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내륙으로
일단 도릴라이온 전투의 승리는 십자군으로 하여금 소아시아 내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전략적인 가치가 있었다. 투르크 군은 괴멸되지는 않았지만 그 주력은 격파되었으며, 이제 그들의 앞길은 한동안 안전할 것이다.
하지만 클르츠 아르슬란 1세와 투르크 군은 그렇게 쉽게 포기할 상대는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수차례 패배했지만 그것으로 끝장난 것은 아니었다. 기동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술탄의 기마 전사들은 공격할 때나 후퇴할 때 모두 신속했으며, 따라서 전투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건재했다. 요컨대 전투엔 패배해도 전쟁에 진건 아니었다. 그리고 이들이 건재하는 한 술탄과 그의 왕국은 아직 죽은 게 아니었다.
클르츠 아르슬란은 자신의 영토 - 물론 한세대 전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였다 - 를 침입하는 이 이방인들에게 보복을 준비했다. 그것은 이른바 초토화 작전이었다. 후세의 스탈린이 독소전 초기 독일군에게 밀릴 때, 감자 1kg, 연료 1L 를 남기지 말고 모두 초토화 시킬 것을 지시했듯이 이 젊은 술탄도 적을 위해 우물 하나, 곡식 한톨을 남기기를 거부했다. 아나톨리아의 건조한 기후와 계절적인 요인 - 당시는 여름이었다 - 은 술탄을 돕는 또다른 응원군이었다.
십자군은 이제 내륙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이는 전투보다 더 힘든 행군이었다. 수많은 병사와 말들이 기아와 갈증으로 인해 고통받았고, 많은 이들이 이 과정에서 사망했다. 이들의 고통스런 행군은 6주간이나 지속되었다.
이들은 고된 행군 후에야 터키 중부의 이코니움 (Iconium) - 지금은 코니아 (Konya) 로 불린다 - 에 도달하여 쉴수 있었다. 십자군들은 여기서야 충분한 식수와 식량을 보충하고 쉴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보는 지도 Konya (Iconium) 의 위치를 대략 확인할 수 있다.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MapMaster )
그런데 십자군들은 이곳에서 갈증과 허기를 달래고 난 후 더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다. 사실 그것은 처음부터 마땅히 제기되어야 하는 문제이지만 이제와서 점차 해답을 찾지 못하고 심각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대체 누가 명령을 내리는 최고 사령관이냐는 것이다.
본래 처음 용병에 가까운 원군을 요청한 알렉시우스 1세의 시각에서 본다면 그들을 고용한 고용주인 자신이 당연히 사령관이었다. 문제는 십자군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황 우르바노 2세와 십자군을 선동한 교회는 그 가장 중요한 목표를 성지 탈환으로 규정했다. 이는 알렉시우스 1세는 전혀 요청한 바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 사실을 알턱이 없는 십자군들은 성지 탈환을 위해 이 고생을 하면서 진군하고 있었다. 물론 원정을 통한 약탈과 새로운 영토 역시 이들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아무튼 십자군은 비잔티움의 잃어버린 영토 수복 따위는 별로 안중에 없었다.
따라서 적어도 십자군이 생각하기에 알렉시우스 1세는 - 비록 충성의 서약을 했어도 이는 큰 구속력을 가지지 못했다 - 최고 사령관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보더라도 황제는 최고 사령관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그러면 그 다음으로 사령관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교황으로부터 십자군 사령관으로 임명받은 아데마르 주교였다. 그러나 아데마르 주교는 제각기 딴 생각을 품고 있는 개별적인 십자군 지휘관들을 통제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오늘날의 생각과는 달리 중세시대에는 교황도 사실 그렇게 강력한 권한을 휘두른 것은 아니었으며, 십자군에 대한 통제력도 별로 없었다. 따라서 대개 십자군들은 아데마르 주교를 영적인 지휘관으로 여겼지 실제적 사령관으로 명령을 받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한편 툴르즈 백작 레몽 4세는 자신이 사실상 세속적 사령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레몽 만 그렇게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야심가인 타란토 공작 보에몽은 자신이 황제로 부터 인가받은 사령관이나 그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지만 이 역시 남들의 동의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긴 해도 안티오크 까지 가장 사령관에 가까웠던 것은 아마도 노련한 군인인 보에몽이었던 것 같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실 이 십자군은 개별 부대는 정예한 군대였고, 수많은 역전의 기사들이 있었지만 지휘 계통은 통일되지 못했다. 따라서 초기의 니케아 공격처럼의 이견의 여지가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이들의 의견은 한가지로 모아지기 쉽지 않았다. 최종 결정을 내리는 최고 사령관이 없을 때, 이것은 매우 난처한 문제였다.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격화된 것은 이코니움에서였다. 문제 제기는 단순했다. 이제 어디를 목표로 진군할 것인가 ?
십자군들은 자신들의 목표와는 다른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 수복은 이미 안중에 거의 없었다. 따라서 룸 술탄국의 중심지역을 지나 동쪽의 다니멘슈드 왕조까지 공격할 생각은 별로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결국 동북쪽이 아니라 동남쪽의 아르메니아 인들의 영토 (Armenian cilicia) 를 통해 안티오크 ->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진군할 것이다.
그러나 모두 이 이견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이제 십자군은 분열되었다. 일부의 별동대가 십자군의 본대에서 갈라져 나왔다. 이들은 출신지는 전혀 다르지만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는 두 인물 - 볼로뉴의 보두앵과 타란토의 탕크레드 - 였다.
1097년 9월, 십자군이 과거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가 통과했던 유서 깊은 길목인 실리시안 관문 (Cilician gate) 를 통과하자 이들은 본대에서 갈라져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토로스 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진군했다.
(실리시안 관문의 사진. 영어로는 Cilician Gates 터키어로는 Gülek Boğazı 라고 부른다. 이 파일은 저자에 의해 public domain 으로 공개됨)
9. 에데사 백작령
여기서 앞으로 자주 나오게 될 최초의 십자군 백작령인 에데사 백작령의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백작령을 개척한 인물은 바로 볼로뉴 3 형제의 막내인 보두앵 (Baldwin of Boulogne ) 이었다.
보두앵이 십자군 본대에서 갈라져 나온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그는 두 형인 외스타슈 3세와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각자 영지를 물려받은 반해, 자신은 형의 영지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다. 한때 성직으로 나갈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실패한 상태로 이대로는 평생 형들의 그늘에 가려 살아야 하는 상태였다.
그런 그가 가족까지 데리고 십자군에 가담한 것은 어떻게 보더라도 종교적인 동기 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이 많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상태였다. 보두앵은 이 기회를 어떻게든 놓치지 않을려고 했다. 토로스 산맥 너머에는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영지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그는 2500명 정도의 별동대를 이끌고 본대에서 빠져 나왔다.
한편 십자군 지휘관 중에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인물이 하나 더 있었다. 그는 타란토 공작 보에몽의 조카 탕크레드였다. 삼촌 보에몽은 타란토 공작이라는 직함에다 비록 작더라도 이탈리아 남부에 영지를 갖고 있었지만 탕크레드는 아무 것도 없었다. 이에 탕크레드 역시 300명 정도의 병력을 이끌로 토로스 산맥을 넘어서 진군했다.
탕크레드의 부대는 숫자가 적은 대신 속도는 더 빨라서 곧 타르수스 (Tarsus) 에 도달했다. 그러나 가진 병력이 적었으므로 도시를 점령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결국 보두앵이 더 많은 군대를 가지고 도착함으로써 이 도시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수비대는 도시에 짐착하기 보다는 살길을 찾아 도망쳤다.
그러나 이 도시를 점령한 후 좋은 것은 보두앵 뿐이었다. 탕크레드는 사실상 쫓겨나다 시피 하면서 - 가진 군대가 적기 때문에 별 수 없었다 - 보두앵에 대해서 악감정을 품고 물러났다. 그러나 보두앵이 십자군 내에서 여론이 악화된 것은 그 후였다.
이후 타르수스로 도착한 십자군 후발대를 성안으로 들이는 것을 거부했다가 그들이 적의 기습을 받아 전멸된 것이다. 이 때문에 악화된 여론을 감지한 보두앵은 이 도시의 수비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좀더 동쪽으로 진군하기로 결심했는데, 하필이면 그의 군대가 도착한 곳은 탕크레드가 점령한 마미스트라였다.
탕크레드는 보두앵의 전래를 따라 도시로 부대는 들이지 못하지만 식량은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두 군대의 갈등은 결국 이 도시에서 유혈사태로 번졌다. 타르수스의 복수를 하려던 탕크레드의 부하가 보두앵의 군대의 역습을 받았고, 십자군간의 전투로 번진 것이다.
적진을 앞에 두고 이 이상의 전투는 여론은 물론 서로에게도 매우 좋지 않음을 깨달은 보두앵과 탕크레드는 마지못해 화해했다. 그리고 보두앵은 같이 온 아내가 위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본대로 귀환했다. 그러나 보두앵은 마음속에서 동쪽의 아르메니아 독립 국가 영역에서 새로운 영토를 개척할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
보두앵이 본대에 도착해 보니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죽어가고 있었다. 결국 그들이 죽은 뒤, 아마도 깊은 슬픔에 빠졌을 보두앵은 크게 절망했을 것이다. 새로운 영지를 얻지도 못하고 처자식만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절망적 상황에 빠져있던 그에게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1098년 초를 전후해서 벌어진 안티오크 전투에서 보두앵은 직접 포위전에 참가하지 않고 동쪽 측면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뜻밖의 요청을 받았다.
이 지역의 아르메니아의 독립 세력 중 하나인 토로스 (Thoros) 로 부터 원군 요청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잠시 아르메니아 인들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이들은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본래 비잔티움 제국에 점령된 후 그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가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력이 약해진 뒤 분열된 투르크 군주들 사이에서 몇개의 독립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비록 이들이 형식적으로는 비잔티움 황제의 신민이었지만 사실 그들이 믿는 기독교의 종파는 아르메니아 정교 (Armenian Orthodox) 로 비잔티움의 그리스 정교회 (Greek Orthodox = 동방 정교회) 와는 많이 달랐다. 따라서 그들은 제국에서 이단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에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그들이 반독립 세력이 된 상황에 대해서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데 에데사의 군주인 토로스의 경우는 상황이 좀 독특했다. 그들의 아르메니아 백성들은 아르메니아 정교회를 믿고 있었으나 정작 군주인 토로스는 그리스 정교회를 믿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백성과 토로스는 긴장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불안정한 에데사의 군주는 주변의 투르크 세력으로 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받고 있었다. 여기에 1098년 초 동방에서 접근하는 카르부카가 이끄는 대규모 무슬림 병력은 그에게 매우 불안했을 것이다. 따라서 토로스는 십자군이 자신을 도와 줄 수 있다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보두앵에게 원군을 요청한 것이다. 이는 사실 늑대를 피해 호랑이 굴로 피신하는 격이었다.
(에데사와 에데사 백작령 (County of Edessa)을 지도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에데사는 안티오크에서 동쪽으로 약 320 km 떨어져 있다.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MapMaster )
1098년 2월 6일, 수천의 병력을 이끌고 보두앵이 이 에데사에 도착했다. 그런데 보두앵은 투르크 족의 위협으로 부터 에데사를 보호해 주는 조건으로 아주 큰 조건을 제시했다. 당시 토로스는 연로했으나 후계자가 없었다.
따라서 보두앵은 자신을 '아들' 이자 후계자로 입양해 주기를 원했다. 당시 보두앵의 나이가 40세 정도였으니 입양아가 되기에는 나이가 많았지만 토로스와 보두앵은 여기에는 크게 개의치 않았던 것 같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입양식에는 아르메니아의 관습에 따라 성대한 행사가 준비되었다고 한다. 상반신을 벋은 보두앵은 새로운 아버지와 어머니의 품속으로 안겼다고 한다. 보통 이 행사는 어린아이를 입양하는 의식이었는데, 이날의 입양아는 키가 크고 털이 많이난 서유럽 기사였으니 자못 흥미로운 의식이었을 것이다. 토로스와 보두앵은 관습에 따라 서로 맨가슴을 문질렀다고 한다.
(에데사에 입성하는 보두앵, 진실과는 거리가 있는 1840년대의 창작이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그런데 앞서 이야기 했듯이 토로스는 늙고 인기없는 지배자였다. 그러다 보니 본래 지위가 좀 불안한 상태였다. 여기에 젊고 강력한 새로운 후계자가 등장했으니 힘의 균형이 한쪽으로 쏠리는 것은 당연했다.
보두앵은 조금 후에는 그를 공동 섭정으로 선포할 것을 요청했고, 토로스는 '아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기록이 약간 엇갈리지만 결과는 동일하다. 보두앵이 토로스를 밀어내고 에데사의 통치자가 된 것이다.
보두앵이 도시에 도착한지 한달 정도 되는 1098년 3월 7일 마침내 쿠데타가 일어났다. 일설에 의하면 토로스는 암살당했다고도 하고 그냥 퇴위 되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결과는 같았다. 토로스는 쫓겨나고 보두앵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 쿠데타에서 보두앵이 어떤 형태로든 연관이 되어있을 가능성은 부인하기 어렵다. 토로스는 백성들의 폭동에 의해 물러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 배후에 보두앵이 관련이 없을 가능성은 정황상 적어 보이기 때문이다. 토로스의 운명에 대해서는 결국 백성들의 손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이야기가 유력한 듯 싶다. 그러니 보두앵이 자신을 지켜주리라는 토로스의 판단은 정말 잘못된 것이었다.
보두앵은 서구의 관습에 따라 여기에 에데사 백작령이라는 십자군 최초의 백작령을 설치했다. 이제 그도 갈곳 없는 백수가 아니라 당당한 영주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야망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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