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십자군 국가들의 혼란
12세기 중반에는 성왕 누르 앗 딘으로 불리는 누레딘이 알레포를 중심으로 점차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어 가고 있었다. 비록 누레딘이 항상 십자군 국가들만 공격한 건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목표가 십자군 국가의 와해 및 그 영토의 장악이었으므로 1149년 이후 누레딘의 부상은 십자군 국가들에게 전례 없는 위협으로 다가왔다.
따라서 예루살렘 왕국은 과거 창업의 군주였던 보두앵 1세 처럼 여러 차례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도 이를 극복해낼 강인한 군주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몹시 불행하게도 서유럽의 야심가 풀크 국왕은 그렇게 모든 국민들의 힘을 집중 시킬수 있는 유능한 군주가 아니었으며, 더 불행하게는 너무 일찍 어이없이 죽어버리고 어린 후계자인 보두앵 3세와 아내 멜리장드만 남겨둔 상태였다.
이 시기에 멜리장드가 좀더 현명한 지도자였다면 아마도 예루살렘 왕국과 다른 십자군 국가들이 어려운 고비를 좀더 슬기롭게 넘겼을 것임에 분명했다. 자신의 장남인 보두앵 3세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왕국의 주요 귀족들을 제압할 만한 힘이 없었다. 따라서 누구보다도 어머니이자 전왕의 왕비인 멜리장드 자신이 보두앵 3세에게 힘을 실어줘야 예루살렘 왕국이 안정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때 선왕 보두앵 2세의 딸들은 모두 현명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둘째인 앨리스가 과욕을 부리다가 결국 몰락한 이야기는 앞서 했지만 그보다 덜 어리석긴 해도 멜리장드 역시 어이없게도 아들과 권력을 다투는 한심한 일을 벌였다. (사실 예루살렘 왕국의 공동 국왕은 멜리장드와 보두앵 3세였다)
어차피 자신의 후계자가 될 아들의 권력을 굳건히 해주지 못할 망정 아들과 권력을 다투는 모습도 보기 좋지 못하지만 더 한심한 일은 강력한 적인 누레딘을 앞에 두고 이런 일을 벌인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보두앵 3세의 권력 기반은 더욱 흔들렸고 덩달아 예루살렘 왕국도 흔들렸다.
본래 중세 유럽 국가들은 왕권이 그다지 강력하지 못했다. 중세 유럽 국가를 지중해 동안에 옮겨서 건설한 듯한 우트르메르의 십자군 국가들 역시 그러했는데, 여기에는 반독립적 공국과 백국들, 그리고 멀리 떨어진 교황의 명령이외에는 듣지 않겠다고 하는 기사단들이 한 몫을 담당했다. 여기에 당시 국왕 보두앵 3세마저 이러니 상황은 더 어려워 질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왕국과 보두앵 3세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바로 보두앵 3세 자신이 선왕들인 보두앵 1세나 2세 처럼 유능한 군주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미 2차 십자군의 재앙적인 다마스쿠스 원정 때 부터 보두앵 3세가 그다지 유능한 군주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었다.
사정이 이러니 보두앵 3세는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지 못하고 귀족 회의에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으며 어머니의 견제까지 받다보니 누레딘의 적수가 되기 힘들었다. 그나마 1150 - 1151년 사이 에데사 백작령을 완전히 점령한 이후 누레딘의 공세가 다소 수그러진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 십자군 국가들은 힘을 합쳐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시간만 낭비했다.
우선 안티오크 공국에서는 젊은 미망인인 공작 부인 콩스탄스가 문제를 일으켰다. 콩스탄스 혼자서 안티오크의 방어를 담당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워 보였기 때문에 누군가 강력한 군사적 지도자 한명이 그녀와 결혼하는 것이 매우 바람직해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일은 콩스탄스가 모든 신랑 후보들을 모두 퇴짜 놓은 것이었다. 그녀는 보두앵 3세와 마누엘 1세가 점찍은 후보들을 모두 거절했으므로 1149년부터 1153년까지 수절을 한 셈이었다. 물론 그녀가 열녀라서 재가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콘스탕스는 꽤 눈이 높았으므로 당시 안티오크의 입장에서는 괜찮아 보이는 후보들을 모두 거절했다.
그러던 그녀가 1153년 마침내 프랑스 출신의 이름없는 기사인 르노 드 샤티옹 (Raynald of Châtillon ) 과 결혼했을 때 세간이 떠들썩 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미망인인 젊은 공작 부인과 무명의 기사와의 로맨스는 중세 뿐 아니라 현대에도 먹힐 러브 스토리긴 하지만 문제는 르노 드 샤티옹은 모두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최악의 지도자였다는 것이다. 이는 안티오크 뿐 아니라 다른 십자군 국가에도 좋지 않은 일이었다.
한편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던 트리폴리 백작령에도 사고가 발생했다. 앞서 포스트에서 설명한대로 트리폴리의 백작인 레몽 2세 (Raymond II of Tripoli) 는 선왕 보두앵 2세의 셋째 딸이자 멜리장드의 동생인 오디에르나 (Hodierna of Tripoli) 와 결혼한 상태였다.
그런데 오디에르나는 다소 품행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수녀원장이 된 막내를 제외하곤 보두앵 2세의 딸들은 아무튼 뭔가 문제가 있었다. 그나마 첫째와 셋째는 보두앵 2세가 죽고 나서 말썽을 일으켜서 보두앵 2세가 이걸 보지 못했으니 나름 효도 (?) 한 셈이다) 그녀를 둘러싼 추문이 발생하자 남편인 레몽 2세와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들의 딸인 멜리장드 (숙모인 왕비 멜리장드의 이름을 딴 딸이다) 의 아버지가 사실 레몽 2세가 아니다란 루머까지 퍼져 이들의 관계는 더 험악해졌다.
(오디에르나와 Jaufre Rudel 의 13세기 삽화. 이 중세 로맨스 전설은 프랑스의 기사인 Jaufre Rudel 이 2차 십자군에 참가했다가 오디에르나를 보고 너무 반해서 사랑의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오디에르나가 Jaufre Rudel 를 불렀고 결국 그 불쌍한 기사는 너무 늦지 않게 오디에르나의 품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이런 전설을 보면 오디에르나는 꽤 미인이었는지 모르겠다. 13th-century Italian manuscript miniature of Jaufre Rudel dying in the arms of Hodierna of Tripoli, Bibliotheque Nationale Française, Manuscrits Français 854, fol. 121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이 그림은 18세기의 오디에르나의 상상도로 화가가 실물을 보진 못했겠지만 꽤 미인으로 그렸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1152년 오디에르나와 레몽 2세를 중재하기 위해 멜리장드 왕비와 보두앵 3세가 나섰다. 결국 이들은 화해 하기로 했지만 오디에르나는 한동안 친정인 예루살렘에 가 있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문제는 오디에르나가 막 예루살렘으로 출발하고 나서 발생했다. 레몽 2세는 아내를 성밖까지 배웅했는데 여기서 그는 아사신파의 킬러에 손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 어이없는 죽음으로 인해 트리폴리는 곧 혼란에 빠졌다.
오디에르나는 급거 트리폴리로 돌아왔고, 보두앵 3세 역시 트리폴리로 달려갔다. 만약 트리폴리까지 누레딘의 손에 넘어가면 그 다음에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리라는 것은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보두앵 3세는 레몽 2세의 어린 아들 레몽 3세 (당시 12세 ) 를 차기 백작으로 앉히고 트리폴리 귀족들의 충성을 약속받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으므로 오디에르나는 성전 기사단에 토르토사 (Tortosa) 성을 넘기고 대신에 누레딘의 공격으로부터 트리폴리 백작령을 같이 방어하기로 협의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비상 대책이 일단 효과를 봐서 트리폴리 백작령은 그럭저럭 지켜낼 수 있었다.
4. 내전
아무튼 이와 같은 정세 변화로 인해 1152년 당시에는 예루살렘 왕국에는 두명의 국왕 - 보두앵 3세와 멜리장드 - 이 있고 안티오크와 트리폴리에는 지도자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불안한 정세가 지속되고 있었다.
1152년초 보두앵 3세는 이제 22살이 되었으므로 사실 중세시대에는 그다지 어린 나이가 아니었다. 따라서 그 자신이 생각하기에 충분히 단독 국왕으로 어머니의 도움 없이도 왕국을 통치할 수 있었다. 문제는 어머니가 권력을 자신에게 이양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보두앵 3세는 권력을 장악하려는 속셈에서 예루살렘 주교 풀크 (Fulcher of Angoulême / Fulk of Jerusalem) 에게 자신의 단독 대관식을 거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사실 대관식만으로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아는 주교는 멜리장드의 눈치도 살펴야 했으므로 이를 거절했다.
결국 멜리장드 대비와 보두앵 3세는 왕립 공의회 (Royal Council = Haute Cour) 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다. 주요 귀족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내린 결론은 차라리 왕국을 분할하자는 것이다. 보두앵 3세는 왕국의 북부인 갈릴리를 차지하고 아크레와 티레 같은 주요 도시를 가져갔다. 멜리장드는 예루살렘 자체와 나블루스 같은 주요 도시, 그리고 유대, 사마리아 등의 부유한 남쪽 지역을 차지하기로 했다.
물론 이와 같은 결정은 많은 사람들의 우려를 낳았는데 둘로 분열된 예루살렘 왕국은 누레딘에게 좀더 손쉬운 먹잇감인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보두앵 3세 본인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이 문제를 주장했으며 사실 이런 경우에는 자식 이기는 부모 없게 마련이기 때문에 - 그리고 상식적으로 멜리장드가 죽으면 왕국은 보두앵 3세에게 물려줘야 하므로 - 보두앵 3세에게 힘을 실어줘도 되련만 멜리장드는 결국 곧 상실하게 될 권력에 계속 집착하는 아집을 보였다.
아무튼 이와 같은 분할로 양측이 만족할 수는 없었으며 결국 왕국의 분열은 피를 흘리고서야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과연 이 결정에 불만을 품은 보두앵 3세는 어머니를 상대로 불과 분할 수주만에 전쟁을 일으켰다. 일종의 남북 전쟁인 셈인데 이 시기 북 예루살렘 왕국이 남 예루살렘 왕국을 기습 남침하므로써 전쟁이 발발했다.
남 예루살렘 왕국의 군사적 리더는 보안 무장관 (Constable) 인 마나세스 (Manasses)로, 마나세스와 멜리장드의 차남인 자파 백작 아말릭 (Amalric) 이 사실 멜리장드 왕비의 주요 지지자였다. 그런데 개전 초기 미라벨 성 (Castle of Mirebel ) 전투에서 마나세스가 패배하고 후퇴하자 남 예루살렘 왕국은 그대로 무너지고 주요 도시인 나블루스 (Nablus) 도 북 예루살렘 군에 함락되었다.
보두앵 3세는 이 여세를 몰아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당시 예루살렘 시민들은 요새 사람들처럼 트랜드에 민감했다. 이제 대세가 보두앵 3세라는 사실을 깨달은 시민들은 즉시 멜리장드에 등을 돌렸다. 시민들은 스스로 성문을 열고 젊은 국왕을 환영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멜리장드와 차남 아말릭은 예루살렘 성채에서 가장 튼튼한 요새인 다윗 탑으로 옮겨서 최후의 저항을 하는 딱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오늘날 다윗탑을 성벽 밖에서 본 모습. 1차 십자군에서도 설명했었다. This image has been (or is hereby) released into the public domain by its author, Maglanist at the wikipedia project. This applies worldwide )
(성벽 안쪽에서 본 다윗탑의 모습 The copyright holder of this file allows anyone to use it for any purpose, provided that the copyright holder is properly attributed. Redistribution, derivative work, commercial use, and all other use is permitted. )
물론 미래의 일을 알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어차피 이렇게 될 바엔 차라리 폼나게 아들에게 권력을 이양하겠다고 하면 아들인 보두앵 3세도 몹시 고마워 했을 것이고, 대의와 왕국을 위해서 결단을 내렸다는 칭찬도 받았을 것인데, 결국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이제 장남의 군대에 의해 좁은 탑안에 포위당한 신세가 되었으니 멜리장드도 참 딱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내전 기간 중 불필요하게 인명과 재산의 손상을 입게 되었을 뿐 아니라 왕국 자체가 누레딘의 공격에 매우 취약한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결국 보두앵 3세에게 물려줄 왕위를 자신이 나누어 갖겠다고 고집한 멜리장드의 아집은 자신은 물론 왕국에도 큰 해가 되었다. 한가지 다행한 일이라면 누레딘이 그 시점에서 오랬동안 탐내던 목표인 다마스쿠스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상황이 이지경에 이르자 멜리장드는 물론 보두앵 3세도 난처하긴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와 동생이 농성하고 있는 다윗탑을 무리하게 공격하다 모두 죽게 되면 그 비난을 감당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결국 다윗탑에서 농성하는 사람들도 본래 대로면 자신의 부하들이었다. 서로 죽여서는 누레딘만 좋은 일 시키는 셈이었다.
결국 교회에서 중재에 나섰다. 마침내 양측의 화해가 이루어져 멜리장드는 나블루스에서 일생동안 지낼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동생인 아말릭도 풀려났다. 보두앵 3세는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1153년부터 예루살렘 왕국의 단독 국왕이 되었다. 보두앵 3세는 자신의 측근인 토론의 영주 험프리 2세를 새로운 보안 무장관으로 임명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훗날 이 모자지간은 서로 화해했다. 1154년 이후 멜리장드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며 아들과 협력해서 왕국을 통치해 나갔다. 하지만 그 시간동안 누레딘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착실히 세력을 확장해서 마침내 시리아 전체를 자신의 지배아래 통일했다는 게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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