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세포이
세포이란 본래 병사라는 뜻의 페르시아어 سپاهی ( Sipâhi = soldier) 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것은 유럽인들이 인도 현지에서 고용한 현지인 용병들을 뜻하는 단어였는데, 사실 인도에서 용병은 흔한 것 중에 하나였으므로 유럽인들이 서로 용병을 고용한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프랑스 동인도 회사도 세포이들을 고용했으니 말이다.
(20세기 초반의 세포이들)
(앤필드 소총으로 무장한 세포이들)
그러나 세포이들이 유명해진 것은 역시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이들을 대량으로 고용하면서 부터이다. 사실 플라시 전투 당시에도 이들의 수는 수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곧 이들의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전성기때 영국 동인도 회사가 고용한 세포이의 숫자는 무려 30만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이들을 지휘할 영국인 장교들도 대량으로 고용되었는데, 1763년에는 114명에 불과하던 장교의 숫자가 1784년에는1069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이 대량으로 고용된 것은 오히려 플라시 - 북사르 전투 때가 아니라 영국 동인도 회사가 점차 점령지를 늘려나가던 시기였다. 당시 영국 동인도 회사가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 보다도 세금을 강제할 수 있는 무력이 필요했다. 내전으로 혼란한 인도에서 세금을 강제하기 위해 총칼의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 세포이의 역활이 인도 정복 사업에서 빛을 바래는 것은 아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보통 유럽인 보다 훨씬 많은 세포이들을 데리고 싸웠으며, 이러한 인도의 용병 문화야 말로 중국등과 비교했을 때 인도가 쉽게 정복이 가능한 이유 중에 하나였다. 즉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인도를 점령할 수 있던 것은 이들의 힘이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힘을 극대화 시킨 것은 바로 근대화된 유럽식 군대로 이들을 훈련시켰기 때문이다. 현지인으로 구성된 군대이면서도 유럽식 군대 문화를 받아들인 근대화된 군대라는 것이 이들을 주축으로 구성된 영국 동인도 회사군의 승리의 비결이었다. 유럽제 무기만 들여왔지 근대화 되지 못한 군대였던 인도 현지 세력이 결국은 패배한 것은 결국 이런 군대 자체의 훈련과 문화가 근대화 되지 못한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그러나 이 세포이들은 결국 나중에 영국 동인도 회사를 해산시키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세포이의 항쟁 때 따로 이야기 하겠다.
33. 마라타 전쟁 (Anglo - Maratha War)
한가지 오해하기 쉬운 것은 플라시 전투 이후 영국의 인도 정복이 본격화 되었으리란 오해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국 동인도 회사는 본래 식민지 획득을 목적으로 한 회사가 아니기 때문에 플라시 - 북사르 전투 이후 한동안은 소강 상태에 빠졌다.
더욱이 앞서 설명했듯이 회사가 1773년 파산위기를 겪은 터라 추가적 정복 전쟁은 수행하기 어려웠다. 사실 이 시기에는 헤이스팅스의 벵갈 식민지 안정화 계획이 진행 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영국 동인도 회사가 팽창 전쟁을 수행하게 된 것은 인도 내부에서 현지 세력들간의 싸움에 말려드면서 부터이다. 현명하게도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인도내의 분쟁을 이용해서 비교적 힘을 적게 들이면서 정복 전쟁을 수행했다. 다만 그것은 18세기 말에 이르러서 본격화되었다. (아래 지도 설명)
(이 지도는 1765년 당시의 지도이다. 영국은 벵갈 지역과 더불어 인도 동부 해안 일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다)
(역시 1795년의 지도 - 영국령은 30년 전하고 별 차이가 없다. 그래도 자세히 보면 남부 마이소르 왕국의 영토를 약간 할양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차 마이소르 전쟁의 결과다.)
일단 이 정복 전쟁을 설명하기 위해 인도 남부에서 발생한 마이소르 전쟁과 인도 중부에서 발생한 마라타 전쟁을 소개할 계획이다. 우선 마라타 전쟁 (혹은 앵글로 - 마라타 전쟁) 을 먼저 설명하겠다.
우선 마라타족에 대한 설명이 우선되야 할 것이다. 이들 마라타 족은 인도 서부에서 중부에 걸쳐 사는 힌두족에 속하는 민족이다. 1674년 시바지가 마라타족을 중심으로 인도 중부 데칸 고원에 마라타 왕국을 건설했다. 이 말은 당시 인도의 지배자인 무굴제국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뜻이다.
1720년대에 이르러 이들은 무너져가던 무굴 제국으로부터 사실상 독립해서 마라타 동맹을 세우게 된다. 이들의 세력은 매우 강대해져서 위의 지도에서 보듯이 인도의 중심부를 장악하기에 이르렀으며, 한때 무굴 제국을 대신하여 인도 북부에 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라타 동맹의 실권은 명목상의 왕인 시바를 받드는 재상인 페슈와가 장악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이들은 1761년 파니파트 전쟁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아흐마드 샤 두라니에게 패배한 후 동맹은 내부분열을 겪게 된다. 특히 이들이 왕위 계승 - 정확히 말하면 페슈와 계승 - 문제로 분열되자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이 다툼에 말려들면서 1차 앵글로 마라타 전쟁이 발생하게 된다.
1차 마라타 전쟁 (1775 - 1782)
: 1772년에 실권자 마드하브라오 페슈와 ( Madhavrao Peshwa) 가 죽자 그의 동생 나라얀라오 페슈와 (Narayanrao Peshwa) 가 페슈와로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의 삼촌인 라그후나스라오(Raghunathrao) 가 다시 나라얀라오를 암살하고 새롭게 권력을 장악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일이 꼬여서 나라얀라오의 미망인이 아기를 출산했는데, 마라타 왕국의 지도자들이 이 아기를 페슈와로 선출한 것이다. 결국 라그후나스라오는 폐위되었다.
그런데 이 라그후나스라오가 그 전에 영국 동인도 회사와 수라트 협정 (Treaty of Surat) 을 맺어 군사 원조를 받는 댓가로 일부 영토 및 세금을 할양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1777년 부터 영국 동인도 회사와 마라타 동맹은 전쟁에 돌입한다.
그러나 봄베이에 파견된 영국 동인도 회사군은 3900명에 불과한 상태였다. 마라타 군은 훨씬 대군이었다. 여기에 이번에는 마라타 군이 영국군의 보급을 끊는 등 매우 효과적으로 싸워 영국 동인도 회사군은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다. 결국 1779년 와드가온 (Wadgaon) 에서 포위된 영국 동인도 회사군은 와드가온 협정을 맺어 할양 받은 영토등을 다시 내주었다.
하지만 이렇게 수치스럽게 물러날 동인도 회사군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시 힘을 모아 마라타 동맹을 공격 1781년 이들을 패배시켰으며, 1782년 살바이 조약 (Treaty of Salbai) 를 맺어 기어이 영토 약간을 할양 받았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봤을 땐 이시기 영국 동인도 회사의 영토는 큰 변화는 없었다고 할 수있다.
2차 마라타 전쟁 (1803 - 1805)
: 이 2차 앵글로 마라타 전쟁은 결국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인도 중부를 장악하게 된 전쟁이었다. 이 팽창주의적 정복 전쟁을 이끈 것은 1798년에 네번째 인도 총독이된 리처드 웰즐리 (Richard Wellesley) 와 유능한 장군이었던 동생 아서 웰즐리 (Arthur Wellesley) 였다. (아서 웰즐리는 나중에 워털루 전투를 승리로 이끈 웰링턴 공작의 본명이다)
(4대 인도 총독 - 리처드 웰즐리 : 그의 임기에 영국 동인도 회사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킨 일련의 정복 정책을 통해서 사실상 인도 전역이 영국의 식민지로 들어가게 된다. 그는 이 업적으로 후작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동인도 회사의 이사들은 그가 정복 전쟁을 위해 회사에 막대한 예산 적자를 초래했다고 격분하여 결국 그는 인도에서 소환되었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영국군 장군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 - 그는 훗날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치열한 전투로 워털루 전투와 아사예 전투를 뽑았다)
그들 형제는 이전 4차 앵글로 마이소르 전쟁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의 영역을 인도 남부로 넓힌 바가 있었다. 이제 웰즐리 형제는 가장 대규모의 영토 팽창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들이 왜 2차 마라타 전쟁을 일으켰는지는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들이 전쟁에 개입한 계기는 보통 그러하듯이 현지 세력 내부의 갈등이었다.
1802년, 당시 페슈와인 바지 라오 2세 (Baji Rao II) 는 2명의 라이벌 토후인 도울루트 라오 신디아 (Dowlut Rao Sindia) 와 자스완트 라오 홀카르 (Jaswant Rao Holkar) 에 의해서 축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데, 바로 외세인 영국 동인도 회사를 끌어들인 것이다.
바지 라오 2세는 바세인 조약 (Treaty of Bassein) 을 체결했다. 이는 바지 라오 2세를 권좌에 올려주는 대신에 그가 영국에 보호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페슈와의 영토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지켜 주는데 대신 그 비용은 바지 라오 2세가 지불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마라타 왕국이 영국의 세력권으로 들어가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가능성을 사실로 만드려면 역시 무력이 필요하다. 리처드 웰즐리는 동생 아서 웰즐리에게 영국 동인도 회사군을 조직하라고 명령했다. 마라타 군을 격파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1803년 아사예 전투 (Battle of Assaye)에서 아서 웰즐리 준장이 이끄는 4500명의 병사들 (1300명의 스코틀랜드 보병연대와 2000명의 세포이, 기병 1200명) 은 페슈와의 군대와 연합해서 마라타 군의 대부대와 싸웠다.
(아사예 전투)
당시 전투에서 마라타 군은 100문의 포를 지녀 영국 동인도 회사군의 24문보다 우월했다. 그러나 이전에도 보통 그러하듯 전투는 열세인 영국 동인도 회사의 승리로 끝났다. 북부에서는 레이크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다시 마라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결국 1805년 전쟁은 영국 동인도 회사의 승리로 끝났다. 바지 라오 2세는 이제 더 이상 영국 동인도 회사가 필요 없었지만 그건 그의 사정이고 영국 동인도 회사군은 그의 영토를 장악했다. 결국 사실상 마라타 동맹이 차지한 인도 중부가 영국의 세력권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로써 영국령 인도는 사실상 거의 4배로 커졌다.
(1805년의 영국 동인도 회사의 영토 - 영토가 크게 커졌고, 마라타 동맹의 나머지 부분도 사실 영국의 세력권이었다)
3차 마라타 전쟁 (1817 - 1818)
: 이 전쟁은 영국 총독인 헤이스팅스 ( Francis Rawdon-Hastings, 1st Marquess of Hastings ) 가 일으킨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마라타 동맹은 영국에 지배에서 벋어나기 위해 영국과의 전쟁을 선포하였으나 결과적으로 크게 패배해서 사실상 영국의 인도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된다.
34. 마이소르 전쟁 (Anglo - Mysore War)
1차 마이소르 전쟁 (1767 - 1769)
: 마이소르 왕국은 인도 남부를 지배한 왕국이었다. 1766년 이 왕국의 지배자였던 하이데르 알리 (Hyder Ali) 는 영국 세력을 경계해서 마라타 동맹과 자신의 영토사이에 있던 하데르바드 영주 (Nizam of Hyderbad) 와 동맹을 맺었다.
(1,2 차 마이소르 전쟁 당시의 영역)
이를 동인도 회사에 대한 적대 행위로 본 영국 동인도 회사는 즉시 원정을 결의했다. 그러나 인도 남부로의 원정은 대 실패로 끝났다. 스미스 대령이 이끄는 영국 동인도 회사군은 대패했다. 결국 평화 협정을 맺고 영국 동인도 회사와 마이소르 왕국은 한동안 소강 상태로 지냈다.
2차 마이소르 전쟁 (1780 - 1784)
: 이 전쟁은 사실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촉발된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 세력은 인도에서 크게 위축되어 있었지만 마이소르 왕국은 영국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프랑스와 연합을 맺은 상태였다. 그러나 1778년 프랑스가 미국 독립 전쟁에 참가하면서 프랑스와 영국은 또다시 전쟁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고, 인도에서도 영국 동인도 회사는 프랑스의 잔존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겠다는 선언을 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하이데르는 영국 동인도 회사군을 공격하게 된다. 특히 그의 아들인 티푸 술탄 (Tipu Sultan) 은 일부의 별동대를 이끌로 영국군을 1780년에 대파하는 승리를 거둔다. 이 패배는 영국 동인도 회사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패배로 여겨질 만큼 대패였다. 당시 윌리엄 베일 대령이 이끄는 영국 동인도 회사군 3280명 중 336명이 사망했다고 하니 사실 큰 패배였다.
(티푸 술탄 - 타이거 왕자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다시 티푸 술탄은 1782년에도 브레스웨이트 대령이 이끄는 영국 동인도 회사군을 콜레룬 강 에서 패배시켰다. 이렇듯 티푸 술탄은 영국 동인도 회사군을 여러차례 곤경에 빠뜨린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1782년 아버지인 하이데르 알리가 사망하고 영국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그도 이 무익한 소모전을 끝내기로 합의 결국 1784년 망갈로 조약 (Treaty of Mangalore)을 맺어 전쟁을 끝내게 된다. 이 2차 마이소르 전쟁은 인도 현지 세력이 영국 동인도 회사에 대해서 우위를 지킨 마지막 전쟁이었다.
3차 마이소르 전쟁 (1789 - 1792)
: 3차 마이소르 전쟁은 티푸 술탄이 영국과 동맹을 맺은 트라빈코르 (Travancore)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때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어 티푸 술탄의 든든한 연합군인 프랑스가 전쟁을 지원해 줄 수 없었다.
(3차 마이소르 전쟁 - 이 전쟁을 계기로 마이소르 왕국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티푸 술탄은 호락호락 당할 상대는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영국 동인도 회사군을 여러차례 궁지에 빠뜨리는데, 그중에서 재미있는 것은 당시 마이소르 군이 대량으로 사용한 로켓탄이었다. 이 때 이 로켓탄의 위력을 본 영국군은 자신들도 이런 무기를 가져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영국의 윌리엄 콩그리브 (William Congreve)는 이 로켓 무기에 영감을 받아 콩그리브 로켓 (Congreve Rockets)을 개발했다.
(콩그리브 로켓)
(콩그리브 로켓의 사용 그림)
그러나 이번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군을 막을 수 없었다. 마이소르의 수도인 세렝가파탐 (Seringapatam) 은 1792년 영국군에 포위되고, 티푸 술탄은 사실상의 항복 문서인 세렝가파탐 조약 (Treaty of Seringapatam) 에 사인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조약에 의해 술탄의 두 아들은 인질로 보내고, 마이소르 왕국은 많은 영토를 할양하고 그 힘이 크게 위축되게 된다.
그러나 협정을 맺은 마라타 동맹과 하이데바르의 태수에게도 영토를 할양했기 때문에 (위의 지도 참조) 2차 마라타 전쟁과 비교할 때 동인도 회사의 영토가 크게 증가하진 않았다.
4차 마이소르 전쟁 (1798 - 1799)
: 앞서 이야기한 웰즐리 형제 (총독인 리처드 웰즐리와 동생인 아서 웰즐리) 은 인도에서 자신의 첫번째 타겟으로 이제 힘이 쇠퇴한 티푸 술탄을 공격했다. 마침 나폴레옹의 이집트 상륙으로 인해 인도내의 친 프랑스 세력을 공격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799년 수도인 세렝가파탐을 공격한 영국 동인도 회사군은 로켓탄 공격에도 불구하고 포격으로 성벽을 허물고 세렝가파탐을 점령했다.
(4차 마이소르 전쟁 다음에 남은 마이소르 왕국은 영국의 허수아비였다)
티푸 술탄은 이 세렝가파탐 전투에서 결국 사망했다. 이로써 인도 남부가 영국 동인도 회사의 관할에 들어온 것이다. 영국 침략자에 대해 용감히 싸운 뛰어난 군인이자 통치자의 씁쓸한 최후였다. 이 씁쓸함은 그의 패배의 일부분이 영국 동인도 회사와 내통한 그의 부하인 미르 사디크 (Mir Sadiq) 의 배신에 의한 것이었다는 데서 더 커진다. (영국군이 포격으로 성벽을 허물자 그는 병사들을 딴 곳으로 이끌어 영국군이 들어오도록 도와주었다)
(1823년의 영국 동인도 회사의 영토 - 사실상 영국이 인도의 실제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이렇게 마이소르 전쟁과 마라타 전쟁의 결과 인도는 대부분 영국 동인도 회사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이 중 가장 결정적인 전쟁인 4차 마이소르 전쟁과 2차 마라타 전쟁은 바로 앞서 이야기한 웰즐리 형제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들이 전임자들과는 달리 이러한 적극적 정복 전쟁을 벌인 이유는 확실치 않지만 개인적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이를 테면 아서 웰즐리는 마이소르 전쟁 이후 이 지역 총독이 되고 4천 파운드의 상금을 받았다.
아무튼 이 정복 정책은 이윤 추구라는 회사의 방침에는 맞지 않았다. 인도 정복 사업은 회사의 이익에는 큰 기여를 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리처드 웰즐리는 후작 작위를 받긴 했지만 회사로 부터는 1805년 소환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정복 전쟁은 회사의 성격을 크게 변화 시킨다. 이제 회사는 거대한 조직이 되었고, 주 사업은 이윤과는 관계 없이 이제 식민지 운영 및 유지 사업이 되었다. 이러한 사업은 점차 정부의 간섭을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종국에는 식민지 위임 통치를 종식시키고 회사를 해산시키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내용은 좀 더 다른 설명을 하고 난 이후에 이어질 것이다.
한가지 주목할 점은 영국 동인도 회사가 결국 이러한 정복 전쟁을 성공시킨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인도 내부의 분열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전쟁이 벌어질 때 자신이 이끄는 군대보다 훨씬 수적으로 많은 현지 세력 군대의 도움을 받았다. 동인도 회사가 전쟁에 끼어 들때도 내부 적인 분열이 항상 기회가 되었다. 결국 인도 내부의 상황이 영국 동인도 회사라는 일개 회사가 인도라는 거대한 제국을 점령하게 도와준 셈이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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