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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예루살렘 왕국 7 (1101 - 1145)



16. 1118년 - 전환점


 십자군 국가에서 창업 1 세대가 완전히 끝나고 새로운 세대가 시작된 시기는 아마도 1118년 일 것이다. 이 시기 1차 십자군의 중요 인물들이 마지막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우선 첫 번째 언급할 대상은 바로 예루살렘 왕국 국왕 보두앵 1세였다.



 보두앵 1세는 1117년에도 중병으로 앓아누워 이미 자신의 중혼죄를 참회한 적이 있다. 이 참회가 진실했는지 결국 보두앵 1세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다만 3번째 아내인 아델라이데는 이미 시칠리아로 돌아간 상태였지만.


 아무튼 자리에서 일어난 보두앵 1세는 1118년이 되자 다시 해외 원정을 감행했다. 이번에는 상대가 이집트였다. 약간 기록이 엇갈리긴해도 일단 보두앵 1세는 이집트 국내로 침입하는덴 성공한 것 같다. 그러나 이후 이전에 병이 더 심해졌던지 아니면 새로운 부상을 입었던지 간에 결국 병세가 다시 악화되었고 결국 이번에는 병을 이기지 못하고 1118년 4월 2일 사망했다.



 보두앵 1세는 1058년생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아마도 60세 정도까지 살았던 것 같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 볼 때 그런 대로 장수한 셈이었다. 여기에 실패한 수도승으로 시작해서 결국 18년간 국왕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성공한 인생을 산 셈이었다.


 물론 보두앵 1세 역시 다른 십자군 군주들 처럼 약점이나 탐욕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형들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그가 결국 십자군 원정을 통해 한 나라의 군주가 되고 더 나아가 그 신생 국가를 안정된 토대 위에 올렸으니 그 업적은 십자군 군주들 가운데서 남다르다고 하겠다.


 흔히 말하기를 일찍 죽은 그의 형 고드프루아 드 부용 보다는 사실상 보두앵 1세가 예루살렘 왕국의 진정한 창업자로 불리고 있는데, 사실 이는 어느 정도 타당한 이야기였다. 아무것도 물려 받지 못한 3남이 십자군 원정을 통해 정상에 자리에 오르는 인생 역전의 드라마가 실존 했던 셈이다.


 하지만 그의 치세에도 결점은 있었다. 사실 그로써는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피정복민인 현지 토착 기독교도와 무슬림들을 결국 융합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유럽에서 부정기적으로 오는 십자군 지원군에 군사력을 의존하게 되었고 이는 결국 십자군 국가들이 계속되는 병력 부족에 시달리는 한가지 이유가 되었다. 또 아내를 3명이나 두었지만 누구도 자식을 얻지 못해서 (이에 대해서 사실은 보두앵 1세가 동성애자라는 확인되지 않은 루머도 있었다) 결국 그의 사후 왕국이 잠시 혼란에 빠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비잔티움 제국 쪽에서도 한명의 역사의 거인이 세상을 등졌다. 바로 비잔티움 제국의 노황제이자 십자군 원정의 발단 중 하나를 제공한 알렉시우스 1세 콤네누스가 1118년 8월 15일 사망한 것이다. 알렉시우스 1세는 1048년 생이니 70세라는 당시로써는 제법 장수를 누리고 승하했다.


 제위에 앉은 기간만 1081 년에서 1118년으로 37년이었으니 혼란이 극에 달했던 당시 시기에는 정말 오랜 기간 옥좌를 지킨 셈이었다. 1025년 바실리우스 2세가 사망한 후 1081년 알렉시우스 1세가 즉위할 때까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는 무려 13명이나 되었다. 그의 앞에 있던 많은 불행한 비잔티움 황제들은 대개 비참하게 짧은 재위기간을 마친 경우가 많았음을 생각하면 그는 행운아였다.


 하지만 이 행운은 누군가 만들어 준것이 아니라 알렉시우스 1세 본인이 스스로 쟁취한 것이었다. 사실 알렉시우스 1세가 즉위한 시점에는 테마제의 근간인 아나톨리아 지역은 셀주크 제국의 손에 다 넘어가고 서쪽에서는 로베르 기스카르와 그 아들인 보에몽이 비잔티움 제국의 나머지 부분을 노리고 침입해 들어와 알렉시우스 1세 뿐 아니라 비잔티움 제국 자체가 곧 무너질 상태였다.


 황제는 스스로 군대를 재조직해 이 위기를 벋어나고자 했다. 당면한 비잔티움 - 노르만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세금을 짜낼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세금을 짜내고 재원을 마련해서 결국 로베르 기스카르 사망할 때 까지 제국을 방위해 냈다. 그리고 1090년대 이후로는 서방의 도움을 구해 아나톨리아 지역도 수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 노력은 뜻밖에 십자군 운동을 일으켜 결국 황제는 불완전한 상태로 자신의 과업을 완성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플 외에는 모든 영토를 상실할 것 같던 비잔티움 제국을 다시 일으킨 것은 모두 알렉시우스 1세의 위업이었다. 그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아마 15세기가 아니라 11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십자군 전쟁사라는 글의 주제 때문에 언급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알렉시우스 1세는 군 사령관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방지하고 또 스스로 군대를 이끌기 좋아했기 때문에 황제 자신이 친히 병력을 이끌고 끊임없이 비잔티움 제국의 국경을 침범하는 여러 이민족의 군대와 맞서 싸웠다. 사실 죽기 몇년 전인 1115년에도 황제는 직접 병력을 이끌로 대규모 셀주크 투르크 병력과 싸워 승리하기도 했다.



(알렉시우스 1세가 즉위한 1081년 당시의 지도. 빨간색이 비잔티움 제국이다. I, the copyright holder of this work, hereby release it into the public domain. This applies worldwide.  )



(1173년 비잔티움 제국의 수복기의 비잔티움 제국 영토. 빨간색으로 표시된 쪽이 비잔티움 제국 영토이다. 이와 같은 일시적인 영토 수복이 가능했던 것은 물론 알렉시우스 1세가 그 기반을 다져놓았기 때문이다. CCL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Original uploader was Justinian43 at en.wikipedia)



 하지만 군인 황제인 알렉시우스 1세도 세월 앞에는 당할 수 없었다. 결국 이 마지막 승리 이후 그는 병석에 눕게 되었고, 1118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 했듯이 천수를 누리고 죽었을 뿐 아니라 아들 요하네스 2세 콤네누스에게 안정적으로 권력을 이양하고 죽었으니 당시 비잔티움 제국 황제로는 보기 드문 업적을 세운 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후세의 역사가들의 평가이고 사실 재위 기간동안 알렉시우스 1세는 국민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벌어지는 전쟁 비용을 감당하느라 막대한 부담을 졌기 때문이다. 황제는 현명한 사람이라면 외국의 침략자들이 집을 파과하고 아들을 죽이고 딸을 겁탈하도록 놔두는 것 보다 전쟁 수행에 필요한 부담을 지는 게 더 낮다고 국민들을 설득하긴 했지만 모두를 납득시킬 순 없었다. 아무튼 알렉시우스 1세는 집권 당시에는 인기가 별로 였지만 후세의 평가는 비교적 후한 인물이었다.



 아무튼 1118년은 이렇게 1차 십자군 세대의 마지막 인물들이 사망하므로써 사실상 십자군 1세대가 마무리 된 해였다. 여기서 잠시 1차 십자군 군주들이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간단히 살펴보자.


 최고 지휘관 : 서방측 - 아데마르 주교 (Adhemar, Bishop of Le Puy-en-Velay)
                    -> 결과 : 1098년 안티오크 함락이후 질병으로 사망하여 성지에도 못감.

                   비잔티움 측 - 알렉시우스 1세 콤네누스 (Alexios I Komnenos)
                    -> 결과 : 비잔티움 제국 영토의 일부 수복 성공함.

 주요 지휘관 :

 툴루즈의 레몽 (툴루즈 백작 레몽 4세 : Raymond IV of Toulouse)
 -> 결과 : 살아서는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함. 1108년 트리폴리 포위 중 사망. 결국 그의 장남이 트리폴리 백작령을 확보함.

 위그 드 베르망두아 백작 (Hugh I of Vermandois)
 -> 결과 : 원정 도중 회군해서 명성이 실추. 이를 회복하기 위해 1101년 마이너 십자군에 참여했다가 사망.

 고드프루아 드 부용 (Godfrey of Bouillon)
 -> 결과 : 예루살렘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되어 성공했지만 결국 1년만에 사망.

 볼로뉴 백작 외스타슈 3세 (Eustace III, Count of Boulogne ) 
 -> 결과 : 예루살렘 함락 후 귀국하여 3형제 중 장남이지만 가장 장수함.

 볼로뉴의 보두앵 (Baldwin of Boulogne)
 -> 결과 :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이 되어 왕국의 기틀을 세움

 노르망디 공작 로버트 2세 (Robert Curthose or Robert II)
 -> 결과 : 예루살렘 함락에 큰 공로로 금위환향하지만 십자군 원정으로 자리를 비운사이 동생 헨리와의 왕위 계승 전쟁에서 패배해 유폐당함.

 블루아 백작 스테판 2세 (Stephen II, Count of Blois)
 -> 결과 : 1차 원정 중 안티오크 공방전에서 도망쳐 망신. 결국 우트르메르로 귀환하여 2차 람라 전투에서 싸우다가 전사함.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2세 (Robert II, Count of Flanders)
 -> 결과 : 성지 탈환후 자랑스럽게 귀국했으나 결국 유럽에서 전쟁 중 사망

 타란토 공작 보에몽 (Bohemond, Prince of Taranto )
 -> 결과 : 안티오크 장악. 그러나 너무 과욕을 부린 탓에 1108년 비잔티움 제국의 포로로 잡힌 후에는 몰락함.

 타란토의 탕크레드 (Tancred of Taranto)
 -> 결과 : 안티오크 및 주변 지역을 장악해서 한동안 잘나갔으나 주변의 큰 원성을 샀으며, 결국 1112년에 사망.


 이렇게 놓고 보면 결국 1차 십자군 원정의 최대 수혜자는 필자 생각으론 보두앵 1세 였으며,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그 다음으로는 알렉시우스 1세였을 것 같다.




17. 왕위 계승


  아무튼 선왕 보두앵 1세가 승하했으니 다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차기 국왕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보두앵 1세가 후사 없이 승하했기 때문에 왕세자가 있을 리가 없었다. 이 경우 차기 국왕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보두앵 1세의 친족들이다.


 첫번째 후보는 바로 일찍 귀국해서 이 때까지 장수를 누리고 있었던 볼로뉴 백작 외스타슈 3세였다. 사실 선왕 보두앵 1세도 형제가 계승한 경우이기 때문에 불가능 할 건 없었다. 그러나 이미 나이도 고령 (정확히 몇살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적어도 60세 이상이었을 것이다) 인데다가 거리가 너무 멀어 현실성이 많이 떨어졌다.



(알렉시우스 1세를 접견하는 볼로뉴 3형제 - 고드프루아 드 부용, 보두앵 1세, 외스타슈 3세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한편 이전에 보두앵 1세가 아델라이데와 결혼했을 때 후사 없이 죽게되면 아델라이데의 아들인 시칠리아의 로게르 2세에게 예루살렘 왕국의 왕관을 물려주기로 약속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은 많은 도덕적 비난을 받았으며 교황에 의해서 무효라고 선언되었으므로 사실 로게르 2세에게는 권리가 없었다.


 그러나 선왕 보두앵 1세는 아델라이데가 가져온 지참금은 모두 써 버렸기 때문에 아델라이데로써는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에 아이러니 하게도 아델라이데도 보두앵 1세가 죽고 나서 얼마 있다 사망했는데, 아마 저승에서 이 문제를 따지지 않았을 까 생각된다.


 아무튼 이 후보들을 제외하고 예루살렘의 십자군 귀족회의에서 가장 큰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1100년 선왕 보두앵 1세에 의해 에데사의 2대 백작으로 임명된 보두앵 1세의 사촌 보두앵 2세 혹은 보두앵 뒤 부르 (Baldwin II of Jerusalem, formerly Baldwin II of Edessa = Baldwin of Bourcq) 였다.



(기사들을 접견하는 보두앵 2세 (왕관쓴 사람)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보두앵 2세는 이미 선왕을 도와 십자군 국가의 북방 국경을 튼튼히 했을 뿐 아니라 현지 사정에도 매우 밝았고, 무슬림 군대와의 오랜 전투 경험은 물론 감옥살이 경험까지 있었으므로 앞으로 끊임없이 이들 무슬림 세력과 싸워야 하는 예루살렘 왕국의 입장으로써는 가장 적당한 국왕 후보로 생각되었다.


 결국 귀족회의의 지지를 얻은 보두앵 2세는 형식적인 겸양 이후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직을 수락하고 예루살렘 왕국의 3대 국왕 (실질적으로는 2대 국왕) 으로 옹립되었다. 사실 보두앵 2세는 1차 십자군 원정 때 부터 참가했으나 아무 주목도 받지 못하다가 이제서야 국왕의 자리에 오른 셈이었다. 그러나 보두앵 2세의 치세는 그렇게 장미빛 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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