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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무슬림의 반격 3



 5. 아스칼론 공략 (1153년)


 사실 보두앵 3세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그다지 강력하거나 유능한 군주는 되지 못했다는 것이지만 그래도 창업의 군주인 보두앵 1세와 비슷한 큰 야망만은 공유하고 있었다. 보두앵 3세는 1152년 내전에서 승리하기 이전부터 호시 탐탐 무슬림의 영토를 노리고 있었다. 다마스쿠스를 공략한 2차 십자군의 실패는 비록 대재앙으로 끝났고, 누레딘이 버티고 있는 시리아를 공략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워 졌지만 대신 남쪽에서 새로운 기회가 열리고 있었다.


 남쪽에 있는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가 12세기 중반에 내분으로 인해 혼란에 빠지면서 주변 야심가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집트는 당시 중동에서 매우 부유한 국가인데 비해 군사력은 그다지 튼튼하지 못했다. 당시 이집트를 차지한 파티마 왕조는 한때 그 영토가 500 만 ㎢ 에 이를 정도로 (그러니까 지금 미국 크기의 절반 혹은 인도보다 약간 작은 정도) 세력이 거대했지만 당시엔 이집트로 그 영토가 감소했으며 그나마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는 자신의 마지막 부유한 왕국을 완전히 장악하지도 못했다.


 따라서 12세기 중반 이후 이집트는 주변의 야심가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땅이 되었는데 이중에는 예루살렘 왕국의 보두앵 3세도 있었다. 사실 보두앵 1세 때도 이 부유한 중동국가는 십자군의 목표중 하나이긴 했다. (앞서 포스트를 기억하신다면 보두앵 1세가 결국 이집트 원정 도중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했다는 것을 기억하실 분도 있으실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숫적으로 소수인 십자군으로써는 우트르메르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결국 이집트 공략은 성공하지 못했다.


(한창 잘나가던 시절 파티마 왕조의 영토 (초록색) - 그러나 당시에는 이집트 영토 정도로 축소된 상태였다. 사실 십자군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셀주크 제국에 밀리던 상황이었는데 셀주크의 내분과 십자군의 등장으로 그나마 한동안 수비에 성공할 수 있었다. 따라서 초창기 파티마 왕조는 십자군을 자신의 잠재적 동맹 상대로 생각했다.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Gabagool / Jarle Grøhn)



 그러나 여전히 이집트는 매우 먹음직스러운 땅이었으므로 십자군으로썬는 이를 쉽게 포기하기 어려웠다. 비록 훗날 이 땅이 결국 살리딘의 품에 안기게 되긴 하지만 일단 못 먹는 감 찔러는 본다고 보두앵 3세는 이미 1150년에 현재는 분쟁지역으로 더 친숙한 가자 (Gaza) 지역에 요새를 건설하면서 기회를 노렸다.


 마침내 1152년에 왕권을 확립하게 되자 보두앵 3세에게는 좋은 기회가 도래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불행히 전병력을 이집트 원정에 투입하기에는 시리아 방면에 누레딘의 걱정되는데다가 아직 예루살렘 왕국의 부족한 병력으로는 이집트 본토를 도모하기엔 시기 상조로 생각되었으므로 대신 예루살렘 왕국에게는 목에 가시 같은 도시인 아스칼론 (Ascalon) 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앞서 1차 십자군 포스팅에서 설명했듯이 이 팔레스타인의 해안도시는 본래 아스칼론 전투 (1099) 때 십자군의 손에 넘어올 뻔 했지만 고드프루아 드 부용의 판단 미스로 인해 이집트의 수중에 50년 넘게 더 남아있었다. 이집트가 이 도시를 가지고 있으므로 해서 병력을 바다건너 보낼 수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편리하게 예루살렘 왕국의 핵심부를 공격할 수 있다는 점은 여러 차례 증명되었다.


 따라서 아스칼론을 공격한다는 결정은 사실 보두앵 3세가 내린 결론 가운데서 매우 현명한 결정임에 틀림없다. 장차 이집트를 도모하던 아니면 누레딘의 공격을 막는데 최선을 다하든 간에 아스칼론을 점령해서 배후를 안전히 하는 것은 누가 생각해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2차 십자군의 당시 지도로 아스칼론은 자파 (Jaffa) 바로 아래 있다. 따라서 예루살렘과 매우 가까운 해안 도시인 셈이다.   CCL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ExploreTheMed)


 사실 2차 십자군 당시에도 콘라트 3세가 이 도시를 도모한 적이 있지만 이집트 군도 이 도시의 중요한 가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방어가 튼튼해서 쉽게 점령하지 못하고 포기한 바가 있었다. 이제 다시 이 도시에 도전하는 보두앵 3세 역시 이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당시 누레딘이 다마스쿠스에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다마스쿠스 마저 누레딘의 손에 넘어 간다면 그 이후로는 아스칼론에 전력을 집중하기 불가능해 질 것이므로 기회는 지금밖에 없어보였다.


 비록 내전에서 승리한 직후이긴 하지만 보두앵 3세는 그다지 강력한 군주는 아니었으므로 이 거사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불가피 하게 도움이 필요했다. 특히 바로 도움을 구할 수 있는 군사 집단인 기사단 - 특히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 - 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 했듯이 이들은 사실상 반독립 군사 집단으로 한낮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의 명령 따위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들은 교황의 명령만 듣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교황청은 우트르메르에서 멀리 떨어져서 명령을 내리기 힘들기 때문에 사실상 그들은 반독립 세력이었다.


 그런데 보두앵 3세에게는 다행히도 기사단 역시 아스칼론 공략에 관심이 있었다. 보두앵 3세는 아스칼론에서 가까운 가자의 방어를 성전기사단에 맞기고 아스칼론 주위에 요새선을 구축하여 도시를 포위했다. 그리고 이후 발생한 내전에서 보두앵 3세가 승리하자 보두앵 3세는 그 여세를 몰아 아스칼론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1153년 1월에 예루살렘 왕국의 주력 병력이 아스칼론 포위전에 거의 전부 투입되었다. 그들은 아스칼론 주변의 과수원을 모두 파괴하고 도시를 포위했다. 내전 직전 보두앵 3세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줄지 말지 고민하던 풀크 (혹은 푸세 Fulcher/Fulk) 예루살렘 주교는 과거 50년전 아스칼론 전투 때도 등장한 성물인 참십자가 (True Cross : 예수 그리스도가 못박힌 바로 그 십자가의 조각. 앞서 1차 십자군 참조) 를 들고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앞장섰다.


 한편 구호 기사단 (Knight Hospitaller) 의 수장인 레몽 드 푸이 (Raymond du Puy de Provence) 와 성전 기사단 (Knight Templer) 의 수장인 베르나르도 (Bernard de Tramelay) 역시 직접 기사들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당도했다. 여기에 토론의 영주 험프리 2세를 비롯한 보두앵 3세의 주요 가신들과 심지어 르노 드 샤티옹 까지 전투에 참가했다.


(당시 구호 기사 단장  레몽 (Raymond du Puy de Provence) 의 동판화. 당시의 기록화라기 보다는 후세의 상상화인듯 하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지금밖에는 기회가 없다고 생각해서 인지 1153년에 십자군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가용 병력을 모두 다 동원하다 시피 했다. 심지어 항구 도시인 아스칼론을 육지에서만 포위해서는 공략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바다에서도 함대를 동원해 압박했다. 십자군 해군을 지휘하는 것은 시돈의 제라드 (Gerad of Sidon) 였다. 여기에 마침 성지를 순례하기 위한 순례자들 가운데서도 병력을 지원받으니 오랫만에 전 십자군이 거국적으로 아스칼론 공략에 매달렸다.


 그러나 아스칼론은 이집트 입장에서도 매우 중요한 도시였기 때문에 사실 아주 잘 방어되고 있었다. 아스칼론의 견고한 성벽과 성문들은 거의 파괴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거듭되는 공성기에 공격에도 이 도시는 매우 잘 견뎌냈으며 성안에는 장시간의 공성전에 필요한 막대한 물자가 비축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이집트의 강력한 함대가 지원을 위해 도착하자 시돈의 제라드가 이끄는 미약한 십자군 함대는 그냥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지루한 공반전은 거의 1153 년 상반기 내내 지속되었다. 전환점은 그해 8월 달이었다. 이번에는 십자군이 거대한 공성기를 성벽으로 밀어붙였다. 이 공성기를 본 아스칼론 수비대는 야음을 틈타 이 공성기에 불을 붙이기로 결정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공성기에 불이 붙는 순간 수비대는 환호를 질렀지만 그 다음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공성기의 불이 성벽으로 옮겨붙자 이는 곧 경악으로 바뀌었다.


 티레의 윌리엄에 의하면 이로 인해 약해진 성벽의 일부가 무너지자 곧바로 성전 기사단이 들이 닥쳤다고 한다. 성전 기사단장인 베르나르도는 아스칼론을 독점하고 싶었으므로 이 사실을 보두앵 3세에게 숨긴채 약 40명의 기사들과 더불어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머지 성전 기사단은 정말 어이없게도 다른 이들이 성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결국 이들의 만용과 탐욕은 충분한 댓가를 치루었다. 베르나르도와 다른 40 명의 기사는 압도적인 수비대 병력에 제압당했고, 곧 죽임을 당했다. 아스칼론의 수비대는 조롱의 의미로 이들의 목을 베어 이집트에 보내고 몸은 성벽에 걸어두었다.


 하지만 티레의 윌리엄의 기록은 약간 그 신빙성이 의심된다. 성벽이 불에 타서 무너진 점은 그렇다 쳐도, 베르나르도와 성전 기사단의 기사들이 겨우 40명 정도가 들어가서 싸웠다는 것은 거의 죽으러 간거나 다를바 없는 이야기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무리 탐욕에 눈이 멀고 무식과 용감함을 겸비했더라도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티레의 윌리엄 (혹은 기욤) 이란 인물은 1130년에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서 1145년경에는 유럽으로 갔고, 이후 1165년경 다시 우트르메르로 귀국했다. 따라서 중간의 기록은 실제로 본 것이 아니라 성지에서 유럽으로 도착한 뉴스를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 시대 상황상 이런 뉴스나 루머가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당시 다마스쿠스의 연대기 작가들의 기록에는 이런 이야기가 없다는 점도 의문을 증폭시킨다. 다만 베르나르도가 아스칼론 포위전에서 죽은 것만은 사실이라고 한다.


 아무튼 공성전이 길어지자 구호 기사단과 주교는 후퇴를 건의했지만 보두앵 3세의 굳은 결의를 걲을 수는 없었다. 결국 또 다른 대규모 공세가 이어졌고마침내 아스칼론은 8월 19일 함락된다. 50년 넘게 끌어온 숙원 사업을 완성한 것이다. 보두앵 3세는 당시 십자군에서는 보기 힘든 관용을 베풀어 시민들이 모두 무사히 이집트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아마 이 전투가 보두앵 3세의 가장 큰 승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최근 수세에 몰려있던 예루살렘 왕국으로써는 아주 큰 승리였음에 분명하다. 이 승리 이후 보두앵 3세는 주변에 여유 있는 관용을 베풀었다. 아스칼론은 한 때 적대 관계였던 동생 아말릭의 자파 백작령에 합쳐졌다. 과거 2차 십자군 때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아스칼론 공격을 반대했던 보두앵 3세 였지만 이제는 왕국의 유일한 국왕으로써의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그러나 아스칼론 전투의 승리를 뒤집고도 남을 만한 승리가 바로 북쪽의 누레딘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누레딘이 시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인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고 마침내 시리아의 통일을 완성한 것이다.



 6. 다마스쿠스 정복 (1154년)


 누레딘에게는 이전부터 큰 야망이 있었다. 누레딘이 생각하기에 십자군이 얼마 안되는 병력을 가지고도 성지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 무슬림 세력의 분열이 큰 이유였다. 십자군 국가들을 둘러싼 무슬림들이 하나로 통일되지 못한다면 성지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십자군을 그들이 있던 유럽으로 밀어내는 일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누레딘에게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나일강에 이르는 지역을 자신의 깃발아래 통일하고 궁극적으로는 십자군을 다시 바다 건너로 밀어낸다는 커다란 야망이 있었다. 사실 이것은 지하드의 이미도 있긴 하지만 누레딘 자신의 야심이기도 했다. 아마 어디까지가 지하드를 위한 것이고 어디까지는 누레딘 자신의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인지는 본인도 확실히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1149년 누레딘이 푸아티에이 레몽을 격파할 무렵 그의 라이벌이자 큰형인 모술의 군주 사이프 앗 딘 가지가 사망했다. 큰형의 자리는 누레딘의 동생인 쿠투 앗 딘 (Qutb ad-Din) 이 계승했다. 쿠투 앗 딘은 둘째 형인 누레딘이 모술까지 넘보고 있다는 사실을 곧 깨닫고 그를 상위 군주로 섬겼다.


 누레딘의 다음 목표는 에데사 백국의 남은 지역과 다마스쿠스였다. 에데사 백국은 곧 누레딘의 깃발아래로 통합되지만 다마스쿠스는 1150년과 1151년의 공격을 잘 방어해 내며 난공불락의 요새로써의 명성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이 시기 본래 다마스쿠스의 유능한 지배자였던 무인 앗 딘 우나르 (Mu'in ad-Din Unur al-Atabeki ) 는 결국 사망하고 없었다.


 그 뒤를 이은 것은 훨씬 허약한 지배자였던 무지르 앗 딘 (Mujir ad Din /풀네임 Mujīr ad-Dīn ʿAbd al-Dawla Abu Saʿīd Ābaq ibn Jamāl ad-Dīn Muhammad) 이었다. 그는 누레딘에 대항하기 위해 십자군 국가에 굴종하면서 보호를 댓가로 조공을 바친 무능한 지도자였다. 이에 다마스쿠스에서는 점차 무지르 앗 딘의 인기가 추락하고 차라리 지하드의 영웅 누레딘의 품에 안기자는 여론이 강해졌다. (그러고 보면 역시 명분은 중요한 것이다)


 1154년 마침내 누레딘은 이 도시를 공격할 때 결국 도시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그렇게도 난공불락이던 성문을 열 수 있었다. 이는 아무리 튼튼한 성벽이 있었도 이를 지키는 백성들의 지지 없이는 어떤 성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였다. 다마스쿠스 함락은 명분을 가지고 있는자, 백성의 마음을 얻는자가 결국 승리하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결국 다마스쿠스까지 누레딘의 품에 안기게 되자 이제 그는 명실공히 시리아와 주변 지역을 통일한 강력한 군주로써 거듭나게 되었다. 이는 십자군이 아스칼론이란 작은 도시 하나를 점령한 것과는 비교도 안되게 큰 승리였다. 이제 누레딘의 입장에서는 저 이단 파티마 왕조와 십자군 국가들을 점령해서 하나로 통일 시키는 더 큰 과업을 추진할 차례였다.


 그런데 이 다마스쿠스 함락에서 중요한 역활을 한 인물을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나즘 앗 딘 아이유브 (al-Malik al-Afdal Najm ad-Din Ayyub ibn Shadhi ibn Marawan ) 라는 인물은 사실 쿠르드 족 출신으로 과거 장기가 어려울 때 도와준 덕에 관리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었다. 장기에게 신용을 얻은 아이유브는 발벡이란 도시의 통치자로 임명되었는데, 이 발벡이 무인 앗 딘 우나르의 공격을 받을 때 그는 장기의 신임을 배신하고 다마스쿠스군에 항복했다.


 나중에도 다시 거론하겠지만 이 아이유브란 인물은 다소 기회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다. 다시 다마스쿠스에서 신용을 얻은 아이유브는 관리로 높은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누레딘이 이 도시를 함락시킬 가능성이 높아 보이자 다시 장기의 아들인 누레딘에게 항복할 의사를 보이며 이미 누레딘의 심복으로 일하고 있던 자신의 동생인 아사드 앗 딘 시르쿠 (Asad ad Din Shirkuh) 에게 연락해서 내통한다.


 결국 다시 다마스쿠스가 누레딘에게 함락되었을 때 아이유브는 그 공로로 다마스쿠스의 총독의 지위에 까지 올랐다. 그런데 당시 통치자가 너무 자주 교체되던 이 지역에서 이와 같은 변천사는 꼭 놀라운 일도 아니거니와 어찌 보면 살기 위한 지혜라도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아이유브가 주목되는 이유는 변절을 남들보다 잘해서는 결코 아니다. 그보다는 그가 앞으로 나올 이야기의 주인공인 살라딘 (살라흐 앗 딘 유스프 이븐 아이유브  Ṣalāḥ ad-Dīn Yūsuf ibn Ayyūb  ) 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살라딘은 1138년 태어났으므로 당시에는 16세의 청소년이었다.


 아버지가 누레딘에게 항복한 것은 이 살라딘의 인생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다. 그것은 결국 장기와 누레딘이 뿌린 씨앗을 살라딘이 수확하게 되는 역사적 과정이다. 아무튼 1154년 이후로 살라딘은 누레딘의 신임 받는 측근 시르쿠와 새로운 측근 아이유브 형제의 아들이자 조카로 누레딘의 궁정에서 주목 받는 젊은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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