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에데사 포위전 (Siege of Edessa 1144.11. 28 - 1144. 12. 24)
에데사가 함락 되기 1년전부터 십자군 국가에는 좋지 않은 조짐이 일어나고 있었다. 1143년 비잔티움 황제 요한네스 2세가 승하한 것은 안티오크 공국과 에데사 백국에 좋은 일로 생각될 수도 있기는 했지만 이로 인해 신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 (Manuel I Komnenos, or Comnenus 1118 - 1180) 는 자신의 자리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바뻤기 때문에 만약의 경우 이들을 도울 수 없는 상태였다. (참고로 마누엘 1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경쟁자가 될 형제들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더 불길한 일은 인기 없는 국왕 풀크가 승하한 것이다. 풀크왕은 왕비인 멜리장드와 함께 훗날 살라딘과 사자심왕 리처드의 격전지가 되는 아크레 (Acre) 에서 휴가를 즐기던 차에 어이없게도 낙마사고로 인해 큰 부상을 입고 1143년 11월 13일 승하했다.
(낙마사고로 사망한 풀크 국왕. 헨리 2세의 조부이자 한때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의 최후 치곤 너무 어이 없는 마지막이었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풀크 국왕은 성묘 교회 (Church of the Holy Sepulchure)에 안장되었다. 이제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자리는 이제 풀크 왕과 멜리장드 왕비 사이의 어린 아들인 보두앵 3세 (Baldwin III of Jerusalem 1130 - 1162) 와 멜리장드에게 돌아갔다. 새롭게 예루살렘 왕국의 5대 국왕 (보두앵 1세 부터 하면 4대) 이 된 보두앵 3세는 13세에 불과했으므로 주변 무슬림 국가의 공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아무리 인기없는 국왕이라도 이렇게 건재한 것과 아닌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1143년 당시 십자군 국가에 있어 가장 좋지 않은 일은 바로 안티오크의 레몽과 에데사 백작 조슬랭 2세간의 알력과 다툼이었다. 사실 안티오크와 에데사 의 주인이 여러차례 바뀌는 동안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한두번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젠 과거와는 달리 장기라는 강력한 무슬림 군주가 그들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었다. 만약 레몽과 조슬랭 2세 모두 좀더 현명했더라면 일단은 힘을 합쳐 서로를 방어했을 테지만 불행히 이러한 현명함은 두명 모두에게 모자란 자질이었다.
1144년 에데사 함락 당시 에데사 백작 조슬랭 2세는 새롭게 부상하는 이슬람 세력인 장기드 왕조에 대항하기 위해 역시 투르크계 이슬람 왕조인 오르토키드 왕조 (Artukid, Ortoqid or Ortokid, 당시 동부 아나톨리아 및 시리아, 이라크 북부를 근거지로 했다) 의 지도자인 카라 아슬란 (Kara Aslan) 과 연합했다.
조슬랭 2세는 알레포를 공략할 목적으로 카라 아슬란과 동맹하여 에데사의 주력 부대를 이끌고 출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풀크왕의 죽음이후 완전히 사분 오열된 십자군 국가를 노리던 장기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나 다름 없었다. 장기는 이 기회를 저버리지 않고 신속히 군대를 출전 시켜 1144년 11월 28일에 에데사를 포위했다.
갑작스레 나타난 무슬림의 대군을 본 에데사 성의 주민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슬랭 2세가 대부분의 군대를 이끌고 나간 상태였으므로 에데사는 이러한 대군의 공격을 막아낼 가능성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오랜 세월 기독교인들의 도시였던 에데사는 무슬림들에게 갑자기 항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에데사의 대주교인 위그 2세 (Hugh II) 를 비롯하여 여러 주교들은 자신들의 힘으로라도 에데사를 방어하기 위해 분주히 노력했다. 그러나 그를 비롯한 주교들은 대개 군사 경험이 없는 이들이라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이들의 유일한 희망한 조슬랭 2세가 구원군을 이끌고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투베르베실에 있던 백작은 자신이 이끄는 군대의 규모로는 장기가 이끌고 나타난 대규모 군대를 물리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유일한 희망은 다른 십자군 국가에 원군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일단 멜리장드 왕비는 원군을 보내주기로 약속했지만 거리가 다소 멀었기 때문에 제때 도착하기 어려워 보였다.
사실 에데사 구원의 유일한 희망은 바로 옆에 있는 안티오크 공국의 군대 뿐인 듯 했다. 그러나 푸아티에의 레몽은 조슬랭 2세의 구원 요청을 묵살해 버렸다. 이것은 의심할 필요도 없이 레몽이 저지른 가장 최악의 실수였다. 좋고 싫고의 여부를 떠나 만약 에데사 백국이 붕괴되면 이제 안티오크 공국 바로 옆까지 장기드 왕조의 세력권에 들게 될 것이고 이것은 누구보다 레몽과 안티오크 공국에 가장 위험한 상황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실 레몽이 구원군을 보낼 수 없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1년전 요한네스 2세가 승하하고 마누엘 1세가 권력을 장악하던 혼란한 시점은 레몽이 보기엔 영토확장을 위한 좋은 기회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그는 최근 제국으로 다시 편입된 아르메니아 실리시아를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솔직히 군대를 바로 투입해서 에데사를 구원하러 갈 수 없는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레몽이 얼마나 근시안적인 생각을 가진 인물인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솔직히 선대의 풀크 국왕이 대체 어떤 근거로 경험 없는 젊은이인 푸아티에의 레몽이 안티오크 처럼 십자군 국가에 중요한 요충지에 적합한 지배자라고 생각했는지는 알길이 없다. 분명한 것은 안티오크의 중요성을 감안했을 때 레몽이 그 통치자가 된 것은 풀크 국왕이 저지른 중요한 실책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아무튼 에데사 성안에 남은 주민들과 이들을 지휘한 위그 대주교 및 바실 주교 (Basil, Bishop) 등 성직자들은 상당히 열심히 싸우기는 했다. 왜냐하면 거의 4주간 장기의 대군을 방어해 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성전 경험이 전무한 이들이 장기간의 공성전을 견디기는 무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실 에데사 자체는 견고한 요새이지만 에데사의 많은 망루들이 전혀 무장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성전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에 비해 장기가 이끄는 군대는 수많은 공성전으로 단련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성벽 주위에 공성기 (Siege Engine) 배치한 다음 유황과 원유 및 나무들을 이용한 일종의 공성 지뢰를 이용해서 성벽을 파괴시키기 위해 불을 붙였다. 그러나 방어하는 에데사의 시민들은 이 공성 지뢰를 파괴하는 지식이 전혀 없었다. 한달이 채 안되는 포위전 끝에 마침내 성벽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에데사 성벽이 무너져내린 1144년 12월 24일은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 이브 였지만 에데사 성안의 크리스찬들에게는 매우 끔찍한 날이었다. 이날은 안티오크와 마라트 알 누만, 그리고 예루살렘과 기타 여러 도시에서 십자군이 원주민들에게 가한 것 같은 끔찍한 학살이 무슬림 군대에 의해 자행되었다. 본래 장기는 종교에 관계없이 점령한 도시에 대해서 잔인하게 대하는 것으로 유명해지만 어쨌든 이 일이 십자군과 기독교 사회에 준 여파는 엄청났다.
다시 이틀 후인 1144년 12월 26일에는 마지막으로 저항하던 에데사의 성채 (Citadel) 가 함락되면서 에데사 포위는 장기의 승리로 끝났다. 장기는 부하중 한 사람을 에데사의 통치자로 임명했으며 살아남은 바실 주교가 어떤 쪽이든 지배자에 충성하겠다고 이야기 했기 때문에 그를 에데사의 기독교 인들의 수장으로 임명하고 1145년 1월 다시 군대를 이동시켰다.
한편 조슬랭 2세는 뒤늦게 도착한 예루살렘 왕국의 군대와 합류했다. 그는 에데사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조슬랭 2세는 투베르베실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한동안 에데사 백령의 나머지 부분을 통치했지만 그의 영지는 차츰 줄어들게 된다.
1145년에 장기는 자신의 성과를 더 확대하기 위해 십자군 국가와 전쟁을 지속할 여유가 없었다. 그의 본거지 중 하나인 모술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퇴각했지만 아무튼 에데사를 함락시켰기 때문에 이슬람 세계에 이를 크게 선전했다. 장기는 신념의 수호자나 혹은 승리의 왕 (al-Malik al-Mansur) 이라는 칭호를 통해 자신이 이교도와의 성전에서 거둔 승리를 크게 알렸다. 그리고 이러한 명분이야 말로 장기가 승리를 지속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장기는 나머지 십자군 국가들과의 싸움을 지속할 수 없었다. 그 다음해에 그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31. 장기의 최후와 누레딘의 등장
에데사 함락 이후 장기는 다시 다마스쿠스의 우나르를 공격해서 시리아 통일을 마무리 짓기 희망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우나르는 성공적으로 다마스쿠스를 방어했다. 다마스쿠스 점령에 실패한 장기는 다른 무슬림 영토를 넘봤다.
1146년에 장기는 칼라트 자바르 (Qalat Jabar) 란 도시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사에서 술에 취해 잠든 - 비록 그가 독실한 이슬람 신자이긴 하지만 코란의 모든 가르침에 충실하진 못했던 것 같다 - 장기를 프랑크인 (당시 무슬림들은 서유럽인들을 이렇게 불렀다) 출신 환관인 야란카시 (Yarankash) 가 암살한 것이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이 환관이 장기를 암살한 이유는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사소한 실수였다고 한다. 장기가 술에 취해 자고 있을 때 노예 몇명이 막사 안에 들어와 남은 술을 먹었고 이를 본 장기가 이들을 꾸짓은 다음 다시 자버리자 누구보다도 자신의 주인의 잔인성을 잘 아는 이들이 보복을 두려워해서 주인을 배신하고 살해했다는 것이다.
정확한 이유야 어찌되었던 장기의 뜻하지 않던 죽음은 당시 투르크 족들의 문제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강력한 지도자가 사라지자 그들은 단숨에 오합지졸로 변하여 값나가는 물건을 훔치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지리 멸렬함을 보였던 것이다. 본래 유목 민족인 투르크 족은 강력한 지도자를 잘 따르긴 해도 중앙 집권제나 하나의 국가에 지속적으로 충성하는 데는 서툴렀다.
그런데 당시 장기의 막사에서 분노를 억누르면서 그의 손에서 지배권을 상징하는 반지를 빼든 이가 있으니 그는 장기의 차남인 누레딘 이었다. (참고로 풀네임은 al-Malik al-Adil Nur ad-Din Abu al-Qasim Mahmud Ibn 'Imad ad-Din Zangi 인데 일반적으로는 Nur ad-Din 이라고 불린다. 누르 앗딘 이라고 불러야 맞겠지만 이후에 등장할 살라딘과의 명칭상의 통일을 위해 여기서는 그냥 누레딘 라고 통일하겠다.)
만약 장기가 죽고 나서 그의 영토가 한명에게 상속되었다면 이는 십자군 국가들에게 더 큰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 당시의 투르크족 왕조들이 그러하듯이 그의 영토는 아들들에게 분할 되었다. 일단 모술은 장남인 사이프 앗 딘 가지 1세 (Saif ad-Din Ghazi I)에게 분할 되었다. 그리고 차남인 누레딘은 알레포를 상속받았다.
위치상 알레포가 십자군 국가에 가까웠으므로 누레딘은 아버지 장기의 뒤를 이어 성전을 지속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이제 다음 부터는 2차 십자군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갈 차례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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