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십자군 전체를 1차, 2차, 3차... 하는 식으로 나누는 것은 정확하지 않을 수 도 있다. 주요 대규모 십자군 사이에는 소규모의 십자군들이 존재했으며 대규모 십자군 중에서도 십자군에 포함시켜 설명하는게 적절치 않는 경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상의 일련의 사건들이 연속해서 일어나더라도 어느 정도는 나누어서 설명하는게 편하기 때문에 일단 역사상의 2차 십자군이라고 불리는 사건을 중심으로 1145 년 부터 1149 년 사이의 십자군 전쟁사를 설명할 예정이다.
2차 십자군은 에데사 함락 이후 위기를 느낀 예루살렘 왕국의 요청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단 2차 십자군에 이야기 하기 전 2차 십자군 당시의 서유럽의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2차 십자군에 주역인 교황 및 독일 황제, 그리고 프랑스의 루이 7세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 부터 2차 십자군에 대한 설명을 시작해볼 생각이다.
1. 2차 십자군 직전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의 상황
아마 필자의 허접한 십자군 전쟁사 연재를 이전에 읽으셨던 분이라면 1118년 까지 교황은 파스칼 2세 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사실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를 읽고난 후 하기 쉬운 오해 중 하나가 '카노사의 굴욕' 이후 교황의 권력이 강력해져 신성로마 제국 황제 보다 교황이 권력상 우위에 있을 것이란 오해다.
십자군의 아버지 우르바노 2세의 후임인 교황 파스칼 2세의 재위 기간 (1099 - 1118) 을 보면 이것은 다소간의 오해라는 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파스칼 2세는 재위 기간 중 무려 4명이 대립 교황에 시달렸을 뿐 아니라 누구보다도 황제 하인리이 5세에게 시달림을 당했다.
앞서 잠깐 설명했듯이 하인리히 5세는 서임권을 양보할 것 처럼 파스칼 2세를 속이고 교황의 도움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킨 다음 옥좌에 앉자 이탈리아 원정한 후, 결국 파스칼 2세를 포로로 잡고 황제의 관을 썼다. 1118년 파스칼 2세의 후임으로 등장한 젤라시오 2세 (Gelasius II 재위 1118 -1119) 는 짧은 재위 기간 중에도 황제의 공격을 받았으며 결국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 (좌측) 과 아들인 하인리히 5세 (우측) 워크래프트에 나오는 아서스 못지 않게 불효 막심한 하인리히 5세는 자신에게 독일 왕관 자리를 물리준 아버지를 배신하고 강제로 퇴위 시켰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expired)
그러나 이들의 후임으로 즉위한 갈리스토 2세 (Gallistus II 재위 1119 - 1124 ) 는 선임자들 보다 의지가 굳건한 인물이었다. 그는 황제가 세운 대립 교황 그레고리오 8세의 도전을 물리쳤으며 황제의 서임권 주장을 이단이라고 선언함은 물론 하인리히 5세에게 파문장을 날리기까지 했다.
한동안 갈리스토 2세와 하인리히 5세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되었으나 결국 1122년의 역사적인 보름스 협약을 통해 황제와 교황은 일단 서임권 문제에서 타협을 이루어냈다. 이는 성직자의 임명권인 서임권의 종교적인 측면은 교황에게 세속적인 측면은 황제에게 부여한다는 내용이었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주교와 대수도원장 선출권은 성직자에게 있지만 후보가 다수이면 황제에게 선택권을 주고, 선출된 성직자는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황제의 봉신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일단 타협적인 내용이긴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성직자 선출권을 교황청에 양보한 것이기 때문에 이는 교황권의 승리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로써 교황파와 황제파의 대립이 끝났다기 보다는 새로운 측면으로 돌입했다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더구나 갈리스토 2세와 하인리히 5세 사후 교황청은 물론 신성로마 제국 자체까지 내분에 휩싸인다.
1130 년 즉위한 교황 인노첸시오 2세 (Innocent II 1130 - 1143) 는 황제가 아니라 교황청 내부의 내분으로 인해 즉위한 대립 교황 아나클레토 2세의 도전을 받았다. 문제는 아나클레토 2세파가 다수파라는 것이었다. 할수 없이 이노첸시오 2세는 로마를 탈출하여 프랑스로 도망쳤다. 여기서 이노첸시오 2세는 성직자들을 설득해 재기할 수 있었다. (만약 재기 못했으면 그가 대립 교황이 됐으리라)
한편 1125년 잘리에르 왕조 (Salier dynasty) 의 마지막 황제 하인리히 5세가 후계자 없이 승하하자 독일 제국 역시 내분에 휩싸이게 된다. 작센 공작인 로타르는 본래 하인리히 5세가 아버지에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도와 그 자리에 올랐던 인물로 하인리히 5세가 사망할 당시 브라운슈바이크 가문과의 결혼 및 아버지로 부터 물려 받은 막대한 영지들로 인해 가장 강력한 제후가 된 상태였다.
따라서 1125년 로타르는 하인리히 5세의 후계자임을 자청하여 로타르 3세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로타르 3세는 즉시 반대파의 반발을 받게 된다. 특히 선제 하인리히 4세의 딸 아그네스과 슈바벤 공작 프리히드리 2세사이의 아들인 콘라트 3세 (Konrad III 1092 - 1152) 는 형인 프리히드리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를 대립 황제로 선출했다.
사정이 이렇자 이 시대에는 교황 대 대립 교황, 황제 대 대립 황제가 난립하는 상황이 되었다. 당시 교황 이노첸시오 2세는 로타르 3세를 지지하고 황제의 관을 씌워주었는데, 결국 이 시기에는 로타르 3세가 우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타르 3세가 1137년 죽자 상황이 변했다. 다음해인 1138년에 콘라트 3세는 그렇게 원하던 로마인들의 왕 (King of the Romans : 한마디로 오래 전에 없어진 로마 제국의 황제란 뜻이었는데 정작 로마제국은 '왕' 이란 명칭을 끝내 사용하지 않았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 자리는 그냥 독일 왕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독일왕에 오른 콘라트 3세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참고로 엄밀히 말하면 처음에 로타르 3세와 콘라트 3세는 독일왕으로 번역되는 로마인들의 왕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신성 로마제국 황제는 교황이 왕관을 씌워 주어야 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교황과 황제의 대립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내전은 끝날 줄을 몰랐다. 이번에는 로타르 3세의 사위이자 후계자인 벨프가의 하인리히 거만공 (Heinrich the proud) 이 다시 바이에른과 작센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5년간의 내전은 하인리히 거만공이 죽고도 그의 아들인 하인리히 사자공 (작센 및 바이에른 공작) 에 의해 지속되었으며 1142년에 가서야 마침내 당사자간이 화해로 종식될 수 있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콘라트 3세는 새로운 독일 왕조인 호엔슈타우펜 왕조 (House of Hohenstaufen) 의 태조가 된 셈이었다. 하지만 그 지위는 완전이 안정되진 못했고, 잠재적 반란 세력 벨프 가는 건재했다. 여기에 콘라트 3세 자신은 죽을 때까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받지 못했다. 다소 주제에서 벗어난듯 해도 이렇게 콘라트 3세를 자세히 설명하는 이유는 그가 2차 십자군의 한축을 이룬 군주이기 때문이다. 콘라드 3세가 십자군 원정에 참전한 것은 이런 불안한 내부 상황을 완전히 정리 못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십자군 원정이 부담될 법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상황은 교황청 보다는 좋았다. 1138년 콘라트 3세가 반란에 직면할 당시 대립교황 아나클레토 2세가 죽자 다시 그의 지지자들은 새 대립교황 빅토리오 4세를 옹립했다. 그러나 다행히 그는 2달만에 죽었고 이로써 이노첸시오 2세는 다시 로마로 금위환향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시칠리아 백작 로게르 2세 (Roger II, 루지에로 2세, 로제르 2세 / 로베르 기스카르의 동생 로게르 1세의 아들로 보에몽 1세의 사촌이지만 나이는 보에몽 보다 매우 젊은 편이다. 이전 설명한 보두앵 1세의 후처인 아델라이데 왕비의 아들로 앞서 몇번 잠시 언급했음) 이었다.
(교황 이노첸시오 2세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로게르 2세는 본래 대립 교황 아나클레토 2세를 지지한 댓가로 왕의 칭호를 얻었다. 로게르 2세는 남부 이탈리아를 사실상 장악한 상태였기 때문에 사실 왕으로 선포하기에 그렇게 무리는 없어보였다. 그러나 이후 이노첸시오 2세의 지지를 받은 로타르 3세와 비잔티움 제국등의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시칠리아 외의 영토를 거의 상실할 지경에 이른다.
그런 로게르 2세에게 독일 제국의 내분은 절호의 기회였다. 1138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로게르 2세는 다시 이탈리아 남부를 장악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도 이노첸시오 2세는 본래 적대 관계인 로게르 2세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포로로 잡힌 것이었다. 교황은 로게르 2세에게 시칠리아 왕, 아풀리아의 백작이자 카푸아의 왕자(rex Siciliae ducatus Apuliae et principatus Capuae) 라는 복잡한 칭호를 수여하고 남부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인정함으로써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노첸시오 2세의 남은 재위 기간 중에도 로마는 혼란스러웠으며 내분은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말에 탄 로게르 2세를 그린 12세기 삽화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1145년 새롭게 교황으로 선출된 에우제니오 3세 (Eugene III 재위 1145 - 1153) 는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즉위했다. 남쪽에는 향후 500년간 이어질 시칠리아 왕국의 시조인 로게르 2세가 호시탐탐 교황청을 노리고 있었다. 사실 로게르 2세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는 아니었지만 대신 로마에서 제일 가까이 있는 강력한 세력이라는 강점이 있었다. 여기에 1145년에는 각지의 군주들이 모두 자신들의 사정으로 바뻤기 때문에 로게르 2세가 교황청에 미치는 영향력이 더 커졌다.
에우제니오 3세가 십자군 요청을 받은 것은 이런 미묘한 상황에서 불안하게 즉위한 시점이었다. 즉위전 선대의 두 교황 중 한명은 고령으로 즉위 6개월만에 세상을 뜨고 다른 한명은 로마의 적대적 귀족들로 부터 군대를 이끌고 수도를 탈환하려다가 부상을 입고 전사했다.
(교황 에우제니오 3세 This imag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in the United States and those countries with a copyright term of no more than the life of the author plus100 years )
에우제니오 3세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그 역시 대부분을 로마 교황청이 아니라 망명지에서 보내야 했고, 여기에 로마 공화주의 운동 및 극단적 교회 쇄신 주의자인 아르날도의 공격에 직면하여 곤경을 겪었다. 이런 와중이다 보니 에우제니오 3세 입장에서 십자군 원정 요청은 받아들기도 어렵고 받아들이지 않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에우제니오 3세의 입장은 정말 미묘했다. 이 부분은 나중에 2차 십자군 모집 부분에서 다시 설명하겠다.
지금까지의 복잡한 상황을 정리한다면 중세 유럽의 두 축인 신성 로마 제국 (독일) 과 교황청은 서로 모두 어려운 상황에서 십자군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각각 세속 및 종교적인 수장임을 자처하는 상황에서 긴급한 십자군 요청을 거절한다면 이들의 입장도 곤란해질 수 밖에 없다. 결국 십자군 원정에 참가는 해야 겠는데 각자의 사정과 계산이 서로 다른 미묘한 입장에서 2차 십자군 원정은 일어났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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