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2차 도릴라이온 전투 (Second Battle of Dorylaeum 1147년 10월 25일)
2차 십자군의 본대인 독일군과 프랑스 군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만난서 합류한다는 계획에만 동의했을 뿐 지휘권을 통일할 계획은 전혀 없었다. 사실 이 둘이 합지고 여기에 비잔티움 제국만 힘을 합친다면 그 숫자는 당시 롬 술탄국의 술탄인 마수드 1세 (Masud I) 가 대적하기 어려울 정도의 대군이었을 것이다. 만약 남이탈리아의 로게르 2세 때문에 마누엘 1세가 십자군에 합류할 수 없다고 해도 적어도 루이 7세와 콘라트 3세가 힘을 합치기만 해도 마수드 1세는 이들을 쉽게 공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알라의 가호가 있었던 것인지 이 세명의 군주들은 서로를 불신했다. 사실 마누엘 1세야 요청한 적도 없는 십자군이 나타나서 그랬다고 치더라도 적어도 콘라트 3세와 루이 7세는 서로 협력했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군주는 서로 협력할 생각이 없었다. 이는 마수드 1세의 승리를 보장하는 것과도 같았다.
사실 적대적인 무슬림 세력권인 아나톨리아 중부에서 롬 술탄국은 절대적인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건조한 산악지대인 이 지역에서 투르크 전사들은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에 유리했다. 특히 보급면에서 롬 술탄국이 가진 잇점은 분명했다. 십자군의 대군은 식량과 식수를 구하기 쉽지 않을 것이고 1차 십자군과 1101년의 마이너 십자군이 고생했던 것 처럼 좋지 않은 보급으로 인해 큰 곤란에 처할 가능성이 높았다. 사실 십자군이 가진 유일한 이점은 바로 숫적인 우세였는데 2차 십자군은 이 유리함을 과감히 포기하고 독일군과 프랑스 군이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이들의 이런 잘못된 판단은 마누엘 1세의 적절한 충고를 무시한 데서 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마누엘 1세는 비록 이들 십자군을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심 무슬림 세력과 싸워 그들의 힘을 빼주기를 바랬는지 적어도 적절한 충고를 아끼지는 않았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충고는 십자군이 성지까지 가는데 있어 현재 비잔티움 제국이 점령한 터키 해안 지대를 따라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앞서 1차 십자군과 마이너 십자군의 사례 에서 보듯이 이는 매우 적절한 충고였다. 돌아가는 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식량과 식수를 충분히 구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투르크 족의 특기인 기습에서도 안전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 뭔가 패신(敗信)에 홀리기라도 했는지 십자군은 이와 같은 매우 타당하고 지당한 충고마저 거절했다.
이 시기의 콘라트 3세를 보면 앞서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잘못된 판단으로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 직전 상황까지 몰고간 로마누스 4세 디오게네스 (Romanus IV Diogenes) 의 전철을 밟는 듯 했다. 로마누스 4세 처럼 콘라트 3세 역시 병력을 다시 둘로 나누어 본대는 자신이 이끌고 나머지는 자신의 이복 형제인 오토 주교 (Bishop Otto of Freising) 에게 주어 다른 루트로 가게 했다. 이는 병력의 우세라는 결정적 잇점을 다시 한번 포기하는 것이었다.
콘라트 3세가 이끄는 독일군 본대는 프랑스군 보다 먼저 성지를 향해 아나톨리아 내륙 지대로 진군했다. 그들은 1차 십자군 시절 비잔티움이 수복한 니케아를 거쳐 50년전 보에몽이 이끄는 십자군이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의 기습을 막아낸 역사적인 장소인 도릴라이온 근처까지 진군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진군하는데도 이미 심각한 보급상의 문제가 불거졌다.
(1차 십자군 시기의 지도이다. 도릴라이온의 위치를 알수있다.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MapMaster )
그것은 본래 이 지역이 식수를 구하기 어려운 지역이라는 점에서 기인한 것으로 많은 병사가 물부족으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무질서하게 도릴라이온 근처의 개울에서 식수를 구하고 있을 때 근처에 매복하면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마수드 1세는 알라께서 저 불경한 자들을 응징할 기회를 주신 것으로 믿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곧 투르크 기마 병사들의 기습이 시작되었다. 2차 도릴라이온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1147년 10월 25일) 사실 이 전투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지만 투르크 족은 그들 특유의 전법을 또다시 사용했고 이는 역시 효과를 발휘했다고 한다. 그것은 의도적인 후퇴로 적을 꾀어내는 전술이었다.
먼저 투르크 기마 병사들이 적에게 공격을 가한다음 후퇴하자 곧 독일군 기병들이 이를 뒤쫓았다. 그러나 이는 함정이었다. 투르크 군이 노린 것은 십자군의 기병대를 보병들과 분리시켜 각개 격파하는 것이었다. 십자군은 이 함정에 보기 좋게 걸려들어 기병대는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보병 역시 사방에서 치고 빠지는 투르크 기마 병사들 화살 세례를 받으며 차츰 괴멸 직전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 때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바바로사) 는 혈로를 뚫어 간신히 콘라트 3세를 구해낼 수 있었다. 비록 콘라트 3세는 부상을 입긴 해지만 적에게 사로잡히지 않고 살아서 후퇴했다. 그러나 대개 독일군은 그렇게 운이 좋지 못해서 거의 90%가 괴멸되었다고 한다.
마수드 1세는 이 여세를 몰아서 오토가 이끄는 독일군의 분견대마져 격파해 버리니 독일 십자군은 그 강력한 위용이 어이가 없을 정도로 치욕적인 참패를 당한 셈이었다. 이는 십자군 역사는 물론 독일 역사에 남을 정도의 어이 없는 참패였다.
7.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이렇게 되자 나머지 프랑스 군대와 합류해서 성지로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던 루이 7세는 이제 정말 마누엘 1세의 충고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마누엘 1세는 로게르 2세와의 전쟁 때문에 십자군에 병력을 파견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하긴 했지만 해안선 루트를 가라고한 그 충고만큼은 옳은 이야기 였다.
니케아에서 콘라트 3세와 잔존 병력을 흡수한 루이 7세는 해안 지역을 따라 돌아가는 루트를 택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의 터키 서부 해안에 있는 도시인 에페수스 (Ephesus) 에 1147년 12월경 도달했을 때 십자군은 근처에 자신들을 요격하기 위해 투르크 군대가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이 시기 마누엘 1세는 십자군에게 투르크 군을 조심하라고 충고는 해주었지만 병력은 보낼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물론 이는 로게르 2세가 비잔티움의 주요 도시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 시점에서 콘라트 3세가 건강이 악화되었으므로 루이 7세는 콘라트 3세를 콘스탄티노플로 호송하고 나머지 병력을 추스려 계속 전진했다.
루이 7세에게는 다행히도 투르크 군의 매복 정도는 크지 않아서 에페수스 근처의 전투에서는 프랑스 군이 승리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계속 전진해서 지금 터키 서부 도시인 라오디세아 (Laodicea, 지금은 Denizli) 에 도달했을 때는 상황이 달라졌다. 여기서 거센 투르크 군의 공격을 받고 손실을 입은 프랑스 군은 아달리아 (Adalia) 에서 해로로 안티오크로 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폭풍으로 말미암아 배가 늦게 도착했을 뿐 아니라 충분한 숫자의 배도 도착하지도 못해서 결국 모든 병력이 아니라 일부 병력만 배를 타고 안티오크로 도달하고 나머지는 다시 육로로 걸어서 진군해야 했다.
(2차 십자군의 진로. 프랑스군은 결국 마지막에 해로와 육로 양 방향으로 안티오크에 도달했다. CCL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ExploreTheMed)
결국 루이 7세가 마침내 안티오크에 도달한 것은 바로 1148년 3월 19일 이었다. 여기서 프랑스 십자군과 루이 7세는 왕비 엘레오노르의 숙부인 안티오크 공작 푸아티에의 레몽의 환대를 받을 수 있었다. 우여 곡절 끝에 루이 7세는 그토록 원했던 우트르메르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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