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1099년 상반기의 상황
1099 년 5월 13일 마침내 십자군은 아르카의 포위를 풀고 후퇴했다. 4개월 이상 지속된 이 공성전에서 십자군은 아무것도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에 막대한 손실만 입고 물러난 셈이었다. 여기에 이 때까지의 인적 손실 및 보에몽, 보두앵, 블루아 백작등이 이탈한 문제 때문에 십자군은 이미 규모가 좀 줄어든 상태였다.
따라서 만약 이 시기 무슬림 세력들이 연대해서 이들을 공격했다면 십자군은 상당한 어려움에 직면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의 가호 (보는 입장에 따라서는 징벌이될 수도 있지만) 가 있었는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당시 무슬림 세력의 상황을 생각할 때 이는 전혀 놀랄 일도 아니었다. 불경스런 자들과 맞서 싸우는 지하드 (Jihad) 는 당시 이슬람 세계의 지배자들에게는 편리할 때 사용하는 구호 이상의 의미는 크게 없었던 것 같다.
당시 투르크 족으로 부터 예루살렘을 차지한 것은 바로 파티마 왕조였다. 물론 투르크 족이 이 성스러운 도시를 차지하기 전에는 주인이 파티마 왕조이거나 혹은 비잔티움 제국등으로 다양한 것도 당시 이 도시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기도 했다.
이야기를 좀 더 앞으로 돌리면 1098년 카르부카의 몰락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은 거의 무주공산 처럼 변했다. 각 도시의 투르크 지배자들은 도데체 누구에게 충성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시아파를 추종하는 파티마 왕조는 수니파 국가 - 즉 셀주크 투르크 - 가 분열된 이 좋은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
사실 한때 비잔티움 제국의 영역이었던 이 도시는 한때나마 파타미 왕조의 지배지였다. 그러나 11세기 말 파티마 왕조는 신흥 셀주크 투르크 제국의 발호에 밀려 팔레스타인 및 시리아 지역에서 완전히 밀려나고 말았다. 이 시기 이 수니파를 추종하는 이단 셀주크 투르크에 대응하기 위해 파티마 왕조는 이교도 비잔티움 제국과 - 이전까지는 적대했지만 - 연합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다 건너 나타난 이교도 (십자군) 덕택에 그런 어렵던 시절은 지나고 이제 좀더 파티마 왕조에 유리한 상황이 도래한 듯 싶었다.
(이 지도는 파티마 왕조의 전성기 시절의 영역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셀주크 투르크에 밀려 시리아 및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완전히 밀려나고 말았다. This image has been released into the public domain by its author, Yenemus. This applies worldwide. )
당시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는 아마드 알 무스탈리 (Aḥmad al-Musta‘lī 9대 파티마 칼리프, 재위 1094 - 1101) 였다. 그는 당시 라이벌인 바그다드의 칼리프처럼 허수아비에 가까웠고, 실권자는 사실 알 아흐달 (al-Malik al-Afdal ibn Badr al-Jamali Shahanshah 1066 - 1121) 이었다. 1095년 알 무스탈리의 형제인 니자르와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종식시킨 알 아흐딜은 이제 밖으로 눈을 돌릴 여유가 생겼다.
1098년 이단 투르크 지배자 카르부카의 몰락을 즐겁게 구경한 알 아흐달은 바로 군사를 일으켜 예루살렘을 공격했다. 예루살렘의 투르크 지배자들은 40일간 버텼지만 결국 승산 없는 싸움을 중단하고 투항하기로 결정했다. 알 아흐달은 이들을 환영하고 투항자들을 받아들였다. 여기까지는 그에게 좋은 일만 일어난 셈이다.
그러나 한 때 잠재적 동맹으로 여겼던 - 앞서 이야기 했지만 안티오크 공방전 당시 파티마 왕조는 십자군과 동맹을 맺으려 했었다 - 십자군은 곧 종잡을 수 없는 자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알 아흐달은 그들이 마라트 알 누만에서 식인 행위를 한 것 보다도 이들이 남하하려 한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당시까지 파티마 왕조는 이들을 비잔티움 제국의 용병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알 아흐달은 이들의 본래 고용주였던 알렉시우스 1세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알렉시우스 1세의 답변은 청천 병력이었다. 황제에 의하면 십자군은 더 이상 자신의 용병도 아니고, 자신의 말도 전혀 듣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본래 황제의 영토인 안티오크를 내주기 거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지역에 새로운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성도 예루살렘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1099년 상반기에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이 지역의 권리를 되찾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르카 공성전이 한창일 때 그는 십자군에 전령을 보내 자신이 대군을 거느리고 지원을 갈 것이니 기다리라는 통지를 했다. 그러나 이미 황제에 대한 신뢰가 바닥에 닿은 십자군은 이를 거부했다. 앞서 인기가 떨어졌던 레몽은 한 때나마 황제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므로써 더 지지도가 떨어졌다.
십자군은 명백히 황제에 대해서 반기를 든 셈이었다. 본래 비잔티움 황제의 요청으로 자신들이 여기에 왔고, 레몽을 제외하곤 모두 충성의 맹세를 했다는 것은 이미 안중에도 없는 셈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보겠지만 사실 십자군이 하는 맹세처럼 믿을 수 없는 것도 없었다.
한편 십자군은 아르카 포위전에서 실패한 이후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남하했다. 해안선을 따라 5월 19일에는 베이루트(Beiruit), 5월 23일 티레 (Tyre)를 거친 십자군은 내륙으로 방향을 틀어 자파 (Jaffa) 를 통과하여 람라흐 (Ramlah)에 6월 3일 도달했다.
이미 그들의 전력이 상당히 감소한 상태였지만 이들의 잔인성과 용맹이 널리 알려진 터라 이들이 목표로 공언한 예루사렘을 제외한 여러 도시들은 이들에게 식량을 제공하고 길을 내주었다. 사실 어떤 지역에서는 이들이 환대를 받기까지 했다고 한다. 물론 이 지역은 당시 토착 기독교도와 유대인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이 환영을 받는게 꼭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현지 주민들이 식량을 순순히 내준것은 역시 식량보단 목숨이 소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099년 6월 6일, 고드프루아, 가스통, 탕크레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향인 베들레헴을 점령했다. 이 유서깊은 도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인 예수 탄생 교회 (Church of the nativity) 가 있다.
잠시 이 유서 깊은 교회를 설명한다면,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지점이라고 알려진 곳에 세워진 교회로써 본래 서기 135년 하이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아도니스 신전이 세워졌으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가 이곳에 아도니스 신전을 부수고 교회를 세우도록 지시해 건설된 교회였다. 333년에 완공된 이 교회는 다시 화재로 불탔으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에 의해 재건되었다.
전승에 의하면 614년 페르시아의 침공 당시 다른 교회는 모두 파괴되었지만 이 예수 탄생 교회는 벽화에 있는 동방 박사의 옷이 페르시아의 선조의 옷과 같다고 하여 파괴를 모면했다고 한다. 그러니 건물 자체가 정말 오래된 유서 깊은 유적인 셈이다.
(예수 탄생 교회 - 이 오래된 교회는 사실 건물은 작은 편이다. CCL 에 따라 동일 조건하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Jgritz )
그런데 이 성스러운 교회에 도착한 십자군 지휘관 탕크레드는 자신의 깃발을 내걸었다. 이 행위는 보통 이곳이 자신의 영역임을 표시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탕크레드가 욕심을 낸건 교회가 아니라 베들레헴 자체였다. 즉 베들레헴의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곧 기각되고 말았지만 영토를 둘러싼 분쟁은 그렇게 쉽게 가라앉을 성격이 아니었다. 십자군이 더 많은 지역을 정복할 수록 이런 분쟁도 더 심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십자군은 1099년 6월 7일 예루살렘의 외각지대에 도달했다. 이 전설적인 도시를 직접 본 십자군들은 저마다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도시는 그렇게 순순히 십자군의 품에 안길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았다. 이 도시의 지배자인 파티마 왕조의 이흐티카르 앗 다울라 ( Iftikhar ad-Daula) 는 이들로 부터 성도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8. 예루살렘 포위전 (Seige of Jerusalem 1099. 6.7 -1099. 7.15)
이흐티카르 앗 다울라는 국가의 자랑 (Pride of the Nation)이라는 뜻이었다. 사실 그가 아스칼론 등의 지배자로도 불린 점으로 봐서 팔레스타인 지방의 파타마 왕조의 통치를 당담하는 지방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수단이나 누비아 인이라고 한는데, 그러면 흑인일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그가 거느린 병력은 많지는 않았지만 주로 아랍인이나 수단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한다.
아무튼 국가의 자랑으로 불린 이 인물은 그렇게 쉽게 이 성스러운 도시를 이교도 (즉 십자군) 에게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이 도시는 이슬람의 성스런 사원인 알 아크사 사원을 비롯한 중요한 사원들과 유적들이 있었다. 예루살렘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모두의 성지로 여겨지고 있었므로 이들 종교를 믿는 이들에게 모두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래서 그는 수개월 전부터 착실히 준비를 했다. 성벽을 보수하는 것은 물론이고, 안티오크의 야기 시안이 그랬던 것 처럼 혹시 십자군에 동조할 지 모르는 기독교 인들을 예루살렘 밖으로 내보냈다. (여기에서도 볼 수 있지만 성지에서 기독교가 탄압받는다는 이야기는 전혀 진실이 아니었다. 많은 기독교 인들이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다만 당시 유대인들은 성안에 그대로 남겼다고 한다) 또 주변의 가축들을 불러들이고 식량도 비축해서 장기전에 대비했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물을 구하기 어려운 건조 지역인 이 일대에서 우물마다 독을 풀어 십자군을 환영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한편 알 아흐달은 십자군과 마지막 교섭을 벌였다. 그는 십자군에게 이미 서로 차지한 지역은 인정하자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대해서는 자신이 자유로운 왕래를 절대 보장하겠다고 이야기 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냥 지금처럼 하자는 이야기 였고, 십자군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알 아흐딜은 이 새로운 이교도들과 함께 수니파들과의 공동 전선을 펼치려고 했지만 혼자만의 꿈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알 아흐달의 행동에서 이해가 잘 안되는 점은 이것만이 아니다. 당시 십자군의 병력은 보병 1만 2천에 기병 1200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처음 출발했을 때의 보병 3만, 기병 5천에 비해서 이미 병력이 크게 감소한 상태였으므로 이집트의 풍부한 물적, 인적 자원을 생각했을 때 이들을 공격해서 괴멸시키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앞으로 보겠지만 알 아흐달과 그의 이슬람 전사들은 전쟁에 대한 의지 자체가 매우 빈약한 이들이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예루살렘 공성전에 중요한 것은 현지를 사수하는 이흐티카르와 그의 병사들이었다. 일단 처음에는 그들에게 결사 항전의 의지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반면 십자군은 이렇게 준비가 잘 된 도시를 공격하기 이전에 그들 부터 다시 내분에 빠졌다. 하지만 이흐티카르가 이집트에 대규모 원군을 요청했고, 알 아흐딜이 다시 대규모 원군을 보낸다는 소식이 이들을 다시 합치게 만들었다.
일단 고드프루아, 플랑드르의 로베르 2세, 노르망디의 로버트 2세는 북쪽 벽에서 부터 남쪽의 다윗의 탑 (Tower of David) 까지 진지를 구축했다. 레몽은 서쪽에 진지를 쳤는데, 시온 산에서 다윗의 탑까지를 커버했다.
(이것이 예루살렘 성벽의 다윗의 탑이다. This image has been (or is hereby) released into the public domain by its author, Maglanist at the wikipedia project. This applies worldwide. )
그들은 6월 13일 첫번째 공격을 시도했으나 일단 이흐티카르는 이를 잘 방어했다. 결국 아무런 성과도 없이 십자군은 후퇴하는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이흐티카르의 사전 작업 덕에 십자군은 다시 물과 식량이 부족해졌다.
그러나 나름대로 신의 가호가 있었는지 자파 항으로 부터 2척의 제노바 갤리선이 그들에게 보급품을 공급했다. 충분한 양은 물론 아니지만 그래도 급한 불은 끌 수 있었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의 성벽을 공격하기 위해 공성 무기를 제조해야할 필요성을 느껴 인근 사마리아 에서 나무를 조달했다.
한편 6월 말에는 이집트에서 대규모 원군이 온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다 십자군은 아직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매우 다급한 마음이 커졌다. 잘못하면 대규모 무슬림 병력과 예루살렘의 성벽 사이에 포위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다시 한번 십자군들의 흩트러진 마음을 다잡을 성직자가 등장했다. 피에르 데시데리우스 (Peter Desiderius) 라는 성직자는 자신이 아데마르 주교의 영혼을 만나 계시를 받았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3일간 금식한 후 맨발로 성벽 주위를 돌면 9일 이내로 성벽이 무너지고 성이 함락되리라는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물론 성경의 예리코 (Jericho) 를 함락한 여호수아 (Joshua) 의 전례를 따른 것이다.
이미 앞서 있었던 2차 안티오크 포위와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다. 그들은 이미 굶주리고 있었지만 3일간 금식한 후 예루살렘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7월 8일) 성직자들이 나팔을 불고 앞장을 섰다. 이를 본 무슬림 병사들은 정말 어리 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행동은 나름 효과가 있었다. 이로써 성벽이 무너지진 않았지만 사기는 다시 올라갔기 때문이다. 이 행진의 마지막엔 은자 피에르 (그는 그때까지도 살아있었다!) 를 비롯한 성직자들의 설교가 있었다.
(1099년의 예루살렘 공성전의 그림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한편 주변에서 보급도 있었다. 제노바 인들은 식량은 물론 병력도 보네왔는데 이 중에는 제노바의 부유한 상인 Guglielmo Embriaco (뭐라고 읽는지?) 가 이끄는 병력도 있었다. 이 제노바인은 함대를 이끌고 나타나 십자군에 병사를 이끌고 참전했으며 공성전을 위해 자신이 타고 온 배를 이용해 목재를 뜯어 공성 타워를 만들었다.
이렇게 공성 타워들이 완성되자 7월 14일 밤을 틈타 남쪽에서 먼저 공격을 가했다. 비록 이 남쪽에서의 공격은 실패했지만 북서쪽에서 동시에 공격을 시작한 고드프루아의 공성탑은 7월 15일 마침내 성벽을 공략하는데 성공했다. 레살데 (Lethalde) 와 엥게베르트 (Engelbert 혹은 질베르) 라는 두 기사가 처음으로 성벽으로 뛰어 들어간 후 고드프루아가 뒤따랐으며, 이후 그의 형제인 외스타슈 3세 (아직까지 있었는지 필자도 이제 알았음 ) 탕크레드 등이 성안으로 난입했다.
이렇게 남들이 성안으로 난입하는 동안 레몽은 다시 난처한 상황에 놓였다. 그의 공성 병기가 도랑에 결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한편 레몽의 공격을 받고 있던 다윗 탑의 이흐티카르도 난처하긴 마찬가지 였다. 이 강력한 요새화된 탑을 사수하는 동안 예루살렘이 적의 손에 사실상 거의 넘어갔다. 이제 패배는 명확했으니 다윗 탑안에 꼼짝없이 갇힌 셈이었다.
이 두 난처한 남자는 나름대로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둘 사이 전령이 오가고 결국 이흐티카르는 레몽에게 항복하는데 동의했다. 다윗 탑을 넘기는 댓가로 레몽은 안전한 퇴각을 보장했다. 결국 이흐티카르는 아스칼론으로 후퇴하는데 성공해서 목숨을 보전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시민들은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19. 예루살렘 학살 (Massacre of Jerusalem)
당시 예루살렘 안에는 무슬림들과 유대인들, 그리고 일부 빠져나가지 않은 토착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이들 모두가 십자군의 잔인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주요 성지로 피신했다. 이곳에서 만큼은 십자군도 무자비한 학살을 하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군은 여기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많은 무슬림들은 그들의 성지인 알 아크사 사원 (Al Aqsa Mosque) 과 바위 신전 (Dome of the Rock) 그리고 성전산 (Temple Mount) 로 피신했다. 알 아크사 사원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이곳까지 밤마다 성스러운 여행을 했다는 곳이었다. 이 사원은 무슬림들에게 아주 중요한 성지였다. 또 성전산 위의 바위 신전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눕혔던 곳이라고 한다. 성전산은 유대교에서 아주 중요한 성지이며 또 무함마드가 승천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유대교, 기독교, 무슬림 모두에게 중요한 성지이다.
(알 아크사 사원 This image has been (or is hereby) released into the public domain by its author,Nikeman916 at the wikipedia project. This applies worldwide.)
(바위 신전 혹은 오마르 모스크 CCL 에 따라 복사, 동일 조건하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Paolo Massa from Trento, Italy)
그러나 이들이 성지로 피신한 것은 오히려 이들을 학살하려는 십자군들을 더 수월하게 했을 뿐이다. 2년이 넘는 오랜 원정으로 인한 적개심이 이들의 행동을 더욱 부추켰을지 모른다. 구체적으로 몇명이 죽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일설에 의하면 7만명이라고도 하고 4만명이라는 설도 있다. 아무튼 당시의 기록을 종합하면 당시까지 십자군이 했던 최대 규모의 학살이 자행된 것이 분명했다.
십자군의 가장 중요한 연대기인 게스타 프랑코룸 (Gesta Francorum) 에 의하면 성전산에서 자행된 학살은 워낙 대규모여서 십자군들의 발목까지 피가 묻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일부 지역에선 무릎까지 피가 묻을 정도였다고 기록했다.
미상으로 알려진 이 연대기의 작가는 이 광경은 글로써 다 표현하기 어려우며 묵시록 14 : 20 (Apocalypse 14 : 20 - And the winepress was trodden without the city, and blood came out of the winepress, even unto the horse bridles, by the space of a thousand and six hundred furlongs -
King James Bible ) 이 이 상황을 직접 묘사하고 있다고 이야기 했다. (간단히 번역하면 와인짜는 기계에서 피가 넘처나와 1600 펄롱 (200마일) 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다)
또 연대기 작가 풀처 (Fulcher of Chartres)는 이 성전산의 학살을 직접 목격했는데, 1만에 달하는 사람이 죽었고, 이 곳에 누군가 있다면 발목까지 피에 젖게 되었을 것이며 여자도 아이도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라고 기록했다.
기록에 의하면 아무튼 도시에 있는 거의 모든 시민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연대기 작가 아길레라의 레몽 (Raymond of Aguilers) 은 다윗의 탑에 있던 일부는 살아남았다고 기록하긴 했지만 시민 대부분이 죽었다는 기록은 크게 차이는 없다.
다른 기록들은 이날 죽은 이들의 숫자는 오직 신만이 알 수 있을 (no one knows their number except God alone ) 정도로 많았으며, 극히 소수의 무슬림과 유대인들만이 살아서 도망갔다라고 전하고 있다. 사실 도망치지 못한 사람은 대개 죽었고, 도망간 사람의 시체는 찾을 수 없을 테니, 의외로 많은 이들이 도망갔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십자군이 이날 학살한 사람의 숫자가 적은 것은 아니었다. 게스타 프랑코롬은 '어느 누구도 이교도들을 이만큼 대규모로 학살한 적이 없었다' 라고 적었다.
이 때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유대인도 막대하게 학살 당한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나치 시대 처럼 유대인들이 표식을 하고 다녔을 리 없으니 십자군 입장에선 누가 무슬림이고 누가 유대인인지 알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정확히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역시 알기 어렵다.
다만 이슬람 연대기 작가 이븐 알 칼리니시 (Ibn al-Qalanisi) 에 의하면 성을 수비하는데 참가한 유대인을 비롯하여 많은 유대인이 역시 유대 예배당으로 피신했으며, 십자군은 이 유대 예배당을 불태웠다고 기록했다. 오늘날 일부 역사가들은 대다수 유대인들이 유대 예배당으로 피신하지 않았다는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기록에서 일치하는 부분은 유대 예배당이 실제로 불태워졌다는 것이다.
한편 토착 기독교도들은 어땠을까? 이 역시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다만 이 예루살렘 학살 수주 후에 성묘 교회에서 은자 피에르가 동방 교회의 사제들과 감사 기도를 드렸다는 기록으로 봐서 이들 중 일부는 살아남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이흐티카르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추방당해서 목숨을 부지한 후 도시로 돌아왔을수도 있다. 나중에 살라딘이 이 도시를 다시 점령했을 때 도시에는 많은 토착 기독교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또 풀처의 기록에서도 학살 1년 후에 도시에는 많은 동방 기독교도가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제 성지 탈환을 마쳤으니 더 중요한 문제가 십자군 사이에서 논의 되었다. 과연 누가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 될 것인가 ?
(다음에 계속됩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