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내분
비록 민중 십자군들을 그들의 최후의 땅이 될 소아시아로 신속히 옮겨준 알렉시우스 1세이지만, 기록에 의하면 황제는 이들을 향해 한가지 조언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것은 그곳에서 기다렸다가 자신들 뒤에 오는 다른 십자군과 합류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그들의 상황을 생각하면 좋은 충고였지만 2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이들이 그곳에 계속 머물기엔 물자가 충분치 않았다. 두번째는 더 치명적인 문제였는데, 그것은 이들이 이런 충고를 받아들일 만큼 현명하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역시나 그들은 소아시아 내부로 진군해 들어갔다. 보급은 이전과 같이 약탈로 해결되었는데, 롬 술탄국이란 명칭처럼 이 지역 원주민들은 기독교를 믿는 과거 동로마 제국의 국민이었지만 민중 십자군에게는 이점은 사소한 문제였다. 그들이 약탈할 물자를 지니고 있는지, 또 자신들도 약탈할 수 있을 만큼 약체인지가 중요하지 그들이 믿는 종교는 문제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소아시아에 도달하자 곧 이들이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문제가 표출되기 시작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이 민중 십자군이란 군중의 무리는 통일된 군대가 아니라 가난한 농민을 중심으로한 잡다한 무리들이 뭉쳐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다 보니 은자 피에르가 대장처럼 여겨지긴 했지만 이는 확립된 지휘권이 아니었다.
피에르의 본대는 무일푼의 발터의 선발대와 합쳐진 뒤 다시 둘로 분열되었다. 이들은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 집단을 중심으로 분열되었는데, 프랑스인들은 은자 피에르를 지지했고, 독일인들과 이탈리아인들은 라이날드 (Rainald, 혹은 르노)라는 이탈리아 기사를 지지했다. 하지만 역시 오합지졸의 무리답게 이 두 집단들도 엄밀히 말하면 그들의 지휘관의 지시를 100% 따르지 않았다.
이들은 일단 과거 비잔티움 제국의 군사 기지였던 시비토트로 행했다. 민중 십자군이 이곳을 임시 기지로 설정한 것은 이곳이 비잔티움 제국으로 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만큼 바다에 가까웠고, 또 주변에 약탈할 지역이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민중 십자군은 피에르나 라이날도의 지시 없이도 무리를 이루어 주변을 약탈하려 다녔다.
그러나 이들의 약탈을 참고만 있을 투르크 인들이 아니었다. 비록 주된 약탈 대상은 같은 기독교인 원주민들이긴 했지만 이들은 지금은 술탄의 백성들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20세도 안된 젊은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은 이들에게 신의 징벌을 내리기로 결정했다.
9. 투르크 족의 반격
사실 룸 술탄국의 젊은 술탄인 클르츠 아르슬란은 일시적으로 알렉시우스 1세와 동맹을 맺기는 했지만 황제가 언제든지 자신의 도시였던 니케아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리라는 점은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도시는 유서깊은 비잔티움 제국의 도시임과 동시에 제국의 수도와 너무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술탄은 비잔티움 제국 내부의 사정에 대해 어둡지 않았다. 용병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비잔티움 제국 내에는 투르크인 용병이 여전히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1096년 7월 비잔티움 제국 내부로 수상한 무리들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8월에 들어 자신이 영토의 해안지역에 접근하자 술탄과 그 부하들은 이들을 공격할 준비를 했지만 사실 술탄은 동족인 다니슈멘드 왕조와 전쟁 중이라 이들을 바로 공격할 수는 없었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그들은 주로 그리스도 교인들을 약탈하고 다녔지만 입으로는 무슬림들을 공격하기 위해 왔다고 외치면서 다닌다고 했다. 이들은 시비토트라는 곳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아침마다 인근 지역을 약탈한 다음 저녁에는 이를 분배하기 위해 본거지로 돌아왔다.
이들은 물론 민중 십자군이다. 한동안 약탈에 재미를 붙인 이들은 특별한 제재가 없자 대담해졌다. 그해 9월 술탄은 이들이 자신의 수도인 니케아(당시 투르크 명칭은 이즈니크, 그리스어로는 니카이아)를 행해 진군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은 니케아 주변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일설에 의하면 굶주린 민중 십자군들이 어린아이를 불에 구워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불행히 술탄이 파견한 소수의 기병대는 오합지졸이라도 수적으로 크게 우세한 이들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나 민중 십자군들은 아직 니케아의 굳건한 성벽을 공격할 만한 능력이 없었으므로 약탈한 다음 후퇴했다.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은 이들을 공격하려고 벼르고 있었으나, 부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일단은 참기로 했다. 이들은 더욱 대담해져 내륙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2일 후 이들은 제리고르돈 요새 (Xerigordon) 를 점령했다.
사실 경과는 이러했다. 수일전 니케아 주변을 약탈한 것은 프랑스인 원정대였다. 이들이 시바토트로 온 다음 전리품들을 자랑하면서 - 물론 이들 대부분이 기독교인 원주민들에게 뺏은 물품일 것이다 - 비잔티움 상인들에게 팔았다. 이를 본 독일인들은 자신들도 가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들은 아직 약탈을 면한 풍요로운 내륙지대로 진출할 했던 것이다. 이들이 제리고르돈 요새를 점령한 건 그 때문이었다. 이 지역을 새로운 거점으로 주변 지역을 약탈할 계획이었다. 이들에게 성지는 이미 뒷전이었다. 이 요새를 점령하는데는 약 6000명 정도의 십자군이 참가했다고 한다.
이들은 적의 수도의 앞을 의기 양양하게 지나갔을 뿐 아니라 9월 18일에는 제리고르돈 요새 수비군을 격파하고 이를 점령했으니 기세 등등해졌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사실이 2가지 있었다. 하나는 이 겉으로는 그럴 듯해 보이는 요새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유일한 식수원이 성 밖에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 때문에 이 요새는 죽음의 덫이 될 것이다.
또 한가지 사실은 오합지졸에 불과한 민중 십자군들이 소수의 투르크 병력을 잇달아 격파할 수 있었던 이유가 투르크 군의 주력과 마주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술탄이 주력 병력을 보내면 오합지졸에 불과한 민중 십자군은 유일한 장점인 숫적인 우위도 잃게 될 것이었다.
술탄은 자신의 부하인 엘카네스 (Elchanes) 에게 기마 궁수를 주력으로 하는 1만 5천의 병력을 주어 제리고르돈 요새를 탈환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이 요새를 지키는 6천의 병력보다 훨씬 압도적인 병력이었다. ( 사실 이 6천명중 기사는 200명이었다)
(활과 검으로 무장한 투르크 족 경기병 : Sipahi (light turkish cavalery) from Ralamb Costume Book.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1096년 9월 21일에 투르크 군대는 이 요새에 도달했다. 기마병이 대세인 투르크 군들은 순식간에 이 요새 주변을 모두 포위 버렸다. 십자군이 성밖에 식수원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포위한 것은 물론이다. 이후 8일간의 포위전이 계속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민중 십자군들은 하늘에서 비라도 쏟아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짐승의 피와 자신의 소변을 받아 마셨으나 하늘에서는 투르크 군의 화살의 비만이 쏟아질 뿐이었다. 8일 후인 9월 29일 마침내 라이날드가 이끄는 민중 십자군은 항복했다.
술탄은 잔혹했다.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자는 노예로 삼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죽음만이 대안이었다. 라이날드의 운명에 대해서는 기록이 엊갈린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전투중 사망했다고 하기도 하고, 또 일설에는 이슬람으로 개종해서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마 어떤 기록이 옳아도 이들이 어리석음의 극치였다는 사실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다.
10. 민중 십자군의 최후
한편 술탄은 이 제리고르돈 공성전의 승리를 더 완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다음 작전을 준비했다. 술탄이 1092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니케아의 지배자가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13세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10대의 나이에 장인인 차카를 살해하고 아버지의 이전 지배지를 되찾았으며, 다니슈멘드 왕조와 이 지역의 패권을 두고 싸우고 있었다. 그런 그의 나이 17세 였다. 그러나 클르츠 아르슬란은 어린나이에 놀라운 업적을 세운 그답게 나이에 걸맞지 않게 용의주도했다.
기록에 의하면 술탄은 두 스파이를 풀어 시비토트의 민중 십자군들에게 잘못된 소식을 전하도록 했다. 그것은 라이날드와 그 부하들이 적의 수도인 니케아까지 점령했으며 막대한 전리품을 손에 넣었다는 것이었다.
이 소리를 들은 그들은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수만명의 십자군들이 약탈을 위해서 시비토트를 떠날 준비를 하느라 부산했다. 막대한 약탈에 대한 기대로 그들은 흥분했다. 그런데 출발하려는 찰나 제리고르돈에서 탈출한 이들이 나타나 그들에게 사실을 전해 주자 이들의 흥분은 공포로 변했다.
당시 은자 피에르는 보급을 요청하려고 콘스탄티노플로 마침 떠난 참이었다. (그리고 결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따라서 민중 십자군은 어떻게 할 것인지를 두고 혼란에 휩싸였다. 이들이 현명했다면 일단 정확한 사정을 알때까지 진지를 고수하면서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술탄에게는 다행하게도 이들은 그런 판단력이 부족했다. 일부 과격파들은 약탈에 가담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순교자들을 위해 복수를 해야 한다며 진군할 것을 주장했다. 주저하는 자들은 비겁자로 몰렸다. 결국 이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리석은 셈이었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시비토트를 떠나 진군했다. 이는 술탄이 기다린 것이었다. 1096년 10월 21일, 2만에 달하는 십자군이 시비토트에서 3마일 떨어진 드라코 근처를 지나자 매복하기 좋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투르크 군은 이들을 기습했다.
말할 것도 없이 투르크 군의 대승이었다.
결국 민중 십자군 중 단지 수천명이 살아서 탈출했을 뿐이다. 나머지는 현장에서 투르크 군의 공격에 일방적으로 학살당하거나 혹은 포로로 잡혔다. 투르크 군에 포로로 잡힌 사람들 중에서 젊은 여성들등 노예로써 가치가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학살당했다.
어느 정도 예상 되었던 결과이긴 하지만 이들의 어리석음과 만행은 결국 이렇게 댓가를 치룬 셈이었다. 여기에서 한가지 공평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이들을 혹세무민하여 이곳으로 인도한 은자 피에르는 콘스탄티노플로 간 덕분에 무사했다는 것이다.
11. 결과
오늘날 이 민중 십자군은 소년 십자군등과 더불어 중세의 블랙 코메디 중 하나로 뽑힐 만 하다. 그들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과 만행, 그리고 무모함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씁쓸한 웃음을 남긴다.
그러나 적어도 당시 중세인들은 여기서 큰 교훈을 얻지는 못한 것 같다. 심지어 은자 피에르는 성자 비슷하게 추앙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아마도 이들의 무모한 시도가 후세인들에게 큰 교훈이 되었다면 100년 후의 소년 십자군 같은 블랙 코메디가 다시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오늘날에 역사가들에 의해서 냉소적으로 그려지고 있긴 하지만 이들을 선동한 은자 피에르 같은 광인과 약탈에 대한 기대로 참가한 기사들을 제외하고 생각한다면 여기에 참가한 가난한 농민들과 유랑민들은 어찌 보면 시대의 희생자였다.
그들은 지배 계층에 수탈과 억압에 못견디며 지상의 천국을 이야기하는 이들의 감언이설에 쉽게 넘어갔고, 결국 약탈과 만행을 저지르다가 마침내는 타향만리에서 최후를 맞이하고 만 것이다. 비록 이들의 행동은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어리석지만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반드시 그들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들 역시 억압적인 당시 사회구조의 희생자인 부분도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의 잘못이 작다는 뜻은 아니지만.
한편 이들은 그들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정규 십자군인 1차 십자군을 도왔다. 이제 의기 양양한 승리자가 된 젊은 술탄은 이제 프랑크인 (당시 서유럽 인들을 이렇게 불렀다) 들이 숫자만 많았지 별 볼일 없는 힘을 가졌다고 오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1차 십자군이 쳐들어 올때 역시 만만치 않은 동족인 다니슈멘드 왕조와의 전쟁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는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큰 오판이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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