지금의 우리가 일본이나 중국을 침공하는 것처럼 실현 가능성 및 국가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할 때 좋지 못한 아이디어였다. 더군다나 당시 원정군이 결국 회군했던데서도 볼 수 있듯이 대부분의 군부 세력도 성공 가능성을 낮게 본 일이었다. 최영 장군은 적들도 인정하는 청렴하고 공정한 인물이었긴 했지만 요동 정벌은 좀 악수였던 것 같다. 무리한 원정이 아니었다면 최영 정권은 좀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고려가 특별한 주위 위협 세력이 없고 중국도 분열된 상태라면 요동 및 만주 원정도 노려볼 만한 일이지만 당시 정세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이런 좋지 못한 여건에서의 원정은 그게 아무리 자주적으로 보여도 무조건 옹호할 수 는 없지 않을까? 물론 이건 필자의 주관적인 판단이긴 하지만 말이다.



 일어난 역사적 사실은 하나이지만 이를 평가하는 데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필자는 짧은 지식을 바탕으로 위화도 회군에 대한 사견을 적어봤다. 두서없이 긴글 읽어 주신 분이 있다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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