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크롬웰의 개편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이라고 하면 찰스 1세를 처형하고 청교도 혁명을 일으켜 영국 최초의 공화국을 세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또 항해조례를 발표하고 영국 - 네덜란드 전쟁을 통해 네덜란드를 몰락시키고 영국을 해양 강대국으로 끌어올린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적인 설명이고 실제로는 이것보다 더 복잡하다.
(크롬웰의 초상화)
당시 의회파였던 올리버 크롬웰 (Oliver Chromwell) 은 내전에서 왕당파들을 격파하고 1649년 찰스 1세를 처형한 후 잉글랜드 연방 (Commonwealth of England) 를 건설한 다음 스스로 호국경 (Lord Protector : 본래 왕권이 미약할 때 왕권을 보조하기 위해 임명되던 귀족이었으나 올리버 크롬웰 시기엔 잉글랜드 연방 최고 권력자를 뜻하는 단어가 되어었다) 이 되어 독재 정치를 실행했던 것이다.
크롬웰은 자신의 반대파를 처단하여 사실상의 독재를 실시했다. 집권 후 평등한 보통선거를 요구하는 수평파를 처단했고, 반의회파 세력이 강하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정벌하여 반대자들에게 철처한 응징을 가했으며, 1653년에 이르러서는 의회까지 해산하고 종신 호국경이 되니 잉글랜드 연방은 이름만 공화국이고 이전의 절대 왕정보다 더한 독재 국가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절대 권력자 크롬웰이 파산 상태에 몰린 영국 동인도 회사를 살리겠다고 나선 것이다. 당연히 회사의 경영진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아마 필자의 짧은 지식으로는 이것이 정부에 의한 기업 구제의 효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것이 350년이나 지나서 유행이 될지는 아마 아무도 몰랐겠지만.
그런데 크롬웰은 그냥 회사만 구제한 게 아니었다. 1657년 10월, 크롬웰은 회사의 조직을 근본적으로 개편했다. 실로 새로 창업하는 수준의 기업 구조조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구조조정의 핵심은 영국 동인도 회사가 매 항해나 몇번의 항해를 묶어서 원금과 이익을 전부 분배하는 임시적 기업이 아니라 이웃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비슷하게 영속적인 기업이 되도록 한데 있다.
즉 회사의 이윤 만을 주주들에게 배당금으로 지불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현대의 주식회사와 같은 것으로 크롬웰의 개혁으로 드디어 영국 동인도 회사가 근대적인 주식회사로 거듭났다고 할 수 있다. 또 주주들은 주주총회에 출석하고 그 출자액에 따라 경영에 대해서 투표하고 의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영국 동인도 회사는 진정한 의미의 주식회사가 되었다.
아무튼 크롬웰에 의해서 회생 철차를 거친 영국 동인도 회사는 주주들로 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1657년 10월 19일 새로운 특허장에 도장이 찍히고, 새롭게 주식을 공모하자 1만 4천 파운드의 적은 돈에도 그 권리를 사려는 사람이 없었던 회사가 무려 78만 파운드의 자금을 공모할 수 있었다. (실제 모집한 자금은 50%정도라고 함) 이 돈을 종잣돈으로 하여 영국 동인도 회사는 다시 동인도 무역에 뛰어들었다.
회사는 이번에도 엄청난 양의 후추를 구입해 왔으나 사실 이것으로는 큰 이익을 내고 배당금을 마련하긴 어려웠다.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데, 그 돌파구는 인도에서 나왔다.
17. 인도 무역
사실 동인도 회사가 인도에 거점을 마련한 건 아주 초창기였다. 동인도로 가는 중간 기착지이고, 또 인도에서도 향신료와 각종 물품들을 구입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절박한 이유도 하나 있었다.
앞서 포스트에세 이야기 했듯이 영국 동인도 회사는 금과 은의 귀금속을 가지고 나가 이것을 향신료와 바꾸는 형태의 무역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중요한 귀금속이 자꾸 해외로 유출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사실 회사 입장에서도 이 귀금속을 마련하느라 많은 돈을 마련한다는 것이 영 탐탁치 않았다.
그들이 더 많은 금을 유럽에서 구할 수록 금값은 올라가는 반면, 많은 금이 동인도 제도에 흘러들어 갈 수록 현지에서는 그 가치가 떨어져 더 많은 금을 구해야 한다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여기에 많은 향신료를 가지고 올 수록 향신료 가격은 더 떨어져 자금을 마련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었다.
사실 영국 동인도 회사가 설립될 당시 정부에서 혼쾌히 허가해준 이유 중 하나는 동인도 제도와 아시아에 영국의 주요 상품인 모직물 (양털로 만든 직물) 을 수출해서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될지 알았기 때문이다. 사실 회사 입장에선 모직물을 영국에서 싸게 사서 현지에서 비싸게 팔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추운 북유럽과 달리 열대의 동인도 제도에선 모직물은 인기가 바닥이었다. 현지에는 면제품이 대세였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금과 은을 들고 나가 무역을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회사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다. 인도에서 모직물이나 영국의 주력 상품인 주석과 철등을 판매하면 어떨까 ? 여기서 이 물건들을 팔고, 면제품을 사들인 뒤 이를 동인도에서 팔고 다시 향신료를 사서 돌아온다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동인도로 가자면 인도에 중간에 들릴 수 밖에 없으니 손해 볼게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인도를 장악한 무굴 제국은 포르투갈 상인들과 거래를 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골키퍼 있다고 골이 안들어가는게 아니듯, 영국 동인도 회사는 여기에 자신들도 끼어들고자 했다. 1609년 이 임무를 위해 회사는 윌리엄 호킨스를 인도로 파견했다.
(무굴 제국 황제 자한기르(Jahanjir) - 유럽의 사신을 접견하는 장면이 이채롭다)
당시 무굴 제국의 황제는 악바르 대제의 아들인 자한기르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이 황제는 예측 불가능한 성격과 잔인함으로 정평이나 있었다. 그러나 윌리엄 호킨스는 운이 좋았다. 신기한 외국인을 좋아한 황제가 그를 총신으로 삼고 '잉글리스 칸' 의 직위를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회사는 이보다 운이 덜 좋아서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인도의 수라트 (Surat) 항에서 무역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을 수 있었다.
(구글 맵에서 찾은 수라트항 - 구자라트 주의 주요 도시이며 지도에서 A 로 표시된 지역이다)
그러나 포르투갈 상인들 역시 자신의 독점권을 쉽게 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 동인도 회사는 힘으로 이를 확보하고자 했다. 1612년 수라트 항 주위에서 벌어진 스왈리 전투 (Battle of Swally) 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 함대는 포르투갈 함대를 격파하고 오랜 세월 지속된 포르투갈의 인도 무역 독점을 종식시켰다. 이 해전은 비록 소규모 해전이긴 했지만 영국 동인도 회사의 인도 진출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데서 의의가 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영국 동인도 회사가 비록 강력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군사력으로 밀리긴 했어도, 사실 군사력으로 따져서 그렇게 약체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항상 영국 해적선의 만만한 상대인 포르투갈 상선들은 영국 동인도 회사만 만나면 약탈당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이미 처음 포스트에서도 보았던 대로 영국 동인도 회사는 영국 동인도 해적으로 불러도 될 정도로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상선을 만나면 노략질을 중요한 영업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동인도 현지에서 군사력으로 포르투갈 세력을 몰아냈듯이 영국 동인도 회사 또한 약체인 포르투갈 세력을 인도에서 몰아내기 시작했다. 1612년 영국 동인도 회사는 수라트 항에 상관을 건설하기 시작해서 1639년엔 마드라스, 1668년엔 봄베이, 1690년엔 캘커타에 상관을 건설했다.
(토마스 로 경)
한편 영국 정부는 1615년 토마스 로 (Sir Thomas Roe) 경을 무굴제국의 수도 아그라에 있던 자한기르 황제에게 파견해 양국간의 친목을 다지고 수라트의 영국 동인도 회사 상관의 지위를 약속받았다. 비록 1630년대의 대기근으로 영국 상관도 크게 타격을 받긴 했었도 1600년대의 후반부에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 무역을 기반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1634년에 이르러 무굴 황제는 (당시 황제는 자한기르의 다음인 샤 자한(Shah Jahan)이었다) 영국인들에 대한 호의로 벵갈지역 (지금의 방글라데시와 인도의 서벵갈지역을 합친 지역) 으로 무역을 확대하게 해 주었다. 당시 무굴 제국 황제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이와 같은 은혜를 나중에 배은 망덕하게 갚으리라곤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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