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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1차 십자군 4



 
 6. 니케아 포위전 (Siege of Nicaea)



 1097년 초, 콘스탄티노플 너머 보스포루스 해엽 반대편에서 1차 십자군이 집결하고 있을 당시, 룸 술탄국의 젊은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은 니케아에 없었다. 왜냐하면 동쪽의 다니슈멘드와 전쟁 중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1097년 초반, 대다수 다른 투르크족 족장들과는 달리 학문에 능해 '현자' 의 칭호를 받은 바 있는 인텔리 무슬림 군주 다니멘슈드는 지금의 앙카라 남동쪽에 존재하는 아르메니아 도시인 말라트야를 공격하고 있었다. 훗날 이 도시를 함락한 것은 그의 위대한 승리로 칭송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말라트야를 함락시키는 대업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다니멘슈드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던 이웃 무슬림 군주 클르츠 아르슬란이 훼방을 놓기 위해 나타났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틈을 타서 터키 동부에서 세력을 키운 다니멘슈드를 못마땅하게 생각해 오던 클르츠 아르슬란은 자신의 라이벌이 그렇게 위대한 승리를 거두는 것을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양측의 전투가 격화되던 1097년 4월경, 클르츠 아르슬란의 진지로 급한 전갈이 도착했다. 저 오만 불손한 프랑크인 (당시 서유럽인들을 무슬림들이 부르는 명칭) 들이 죽지도 않고 작년에 이어 올해도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전보다 숫자가 훨씬 많다는 다급한 보고였다.


 하지만 작년에 민중 십자군을 상대하면서 그들이 얼마나 오합지졸인지 알고 있던 젊은 술탄은 크게 걱정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삭의 몸인 왕비가 약간 걱정되긴 했으므로 술탄은 소규모의 증원군을 니케아로 보내 수도의 방비를 굳건히 하도록 했다. 앞서 이야기 했지만 이것이 바로 이 민중 십자군이 십자군 원정에서 일군 가장 큰 성과였을 것이다. 젊은 술탄으로 하여금 상황을 오판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술탄이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5월달이 되자 상황은 분명해졌다. 이번에 온 프랑크인들의 무리는 이전같은 오합지졸의 무리가 아니라 잘 훈련된 보병과 기병들이며, 여기에 비잔티움 제국도 합세한 대군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젊은 술탄은 더 이상 다니멘슈드와 싸울 상황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서둘러 다니멘슈드와 휴전하고 주력 병력을 수도인 니케아로 돌렸다. 그러나 이미 수도 니케아 (투르크 인들은 이즈니크라고 불렀다) 는 대규모 병력에 포위된 상태였다.


 1097년 5월경 집결한 십자군 - 비잔티움 연합군은 사실 서로 목표가 전혀 다르다는 것은 이미 여러차례 이야기한 대로이다. 그러나 그들의 첫번째 군사적 목표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었다. 룸 술탄국의 수도 니케아는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와 너무 가까이 있을 뿐 아니라 이곳을 지나지 않고는 성지이든 소아시아의 내륙이든 갈 수가 없기 때문에 일단 이곳을 공격해야 한다는 데에는 모두의 의견이 일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로는 이러한 의견의 일치는 보기 어렵게 된다.



(1081년 알렉시우스 1세가 즉위할 당시의 상황 - 룸 술탄국의 수도 니케아는 콘스탄티노플 바로 앞이었다. 한마디로 비잔티움 제국에겐 목에 가시와 다를바 없었다. 따라서 비잔티움 제국의 첫번째 목표는 이 도시가 되었다. 십자군이 성지까지 가려고 해도 이 중요한 도시를 지나야 했으므로 이를 점령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은 용납할수 없었다. 이 파일은 저자에 의해 public domain 으로 공개됨. Byzantine empire at 1081 - Antioch fell in 1084, though imperial rule in the surrounding lands fell before )



 1097년 4월말,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이끄는 십자군의 선봉은 니케아를 향해 진군했다. 그들은 5월 6일 목표인 니케아에 도착했다. 그 뒤로는 탕크레드가 숙부 보에몽을 대신해서 노르만 전사들을 이끌고 진군했으며, 나머지 부대들도 그 뒤를 따랐다.


 비잔티움 제국에 의해 건설된 니케아의 성벽은 매우 견고한 것이었다. 길이 5km 에 이르는 튼튼한 성벽과 250개의 견고한 망루는 어떤 공격자라도 쉽게 이 도시를 점령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었다. 또 서쪽에 있는 아스카니오스 호수 (Ascanian Lake) 는 천연의 해자나 다를바 없었다.



(아스카니오스 호수 :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QuartierLatin1968 )


(니케아 공성전을 묘사한 중세의 그림 - 중세에 그린 그림답게 정말 간단하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아스카니오스 호수가 있는 서쪽을 제외하고 성벽의 북쪽에는 고드프루아가 동쪽에는 보에몽과 탕크레드, 남쪽에서는 레몽과 아데마르 주교의 부대가 배치되었다. 당시 십자군은 대군이었기 때문에 곧 식량과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이는 보에몽이 물자 수송을 책임지므로써 어느정도 해결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 물자는 알렉시우스 1세가 마련한 것이었다.


 십자군은 5월 14일에는 포위를 완료하고 본격적인 공성전에 돌입했다. 비록 주력이 빠져나간 룸 술탄국이지만 과거 비잔티움 제국 시절 튼튼하게 건설된 성벽은 제 몫을 톡톡히 했다. 아이러니 하게 이민족의 침입을 막으려 건설한 성벽이 이제 본래 주인인 비잔티움 황제의 접근을 차단한 것이다.



 마침내 5월 21일에는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이 주력을 이끌고 니케아에 도착했다. 술탄은 이번에는 수도를 구원하기 어려움을 곧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냉철한 판단력을 보여준 술탄이라도 자신의 수도와 만삭인 아내를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순 없었다. 술탄은 니케아를 포위한 십자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날 술탄과 투르크 전사들의 공격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들은 남쪽의 레몽 4세의 부대를 공격했으나 응원군을 끌고 나온 플랑드르의 로베르 2세의 부대와 합심한 십자군 군대에 격퇴되고 말았다. 술탄은 결국 군대를 퇴각시키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편 십자군은 이 승리로 사기가 고취되었다. 그들은 적의 시체에서 머리를 잘라내 공성기로 적이 성벽을 향해 발사했다. 매우 잔인한 방법이었지만 이후 십자군이 보여준 잔인성에 비한다면 크게 나무랄 것도 없는 수준의 심리전이었다.


 그러나 한쪽이 호수로 연결된 이 도시를 해군의 도움 없이 완전히 포위하기는 어려웠다. 니케아의 투르크 군은 호수를 통해 식량을 공급 받으면서 한달 이상 저항을 지속했다. 견고한 성벽은 역시 파괴하기 어려웠다.


 이에 비잔티움 제국은 6월 17일경 호수에 배를 보내 이 보급선을 차단했다. 비잔티움 제국 장군 타키티오스는 2000의 지상군을 이끌고 십자군에 합류했다. 여기에 고무된 십자군은 6월 19일 총공세를 계획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사실 알렉시우스 1세는 이 도시를 십자군이 점령하도록 놔두지 않을 속셈이었다. 만약 저 야만스런 서방인들이 도시를 점렴하는 날에는 오랜 세월 제국의 중요한 도시였던 니케아를 철저히 약탈하고 파괴하리란 사실을 황제는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이는 앞으로 십자군이 할 행동을 보면 매우 타당한 결론이었다.


 니케아 시민들은 한 세대 전만 해도 황제의 백성들이었고, 이들 대다수가 기독교 인이란 사실은 약탈에 눈이 먼 십자군에게는 사소한 문제일 것이었다. 따라서 황제로써는 이들을 십자군의 손으로 부터 지켜야할 필요가 있었다.


 동맹과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클르츠 아르슬란과 알렉시우스 1세간의 애증의 드라마가 다시 한번 펼쳐졌다. 이들의 은밀한 물밑 협상을 통해 서로에게 최선의 결과를 얻어내고자 했다.


 젊은 술탄은 이번에도 나이에 걸맞지 않은 냉철한 판단을 보여주었다. 니케아가 소중한 자신의 수도이긴 하지만 술탄은 기마 민족인 투르크 족의 권력이 도시가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투르크 전사들의 힘에서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무의미하게 투르크 전사들을 희생시키느니 차라리 도시를 희생시키는 것이 더 나은 결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침내 6월 19일 아침, 십자군이 도시를 함락시키고 막대한 전리품을 약탈할 기대에 뜰떠서 니케아의 성벽에 도달했을 때 그들이 발견한 것은 바로 비잔티움 제국의 깃발이었다. 밤사이 도시가 비잔티움 제국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황제는 이 도시를 큰 손상없이 획득한 것에 만족했다. 술탄의 왕비와 갓 태어난 자식들은 콘스탄티노플로 이송되어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들은 좀더 이용가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를 본 십자군들은 상당히 못마땅한 상태였다.


 니케아 함락 후 황제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군 전사들은 크게 분개했다. 자신들이 니케아를 약탈했다면 더 많은 전리품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비잔티움 제국과 십자군은 일단 목표부터가 달랐기 때문에 서로 어긋난 길을 갈 수 밖에 없긴 했지만 이 일은 서로의 갈등을 더욱 크게 증폭시켰다. 더구나 십자군들은 협상 과정에서 자신들을 완전히 배제한 것도 그냥 넘어가기 어려웠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중세 시대의 관행이다. 당시에는 도시를 함락하고 난 이후에 약탈은 승자의 권리처럼 생각되었다. 이점에 있어서는 무슬림 군대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십자군은 이 권리를 행사하는데 매우 적극적 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관행상 알렉시우스 1세가 도시를 온전한 상태로 얻기 위해 은밀한 협상을 시도했던 것은 충분히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일단 그게 옳지는 않더라도 당시에는 약탈이 승자의 권리처럼 행사되던 시기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앞으로의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편 알렉시우스 1세가 술탄의 왕비를 극진히 대접한 이유는 곧 밝혀지게 되었다. 앞서 이야기 했던 차카라는 투르크 족장의 이야기가 기억나실지 모르겠다. 에미르 (영주나 토호라는 의미) 차카는 에게해 방면의 스미르나에 해상세력을 구축한 투르크 족장이었다.


 그는 비잔티움 제국을 정복할 야심을 가진 인물로 아직 어린 클르츠 아르슬란 1세와 동맹하여 비잔티움 제국에 대항했다. 이 때 차카는 자신의 딸을 클르츠 아르슬란에 결혼시켜 그의 장인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알렉시우시 1세와 손잡은 클르츠 아르슬란은 차카를 제거했다는 이야기는 앞에서 했다.


 그런데 아르슬란은 그래도 자신의 왕비와는 잘 지냈는지, 차카의 딸인 왕비는 계속 왕비자리를 유지하고 있었고, 니케아 함락후 콘스탄티노플로 끌려간 왕비 역시 그녀였다. 그녀는 곧 황제가 자신들에게 호의를 배푼 이유를 알게되었다.


 차카가 죽은 후 스미르나는 차카의 아들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의 세력은 별로 크지는 않아도 일단 지금의 터키 서부 해안을 장악하고 있었다. 클르츠 아르슬란의 왕비는 곧 자신의 오빠 - 즉 차카의 후계자 - 에게 보내졌다. 여기서 왕비는 오빠에게 아르슬란의 군대가 패배했고, 이제 곧 비잔티움의 군대가 스미르나를 치기 위해 온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니 차카의 아들이 살고 싶다면 여동생을 데리고 클르츠 아르슬란을 찾아 떠나는 수 밖에 방법이 없을 것이었다.


 차카의 아들은 이 황제의 정성어린 충고를 곧 받아들여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자신의 왕국을 포기하고 도망치기로 결정했다. 덕분에 비잔티움 제국은 별다른 고생없이 해안 지역의 영토를 다시 수복할 수 있었다. 적어도 여기까지는 알렉시우스 1세의 계획이 착착 들어맞고 있었다.





 7. 도릴라이온 전투 (Battle of Dorylaeum)



 1097년 6월 26일, 일단 니케아 공성전 이후 재정비가 끝난 십자군은 더 내륙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첫출발 부터 다소 불안한 십자군의 앞날은 그렇게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아나톨리아의 내륙 고원지대는 완만한 구릉지가 많아서 투르크 족들이 매복 전술을 펼치기에 매우 적합한 곳이었다. 여기에 서유럽에서 온 십자군은 이곳의 덮고 건조한 기후에 익숙하지 못했다.


 그러나 성지까지 가려면 어쩔수 없이 이를 통과할 수 밖에 없음으로 이들은 소아시아의 내륙을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이들이 진격해 들어갈 수록 식량 문제는 더 심각해질 것이었다. 이들 중세의 군대는 대규모의 식량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대개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했다. 돈이 있으면 식량을 구입했고, 없다면 약탈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당시 십자군은 이런 방식으로 식량을 조달하기엔 규모가 컸기 때문에 식량의 상당 부분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보급해 오고 있었다. 따라서 군대가 진군함에 따라 콘스탄티노플에서 멀어질 수록 식량 문제가 심각해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이 지나가는 고장의 식량이 바닥나지 않도록 군대를 전위와 후위로 나누었다. 보에몽과 탕크레드, 노르망디 공작 로버트 2세, 플랑드르의 로베르 2세, 비잔티움 장군 타키티오스의 군대는 전위대에 속해서 먼저 떠났다. 고드프루아 드 부용과 보두앵, 레몽 4세, 블루아 백작 스테판, 위그 백작의 군대는 후위대로 그 뒤를 따랐다.


 보에몽이 이끄는 전위대가 니케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도릴라이온 근처를 지날 때, 보에몽은 투르크 정찰병을 보고는 곧 적의 대규모 부대가 나타날 것임을 예측했다. 사실 클르츠 아르슬란은 그의 적이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대규모의 반격 작전을 계획했다. 술탄은 자신의 수도를 유린한 적을 그냥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술탄은 도릴라이온을 반격의 장소로 선택했다.


 이 반격을 위해 술탄은 많은 것을 준비했다. 그는 탁월한 외교 솜씨를 발휘해서 자신의 적수인 다니멘슈드를 이 반격작전에 끌여들였다. 비록 사실과는 달랐지만 아마 다니멘슈드 역시 저 기독교 군대가 룸 술탄국을 점령한 후에는 소아시아의 동쪽에 있는 자신도 공격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비잔티움 제국이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한다면 그게 순서였기 때문에 그 추측은 일견 타당했긴 했지만 '현자' 다니멘슈드도 십자군의 의도를 알아채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여기에 클르츠 아르슬란은 카파토키아의 하산 같은 다른 동맹들도 끌여들여 비교적 대규모 부대를 짧은 시간내에 구성할 수 있었다. 이들의 병력은 25000 - 30000 정도로 생각되는데, 최근의 연구에서는 이보다도 더 적었을 가능성도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과장을 좋아하는 서방의 연대기 작가들은 그 수를 15만에서 36만으로 부풀려서 기록해 놓았다. 이는 그만큼 대규모 반격이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6월 30일 도릴라이온 근처에 집결한 투르크 연합군은 1097년 7월 1일 새벽을 기해 둘로 분열된 적을 향해 총공격을 개시했다. 도릴라이온 전투가 시작된 것이었다. 투르크 세력이 십자군을 격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있었다면 바로 이때였을 것이다.



(1097년 당시 소아시아의 상황 - 도릴라이온 전투 (Battle of Dorylaeum) 과 말라트야 (Malatya) 안티오크, 에데사, 알레포, 모술등 주요 도시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MapMaster )



 당시 보에몽이 이끄는 부대는 대략 1만명 정도로 추산되기 때문에 갑자기 기습을 받은 십자군은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새벽을 틈탄 기습에 보병들은 제대로 무장을 갖출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중세의 군대의 꽃이랄 수 있는 기사들은 재빨리 말에 타서 산발적인 반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투르크 기마병들은 보병들과 중세군대에 따라다니던 비 전투원들을 공격하면서 기선을 제압했다.


 보에몽은 비록 교활하고 이기적인 심성을 가진 인물이기는 했지만 십자군에게는 다행하게도 오랜 전투로 단련된 군인이었다. 과거 노르만 비잔티움 전쟁과 아풀리아 계승전쟁을 통해 단련된 전투 능력과 위기 관리 능력은 바로 이런 위기에서 빛을 발했다.


 보에몽은 일단 말에탄 채로 산발적인 반격을 하는 기사들을 말에서 내리게 했다. 그리고 전열을 유지하고 적의 공격을 막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아직 무장하지 않은 보병과 비전투원을 보호하고 전열이 더 이상 흐트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갑옷으로 잘 무장된 기사들이 검으로 버티고 있으면 가볍운 갑옷을 입은 투르크 경기병들은 쉽게 들어오지 못했다. 이들의 갑옷은 투르크 족의 화살도 효과적으로 방어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들의 불리한 상황이 쉽게 호전되지는 않았다. 투르크 기마 궁병들은 계속해서 활을 쏘면서 이들을 공격했고, 투르크 군은 이들을 우세한 병력으로 포위했다. 이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한 이들이 계속해서 버티지 못하 것이 분명해 보였다. 비록 정오쯤 고드프루아와 소규모의 부대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나타났으나 이는 반격을 위해 충분치 않았다.


 하지만 후위 부대의 원군이 속속히 도달하자 그 효과는 분명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레몽 4세의 기사들이 포위된 부대를 공격하는데 정신이 팔린 투르크 부대를 측면에서 기습하자 전세는 점차 역전되기 시작했다.



(도릴라이온 전투를 묘사한 그림  - This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


 마침내 십자군이 결집하자 그 효과는 분명해졌다. 십자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개시했다. 좌측에는 보에몽과 탕크레드, 노르망디 공작 로버트 2세, 스테판 백작의 군대가 위치하고, 중앙에는 플랑드르의 로베르 2세, 레몽 4세가 위치했으며, 우측에는 고드프루아 드 부용과 위그 백작의 부대가 위치했다. 이들은 이제 반대로 투르크군을 밀어내고 있었다.


 십자군의 반격은 뜻밖의 인물의 가담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갑자기 아데마르 주교가 이끄는 부대가 투르크군 진지 뒤에서 불쑥 나타난 것이다. 이제 투르크 연합군은 기마민족 특유의 기동성을 이용해서 신속히 퇴각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젊은 술탄은 현명하게도 다음을 기약하고 일단은 퇴각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이 투르크 족들이 너무나 황급히 도망가는 바람에 그들이 지닌 막대한 전리품이 십자군에게 남겨졌다고 한다. 그래서 뜻하지 않은 횡재를 한 십자군들은 hodie omnes divites si Deo placet effecti eritis - 신께서 너희 모두를 부자로 만드실 것이다 - 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많은 전리품 까지 손에 넣었으니 십자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앞으로 그들 앞에는 많은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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