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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로를 도운 미국의 오판 - 피그만 침공 작전 (Bay of Pigs invasion)




 세상에 계획된 대로만 되는 작전은 없을 것이다. 대개 시행중에 여러가지 생각지 못한 난관에 부딪히거나 원하지 않는 결과만 나오는 계획도 허다하다. 군사 작전또한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최악은 적을 제거하려 작전을 시행했는데 오히려 적을 도운 꼴이 되는 작전이다. 두고두고 세간의 웃음거리가 될 뿐 아니라 의도와 반대의 상황이 되버렸으니 말이다. 지금 이야기할 미국의 피그만 침공 작전이 바로 이런 실패한 작전의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피그만 침공 작전시 쿠바군에 포로로 잡힌 반군들)



1. 피그만 침공 작전의 배경


 본래 쿠바는 미국 본토에서 최단 거리가 150km 정도 밖에 안될 정도로 가까운 섬나라이다. 거의 남한 면적만한 이 카리브해의 섬나라는 오랜 세월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콜럼부스가 1492년 항해중에 발견 당시에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지만 이후 스페인 식민 치하에서 착취와 유럽의 전염병으로 인해 대부분의 주민이 전멸해서 식민지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100만명에 이르는 노예가 아프리카에서 수입되었다. 따라서 쿠바의 인종 구성은 원주민 보다 백인, 흑인 과 그 혼혈이 주가 된다.



 쿠바에선 사탕수수 같은 식민지 플랜테이션 농업이 노예 노동으로 충당되었다. 오랜 식민 착취에 대해 쿠바인들은 19세기에 10년 전쟁 같은 대대적인 항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쿠바의 역사가 결정적으로 변한 것은 1898년에 미국-스페인 전쟁 이후였다. 이 전쟁은 미국 선박 메인호 폭발 사고의 배후로 스페인을 지목하여 미국이 일으킨 전쟁이다. (훗날 스페인은 아무 잘못이 없음이 드러났지만) 이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자 쿠바는 1902년 미군정이후 독립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주적 독립이 아니라 미국에 의한 것이었고, 또 미국과의 위치가 워낙 가깝다 보니 미국의 간섭을 크게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은 관타나모 항등에 기지를 건설하고 쿠바의 사탕수수 산업을 비롯한 주요 산업은 미국 자본의 손에 지배받았다. 더욱이 1920년 미국에서 금주법이 발효되자 이를 피해서 술마시고 놀려는 미국 사람들이 몰려 관광산업이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주요 산업은 미국 자본에 완전 지배되었고, 대다수 쿠바인들은 매우 빈곤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많은 쿠바인들이 미국에 대해서 반감을 품은 것은 당연했다.


 더욱이 이런 중남미 국가에서 흔히 볼수 있듯이 쿠바의 정치권은 무능하고 부패하여 국민들은 더욱 고통받았다. 쿠데타 역시 이런 상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1952년 독재자 바티스타는 대통령 선거 대신 쿠데타로 집권한다. 당시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피델 카스트로는 반란을 일으켰다 구속된 후 석방되어 멕시코로 망명했다, 다시 체게바라와 함께 바티스타 정권 전복에 나서 마침내 1959년 정권을 장악하고 쿠바를 공산화 시킨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사실 미국은 바티스타 독재 정권의 철권 통치에도 반감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1958년에는 미국이 무기 금수 조치를 취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미국 옆동네인 쿠바가 공산화 되자 이제 상황이 180도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카스트로가 미국 자본을 몰수하고 소련과 가깝게 지내자 미국 정부내에서 카스트로 정권을 붕괴시켜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이 두려워한 사태는 쿠바 위기에서 볼 수 있듯이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고 여기서 핵미사일을 발사하는 일이었다.


 (당시 초기 미사일로도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면 미국의 핵심부를 타격할 수 있었다)






2. 피그만 침공 작전의 준비


 일단 쿠바가 공산화 되기는 했지만 미국이 직접 군대를 파병할 명분은 부족했다. 쿠바가 미국을 침공한 것도 아니었고, 또 집권 과정이야 어떻든 간에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전체를 대표하는 독립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를 명분 없이 침공한다면 국내외 여론의 비난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CIA 가 생각한 묘안은 미국에도 망명자들이 많이 있으니 이들을 이용해 카스트로 정권을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카스트로 정권은 생긴지 얼마 안되 정권이 불안했고, 이전 바티스타 정권에서 일하던 사람들과 쿠바 혁명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도 적지 않았으니 어찌보면 승산이 있어보이는 일이었다. 여기에 당시 CIA 는 자신들이 쿠바에 상륙하기만 하면 카스트로 반대파들이 봉기를 일으키리라고 미리 김칫국부터 마시는 상태였다. 카스트로 정권이 바티스타 정권보다 쿠바인들에게 지지를 받는 다는 점은 완전히 무시한 것이었다.



 1960년 미국의 마이애미 지역의 쿠바인 망명자들을 대상으로 지원자를 모집한 CIA 는 이를 '제2506여단' 으로 명명하고 비밀리에 훈련시켰다. 1961년 해가 바뀌고 본래 쿠바 침공작전을 계획한 아이젠하워 정권은 물러났지만 이를 계승한 케네디 정권은 이를 계속해서 추진한다.



 (결국 케네디 대통령이 피그만 침공을 최종 승인한다)


 침공 작전에 필요한 모든 비용은 CIA 가 지원했고, 이를 위해 필요한 수송선과 무기 그리고 16 기의 B-26B 폭격기가 준비되었다. 이 폭격기가 필요한 이유는 쿠바 공군이 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미국은 이 작전이 미국과 관련이 없는 순수하게 쿠바인 망명자들에 의한 것처럼 보이기를 원했다. (즉 미공군이 직접 지원할 수 없다는 이야기) 미국은 본래 쿠바인들을 훈련시켜 파일럿으로 쓰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훈련이 부족해서 미군 교관들도 결국 같이 탑승했다. 그리고 그들 중 4명이 사명했다. 여기에 비밀리에 C 54 더글라스 수송기와  C47 커티스 수송기도 준비되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러한 군사훈련이 100% 비밀리에 진행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1500명이나 되는 지원자를 아무 소문 없이 모은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연히 KGB 와 쿠바 정부는 미국 정부의 계획을 어느정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니 설령 구체적인 정보가 없더라도 미국 정부가 공개적으로 친소 정책을 표방하는 공산 쿠바정권을 가만두지 않으리란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철저히 이 일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망명 세력에 의한 정권 전복으로 비춰지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이미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리라는 루머가 퍼진 상태였고, 쿠바는 미국을 비난했다. 이에 대해서  케네디는 침공 4일전 쿠바에 대한 군사 작전은 없다고 말했으니, 정녕 미국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셈이었던 것이었다.




 아무튼 침공 계획이 사전에 누설된 점은 분명했다. 그런나 CIA 는 이 눈가리고 아웅식 작전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그래서 상륙지점도 말도 안되는 곳으로 정했다.





 당초 상륙 지점은 피그만 (Bay of pig)이 아니었다. 피그만은 미국과는 반대 편에 접해 있다. 따라서 상륙 작전을 펼치기에는 좋은 곳이 아니었다. 거기에 만약 여기서 고립된다면 탈출하긴 매우 어려울 것이다.(실제로 거의 탈출 못했다) 본래는 미국에서 가까운 트리니다드가 상륙 지점이었지만 CIA는 이 작전이 니콰라과에서 출발한 쿠바 망명 세력에 의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엉뚱하게도 상륙 지점을 피그만으로 잡았던 것이다. 미국에서 출발하면 미국이 배후로 지목될 것이기 때문이다.






 3. 피그만 침공 작전


 1961년 4월 15일 쿠바 공군의 마크가 그려진 8대의 B 26 폭격기가 니콰라과에서 날아올라 무방비 상태의 쿠바 공군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이날 폭격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이날 공습에 참가한 폭격기 중 2대가 실수로 플로리다로 날아간 것이다. 미국과 관계가 없다고 그렇게 사전에 연습하고 공들인 보람도 없이 말이다. -_- 이날 공습에 대해 쿠바는 미국을 비난했고, 많은 국가들이 여러가지 정황상 당연히 미국이 배후라고 생각했다.


 (B 26B 폭격기, 본래는 A 26 인베이더로 당시엔 B 26 으로 불렸다. )



 그러나 케네디는 소심했다. 이왕 욕 먹을거 차라리 카스트로 정권이라도 전복하게 2차 공습을 허용해야 했는데 비난 여론이 급등하자 케네디는 2차 공습을 포기한다. 사실 이 공습을 통해 쿠바 공군을 완전히 때려 눕혀야만 했었다. 그러나 CIA 는 정찰 사진등을 근거로 1차 공습 만으로도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고 판단, 4월 17일 1500명의 병력을 투입한다.


 그런데 사실 병력 투입도 너무 늦게 이루어졌다. 차라리 2차 공습 없을 거면 빨리라도 상륙해야 한는데 시간을 끄는 바람에 쿠바군은 미국의 상륙이 임박했음을 알아차렸고, 충분히 준비할 시간을 가졌다. 여기에 본래대로라면 지상에서 공습으로 파괴되었어야 할 쿠바 공군이 2506여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씨 퓨리 전투기)


 과거 공산화 이전에 영국군에서 구입한 씨 퓨리 (Sea Fury Hawker) 전투기가 중화기의 대부분을 실은 수송선을 공격해 격침되었고, 상륙 지점으로는 T 34 탱크를 비롯한 쿠바군의 지상 병력이 몰려들자 2506 여단은 곧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그제서야 크게 당황한 CIA 는 B 26 폭격기들을 다시 출격 시켰다. 그러나 이번엔 처음 공습과는 달리 쿠바 공군도 잘 준비가 된 상태였다. 씨 퓨리 전투기와 T 33 훈련기 (훈련기인데 기관총을 탑재해서 공격기로 사용했다) 가 B 26 을 공격하여 큰 손실을 입자 제공권은 쿠바 공군에 돌아갔다.


 결국 4월 19일이 되자 사실상 침공 작전은 실패가 분명해졌다. 미국은 피델 카스트로 정권에 불만을 품은 쿠바인들이 2506 여단 침공 이후 봉기를 일으키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오판이었다. 카스트로 역시 정권을 잡은 후 반혁명 세력일 일소하는데 주력했으며, 미국의 침공 또한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또 앞서 설명했듯이 카스트로 정권은 비교적 쿠바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피그만 침공이 실패가 분명해 보이는데 반대 세력이 봉기할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결국 2506 여단은 118명이 죽고 1189명이 포로로 잡힌다. 극히 일부만이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쿠바군 또한 사상자가 적지 않았으나 그래도 승리를 거두었다. 포로중 일부는 처형되었으나 나머지 포로들은 5300만 달러 의약품과 식량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4. 피그만 침공 작전의 평가


 피그만 침공 작전의 일반적인 평가는 미국의 오판이었다. 1500 명도 안되는 반군 세력으로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긴 어려웠고, 더 중요한 것은 작전 도중 나타난 문제점들이었다. (2차 공습 취소등) 특히 상륙후 미국이 기대했던 반대 세력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이 침공한다는 사실을 안 카스트로가 수백명의 반대파들을 잡아들이고 숙청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카스트로 정권은 최소한 이전의 바티스타 정권보다 훨씬 쿠바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카스트로 정권은 피그만 침공 작전의 결과 반대파를 일소하고 그때까지 불안하던 정권을 반석위에 올려 놓게 된다. 그래서 카스트로는 케네디 대통령에게 "당신이 상륙 작전을 시도하는 바람에 우리의 혁명이 굳건해져서 고맙다" 는 전문을 보내기도 했다. 케네디와 CIA 가 웃음거리가 된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결국 이 일에 책임을 지고 CIA 국장 앨런 덜레스 (Allen Dulles) 를 비롯한 여러 핵심 간부가 물러나야했다.



 (앨런 덜레스와 케네디)


 사실 누가 봐도 피그만 침공 작전의 배후는 미국이었다. 어차피 욕 먹을 거면 차라리 화끈하게 해야 설령 나중에 실패해도 후회가 덜 되지 않을까. 이도 저도 아닌 계획으로 작전에 실패해 조롱까지 당했으니 미국의 체면을 여간 구긴게 아니었다. 여기에 본래 제거하려던 카스트로 정권을 반석위에 올려놨으니 더 이상 무슨 이야기가 필요하겠는가?



 어떤 작전이든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애시당초 잘못된 가정으로 무리한 계획을 세운 경우에는 더 작전이 꼬이기 마련이다. 작전의 계획에서 부터 시행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인 인재로써 피그만 침공 작전은 역사에 그 기록을 남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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