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사이자르 포위전
1138년 3월이 되자 다시 병력을 재정비한 요한네스 2세는 그리스인, 바랑인, 페니체그족, 투르크 족등으로 구성된 다국적 군대를 이끌고 친히 아타베그 장기를 공격하려 나섰다. 그 명분은 안티오크 공작인 푸에티르의 레몽에게 새로운 영지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일단 현지에 도착한 요한네스 2세는 새로운 동맹군을 끌여들였다. 그들은 레몽과 당시 에데사 백작인 조슬랭 2세 (조슬랭 1세의 아들), 그리고 성전 기사단이었다. 이들이 본래 목표로 삼았던 것은 시리아 북부의 중요 도시 가운데 하나이자 장기의 영토의 요충지인 알레포였다. 사실 이 도시는 오랬동안 십자군 국가들이 손에 넣고자 했던 곳이었으므로 이는 많은 이들이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황제는 알레포에 이 소식이 먼저 도착해서 무슬림 수비대가 미리 대비를 하지 못하도록 안티오크의 상인들과 여행자들을 미리 체포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전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찰 결과 알레포는 단단히 잘 수비되고 있었다. 당연히 장기 역시 바보가 아닌 이상 요한네스 2세의 다음 목표가 자신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자신의 주요 도시들을 철통같이 방어하고 있었다.
황제는 적에게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전쟁을 속개할 목적으로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사이자르 (Shaizar) 를 새로운 목표로 삼았다. 이 도시는 오론테스 강의 중류가 지나는 전략적 요충지 이지만 알레포에 비해 작은 소도시에 불과해 방어가 튼튼하지 않으리라 기대한 것이다.
(현재는 버려진 사이자르의 요새. 사이자르는 십자군 전쟁당시 양측이 몇차례 맞붙은 요충지였다 This file has been released into the public domain by the copyright holder, its copyright has expired, or it is ineligible for copyright. This applies worldwide.)
1138년 4월 28일에 비잔티움 - 십자군 연합군은 사이자르를 포위했다. 그리고 참호를 파고 대형 투석기를 설치하고 공성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적극적이었던 것은 황제 뿐이었다. 사실 십자군들이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이 전투에서 황제가 승리하게 되면 결국 시리아 중부까지 황제의 영향력 아래 놓일 것이므로 결과적으로 이 지역에서 비잔티움 황제의 힘이 커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다음엔 다른 십자군 국가들도 안티오크와 비슷한 운명에 처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요한네스 2세는 십자군들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이 본래 제국의 영토임을 주장할 가능성이 농후해 보였다. 황제가 제국의 옛 영토들을 수복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충분히 타당한 추론이었다.
연대기 작가 티레의 윌리엄 (기욤) 에 의하면 레몽과 조슬랭 2세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진지안에서 주사위 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레몽과 조슬랭 2세에게는 당장에 장기보다 요한네스 2세가 더 위험해 보였을 것이다.
과연 이들의 노력 (?) 은 헛되지 않았다. 금방 함락될 지 알았던 사이자르가 끈질기게 잘 버티면서 장기에게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귀한 시간을 이용하여 장기는 여러 무슬림 지배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참고로 사이자르는 장기에 의해 직접 통치되지는 않았지만 장기의 종주권은 인정하고 있었다)
극도의 분열상을 보이던 무슬림 세계의 통일된 도움을 얻기 위해 장기는 놀라운 수완을 발휘했다. 장기는 새로운 술탄인 마수드 에게 급히 전령을 보네 사태의 심각성을 설명하고 원군을 청했다. 선대부터 술탄파인 장기를 지원하기 위해 마수드는 원군을 보내주엇다. 여기에 장기는 다니슈멘드 왕조에도 전령을 보내 아나톨리아 에서 양동작전을 펼쳐주기를 부탁했다. 또 근방의 에미르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다. 마침내 1138년 5월이 되자 장기는 상당한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사이자르를 향해 진격했다.
당시 요한네스 2세는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사이자르가 함락되지도 않는 상태에서 잘못하면 사이자르의 성벽과 장기의 구원군 사이에 갖힐 형편이었다. 여기에 이제 레몽과 조슬랭 2세의 의도를 더욱 믿을 수 없게된 황제는 더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여기서 황제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 중 하나는 후일을 도모하고 일단은 병력을 철수시키는 일이었을 것이다. 한편 비잔티움 제국의 거듭된 공격을 막아내기 힘들어하던 사이자르의 에미르 역시 새로운 제안을 했다. 그것은 사이자르가 황제를 상위 군주로 섬기면서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잃어버렸던 것으로 알려진 루비로 장식된 십자가를 비롯한 보물들을 바치기로 한 것이다.
그 정도면 어느 정도 철수할 명분은 된다고 생각했는지 요한네스 2세는 5월 21일 병력을 사이자르에서 철수 시켰다. 그러나 이것이 황제가 원하던 결말이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분노한 요한네스 2세는 안티오크 공작과 에데사 백작을 걸어서 안티오크로 입성하도록 지시했다.
일단 안티오크에 도달한 황제는 자신의 당초 계획을 밀어부칠 계획이었다. 그것은 어찌되었던 간에 안티오크를 다시 제국의 영토로 편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안티오크를 포기하라는 말을 듣고 레몽이 순순히 지시에 따를 리는 만무했다. 더구나 원래 계획과는 달리 안티오크 대신 주어질 영토도 없는 상태이지 않은가?
결국 레몽과 조슬랭 2세는 일시적으로 힘을 합쳤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폭동을 조정한면서 또 한편으로는 황제에게 자신들이 도시를 남에게 넘긴 매국노로 폭도들에게 죽임을 당할 처지라고 호소했다. 물론 이 자작극을 모를 황제는 아니었지만 당시 황제의 주력 부대가 오론테스강에 있었기 때문에 일단 레몽과 조슬랭 2세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고 물러나기로 결심했다.
이로써 요한네스 2세의 1138년 원정은 사실상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사실 요한네스 2세가 항상 승리만 거두었기 때문에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를 수복했던 것은 아니었다. 무리하게 전 병력을 잃기 보다는 끈기를 갖고 여러차례 시도한 결과 주변의 여러 적대적인 세력들의 침공을 방어하고 제국의 영토를 일부라도 수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아버지 알렉시우스 1세의 치세에서 그 힘을 조금 회복했다고 해도 이미 제국 방위의 근간인 테마 제도는 붕괴된 상태였고, 수많은 이민족들로 구성된 용병들에 힘에 의지하고 있는 쇠퇴기의 비잔티움 제국의 군사력으로는 아마 이 정도 공세가 한계였을 것이다. 그래도 요한네스 2세는 제국을 잠시나마 중흥시킨 군주로 칭송받기에는 무리가 없다고 하겠다.
(아들과 함께 그리스도로 부터 관을 받는 요한네스 2세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참고로 1139년에 요한네스 2세는 다시 우트르메르로 돌아올 수 없었다. 다니슈멘드 왕조의 에미르 가지가 죽은 이후 그의 아들인 말리크 모하메드 가지 (Malik Mehmed Gazi) 가 새롭게 부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트레비존드 공작 콘스탄티누스 가브라스가가 반란을 일으켜 다니멘슈드 왕조와 연합했기 때문에 일이 더 복잡해졌다. 황제는 트레비존드 공작의 항복을 받아내기는 했지만 다니슈멘드 왕조의 본거지인 네오카이사레아를 함락시키는데는 실패했다.
결국 이런 저런 일로 인해 황제가 다시 우트르메르에 나타난 것은 1142년이었다. 그러나 결국 이 원정에서 황제는 원하던 것을 얻지 못했다. 대신 사냥에서 부상을 입었다. 이 어이없는 일로 인해 1143년 4월 8일 요한네스 2세 콤네누스는 사망했다. 그러나 황제는 죽기 전에 마누엘에게 황위를 넘기므로써 마지막까지 비잔티움 제국의 중흥을 위해 노력했다.
29. 장기의 부흥
한편 장기는 주변 영토를 착실히 장악하면서 십자군 국가들을 지속적으로 압박했다. 장기의 이러한 노력은 결과적으로 시리아와 북부 이라크 일대를 지배한 장기드 왕조 (Zhengid Dynasty) 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이 장기드 왕조는 나중에 나타나는 아이유브 왕조와 더불어 십자군을 크게 위협하게 된다.
(장기드 왕조의 영토 (빨간색 )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Amonixinator)
1138년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침공을 막아낸 것 말고도 장기가 영토를 확장하는데 있어 한가지 전기가 마련된다. 그해 5월에 당대를 놀라게 만든 결혼이 성사되었는데 이는 오랜세월 장기에 대항해 왔던 다마스쿠스의 주무루드 (Zumurrud) 가 장기와 결혼한 것이다. 주무루드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자신의 아들인 이스마일을 살해한 바로 그 사람이다. 그녀는 지참금으로 홈스를 바쳤다. 아무튼 장기는 이로써 다마스쿠스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다음해 주무르드의 또 다른 아들인 사히브 앗딘 (Sahib ad-Din) 이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장기는 이 일을 계기로 다마시쿠스를 점령하려 했지만 앞서 장기의 다마스쿠스 침공을 막아낸 무인 앗 딘 우나르와 다마스쿠스 주민들의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우나르는 사히브 앗딘의 다른 형제인 자말 앗 딘 (Jamal ad-Din) 을 새로운 에미르로 내세우고 장기에 저항했다.
1140년에는 장기에 부흥에 위협을 느끼던 예루살렘 왕국 국왕 풀크와 다마스쿠스의 우나르 사이에 종교를 뛰어넘는 새로운 동맹이 맺어졌다. 사실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 왕국은 수시로 전쟁을 벌이다가 동맹을 맺는 관계였기 때문에 새로울 것은 없었지만 이들의 동맹은 1137년과 1138년 사이 시리아와 북부 이라크에 강력한 지배자로 떠오른 장기의 위상을 실감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당시 장기는 불경스런 자들 (즉 십자군) 에 대한 지하드 (성전) 의 기치를 내걸고 십자군과 싸웠으므로 곧 무슬림 세계에서 큰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장기의 입장에서도 십자군과 그 십자군에 동맹한 자들 (이를 테면 다마스쿠스) 를 공격하는 것은 자신의 영토도 넓히고 명예도 높일 수 있었으므로 실리와 명분 두가지를 동시에 얻는 일이었다.
사실 명분이란 것은 억지스런 구실에 불과한 것 같아도 전쟁을 일으킬 때는 중요하다. 십자군 원정때도 성지 탈환이란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호응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장기 역시 지하드의 명분을 내걸고 싸우는 이상 무슬림들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
한마디로 장기가 십자군 국가를 점령하려는 것은 단순한 영토 팽창이 아니라 무슬림이라면 마땅히 해야할 성스러운 전쟁인 것이다. 이것의 차이는 엄청나다. 특히 당시처럼 종교가 중요한 요소로 생각되던 시절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당시 다마스쿠스의 행동은 무슬림 세계에서는 매국노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1140년 이전 다마스쿠스의 영토였던 바알베크 (Baalbek) 를 함락시키고 장기가 수비대를 잔인하게 처벌하자 여기에 겁먹은 다마스쿠스의 백성과 우나르는 이런 문제보다 장기가 더 무서웠다. 그래서 장기의 영토였던 배니어스 (Banias) 를 함께 공격해서 이를 예루살렘 왕국에 넘기는 등의 조건으로 동맹을 맺은 것이다.
결국 이 동맹으로 인해 장기의 1140년의 다마스쿠스 포위전은 실패로 끝났다. 이후 몇년간 장기와 다마스쿠스 그리고 예루살렘 왕국간에는 큰 전란 없이 지냈다. 그동안 장기는 다른 주변 무슬림 국가들의 영토를 합병했다. 그리고 마침내 1144년 에데사를 함락시켰다. 결국 이 일은 앞으로 설명할 2차 십자군의 기폭제가 되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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