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비잔티움 제국의 환대
본래 비잔티움 제국은 서방을 좋아하지 않았다. 야만족들에게 유린된 서방 제국에 잔재에서 새롭게 생겨난 서방 제국들은 역시 야만족의 국가일 뿐이었다. 그것까진 봐줄 수도 있다. 그런데 감히 이들 서방 제국이 비잔티움 황제에 공식 명칭인 '로마 황제' 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묵과할 수 없는 오만이었다. (즉 신성 로마 제국 혹은 독일 제국)
여기에 오랜 세월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과 그리스도의 12 사도와 동격인 로마인의 황제 (바실레오스라고도 부르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의 반목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1054년 교황 레오 9세와 콘스탄티노플의 미카엘 총대주교가 서로 사이좋게 상대에 대한 파문장을 주고 받은 후부터는 사실상 남남으로 갈라진 상태였다.
1081년, 교권의 수호자이자 이미 서방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도 파문장을 날렸던 그레고리우스 7세는 다시 비잔티움의 신황제 알렉시우스 1세에게도 파문장을 보냈다. 그러나 이미 이 시기에는 남남이나 다를바 없던 그들이기에 별 반응은 없었다.
그러던 동서 교회의 갈등이 그나마 약간 봉합되었던 시기가 바로 우르바누스 2세의 집권시기였다. 그는 1089년 파문을 철회했고, 사절을 보내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다. 황제는 이에 대한 화답으로 콘스탄티노플의 라틴 교회들이 다시 문을 열 수 있게 해주었고, 또 교황이 이름이 딥티크 (공식 기도를 할 때 이름을 읆는 사람들의 명단) 에서 누락된 것이 단지 실수였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후 1090년대에는 이전에는 보기 힘든 우호적인 분위기가 로마 교황청과 콘스탄티노플의 란테란 궁전을 오갔다. 그래서 1094년, 교황은 다음해 피아첸차 공의회가 열릴때 콘스탄티노플의 대표단도 보내달라는 초청장을 보냈던 것이다.
알렉시우스 1세는 이 우호적인 분위기와 1092년 말리크 샤 1세의 죽음이후 격화된 투르크족의 내분을 활용하여 소아시아를 수복할 생각으로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1095년 피아첸차 공의회에 사절을 파견했다는 이야기는 이전에 했다. (편지는 몰라도 사절을 보낸 것은 필자가 본 모든 사료에서 나타난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알렉시우스 1세는 일종의 용병 세력을 원했다. 왜냐하면 군사제도의 근간인 테마제도가 거의 붕괴된 비잔티움 제국은 용병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 가진 비잔티움이 가진 군사력은 나중에 한번 설명할 노르만 - 비잔티움 전쟁과 페네체그족과 쿠만 족같은 야만족의 침공을 겨우 방어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소아시아를 수복하려면 이보다 더 많은 용병이 필요했고, 이것은 야만스럽긴 해도 용맹한 서방의 전사들이 적격이었다. 그러나 서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괴상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교황은 성지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조직했으며, 이들은 1096년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 (예수 그리스도 께서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를 하늘로 맞아들였다는 축일) 출발할 것이었다.
이 말을 알렉시우스 1세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잔티움 연대기의 저자 존 줄리어스 노리치도 지적했듯이 알렉시우스 1세가 필요한 것은 용병이었지 십자군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단 일은 엎질러진 상태이니 준비를 해둘 필요는 있었다. 비록 원하던 군대는 아니지만 이들을 최대한 이용할 필요가 있었고, 무엇보다 이들이 자신의 국민들을 약탈하지 않도록 예방 조치를 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알렉시우스 1세는 두라초와 에그나티야 가도의 몇몇 지점에 식량을 비축해 두었으며,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이들을 콘스탄티노플로 호송하도록 준비했다. 그러나 이런 현명한 황제의 사전 조치 조차도 충분치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왜냐하면 예정에도 없던 자칭 '십자군'의 무리가 성모승천대축일 보다 훨씬 전에 제국의 국경도시 벨그라드 (베오그라드) 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십자군을 이끄는 은자 피에르 :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이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앞서 설명한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민중 십자군의 본대이다. 이들은 과거에 했던 일을 벌써 잊었는지 베오그라드를 약탈하고 불태웠다. 그리고 이후 비잔티움 제국 영토내로 진격해서 1096년 7월 3일에는 니쉬 (Nish) 에 까지 이르렀다. 사실 이곳에서 민중 십자군이 약탈을 중단하고 비잔티움 군의 지시를 따랐다면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방앗간을 불태우고 인근 지역을 약탈했다.
이 지역 총독인 니케타스는 이들이 니쉬까지 파괴하기 전에 적절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음을 알았다. 곧 이민족과의 전쟁으로 잘 단련된 비잔티움 군대와 오합지졸의 무리에 불과한 민중 십자군과의 전투가 벌어졌다. 비잔티움 군대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은자 피에르는 500명에 불과한 소규모 부대와 함께 별명처럼 비잔티움 군대의 추격을 피해서 은둔해야 할 판이었다.
비록 패잔병들을 긁어 모으자 그 숫자가 금세 불어나긴 했지만 이 전투는 이들이 앞으로 무슬림 군대와 싸우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할 지 예언적으로 알려주는 것이었다. 이 때 이들은 4만명 중 1만명을 잃었다고 한다.
한편 알렉시우스 1세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 군대라고 부르기 힘든 군중의 무리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필자의 추측이지만 첫번째 교전을 보건대 알렉시우스 1세는 이들을 충분히 괴멸시킬 수 있는 군사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원군을 요청하고서 원군의 명목으로 나타난 이들을 아무리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멀다고 해도 그냥 제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황제는 서방에서 정식 십자군이 조직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에 황제가 정말 원군을 요청한 적이 없다면 그냥 이들을 괴멸시키거나 추방하거나 혹은 이들에게 용무가 있는 헝가리 왕에게 넘기면 되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일부의 주장처럼 이슬람 세력과 당시 친하게 지냈다면 이들에게 길을 내주는 것 만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물론 당시 알렉시우스 1세는 클르츠 아르슬란과 일시적 동맹을 맺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서로 각자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임시 방편이었고, 기본적으로는 적대 관계였다) 하지만 원군을 요청했다는 대개의 기록을 믿는다면 이들을 받아들이고 소아시아 지역으로 보낸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아무튼 남은 3만 정도의 민중 십자군은 비잔티움 군의 엄호겸 감시를 받으며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이들은 1096년 7월 12일 소피아를 출발해서 8월 1일에 콘스탄티 노플에 도착했다. 일부 낙오자들은 재집결이 필요하기도 했다.
(비잔티움의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지도 :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 저자 : Cplakidas)
뛰어난 정치인이었던 알렉시우스 1세는 다시 그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어떠 기준으로 보아도 혹세무민하는 무리에 불과한 은자 피에르를 관대하게 다독이고 정중하게 맞이했다. 황제는 이렇게 그들을 잘 구슬린 다음 그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기로 결정했다.
1096년 8월 6일, 이 민중 십자군들은 자신들의 앞에 기다리는 운명을 모르는체 보스포루스 해엽을 건넜다. 사실 이들의 어리석음은 그전에도 여러번 보여지긴 했지만 여기서 극치에 달했다고 할 수있다. 지금까지의 전투력을 볼 때 이들 민중 십자군의 무리 중에서는 에미코와 목수 윌리엄이 이끄는 부대를 제외하고 나면 제대로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없었고, 당연히 약탈 외의 보급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적지로 들어가는 순간 그들의 최후는 정해진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나 순순히 사지로 들어갔다.
7. 룸 술탄국 (Sultanate of Rûm )
이 룸 술탄국 이란 명칭은 언뜻 보기에 매우 이질적인 단어들이 모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명칭이 붙게 된 것은 자신들을 로마 제국으로 칭한 이 지역 사람들을 지배하는 술탄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혼란한 시기가 지나가고 나서 1086년 말리크 샤로 부터 소아시아 방변의 지휘관으로 임명받은 슐레이만 빈 쿠탈미쉬 (Sulayman bin Kutalmish) 가 사실상 독립 왕국을 건설하고 부터 이 왕조가 탄생했다. 대개 아나톨 셀주크로 부르는 셀주크계 투르크 왕국이다.
당시 이 룸 술탄국은 비잔티움 제국의 주요 도시인 니케아와 니코메디아를 점령했는데, 이 중 니케아는 이즈니크로 명칭을 변경한후 룸 술탄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곳은 콘스탄티노플의 바로 앞이었으므로 이 곳을 수도로 한 의도는 콘스탄티노플을 넘보겠다는 것이었다. (아래 지도 참조)
(1097년 1차 십자군이 도달한 시점의 롬 술탄국, 다니슈멘드, 아르메니아 실리시아 등으로 분열된 소아시아 지역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 저자 MapMaster 출처 Hammond World Atlas Corporation (2007) Historical World Atlas, Fisher, Sydney Nettleton (2000). The Foreign Relations of Turkey 1481-1512 )
앞서 이야기 했듯이 대셀주크 제국의 마지막 강력한 지도자인 말리크 샤 1세가 1092년 사망하자 이 셀주크 제국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 중에서도 당시 아나톨리아 지역엔 위의 지도에서 보듯이 중요한 세개의 세력이 있었다.
첫번째는 앞서 설명한 룸 술탄국이다. 1086년에 이 롬 술탄국의 창업자인 슐레이만 1세는 말리크 샤의 동생인 투투슈와 안티오크에서 싸우다 사망했다. 그로써 이 일대는 대혼란에 빠져 이름을 열거하기도 어려운 투르크 씨족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런데 이 슐레이만에게는 클르츠 아르슬란 (Kilij Arslan) 이라는 어린 아들이 있었다. 그는 말리크 샤 1세에게 볼모로 잡혀 있었지만 다시 1092년에는 이 대셀주크 술탄에 의해 니케아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말리크 샤 1세는 1092년 11월 사망하게 되고 이제는 셀주크 전체가 대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다.
이 시기 새로운 지도자 클르츠 아르슬란은 스미르나에 수도를 정한 에게해 연안의 투르크족 씨족의 수장인 차카와 비잔티움 제국에 대해 싸우기 위해 동맹한 상태였다. 그러나 노련한 정치인 알렉시우스 1세는 1094년에 이들을 이간질 시키키 위해 편지를 보냈다.
이에 의하면 차카는 클르츠 아르슬란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황제의 정성어린 충고를 받아든 아르슬란은 차카를 연회에 초대한 다음 살해해 버렸다. 사실 차카는 아르슬란의 장인이었지만 이와 같은 사소한 문제는 당시 투르크 족들의 투쟁에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렇듯 클르츠 아르슬란은 나이는 어렸지만 매우 현실적이고 냉철하며 잔인성 까지 갖추었으모로 니케아를 중심으로 강력한 투르크 국가를 형성했다. 그러나 위의 지도에서 보듯이 투르크족 경쟁자는 차카만이 아니었다. 서쪽에서는 새 왕조인 다니멘슈드 왕조가 탄생했다. 그리고 투르크족이 흔히 그러하듯이 이들은 전쟁상태에 도달했다.
한편 이 혼란한 시기에 소아시아에 살던 아르메니아 인들은 기독교 인들이었고, 또 비잔티움 황제에 대해서 충성을 받치긴 했지만 불행히 (아니면 다행히) 그들의 영토가 위의 지도에서 보듯이 롬술탄국과 다니멘슈드 왕조에의해 콘스탄티노플로 부터 차단되었기 때문에 사실상의 독립을 유지했다.
이 주변지역의 혼란상은 나중에 1차 십자군과 더불어 설명하기로 하고 일단 여기까지 본다면 당시 소아시아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룸 술탄국과 다니멘슈드 왕조가 서로 싸우느라 정신이 없다는 것이다. 이점은 당시 소아시아 지역을 다시 찾기 희망하는 알렉시우스 1세에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한편 이 룸 술탄국에 1096년 8월 6일 일단의 3만에 이르는 거대한 민중의 무리가 나타났다. 이들은 물론 민중 십자군이다. 그리고 이제 이들의 마지막 약탈과 최후가 시작될 것이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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