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콘스탄티노플로 !
일단 앞서 설명한 다양한 영주들과 개별적인 군대들은 제각기 1차 목표인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이들은 크게 두가지 경로를 향했다. 하나는 민중 십자군이 갔던 것과 비슷한 신성 로마 제국과 헝가리 국경을 통해 비잔티움 제국까지 향하는 육로이다. 나머지는 남부 이탈리아까지 육로로 간 다음 다시 여기서 배를 타고 비잔티움 제국으로 가는 경로였다.
위그 백작과 보에몽이 이끄는 군대, 노르망디 공작 로버트 2세를 중심으로 한 군대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배를 타고 가는 경로를 택했다. 반면에 고드프루아를 비롯한 볼로뉴 3형제와 툴루즈의 레몽과 아데마르 주교가 이끄는 군대는 육로를 통해 전진했다. 이들은 1096년 11월에서 1097년 5월 사이 비잔티움 제국내에서 집결했다.
(1차 십자군의 경로 :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Route of the leaders of the first crusade." By William Shepherd, Historical Atlas, 1911.)
일단 앞서 설명했듯이 제일 먼저 출발한 것은 위그 백작의 군대였다. 그는 앞서 설명한 민중 십자군에서 가장 강력한 부대였으나 헝가리 군에 패배한 에미코 백작의 잔당들을 흡수해서 세력을 키웠다. 백작은 목수 윌리엄을 비롯한 에미코의 잔당들과 북프랑스에서 모집한 군대를 가지고 1096년 8월에 출발했으며 남부 이탈리아의 항구 도시 바리 - 만지케르트 전투 이전까지는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였으나 이후에는 보에몽의 아버지 로베르 기스카르가 뺏앗은 도시 - 에 도달해서는 배를 타고 발칸 반도로 향했다.
그러나 여기서 예기치 않지만 당시에는 흔한 풍랑을 만나 백작의 군대를 실은 배들이 많이 난파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덕분에 위그 백작의 군대는 간신히 뒤라키움 항에 입항할 수 있었다. 여기서 결국 그는 자신이 도우러 왔던 비잔티움 제국군의 구조를 받는 신세가 되었다.
한편 비잔티움 제국은 민중 십자군이 가르쳐준 교훈을 잊지않았다. 제국은 이들이 도중에 백성들을 약탈하지 못하게 감시할 군대를 파견해서 콘스탄티노플까지 호송했다.
당시 알렉시우스 1세의 딸인 안나 콤네나 공주의 기록에 의하면 이 자만심 넘치는 프랑스 왕자는 오만에 가득찬 편지를 미리 보내 자신을 환영하도록 황제에게 요구했다. 이 편지에는 "왕이시여 아시다시피 나는 왕중에 왕으로 하늘아래 존재하는 모든이 들의 위에 있소. 이제 나를 영접할 것을 허락하니 나의 고귀함에 걸맞는 환영식을 준비해주시오" 라고 적혀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위그 백작의 하늘을 찌를 듯한 오만은 웅장한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들어감에 따라 수그러졌다. 황제는 능란한 정치인이었다. 황제는 일단 이 오만 방자한 애송이에게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극진히 환영했다. 당시 문화적으로 후진 지역이던 서유럽에서 화려한 제국의 수도를 본 위그 백작은 어느덧 쉽게 알렉시우스 1세의 꾀에 넘어갔다.
황제는 그에게 충성 서약을 강요했는데, 이는 십자군 군주들이 비잔티움의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도록 도와 줄 것과 새롭게 확보한 영토에서 독자 세력을 확보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받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 순진한 프랑스 왕자는 이에 동의했고, 결과적으로는 그 약속을 지키게 되었다.
이렇게 알렉시우스 1세의 첫 출발은 괜찮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뒤에 오는 십자군 지휘관들은 그렇게 순진한 인물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늙은 여우처럼 꾀가 많은 알렉시우스 1세 였지만 뒤에 오는 십자군 지휘관들은 그에 못지 않게 속이 시커먼 늑대 같은 인물들이었다.
한편 중간에 헝가리에서 트러블이 있긴 했지만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이끄는 군대도 상당히 빨리 진군해서 위그 백작의 군대에 이어 두번째로 빨리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볼로뉴 3형제인 형 외스타슈 3세와 동생 보두앵도 함께였다.
막내인 보두앵은 특히 헝가리를 지나갈 때 유용한 역활을 했다. 이전의 민중 십자군 때문에 곤욕을 치룬 헝가리 왕이 난색을 표명하자 고드프루아는 즉시 동생 보두앵을 볼모로 넘겨주어 자신들 볼로뉴 3형제가 다른 뜻이 없고 다만 헝가리를 지나 비잔티움 제국으로 들어가기 만을 원한다는 뜻을 전했다.
결국 이 조건에 칼로만 왕이 동의하자, 두형은 동생을 볼모로 넘기고 무사히 헝가리 국경의 사바강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여기서 다시 보두앵과 이산가족 상봉을 한 이들 형제는 - 이 사건이후 형제애가 더 좋아졌는지 나빠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 비잔티움 영토내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드프루아가 알렉시우스 1세를 영접하자 이들의 매울 수 없는 인식의 차이가 명백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고드프루아의 목표는 성지 탈환이었다. 더 나아가 말하지는 않아도 이 탈환한 영토에 대한 자신의 권리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알렉시우스 1세가 원한 것은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할 때 필요한 용병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일단 멀리 떨어진 성지가 아니라 소아시아 부터 회복해 주는 것이 순서였다.
여기에 충성 서약도 새로운 문제가 되었다. 고드프루아 드 부용은 앞서 이야기 했듯이 하인리히 4세에 충성을 맹세한 상태였다. 사실 위그 백작도 프랑스 왕자였으니 형인 프랑스 왕 필립 1세에게 충성 해야 옳았다. 그렇다면 알렉시우스 1세에게 충성 서약을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일 수도 있다. 위그 백작에게는 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고드프루아에게는 바로 이 생각부터 떠올랐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나름 충신이었던 고드프루아에는 두 임금을 섬기는 것이 심히 불쾌했다. 더구나 봉건 제도로 인해 주군과 가신과의 맹세와 서약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서유럽에서 충성의 맹세는 함부로 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앞서 말한 위그 왕자의 경우가 문제가 있는 경우인 셈이다. 그러나 이 철없는 왕자는 황제의 명령으로 고드프루아에게 충성 서약을 할 것을 종용했다.
결국 고드프루아와 알렉시우스 황제의 갈등은 거의 일촉즉발의 상황에 이르렀다. 황제는 군대의 식량 공급을 조이고, 홈그라운드의 잇점을 이용한 우세한 군대와 보급으로 고드프루아를 압박했다.
하지만 황제도 고드프루아를 계속 압박할 순 없었다. 저 멀리서 더 많은 십자군 군대들이 모여들고 있는데다, 십자군과 전쟁을 벌이려고 그들을 불러들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압박 전술이 부담스럽기는 고드프루아도 마찬가지 였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타협을 했다. 고드프루아가 다소 변형된 형태로 서약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결말은 문제를 해결했다기 보다는 더 큰 문제의 불씨를 남겼다. 그것은 상호 불신이라는 불씨였다. 이는 서로 목표와 사상이 다른 황제와 십자군 사이에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것이기도 했지만 결국 이 불씨가 커져서 이들의 사이를 완전히 벌려 놓을 것이기도 했다.
1096년 10월에 남프랑스에서 출발한 레몽 4세 (툴루즈의 레몽) 과 아데마르 주교의 부대는 이 고드프루아의 부대 다음에 도착했다. 그들이 도착한 건 1097년 4월이었는데, 거리가 먼 만큼 시간도 훨씬 많이 걸린 셈이다.
하지만 그들의 행군은 단지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만 힘들었던 것이 아니었다. 위의 지도에서 보듯이 그들은 헝가리 영토가 아니라 호전적인 민족인 세르비아 족의 영토를 지나서 비잔티움 영내로 들어왔다. 그러나 남들이 이 길을 안가는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레몽이 이끄는 군대는 여기서 미리 매복하고 기다린 세르비아 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레몽의 군대가 세르비아 인들과의 전투에서 얼마나 많은 손실을 입었는지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막대한 손실을 입은 듯 하다. 세르비아 인들은 훗날 2차 대전 때 독일 군들을 괴롭힌 후손들에게 미리 모범을 보여주듯이 십자군을 공격했다. 베트남과 더불어 게릴라전에 가장 좋다는 이곳 지형을 이용한 매복 전술 앞에 레몽의 군대는 큰 댓가를 치른 후에야 여기를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이들의 불행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교황이 임명한 십자군 사령관인 아데마르 주교는 불운하게도 비잔티움 군대의 오인 공격으로 부상을 입게 되어 어쩔 수 없이 데살로니카에서 요양을 하게 된다. 이는 십자군과 비잔티움의 관계를 더 악화시키는 여러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레몽의 군대가 이교도와 싸우기전 겪은 마지막 불행은 결국 같은 기독교도인 비잔티움 군대와의 전투였다. 그들은 하필이면 보에몽이 식량을 구입하고 지나간 루사라는 도시를 지나갔다. 여기서 지친 레몽의 군대는 앞서 보에몽이 식량을 다 사버려서 식량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분개한 레몽의 군대는 도시를 파괴했다.
그러자 비잔티움 군대도 가만있지 않고 이들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는 레몽의 군대가 우세했던 것 같다. 그러나 결국 싸움을 지속하면 홈그라운드의 잇점과 수적인 우세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군이 우세할 것이 확실했기 때문에 이들은 싸움을 접고 타협점을 찾기 시작했다.
알렉시우스 1세는 앞서 한 것과 비슷한 충성의 맹세를 요구했다. 그러나 툴루즈의 레몽은 자신이 교황으로 부터 인가받은 사실상의 지휘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맹세는 부당하다고 여겼다. 더군다나 레몽과 보에몽의 껄끄러운 관계로 인해서 십자군 내부에서도 미묘한 기류가 감지되었다.
결국 툴루즈의 레몽은 유일하게 주요 십자군 지휘관 중에서 충성의 서약을 끝까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황제와의 양보를 통해 우호의 서약을 했는데, 이는 그와 황제가 십자군 지휘관 중에서 잠재적인 공통의 적을 가졌다는 사실에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그 인물은 바로 타란토 공작인 보에몽이다.
1096년말 뒤늦게 십자군에 합류한 보에몽은 그의 노르만 전사들을 이끌고 과거 그가 아버지를 도와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키기 위한 길을 따라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향했다. 노련한 정치인인 황제 알렉시우스 1세도 여기에는 다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에몽은 누구보다 더 쉽게 충성 서약을 할 인물이지만 누구보다 그것을 쉽게 뒤집을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보에몽은 주력 병력을 뒤에 두고 1097년 4월에 콘스탄티노플에서 황제를 알현했다. 황제와 보에몽은 여우와 늑대 같은 처지였다. 서로가 서로의 속셈을 모를리 없었다. 보에몽은 황제와의 독대를 통해 아마도 안티오크등의 영지를 요구한 듯 싶다. 혹은 십자군의 지휘권을 요구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황제는 이에 대해서 적당히 얼버무리고 보에몽의 꺼림직한 군대를 4월 26일에 보스포루스 해엽 너머로 내보냈다.
한편 1097년 5월에는 마지막이지만 가장 대규모의 군대가 합류했다. 이들은 바로 노르망디 공작 로버트 2세와 블루아의 스테판, 그리고 플랑드르의 로베르등이 합쳐진 군대였다. 이들은 이탈리아 남부로 내려온 다음 다시 해로를 통해 제국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가장 야심이 없는 지휘관들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영토에 대한 욕심이 별로 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나중에 한 행동으로 보아서 이들은 정말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면 명예를 얻기 위해서 이 원정에 참가했었고, 따라서 성지 탈환 이후 영지를 가지고 다투기 보다는 빨리 귀국하기 위해 힘쓴 인물들이다.
아마 그런 이유에서 이들은 알렉시우스 1세와 큰 다툼없이 충성의 서약을 했다. 그들은 새로이 획득한 영토를 황제에게 양도하는 데 혼쾌히 동의했던 것 같다. 이들까지 도달하자 이제 1차 십자군은 거의 집결한 셈이었다. 십자군들은 콘스탄티노플의 건너편인 보스포루스 해엽 너머에 집결했다.
당시 십자군의 병력은 기병 5천명과 보병 3만명을 비롯한 보조 인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세 당시로써는 상당한 대군이었다. 이들은 중국을 비롯한 오리엔트의 군대와는 달리 병력 수치를 몇배 정도 부풀려서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전투 병력이 이정도 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들의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
최고 지휘관 : 서방측 - 아데마르 주교 (Adhemar, Bishop of Le Puy-en-Velay)
비잔티움 측 - 알렉시우스 1세 콤네누스 (Alexios I Komnenos)
주요 지휘관 :
툴루즈의 레몽 (툴루즈 백작 레몽 4세 : Raymond IV of Toulouse)
위그 드 베르망두아 백작 (Hugh I of Vermandois)
고드프루아 드 부용 (Godfrey of Bouillon)
볼로뉴 백작 외스타슈 3세 (Eustace III, Count of Boulogne )
볼로뉴의 보두앵 (Baldwin of Boulogne)
노르망디 공작 로버트 2세 (Robert Curthose or Robert II)
블루아 백작 스테판 2세 (Stephen II, Count of Blois)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2세 (Robert II, Count of Flanders)
타란토 공작 보에몽 (Bohemond, Prince of Taranto )
타란토의 탕크레드 (Tancred of Taranto)
타티키오스 (Tatikios) : 비잔티움 제국의 장군
자 이제부터 본격적인 십자군 원정이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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