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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1차 십자군 7



 
 13. 2차 안티오크 포위전 (Seige of Antioch, second siege 1098 6.5 - 1098 6.28)




 2차 안티오크 포위전을 설명하기에 앞서 이 카르부카라는 모술의 지배자가 처한 상황과 당시의 셀주크의 상황을 간단히 설명하는 것이 안티오크 포위전의 상황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092년 말리크 샤 1세가 사망한 이후 셀주크 제국은 여러 파편으로 나누어졌다. 일단 아나톨리아 고원 일대에서는 앞서 이야기 했듯이 에미르 차카를 척살한 후 이 일대의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된 청소년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1세와 '현자 다니멘슈드' 가 서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한편 말리크 샤 1세와 대립하던 동생 투투시 1세는 1095년까지 알레포를 중심으로 시리아를 지배했으나 자식들이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대립하는 바람에 십자군만 좋은 상황이 되고 있었다.


 대셀주크 제국의 나머지 부분은 말리크 샤 1세의 어린 네 아들들에게 분배되었는데, 제국 중앙의 노른자위 지역인 페르시아 (이란) 일대는 마흐무드 1세 (Mahmud I) 에게 계승되었다. 하지만 꼭 가운데가 좋은 위치는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사방에 3명의 형제와 숙부(투투시 1세)에게 둘러싸이는 형국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형제들인 바르키야루크 (Barkiyaruq) 는 이라크 일대를, 바그다드를 중심으로한 이라크 중부일대는 무함마드 1세 (Muhammad I) 가, 그리고 아흐메드 산자드 (Ahmed Sanjar) 는 페르시아의 코라산 (Khorasan) 일대를 장악했다.


 이 중 바르키야루크는 일단 셀주크의 중앙 노른자위 땅에 더 큰 관심이 있어서 이곳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그는 모술, 알레포, 다마스쿠스에 대해서는 형식상의 지배자로 만족할 뿐이었다. 따라서 안티오크 공방전 당시 십자군을 저지할 수 있는 무슬림 지배자들은 많지 않았다. 즉 모술, 알레포, 다마스쿠스의 지배자가 아니라면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만이 이를 저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정말 십자군에게 신의 도움이라도 있었는지, 알레포와 다마스쿠스의 지배자들은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두 형제들이 지배하고 있었고, 파티마 왕조는 십자군을 저 가증스런 수니파 무슬림과 싸우는 잠재적 동맹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할 때 당시 무슬림 지배자들은 이교도보다는 같은 무슬림들, 특히 자신과 피를 나눈 친형제들과 싸우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한번 패배한 알레포와 다마스쿠스의 지배자들은 십자군과는 더 싸우는 것을 주저했기 때문에 이제 모술(Mosul - 이라크 북부의 티그리스 강변의 도시. 바그다드에서 400km 떨어진 지점에 있다) 의 지배자인 아타베그 카르부카 만이 십자군을 몰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이 시기만이라도 이 두 형제가 일시적으로라도 화해를 하고 카르부카와 힘을 합쳐 십자군을 몰아내기로 결정했다면 십자군에게 큰 위협이 될 뻔 했지만 신의 가호가 있었는지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다마스쿠스의 두카크만은 카르부카와 연합했다. 


 당시 카르부카는 불경스런 자들과 싸우는 성전을 벌인다는 명분을 내걸고 상당히 많은 병력을 모았던 것 같다. 그는 정말 간발의 차이로 안티오크 함락 때 도착했는데, (6월5일) 이미 성벽위에서는 자신이 구원해야 했을 야기 시안의 깃발 대신 십자군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안티오크를 함락시키는 보에몽 1세  1840년의 상상화이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카르부카는 일단 십자군을 포위했다. 사실 그가 가진 병력은 십자군에 뒤지지 않았던 것 같지만 안티오크의 견고한 성벽을 감안할 때 이는 쉽게 공격할 수 없는 목표였다. 한편 이런 포위 공격은 십자군에게 새로운 시련이었다. 도시를 점령하고 보니 야기 시안의 보급품과 식량이 오랜 포위전으로 거의 다 떨어진 것이다. 결국 십자군은 다시 굶주리게 되었다. 다시 한번 시체를 먹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러나 상황은 꼭 카르부카에 유리한 것이 아니었다. 일단 그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별로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카르부카의 독단적인 성격과 탐욕은 부하 지휘관과 병사들 모두에게 경원시되었다. 심지어 그의 휘하의 에미르 들과 두카크 마저도 그가 승리한다면 시라아의 새로운 지배자로 군림하지 않을지 걱정하고 있었다. 


 이렇게 충성심이 의심되는 병사들과 부하들은 일단 성전의 명분하에 일시적으로 결집되긴 했지만 사실 모래알 처럼 쉽게 흩어질 군대였다. 훗날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도 용병이 주축이 되는 자신의 병사들이 오랜 전투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카르부카의 군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오랜 포위전은 이렇게 상호간의 신뢰가 없는 군대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탈영이 줄을 잇고 결국 배반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카르부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6월 7일의 기습이 효과가 없었으므로 포위를 유지하기로 했다. 십자군을 굶겨서 궁지에 몰 생각이었다. 그러나 카르부카의 결정은 최악의 결과만 가져왔다.


 한편 성안의 십자군에게는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이 연달아 도착했다.


 일단 나쁜 소식은 자신을 구원해줄 비잔티움의 군대가 철수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아주 독특한 십자군의 주요 지휘관과 연관이 있었다. 안티오크가 함락되기 하루전인 6월2일 블루아 백작 스테판 (에티엔 앙리) 가 패배를 직감하고 십자군 본대를 이탈해 철군한 것이다.


 사실 다음날 안티오크는 함락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오랜 공성전으로 지치고 기력이 떨어진 십자군을 공격하기 위해 대군이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안티오크가 두번째로 포위되기 직전까지도 십자군에서 많은 탈영병들이 나왔다. 이들은 블루아 백작의 패잔병 군대에 합류했는데, 그들은 지치고 힘이 떨어진 동지들이 이슬람의 대군에 포위되는 모습을 목격하고 이제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채 후퇴했다.


 그런데 그들이 하필이면 대군을 이끌고 십자군을 지원하기 위해 내려오던 알렉시우스 1세의 군대 - 물론 십자군이 점령한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 와 마주친 것이다. 이 때 백작이 한 행동은 탈영보다도 더 심각한 것이었다. 그는 십자군의 본대가 괴멸되었다는 잘못된 소식을 전한 것이다.


 본래 용의주도한 알렉시우스 1세 이지만 이 때 만큼은 잘못된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황제는 더 알아보지도 않고 이 패잔병 무리 처럼 보이는 십자군의 탈영병들을 보고 이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에 아나톨리아 고원에 다시 다른 셀주크 군대가 모였다는 소식이 들려왔으므로 황제는 제국의 안위를 위해 더 이상의 모험은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약 알렉시우스 1세가 대군을 이끌고 카르부카의 군대를 십자군과 협공했다면 아마 보에몽 1세의 안티오크 공작령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에몽에게는 다행하고, 비잔티움 제국에게는 불행하게도 황제는 철군명령을 내렸다.


 이 사건은 이미 크게 약화된 십자군과 비잔티움 제국의 유대를 결정적으로 깨버리는 사건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십자군이 팔레스타인에 독자적인 국가를 형성하게된 계기가 되는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좋은 소식은 아무래도 자작극의 냄새가 나는 일이었다. 이 십자군에 속해 있던 낮은 지위의 수도승인 피에르 바르톨로뮤 (Peter Bartholomew) 이 성 안드레아 (St Andrew - 그리스도의 12 사도 중 하나이자 성 베드로의 동생) 를 영접했는데, 그에 의하면 이 성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찌른 성창 (Holy Lance, 롱기누스의 창이라고 알려진 창) 이 이 도시안의 성 피에르 성당 안에 있다는 것이다.


 당시 종교적인 열정과 오랜 기아가 함께 작동해서인지 이 시기 안티오크에는 성모 마리아나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성창의 이야기를 들은 십자군의 영적인 지휘관 아데마르 주교는 이를 매우 의심스러워 했다.


 왜냐하면 이미 성창이라고 여겨지는 유물이 콘스탄티노플에 있었고, 아데마르 자신이 이를 직접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유물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장소라고 생각되는 유서깊은 성묘 교회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그러니 안티오크에 성창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6월 14일 유성우가 나타나자 이를 상서롭게 여긴 사람들은 이 성창을 찾기 원했다. 레몽과 성창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6월 15일 성 피에르 성당의 여기 저기를 파 보았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그들이 빈손으로 돌아왔을 때 피에르 바르톨로뮤가 성창의 위치를 알아냈고, 마침내 성창의 일부라고 생각되는 쇳조각을 찾아냈다.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사람들은 이로써 큰 위안을 받았다.




(성창을 든 아데마르 주교와 십자군 - 13세기의 그림이다. 뒤에 창을 들고 주교관을 쓴 사람이 아데마르 주교이다. 사실 진본 성창이라고 불리는 몇개의 성창이 있는데, 이 중에 비교적 잘 안알려진 성창이 바로 이 피에르 바르톨로뮤의 성창이었다.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이것이 1차 십자군이 안티오크에서 발견했다는 성창 - 지금은 아르메니아의 Echmiadzin 에 있기 때문에 Echmiadzin 의 성창이라고 부른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그러나 성창에 발견에도 불구하고 성안의 식량이 고갈되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무튼 성창의 발견으로 기고만장해진 피에르 바르톨로뮤는 성 안드레아의 새로운 계시를 전했다. 그것은  앞으로 5일간 금식하면 십자군이 승리하리란 것이었다. 그들은 지금도 금식하고 있었고, 식량도 없었기 때문에 이 계시를 지키는 것은 쉬웠다. 다만 어려운 일은 그때까지 굶어 죽지 않는 일이었다.


 한편 성안의 십자군이나 이를 포위하는 카르부카나 모두 어려운 지경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협상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보에몽은 독특하게도 은자 피에르 - 그는 놀랍게도 그 때까지도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 를 보내 카르부카와 협상을 진행했다.


 이전 파티마 왕조와의 협상 때 처럼 십자군은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만을 제시했으므로 이 협상은 결렬되었다. 그러나 십자군은 이 협상으로 큰 이득을 보았다. 그것은 이전부터 인기없던 지휘관인 카르부카의 인기가 위험한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다. 성전을 외치고 나온 그가 적을 공격하지도 않고 협상만 하면서 시간을 질질 끌자 무슬림 진영에서는 불평의 소리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한편 십자군 입장에서는 이제 더는 싸움을 미룰 수 없는 시점이 왔다. 그들이 모두 굶어 죽지 않으려면 말이다.





 14. 안티오크 전투 (Battle of Antioch   1098. 6.28)



 이 시점에서 정국을 주도해 나가는 인물은 타란토 공작 보에몽이었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그가 최고 사령관이었다. 보에몽은 군대를 6개의 부대로 나누었다. 그 중 하나는 자신이 직접 지휘했다. 나머지 5개의 부대는 위그 드 베르망두아, 플랑드르의 로베르 2세, 노르망디의 로버트 2세, 고드프르아 드 부용, 탕크레드가 각각 지휘했으며, 아데마르 주교도 가세했다. 한편 병으로 아픈 상태였던 레몽은 약간의 수비대를 데리고 성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한편 새로 발견된 안티오크의 성창 역시 아길레라의 레몽 (Raymond of Aguilers - 레몽 4세를 수행하던 연대기 작가) 에 의해 운반되어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역활을 했다.


 적군이 성문을 향해 나오자 투르크 진지에서는 적이 다 모이기 전에 공격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나 카르부카는 한번의 전투로 적을 괴멸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 -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부하들이 다 돌아설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 에 사로잡혀 십자군을 넓은 평원으로 끌어내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카르부카는 탈영과 기아에도 불구하고 아직 적의 숫자가 꽤 많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십자군을 평원으로 꾀어낸 것 자체는 사실 투르크 족이 흔히 쓰는 유인전술이기는 했다. 하지만 십자군은 생각보다 잘 훈련된 군대였으며, 그들의 지휘관은 비록 인간성은 의심할 수 있지만 용맹과 전투력에서는 절대 의심할 수 없는 역전에 용사들이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투르크 기마 궁병은 그들의 특기인 화살로 십자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갑옷을 입은 십자군 기사들은 적의 화살에도 강했다. 비록 전투중에 강에 의해 측면이 보호 되지 못한 십자군의 좌익이 무너지는 듯 했지만 위기에 강한 보에몽은 재빨리 새로운 부대를 편성해서 그들을 밀어부쳤다.



(안티오크 전투에서 적을 격파하는 노르망디의 로버트 2세. 1850년대의 상상화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십자군은 많은 희생을 치루긴 했지만 적을 착실히 몰아부쳤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오랜 금식에다가 종교적 열정이 더해져서 인지 십자군들은 세 성인이 자신을 인도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성 조지, 성 드메트리우스. 성 마리우스 가 그들이었다.



 한편 투르크 군은 그들이 받은 피해보다 더 크게 흔들렸다. 적과 협상을 시도한 오만한 사령관에 대한 부하들의 배신이 잇달았다. 십자군이 카르부카의 진지에 도달할 때 쯤, 다마스쿠스의 두카크는 카르부카를 버리고 퇴각했다. 대세를 눈치 챈 많은 에미르 역시 두카크의 사례를 따르기로 결정했다. 사실 이는 투르크 인들에게는 드물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마침내 카르부카가 퇴각할 때 쯤 그의 부대는 정말 보잘것 없는 수준으로 변해 있었다. 이와같은 군대로는 모술의 지배자 자리를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가 항상 우려했듯이 몰락하고 말았다.


 전투는 결과적으로 십자군의 대승리였다. 그러나 이 십자군들이 항상 그러하듯이 승리는 그들에게 새로운 분쟁의 씨앗이었다. 다시 한번 논쟁의 불이 붙었다. 과연 이 안티오크는 누구의 것인가 ?


 보에몽은 다시 한번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는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게 언제냐는 듯이 - 사실 그가 충성의 맹세 같은 걸 했을 때 부터 보에몽 자신을 포함해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 황제의 신의 없음을 비난했으며, 안티오크 함락에서 자신의 역활을 강조했다.


 그러나 변함없이 보에몽과 사이가 좋지 않은 툴루즈 백작 레몽 4세는 물론 아데마르 주교도 이에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보에몽의 역활이 아무리 커도 보에몽 혼자 안티오크를 점령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나머지 십자군은 아직 아무런 보상도 받지 - 약탈은 제외하고 토지를 - 못했다.


 그들은 알렉시우스 1세의 의견을 묻기 위해 위그 드 베르망두아 백작을 콘스탄티노플로 파견했다. 그런데 황제는 여름에 자신의 권리를 확인하기 위해 추가 파병을 하는 것을 거부했다. 아마도 새롭게 병력을 편성하기 힘들어서 였던 것 같지만 결국 이는 보에몽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한편 보에몽과 레몽 4세의 대립은 위험한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마치 2차 대전 직후 베를린을 분할 점령한 연합군 처럼 레몽과 보에몽은 야기 시안의 궁전을 분할 점령했다. 도시 자체는 보에몽의 통제에 있다고는 하지만 점령지는 남부 프랑스인과 북부 프랑스인 그리고 남부 이탈리아 노르만 족에 의해 분할 되어 거의 독립적인 국가 같았다. 십자군 내의 내분이 무력 충돌로 번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그들을 구원한 건 신의 징벌이었다. 오랜 기아로 인한 영양 실조와 비위생적인 환경이 겹쳐 장티푸스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 장티푸스는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이중에는 십자군의 영적인 지도자인 아데마르 주교도 들어 있었다. 8월 1일 결국 그는 타향만리에서 죽고 말았다.


 한편 장티푸스 이후 이들은 다소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많은 십자군이 이 도시를 등지고 떠났다. 보에몽은 아르메니아 실리시아의 일부를 노렸고, 고드프루아는 안티오크 동쪽의 투르베셀 및 라벤델을 점령했다. 플랑드르의 로베르 2세는 라타키아 항구를 점령하기 위해 떠났다.


 1098년 후반기는 십자군이 다소 정체된 상태였다. 그러면 과연 대체 성지 탈환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 일단 1098년 후반기의 상황을 이야기 한 다음해인 1099년으로 넘어가야 할 것이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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