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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영웅 혹은 폭군들 - 스탈린 9




 23. 무엇이 그를 그토록 잔인하게 만들었나 ?


 사실 이 글을 쓰는 필자가 가장 궁금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질문이다. 왜 그렇게 스탈린은 잔인해 졌을까? 스탈린의 무엇이 과연 이렇게 많은 인명을 희생하도록 만든 것일까? 비록 연재 포스트가 다 끝나진 않았지만 대숙청까지 기술한 상태에서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




 (스탈린과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담배 - 그는 골초였다)



 일단 그의 어린 시절이 그의 잔인성에 일부를 설명해줄지 모른다. 앞서 1장에서 말했듯이 그는 아버지의 폭력속에서 자랐다. 이 점은 주목할 만 하다. 그러나 이 세상에 부모의 무관심이나 폭력속에 자랐던 사람들은 많아도 스탈린 만큼의 잔인성을 보여준 사람은 드물다. 따라서 단순히 어린 시절의 문제가 그의 모든 잔인성을 설명하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불행한 결혼 생활 역시 마찬가지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나 사상도 일정부분 책임이 있을 수 있다. 비록 스탈린 자신도 이중첩자의 의심을 받고 있긴 하지만 당시 러시아 혁명가들 사이에는 비밀 경찰인 오흐라나의 스파이들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게 되었다. 이렇다보니 혁명가들 사이에 동지애 보다는 서로 뒤통수를 때리는 일이 많아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스탈린을 제외하더라도 레닌과 트로츠키, 그리고 트로츠키 대 반 트로츠키 파벌 싸움을 본다면 서로간의 신뢰가 매우 부족한 것을 알 수 있다.


 스탈린은 이중에서도 의심이 많은 편이었고, 자신의 측근들을 포함해서 타인들이 사실은 이중 첩자이거나 스파이가 아닐까 의심했다. 훗날 스탈린의 의심은 너무 지나쳐 편집증적 인격장애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을 정도였다. 이것은 스탈린이 자신의 측근들마저 의심되면 바로 숙청한 데서도 드러난다. (예조프나 야고다 처럼)


 스탈린은 항상 자신과 소련을 전복시키기 위해 누군가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항상 숙청이 계속될 수 밖에 없었고, 스탈린의 충견들은 존재하지 않는 음모를 만들고 희생자를 처형해서 그의 주인을 기쁘게 만들었다. 다만 충견들이라고 숙청 대상에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편집증적인 의심만으로는 그토록 많은 인명을 희생시킨 이유를 다 설명하긴 어려울 것이다. 스탈린은 적백 내전 당시부터 반대파의 인명을 희생시키는 것을 아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주민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반항하는 마을을 불태우기도 했으며, 구 러시아 제국 장교들을 처형하려고 한 적도 있다. 이런 성향은 집권 후 대량 학살로 이어진다. 다만 이러한 성향이 왜 발생했는지는 완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한가지 참조할 만한 사실은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다. 그 시절 러시아를 장악한 볼세비키는 사실 자애로운 인간들이 아니었다. 앞서 설명했듯이 레닌의 지시로 체카는 수많은 반혁명분자들을 총살했다. 트로츠키 또한 적백내전 당시 스탈린 못지 않은 잔인성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본래 공산주의 혁명 자체가 폭력 혁명을 옹호하는 사상이고 또 계급 투쟁과 계급의 적을 타도할 것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다소간 잔인해 지는 건 필연이었다.


 특히 실제 볼세비키 지지파는 얼마 안되고 반대파가 많은 상황에서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반대파에 대한 철저한 숙청이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 볼세비키 중 스탈린 정도의 철저한 숙청을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스탈린에 대해서 말할 때 한가지 추가로 기술해야 하는 것은 집권전부터 그가 과격하고 또 자신의 뜻대로 할려는 독단적 성향을 보였다는 것이다. 앞서 2장에서 설명했듯이 그는 초기 부터 동료 혁명가로 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으며, 1917년 유배지에서 돌아왔을 때도 그의 '성향'을 문제삼아 당에서 바로 받아주지 않았던 전례가 있다. 레닌도 죽기전 스탈린의 성향을 문제삼아 그를 직위해제 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점들을 감안하더라도 1930년대에 보여준 대규모 숙청과 공포정치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아마 스탈린이란 인물만이 가진 유니크한 특징 - 끊임없는 의심과 타인의 생명과 인권을 매우 가볍게 여기는 태도 - 만이 그나마 타당한 이유일 것이다.




 24. 개인 숭배


 스탈린을 기존의 다른 지배자들과 차별화하는 다른 요소중 하나는 바로 철저한 개인 숭배에 있다. 과거 전제 왕권 시절에도 지배자는 신의 아들등으로 신격화되긴 했지만 군주제가 쇠퇴한 현대에 와서 철저한 이념 교육과 사상 감시를 통해 과거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개인 숭배가 이루졌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경애하는 스탈린 동무의 초상화 - 스탈린 집권시절 이러한 포스트가 수없이 많이 제작되었다)



 스탈린 시절 종교적 색체를 띤 개인 숭배는 사실 레닌 동무로 부터 시작되었다. 레닌이 죽고 나서 스탈린은 레닌의 장례식을 주도하면서 그의 시신을 영구적으로 보존하고 이를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곧 레닌의 가르침을 담은 서적들 (물론 스탈린 동무의 입맛에 맞는)이 배포되어 교육되었고, 곧곧에 레닌 동상이 세워졌다. 레닌은 마르크스/엥겔스의 유일한 후계자로 추앙받았다. 그리고 레닌의 유일한 후계자는 바로 스탈린 자신이었다.


 본래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싫어하던 스탈린 이지만 1930년대에 이르러 그의 두꺼운 전기들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프랑스 작가 앙리 바르뷔스가 쓴 1935년 전기는 '스탈린은 오늘의 레닌' 이라는 유행어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도 스탈린의 마음에 차지는 못했는지 38년에 다시 전기가 나왔다. 이 전기는 스탈린이 지금까지 알려져왔던 것과는 달리 볼세비키 이론과 실천에 지대한 공로를 했다는 사실 (?)을 밝혀냈다.



 한편 대숙청이 진행되면서 당원들의 충성심도 나날이 강해졌다. 1930년 당 대회에서는 스탈린의 등장과 함께 '만세' 합창이 나왔고, 1934년 당 대회에서는 '스탈린 만세'라는 함성과 환호가 터져나왔으며, 1939년 당 대회에서는 '우리의 지도자이며 교사이고 친구이신 스탈린 동지 만세'라는 노래가 준비되었다.




 (여성 동무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는 스탈린 동무)


 5개년 경제개발 계획이 진행되는 동안 노동자 - 농민들은 위대한 지도자 스탈린 동무의 지도에 따라 혁명 과업을 완수해 나갔다. 물론 실제로는 농업 집단화 정책으로 인해 대다수 농민들은 스탈린을 싫어했고, 노동자들도 큰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불만을 표시하는 날에는 즐거운 굴락 체험이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대놓고 반대를 하는 경우는 적었다.


 일부 에서는 진위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스탈린과 당의 지도하에 놀라운 성과를 거둔이들도 나타났다. 1935년 8월 31일, 소련 광부인 스타하노프는 6시간 동안 102톤의 석탄을 채굴하는 믿을 수 없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개인 생산량의 14배에 달하는 생산량이었다. 이를 계기로 소련에서는 '스타하노프' 운동이 일어나 모든 분야에서 경이적 생산량을 달성하자는 당의 선전이 계속되었다. 물론 이런 특별한 기록은 특별한 조치속에서 가능했다. 예를 들어 다른 노동자도 스타하노프를 도와야 했다.



 (채굴하는 스타하노프 동지의 초상화)


 1930년에 이르러 공산당사를 정리한 '전연방공산당사 (볼세비키사) - 단기 과정' 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스탈린 시절의 바이블 같았다. 공산당 역사에는 오류를 모르는 선지자 들이 있었다. 그 계보는 마르크스/엥겔스에서 시작하여 레닌으로 이어지고 마침내는 스탈린에 연결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부정하는 사악한 세력인 멘세비키, 아나키스트, 민족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부하린주의자들이 있었다. 다행히 악의 세력은 항상 정의 앞에 패배했다.



 오랜 시간 진행되는 철저한 반복 세뇌는 차츰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엄청난 숙청 결과 30년대 말에는 상위층에 거대한 공백이 생기면서 새로운 상류층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스탈린에 대해서 보다 충성할 줄 알았다. 결국 스탈린은 공포로 집권했지만 점차 소비에트 인민의 영적인 지도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런 부분에서 스탈린은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스탈린주의적 국가인 북한의 롤 모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복되는 숙청과 세뇌는 폭정에도 불구하고 독재자를 사랑하게 만들 수 있다. 마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주인공이 마지막에 대형을 사랑했듯이.


 그리고 1940년대에 이르러 발생한 거대한 사건을 계기로 소련의 프로파간다 조직들은 스탈린을 구국의 영웅으로 승화시켰다. 그 사건은 바로 제 2차 세계 대전이다.



 25. 독소 불가침 조약


  사실 1920년대 히틀러는 많은 이들에게 좋게 말하면 과격한 정치인이고, 나쁘게 말하면 광인이었다. 그러나 세계 대공황 이후 혼란을 틈타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는 그가 이미 '나의 투쟁'에서 말한 미래 계획 - 동유럽의 거대한 지역에 독일 민족의 미래를 위한 공간을 확보하는 것 - 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사실 1930년대 스탈린은 외국 지도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히틀러를 높이 평가했다. 특히 그의 과단성과 무자비함을 높이 평가했다. 1930년대 지도자들 가운데 사실 무솔리니나 일본 군국주의자들 보다 스탈린이 히틀러와 공통점이 더 많았다.


 이론의 방향성만 다를 뿐이지 그들의 계획에서는 상당한 유사성을 볼 수 있다. 히틀러는 유태인 같은 특정 민족을 제거하려 했고, 스탈린은 쿨라크등 특정 계급을 제거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 희생이 발생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계획을 밀어부쳤다. 거대한 비밀 경찰 조직을 운영하고 - 게슈타포와 엔카베데 - 언론을 장악하고, 국민을 세뇌하는 등 그들의 행동에는 뭔가 유사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그들은 상호간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단 히틀러는 친절하게도 이미 '나의 투쟁'에서 볼세비키를 무너뜨리고 그 땅을 차지하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미리 설명해 주었다. 한편 스탈린은 비록 '일국 사회주의론'을 주장하여 소련 혼자서도 혁명이 가능하다고 말하긴 했어도, 또 한편으로는 코민테른을 조정해서 사회주의를 전파하려했다.



 또 스탈린은 자신의 편집증적인 의심을 통해 자본주의 국가들이 연합을 이루어 자신을 공격하리라 생각했고,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독일이 그 선봉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스탈린은 이에 대비해 군수 산업 위주의 경제 개발 계획을 통해 이들과의 전쟁을 치를 전쟁 수행 능력을 키우고자 하였다.



 결국 여러 모로 보건대 양측의 전쟁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많은 이들의 예상이 그러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기도 했다. 그들은 이념적으로도 상극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1939년 8월 23일의 독소 불가침 조약은 여러모로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갑자기 둘이 러브러브 모드? - 구글에서 검색하다 본 대박 자료)



 이들은 왜 갑자기 동맹을 맺었을까? 여기엔 사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단 히틀러는 1차 대전 때처럼 동서로 양면전쟁을 수행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것은 독일군 장군들의 걱정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리고 누가 봐도 이것 때문에 독일은 패배가 자명해 보였다. 따라서 어떻게든 영국/프랑스와 싸울 때 소련과의 싸움을 피해야만 했다. 따라서 독일이 눈가리고 아웅식으로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으려 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놀라운 일은 소련이 이 조약에 동의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여기에도 이유는 있었다. 일단 스탈린은 독일과 영국/프랑스간의 전쟁이 그렇게 빨리 끝날 줄 몰랐다. 스탈린 예상으로는 이전 1차 대전 때처럼 지루한 소모전이 되리라 예상했고, 그렇다면 일단 서로 싸우게 하고 자신은 나중에 어부지리를 얻는 편이 유리했다.


 여기에 대숙청의 여파로 소련군이 사실 오합지졸이 된 것도 한가지 이유였다. 1942년에는 이르러야 소련군은 전쟁에 대비할 수 있어 보였다. 이러한 판단은 합리적인 것이었는데 실제 독일군이 처들어온 1941년에 소련군은 형편없이 패배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영국의 지리 멸렬한 외교도 한몫을 거들었다. 프랑스는 그렇다 쳐도 영국은 아직 전쟁에 적극적으로 돌입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39년에 행해진 비밀회담에서 얼마나 병력을 투입할 수 있냐는 소련의 질문에 영국이 16개 사단이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통역상의 오류로 생각, 한동안 소란이 벌어진적이 있었다. 결국 나중에 알아본 바로는 바로 투입 가능한 건 4개 사단 뿐이었다!


 여기에 프랑스나 영국은 새로 독립한 소련의 주변국들의 독립을 보장하면서 이들과 싸워야 하는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나 소련을 돌아서게 만든 결정적 이유는 바로 폴란드였다. 앞서 여러 포스트에서 설명했듯이 폴란드는 소련과는 앙숙이었다. 그런데 소련이 독일을 공격하려면 어찌됐건 폴란드 영토를 지나야 했다. 폴란드는 결코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려했다.


 당시 소련에서 '우리 붉은 군대가 당신네 영토를 건너지 못하면 어떻게 당신들과 함께 독일군과 싸우느나' 묻자 폴란드는 당신들과 싸우느니 혼자 싸우겠다고 답변했다. 결국 그 답변에 소련은 독일군과 더불어 폴란드를 점령해 버렸다.


 프랑스/영국/폴란드와 달리 독일은 소련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었다. 특히 폴란드 영토를 절반 먹겠다는 요구를 혼쾌히 승낙하였으므로 폴란드 전쟁 당시 폴란드 군을 제거하는 건 거의 독일 군에 맡기고 소련군은 어부지리만 얻을 수 있었다. 당시 히틀러가 이러한 조건에 혼쾌히 동의한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차피 나중에 다시 전쟁으로 뺏을 땅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포스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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