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풀크 (Fulk of Jerusalem, Fulk V of Anjou) 국왕의 배경
1131 년 예루살렘 왕국의 4대 국왕으로 즉위한 사람은 특이하게도 3명이었다. 그것은 국왕 풀크와 왕비 멜리장드,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차기 국왕인 보두앵 3세였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야기가 옆으로 새긴 하지만 풀크라는 인물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앞서 선왕 보두앵 2세는 남자 후계자가 없는 상태에서 유럽의 강력한 군주를 끌어들이기 위해 앙주 백작이던 풀크 5세를 사위로 점찍었다고 이야기 했다. 그렇다면 타이틀로만 보면 그냥 일개 프랑스의 영주 인듯 한 풀크가 그렇게 강력한 군주였던 이유는 무엇을까? 사실 이는 유럽 왕실 및 영주들의 복잡한 혼인관계와 대립의 결과였다.
풀크 5세의 정확한 탄생년도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1089년에서 1091년 사이 앙주 백작 풀크 4세 (Fulk IV of Anjou) 와 몽포르의 베르트라데 (Bertrade de Montfort) 사이에서 태어난 것 같다. 풀크 5세가 20세 가 채 안된 시점인 1109년 아버지인 풀크 4세의 사망으로 앙주 백작의 지위를 계승했다. 이후 풀크 5세는 맨의 에멩가르드 (Ermengarde or Erembourg of Maine) 과 결혼하여 그녀의 영지까지 자신의 통제아래 두었다.
한마디로 결혼을 통해 전쟁 없이도 영토를 합병했으니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혼(婚) 테크인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진정한 혼테크의 달인인 풀크 5세의 전설은 사실 시작단계였다. 여기에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대립도 풀크의 영토 확장에 한몫을 하게 된다.
본래 풀크 5세는 프랑스 국왕 루이 6세를 도와 잉글랜드의 헨리 1세와 대립하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혼테크의 가능성이 그를 반역의 길 - 굳이 말하자면 헨리 1세와 풀크 5세 모두 프랑스 국왕의 신하인 셈이니 - 로 인도했다. 즉 풀크 5세의 장남인 조프루아 5세 (Geoffrey V of Anjou) 와 헨리 1세의 딸인 마틸다 (Matilda of England) 를 1127년 혼인시킨 것이다.
사실 헨리 1세에게는 어린 아들도 있었지만 사고로 죽었서 그녀가 부계로 따졌을 때 정복왕 윌리엄의 마지막 혈통인 셈이다. 물론 모계로 따질 경우 1차 십자군의 참전 용사인 블루아 백작 스테판 2세와 정복왕 윌리엄의 딸 아델라 사이에 아들인 블루아의 스테판 (Stephan of Blois) 이 있었고, 그가 노르만 왕조의 마지막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하긴 했지만 마틸다의 경우에도 정복왕의 혈통임을 내세워 상당한 권리를 주장할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이 결혼은 결국 앙주 가문에 큰 이익이 될 것이었다.
(마틸다의 초상화. 마틸다 공주는 다른 이름으로 황후 마틸다 (Empress Matilda) 라고도 불린다. 그녀가 본래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5세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하인리히 5세의 사후 그녀는 다시 앙주의 조프루아 5세와 결혼한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expired.)
과연 헨리 1세의 사후 선왕을 계승한 스테판의 블루아와 마틸다는 서로 대립하게 된다. 이것이 1135년부터 1154년까지 잉글랜드를 무정부 (Anarchy) 상태로 몰고간 내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전쟁에서 남편과 일부 귀족들의 지지를 얻은 마틸다는 마침내 스테판을 1141년 붙잡고 그녀가 원하던 잉글랜드 왕관을 손에 넣을 뻔했다.
그러나 대개의 잉글랜드 귀족들은 외국 세력과 손잡은 그녀 - 귀족들의 동의없이 국제 결혼을 할 수 없다는 조약을 위반한 것도 싫어했다 - 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에 결국 왕관을 쓰지는 못했고, 나중에 앙주 백작과의 아들인 헨리 2세가 잉글랜드 국왕이 되는 선에서 야망을 만족시킬 수 밖엔 없었다. (보통 정식으론 잉글랜드 군주의 명단에선 빠지지만 일부에선 마틸다를 잉글랜드의 첫번째 여군주로 보는 해석도 있다) 후에 마틸다는 남편의 군사적 도움을 받아 노르망디를 확보할 순 있었다.
아무튼 이 마틸다와의 결혼으로 앙주 백작가는 큰 영토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풀크 5세의 손자인 헨리 2세가 장차 잉글랜드 국왕 겸 수많은 영지 (앙주 백작, 멘 백작, 노르망디 공작, 아키텐 공작 등등) 를 손에 넣게 된 것이다. (참고로 헨리 2세 역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여자라 불린 아키텐의 엘레노오르 (Eleanor of Aquitaine ) 와 결혼하여 조부와 부친의 혼테크 정책을 계승했다)
결국 그의 손자인 헨리 2세에서 시작된 플랜태저넷 왕조 (Plantegenet) 가 손에 넣은 것은 할아버지 풀크 5세가 꿈꾸던 앙제빈 제국 (Angevin Empire ) 이었다.
앙제빈 제국이란 국가는 실제로 12세기 당시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풀크 5세 이후 앙주가문의 결혼 및 군사 정책에 의해 탄생한 거대한 중세 국가를 현대에 역사가가 부른 명칭이다. 여기에는 잉글랜드 전체와 아일랜드, 그리고 프랑스의 서부 지역이 포함된다. 다른 말로는 플랜태저넷 제국이라 불리기도 한다.
(노란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앙제빈 제국 혹은 잉글랜드 국왕의 실제 지배지역이며 노란색 점은 영향력을 행사한 지역이다. CCL 에 따라 동일 조건하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Cartedaos )
아무튼 그 결과 탄생한 이 거대한 잉글랜드 국왕의 영지는 프랑스 왕권에 심각한 위협이 되기 시작하여 결국 영국 - 프랑스 사이의 역사적 대립의 원인이 된다.
여기서 다시 이야기를 풀크 5세가 멜리장드와의 결혼을 제의 받은 1127년으로 돌아가 보자. 이 시기에 풀크 5세는 아들을 마틸다와 결혼 시키고 앞으로 굴러들어올 큰 영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마침 다행히도 (?) 풀크 5세의 전처인 에멩가르드가 1126년 사망한 것이다. 따라서 풀크 5세는 새장가를 들 수 있게 되었다.
보두앵 2세에게는 이미 프랑스의 강력한 군주로 헨리 1세와 동맹을 맺은 앙주 백작을 끌여들여 예루살렘 왕국의 방위를 튼튼히 하려는 속셈이 있었다. 한편 풀크 5세 역시 자신의 새로운 앙제빈 제국에 새로운 국가를 포함시킬 의도가 있었다. 따라서 다시 한번 혼테크 기술을 발휘 예루살렘 왕국을 앙주 가문에 포함시키려 했던 것이다.
비록 풀크 5세의 의도가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선 우르트메르와 앙제빈 제국은 너무 거리가 멀어서 통합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자신의 손자인 헨리 2세와 아들인 보두앵 3세가 모두 잉글랜드 및 예루사렘 왕국 국왕으로 등극했으니 나름대로 그의 야망은 결실을 맺었다고 하겠다.
25. 풀크 왕의 치세
비록 풀크 5세가 성공적인 혼테크로 이름을 날리긴 했지만 예루살렘 국왕 풀크의 치세는 선왕 보두앵 2세 보다도 더 순조롭지 못했다. 일단 트리폴리, 에데사, 안티오크의 십자군 국가들이 이 외국인 왕 - 사실 그들도 이방인이긴 하지만 - 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나섰다. 사실 여기에는 풀크 국왕의 문제도 있었다.
풀크는 일단 국왕으로 즉위하자 멜리장드를 배제하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앙주 출신 가신들을 내세워 권력을 장악하려고 했다. 그리고 다른 십자군 공국과 백국들을 예루살렘 왕국에 종속시키려 노력했다. 이를테면 국왕 중심의 중앙 집권화를 시도했던 셈인데, 이로 인해 본래 이곳에 정착했던 십자군 2세대 들과 현지의 귀족들은 기득권을 상실할 위험에 처했다.
사실 십자군 2세대들 시각에서 보면 이건 완전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밖으로 밀어내는 상황이었다. 본래 자신들의 부모 세대들이 피땀흘려 이룩한 것을 물려받아 지켜온 이들로써는 십자군 원정에 별 기여도 하지 않은 이방인이 자신들의 권리를 빼앗는 것이 당연히 못마땅할 수 밖에 없었다.
1134년에는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바로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 반란의 핵심 인물인 십자군 2세대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자파 백작 위그 2세 (위그 뒤 퓌제 : Count of Jaffa, Hugh II of Le Puiset) 였다. 그는 선왕의 딸인 멜리장드 왕비에 대해서는 충성을 바쳤지만 풀크 국왕에 대해서는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 풀크 국왕 반대파들이 백작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풀크는 이들을 방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위그 백작을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그것은 비록 진위여부는 알 수 없지만 국왕이 위그 백작이 멜리장드 왕비와 간통을 했다고 백작을 기소한 것이다. 아무튼 이는 진위여부와는 관계 없이 자신을 제거할 목적이라는 사실을 안 위그 백작은 자파에서 인근의 아스칼론의 무슬림 군대와 동맹을 맺어 반란을 준비했다.
그러나 여기서 아마도 멜리장드의 부탁을 받은 주교의 중재로 간신히 내전은 모면할 수 있었다. 결국 중재안이 마련되었는데, 위그 백작에게 3년간 추방령을 내리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3년 있다가 돌아오는 정도면 목숨을 걸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 보다는 더 안전해 보였기 때문인지 위그 백작은 여기에 동의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전이 있다. 결국 위그 백작이 안심하고 있을 때 암살 당했기 때문이다.
이 암살의 배후로 풀크 국왕이 지목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풀크의 위신은 크게 추락할 수 밖에 없었다. 후세에 이 사건을 두고 여러가지 해석이 나오긴 했지만 여러가지 정황상 볼 때 아마도 국왕 자신이나 혹은 앙주에서 온 국왕의 측근 세력의 소행이라는 해석이 유력한 것 같다.
아무튼 위그 백작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국왕에게 오히려 더 큰 악재로 작용했다. 이 일이 있은 후 멜리장드 왕비를 지지하는 십자군 2세대들의 지지파들이 점차 굳건히 뭉쳐 분파를 형성한 것이다. 결국 1136년 이후로는 왕비파의 세력이 매우 커져서 풀크 국왕의 영향력은 상당 부분 상실 될 수 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십자군 국가 내부의 대립은 이들 모두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왜냐하면 외부에서 강력한 신흥 세력들이 우트르메르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는 모술과 알레포의 새로운 지배자인 장기 (Zhengi) 였고 다른 하나는 비잔티움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의 아들이자 당시 비잔티움 제국 황제인 요하네스 2세 콤네누스였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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